노자는 누구인가?
명 이이(李耳). 자 담(聃). 노담(老聃)이라고도 한다.
초(楚)나라 고현(苦縣, 지금의 河南省 鹿邑縣) 출생. 춘추시대(春秋時代) 말기
주(周)에서 장서실(藏書室)을 관리하던 수장실사(守藏室史)를 하였다.
공자(BC 552~BC 479)가 젊었을 때
뤄양[洛陽]으로 노자를 찾아가 예(禮)에 관한 가르침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주나라의 쇠퇴를 한탄하고
은둔할 것을 결심해 서방(西方)으로 떠나는 도중에 관문지기의 요청으로
상하(上下) 2편의 책을 써 주었다고 한다.
이것을 《노자》라고 하며
‘도덕경(道德經)’이라고도 하는데, 도가 사상의
효시로 일컬어진다.
그러나 이 전기에는
의문이 많아, 노자의 생존을 공자보다 100년 후로 보는 설이 있는가 하면,
그 실재 자체를 부정하는 설도 있다
-. 사마천은
노자의 벼슬에 대해 언급하고 난 뒤, 늙은 노자와 젊은
공자(孔子:BC 551~479)와의 유명한 만남에 대해 말했다.
노자와 공자가 만났을 때
노자는 공자의 오만과 야망을 질책했고, 공자는 그로부터
깊은 감명을 받아 그를 구름과 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용에 비유했다고 한다.
老子(노자)의 學(학)은
결코 대중적인 것이 아니었으며 지적 엘리트를
대상으로 했다.
그의 글에
聖人(성인), 道(도)를 가진 이, 仙人(선인)이란 道(도)를
체득한 철인 정치가를 말하는 것이다.
老子(노자)의 이러한
철인 정치가에 의하여 無爲(무위)의 정치를 할 때 민중은 미혹된
꿈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민중으로 하여금
그릇된 모든 욕망 재산과 권력과 명예에 대한
탐욕에서 벗어나게 할 때 이상적 사회에서 행복을 누릴 수눈 있으나
그 건설에 주동 구실을 할 수는 없는 존재이다.
그리하여 그는
철인 정치가의 참된 구실, 위대한 사명을
역설한다.
이러한 주장에서
老子(노자)는 愚民(우민) 정치가라는 비난을 받기도 하였고
사실 그의 학설을 따랐던 韓非(한비)들이 秦漢(진한)같은 독재 정치의
이론적 배경이 되기는 했으나
그것은
老子(노자)의 주장을 역이용하고 악용한데
지나지 않는다.
그는 다만 백성이란
사랑해야 할 대상이지만 이상사회 건설의 주인공으로 믿지 않은데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孔子를 비롯한 儒家, 韓非子를 비롯한 法家들은 이런 노자를 현실도피자로 보았을지도 모른다. 제도와 법과 위계질서에 대한 반항분자로 보았을지도 모른다. 현실을 모르는 공상가로 보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노자는 오히려 인간과 통치자들에게 억압 통치에 대한 저항과 성찰의 정신적 근거를 제시해주고 있다. 이런 점에서 그는 東西古今을 통틀어서 현실을 직시하면서 사유하고 자연과 근원적으로 합치하는 無爲自然의 道와 그 수단으로서 德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老子 역시 이런 無爲自然의 道가 실현되고 덕이 합치되는 세상이 열릴 것으로 기대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그가 꿈꾸는 이상향은 현대 과학과 기술이 광폭한 통치자의 손으로 넘어가 생명을 통제하고 죽이며, 기후변화와 같이 자연의 이치와 그 자체를 파괴하는 길로 유도하는 현대 문명사회의 문제점과 인간이 궁극적으로 되돌아갈 귀착점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모든 행위를 자연의 흐름에 맡길 것을 역설한 老子의 無爲自然의 道는 현대를 살아가는 탐욕스러운 인간들에게 相生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되새기게 해주고 있다.
老子의 『道德經』은 자애(慈), 검소(儉), 천하에 대해 앞서고자 하지 않는 것(不敢僞天下先), 즉 이 세 가지 덕목을 위정자들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천하에 앞서고자 하지 않는다면 전쟁도 없을 것이다. 세계의 평화가 유지될 것이다. 노자의 사랑과 평화의 정신이 실현된다면 階層, 男女, 世代, 支配와 彼支配, 種간 화해와 공존이 가능할 것이다. 그가 꿈꾸는 세상이 가장 원초적 인간의 모습이고 가장 太初의 共同體가 아니었을까.
-. 해진 장삼 한 벌과 볼펜 두 자루만 남기고 입적하신 노스님의 모습은 무소유에 대한
무언의 설법입니다.
욕망의 바다에서 소유의 탑을 쌓고 있는 중생들에게 무소유의 설법은 매우 중요한 각성의
계기가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소유 없이 살아갈 수가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노스님의 무소유는 사찰 종단의 거대한 소유 구조 위에서 가능한 것이지요.
그 자체가 역설입니다
-. 무리하게 하려는 자는 실패하게 마련이며 잡으려 하는 자는 잃어버린다는 것이
노자의 철학입니다.
자연의 법칙을 존중하는 무위無爲의 방식으로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 노자 정치학의 압권이 바로 ‘생선 굽는’ 이야기입니다.
“큰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작은 생선 굽듯이 해야 한다”(治大國若烹小鮮: 제60장)는 것이지요.
생선을 구울 때 생선이 익을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이리저리 뒤집다가 부스러뜨리는 것이
우리들의 고질입니다.
-. 자연이야말로 최고最高, 최선最善, 최미最美의 모델이라는 것이 노자의 인식입니다.
천하 사람들이 알고 있는 미美와 선善이란 사실은 인위적인 것이라는 인식이지요.
자연스러움을 외면한 인위적인 미나 선은 진정한 미나 선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미와 선은 지역이나 시대에 갇혀 있는 사회적 개념입니다.
미와 선의 그러한 특성을 한마디로 인위적이라고 규정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한 기존의 인위적인 미와 인위적인 선에 길들여진 우리의 관념을 반성하자는 것이
이장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은 인위人爲란 것이 곧 거짓이기도 하다는 사실입니다.
거짓이란 글자는 여러분도 잘 알고 있듯이 ‘위’僞입니다. ‘위’僞는 인人+위爲입니다.
거짓(僞)의 근본적인 의미는 ‘인위’입니다.
인간의 개입입니다. 크게 보면 인간의 개입 그 자체가 거짓입니다
산을 깎고 물을 막아 도시를 건설하는 것이지요. 그 실천에 있어서 자연의 운동 법칙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위와 작위 그 자체가 바로 거짓(僞)인 것입니다.
자연에 대한 거짓인 셈이지요.
노자는 상당히 어렵습니다. 논어 맹자보다도 어려울 뿐 아니라, 해석도 다양 합니다. 문제는 시중에 엉터리 책이 넘쳐흐른다는 것입니다. 아마 90%이상이 가짜라고 할 수 있겠네요. 이점 유의하면서 새겨봐 주길 바랍니다.
1.노자는 자연주의자가 아닙니다.
[출처] 노자는 누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