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립국(스위스)에서 만난 <광장>의 이명준,
“ 나는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이국의 어느 도시에 도착하기를 꿈꾸었었다. 나는 겸허하게, 그리고 가난하게 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무엇보다도 비밀을 간직할 수 있을 것이다. 나 자신에 다하여 말을 하고, 내가 예전에는 이러저러한 일을 했다든가, 나의 이름을 걸고 어떤 행동을 한다는 것은 분명 나 자신의 무엇인가를 밖으로 드러내는 일이라고 나는 늘 생각해왔다. 그렇다면 그 소중하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그것은 아마도 마음이 허약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표시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프랑스의 산문작가이자 철학자이며, 알베르 카뮈의 스승인 장 그르니에의 <섬> 중 ‘케르겔렌 군도’에 실린 글이다.”
아무도 모르는 곳, 말도 통하지 않고, 아무런 것도 가지지 않고, 도착하는 순간, 진정한 여행이 시작될 것이다. 익명의 장소에서 누군가 모르지만 다른 사람의 몸과 마음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 상상만 해도 즐거운 일이며 얼마나 설레는 일인가,
익명성이 보장되는 곳, 그곳을 사람들은 갈망한다. 아무도 본인을 알아보지 않는 곳, 그래서 대낮에 햇빛 쏟아지는 거리를 활보해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곳, 그곳을 사람들은 충분히 갈망하면서도 그러한 상황과 장소가 확보되면 그곳으로 가기를 꺼린다. 그것은 사람들이 너무 세상의 풍습과 관습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다.
최인훈의 장편소설 <광장>에서 주인공 이명준이 택한 장소가 바로 그러한 곳이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주인공 이명준은 제 3국을 택했다.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 익명으로 살고자 했던 그는 결국 그곳에 도착해 그가 살고 싶었던 생을 살아보지도 못하고 남 지나해에서 자살을 택하고 만다.
1953년 7월 27일 북 한과 유엔 사이에 체결된 휴전협정에 따라 전쟁은 무기한 휴전에 들어갔다. 한국전쟁이 끝난 뒤 남북 양쪽은 전쟁 포로를 교환하였는데, 남과 북 그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고 거부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남과 북 어디에도 안주하지 못한 채 ‘중립국’을 택했다.
“포로는 왼편에서 들어와서 바른편으로 빠지게 돼 있다. 순서는 공산측이 먼저, 네 사람의 공산군 장교와, 국민복을 입은 중공 대표가 한 사람, 합쳐서 다섯 명, 그들 앞에 가서, 걸음을 멈춘다. 앞에 앉은 장교가, 부드럽게 웃으면서 말한다.
“동무 앉으시오.”
명준은 움직이지 않았다.
“동무는 어느 쪽으로 가겠소?”
“중립국”
그들은 서로 쳐다본다. 앉으라고 하던 장교가, 윗몸을 테이블 위로 바싹 내밀면서 말한다.
“동무, 중립국도, 마찬가지 자본주의 나라요. 굶주림과 범죄가 우글대는 낯선 곳에 가서 어쩌자는 거요?”
“중립국”
“다시 한 번 생각하시오. 돌이킬 수 없는 중대한 결정이란 말요. 자랑스러운 권리를 왜 포기하는 거요?”
“중립국”
(...)
다음은, 맞은편에 자리 잡은, 유엔 측 테이블로 걸어간다. 그는 아까처럼 우뚝 섰다.
“자넨 어디 출신인가?”
“……”
“흠, 서울이군.”
설득자는, 앞에 놓인 서류를 뒤적이면서,
“중립국이라지만 막연한 얘기요. 제 나라보다 나은 데가 어디 있겠어요. 외국에 가본 사람들이 한결같이 하는 얘기지만, 밖에 나가봐야 조국이 소중하다는 걸 안다고 하잖아요? 당신이 지금 가슴에 품은 울분은 나도 압니다. 대한민국이 과도기적인 여러 가지 모순을 가지고 있는 걸 누가 부인합니까? 그러나 대한민국엔 자유가 있습니다. 인간은 무엇보다도 자유가 소중한 것입니다. 당신은 북한생활과 포로생활을 통해서 이중으로 그걸 느꼈을 겁니다. 인간은……”
“중립국”
“허허허,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내 나라 내 민족의 한 사람이 타향 만 리 이국땅에 가겠다고 나서니, 동족으로서 어찌 한마디 참고 되는 이야길 안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이곳에 남한 2천만 동포의 부탁을 받고 온 것입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건져서, 조국의 품으로 데려오라는……”
“중립국”
“당신은 고등교육까지 받은 지식인입니다. 조국은 지금 당신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위기에 처한 조국을 버리고 떠나버리렵니까?”
“중립국”
소설 속에서 이명준은 결국 중립국을 택했다. 장그르니에의 산문집> <섬>의 한 소절처럼 중립국에서 새로운 삶을 살고자 가던 남중국해에서 이 명준은 그 푸른 바닷물과 하나가 된다.
북한군 포로 74명, 남한군 포로 2명, 중국군 포로 12 명은 인도로, 남미로 흘러들어가 신산했던 세월을 겪었다.
이명준이 가고자 했던 중립국, 스위스가 바로 중립국이다.
최인훈 선생이 살아 있을 당시 <광장)을 노벨문학상으로 추천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유일한 분단 국가인 대한민국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 <광장), 아쉬움만 남을 뿐이지만,
하여간 신기하다. 그 당시라면 꿈도 못 꾸었을 전쟁의 폐허를 딛고 경제대국의 꿈을 이룬 국민의 한 사람으로 스위스 땅을 밟고 있으니.
수많은 사람들이 가고자 하고 잠시라도 살고 싶어 하는 나라 스위스는 중립국이면서 누구나 갈구하는 ‘평화’가 잘 유지되는 나라 중 하나다. 스위스라는 나라에서도 취리히주의 취리히라는 도시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가장 살기 좋은 도시’중의 한 곳이다.
알프스 몽블랑 트레킹을 마치고 잠시 들렀던 취리히는 자유와 낭만이 살아 숨쉬는 도시이자, 첨단 패션의 도시였다. 취리히 중앙역의 반호프 광장에서 취리히 호반의 뷔르클리 광장까지는 1,300m에 이르는 대로가 뻗어 있는데,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쇼핑가가 이 거리다. 고풍스런 건물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거리에는 고급 상점과 이름난 백화점, 그리고 유서 깊은 은행 등이 밀집되어 있고, 그 거리를 각양각색의 젊은이들이 자유분방하게 할보하고 있었다.
유리창 안에는 수천만 원에서 수억대가 나간다는 스위스의 명물인 고급 시계들이 새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나 같은 여행객에게는 그저 시계에 불과할 뿐, 그저 소 닭보듯 지나갈 뿐이다. 대한민국보다 세배나 더 잘산다는 스위스에서는 물가가 비싸서 쇼핑이 원만하지 않고, 기껏 세상에서 제일 유명하다는 초콜렛이 만만할 뿐,
거리 곳곳에서 펄럭이는 빨간색과 흰색의 스위스 국기가 그런 우리들의 마음을 알아줄까?
도시의 규모는 세계 굴지의 큰 도시, 상해나 뉴욕, 또는 서울, 동경들과 취리히를 비교할 수 없다. 그러나 '작지만 큰 도시'라는 애칭을 가지고 있는 취리히는 스위스에서 가장 큰 도시이자, 고객의 익명성을 보호하기 위한 비밀계좌제도를 운영하는 스위스 중앙은행이 있는 도시다. 세계의 독재자들의 자금 은닉초로 알려진 도시 취리히는 그래서 그런지 활기가 넘쳤다. 취리히는‘첨탑의 도시’로도 알려져 있는데, 그래서 그런지 취리히 시내에는 성당과 교회가 많다.
취리히의 대표적인 성당이자 스위스에서 가장 큰 성당인 그로스뮌스터 대성당은 11-13세기에 걸쳐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졌다. 처음에 이 성당은 샤를 마뉴 대제가 세운 참사회로 지어졌다가, 중세에는 콘스탄티누스 주교회로 이용되었다. 이 성당에서 스위스의 종교개혁가 츠빙글리가 1519년부터 설교한 뒤로 이 성당이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웅장하고도 화려한 이 성당 위의 쌍둥이 첨탑의 인상적인 외관은 취리히에서 꼭 봐야 할 명물중이 한 곳으로 184개의 계단을 올라가 첨탑 정상에서 바라보는 취리히 시내의 전경과 호수는 환상적이다.
이 성당의 강 건너편에 있는 프라우뮌스터 성당도 유명한데 이 성당은 9세기경 동프랑크 왕국의 루트비히 2세가 딸을 위해 세운 여자 수도원을 교회로 바꾼 곳으로 13세기경 재건됐다.
이 성당의 제단 위에 있는 스테인드글라스가 유명한데, 인상파 화가인 샤갈의 마지막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취리히 반호프거리 중앙역 근처에 교육학자이며, 사상가로 어린이 교육에 있어 조건없는 사랑을 주었던 하인리히 페스탈로치 - Johann Heinrich Pestalozzi)의 동상이 서 있다.
취리히에서 나고 자란 페스탈로치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의 양육을 받은 뒤 카를리나 대학에서 보드머 교수의 감화를 받았다. 그는 루소의 영향을 받아 브르그에 농장을 개척하여 그곳에 빈민 학교를 세우고, 교육사업에 투신했다. 페스탈로치는 시탄스에 고아원을 세웠고, 브르크도르프에 학원을 창설한 뒤, 모드 수람들을 빈곤으로부터의 해방시키기 위해 전력을 기울였다. “가정이여, 그대는 도덕의 학교이다.” 라는 말을 남긴 페스탈로치의 사상은 피히테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한 사람이 어떤 철학을 선택하는가는 그 사람이 어떤 종류의 사람인가에 달려있다. ”고 말한 피히테는
“인생은 사랑입니다. 인생의 모든 형식과 본질은 사랑으로 되어 있고, 사랑에서 생성됩니다. 당신들이 진정으로 자기 자신에게 기쁨을 찾고자 할 때 진실로 사랑하는 것, 당신의 영혼이 무엇을 추구하고 동경해 마지 않는가 하는 것을 말해 주십시오, 그러면 당신들은 내게 당신의 인생을 보여준 셈이 됩니다, 당신들이 사랑하고 있는 바로 그것이 당신의 인생이니까요.” 라고 말하며 사랑의 중요성을 강변하였다.
페스탈로치는 인간성의 도야를 목표로 하는 인간 학교(Menschenschule)를 목표로 삼았으며, 그의 이상은 신교육의 원류가 되었다. 그에게 영향을 받은 독일의 헤르바르트ㆍ프뢰벨과 프랑스의 메누드비랑그리고 미국의 셀돈을 통하여 전 세계의 교육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고귀한 지혜를 가가 사람일지라도 자신에게 순수한 인격이 없다면, 어두운 그늘이 둘러쌀 것이다. 그러나 천한 오막살이에 살지라도, 교육된 인격은 순수하고 기품있는 만족된 인간의 위대함을 발산할 것이다“
인간에게 중요한 것을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함에서 찾았던 페스탈로치는“고난과 눈물이 나를 높은 예지로 이끌어 올렸다. 보석과 즐거움은 이것을 이루어 주지 못했을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고난의 세월을 극복하면서 자신의 신념을 세상에 접목시킨 페스탈로치의 이 말은 오늘이 이 시대에도 유효할 것이다.
취리히 시내에서 가장 인상적인 곳은 취리히 호수와 리마트 강이다. 이 강줄기는 취리히호에서부터 북쪽으로 유장하게 흘러 취리히 시내로 이어진다. 스위스의 다른 도시들과 마찬가지로‘호반의 도시’로도 알려진 리마트강이 흐르는 취리히의 호숫가는 평화와 여유가 넘쳐흐르고 있고, 강가에 있는 사람들의 표정에 생기가 넘친다.
이 취리히에서 반생을 보낸 사람이 <젊은 예술가의 초상>과 <더불린 사람들> 그리고 <율리시즈>를 지은 영국의 작가 제임스 조이스였다.
제임스 조이스가 그의 동생 스태니스로스에게 보낸 편지의 한 소절에 그의 남녀 간의 사랑관이 담겨 있다.
“사랑에 관한 많은 이야기는 무의미하다. 여자의 사랑은 언제나 모성적이요. 이기적이다. 반면에, 남자는 사랑하는 이 또는 사랑했던 대상을 위해 성실한 애정의 축적을 소유한다.”
“난 뭔가 아는 여자들이 싫다.”라고 말한 제임스 조이스는 문학이라든가 지성 따위와는 먼 여자로 아일랜드 서쪽 끝 골웨이라는 시골에서 상경해서 핀즈 호텔에서 여급으로 일하고 있던 스물한 살의 노라 바너클을 만나 평생을 함께했다.
장 자크 루소의 여성관과 궤를 같이했던 것은 아닐까?
“나의 눈은 어둠 속에 안 보여요.
나의 눈은 안 보여,
나의 눈은 어둠 속에 안 보여요. 여보.
다시, 이제 그만. 어두운 사랑,
어두운 갈망, 이제 그만,
어두움”
제임스 조이스 <지아코모>
“나는 경험의 실제를 백만 번째 만난 내 넋의 대장간에서 내 민족의 창조되지 않은 양심을 만들어 내려고 떠난다.”제임스 조이스 <젊은 예술가의 초상>
“만약에 마음이란 곳도 아플 수가 있다면
바로 그 마음이 지금 아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임스 조이스 <젊은 예술가의 초상>
“마카엘 로바츠는 잊혀 진 아름다움을 기억해 낸다. 그래서 그가 두 팔로 그 아름다움을 안을 때 그의 두 팔에 안기는 것은 세상에서 잊혀 진 지 오래 된 아름다움이다. 그러나 이래서는 안 된다. 절대로 안 된다. 나는 아직 세상에 나타나지 않은 아름다움을 내 두 팔로 안고 싶다.”
<젊은 예술가의 초상>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에 그의 마음은 안절부절하다. 그들의 부질없는 목소리로 그는 자기가 남과 다른 존재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는 이들과 함께 놀려고 하지 않는다. 다만 그의 영혼에 끊임없이 보이는 환영을 현실세계에서 보고자 할 뿐이다. 그러나 그것을 어디서 어떻게 발견해야 할지 그는 몰랐다.”
제임스 조이스 <젊은 예술가의 초상>
그가 오랫동안 살았고, 생을 마감했던 취리히에는 그때나 다름없이 리마트 강이 유장하게 흐르고, 그 강가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자세로 살아가고 있었다.
이름답기 이를데 없는 리마트강가에 있는 도시 취리히를 떠날 때 문득 <광장>의 주인공 이명준이라는 이름이 가슴 깊은 곳에서 슬픔처럼 떠올랐다.
2023년 7월 1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