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집 ‘푸른 여행’이 2018년도에 발간하였으므로, 그 이후에 쓴 수필을 읽고 싶다고 하였더니 3편의 수필을 보냈다. 수필을 쓰는 솜씨가 훨씬 더 매끄러워졌다. 수필 냄새가 더 많이 풍겼다. ‘수필 쓰는 솜씨가 많이 좋아졌네,’ 이건 솔직히 말해서 나의 판단이다. 그러나 대화체를 많이 쓰고, 현장을 구체적으로 생생하게 묘사하는 것은 옛날 그대로 이다.. 어쩌면 수필에 소설 기법을 잘 결합하였다는 생각이 든다.
김귀선의 수필세계를 쓰면서 느낀 점은 수필에다 자기의 의견을 강하게 피력하지 않았다. 따라서 수필을 통해서 김귀선의 의식세계를 읽기가 수월한 것만은 아니다. 이 수필 ‘명당’도 그렇다. 흔히 말하는 ‘세월이 변했다.’는 그 변함을 거울에 비추듯이 보여주지만, 자신의 의견은 없다. 아버지의 의견에 동조하는 것인지, 막내 삼촌의 의견에 동조하는지를 판단하기가 애매하다.
변해가는 세월을 억지로 붙잡으려 안타까워 하는 것이 아니다. 한발 물러서서 세월의 물살을 이기지 못하고 휩쓸려 가는 것들을 조용히 바라보기만 하는 것이 김귀선의 수필세계가 아닐까. 세월은 흐른다. 그 흐름에 나도 따라 흘러간다는 것이 김귀선의 수필세계라고 할까.
이것은 순전히 나만의 생각이지만, 대구 수필 문단이 구태의연한 작품이더라도 문장력이 아름답다는 이유로, 서정성이 짙다는 이유로 좋은 작가로 평하고 문학상의 대상으로 삼는 것을 한 번은 숙고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새로운 시도, 문제성이 있는 작품에 관심을 돌려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만이 수필이 발전한다.
김귀선씨와 이런 말을 나눈 일이 있다. 목성균과 김귀선의 수필을 소설 형식의 수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목성균은 짙은 서정성으로 수필이라는 생각이 들도록 했고, 김귀선의 작품은 우리의 아픈 현실을 보여줌으로 서정성보다는 불편함을 준다. 라고 했다. 이제는 익숙한 서정성보다는 불편한 작품도 읽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불편함이 느껴지는 작품도 읽고, 또 읽으면 익숙해지고, 친숙해지리라.
김귀선의 수필세계를 소개하는 이유가, 그가 수필에 소설기법을 시도하였다는(나의 생각입니다만.) 것만이 이유가 아니다. 전통적인 수필기법의 형식에서 보더라도 잘 쓴 수필이 많다. 특시 여성 수필가들이 감성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려, 독자의 눈시울을 뜨겁게 해주는 글을 잘 쓴 글이라고 평해온 지금까지의 관례를 벗어나야 하리라. 수필은 의미를 강조하는 문학 장르이다. 감성만을 한껏 끌어올린 글에서, 감성 뒤에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면 독자들은 실망할 것이다. 이것은 주제를 강조하는 수필의 정의에도 어긋난다.
이 글을 통해서, 문학상을 줄 때는 이처럼 새로운 시도를 한 글을 수상작으로 삼아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문학상은 수필이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준다는 의미도 강하다. 그래서 심사의원은 오랜 작품 활동을 한 원로님에게 맡기는 이유이다. 그러나 심사를 하시는 분의 수필관이 구태의연하면 그런 기대를 접어야 할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심사의원이 감성적이고, 전통 기법에 충실하다는 이유만으로 상을 준다면 대구 수필 문단의 발전을 저해하는 행위라고 본다.
이 말을 끝으로 김귀선 수필세계를 끝내겠다.
첫댓글 수고 많으셨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