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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탈출기의 말씀 3,1-8ㄱㄷ.13-15>
그 무렵
1 모세는 미디안의 사제인 장인 이트로의 양 떼를 치고 있었다.
그는 양 떼를 몰고 광야를 지나 하느님의 산 호렙으로 갔다.
2 주님의 천사가 떨기나무 한가운데로부터 솟아오르는 불꽃 속에서 그에게 나타났다.
그가 보니 떨기가 불에 타는데도, 그 떨기는 타서 없어지지 않았다.
3 모세는 ‘내가 가서 이 놀라운 광경을 보아야겠다. 저 떨기가 왜 타 버리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였다.
4 모세가 보러 오는 것을 주님께서 보시고, 떨기 한가운데에서 “모세야, 모세야!” 하고 그를 부르셨다.
그가 “예,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5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이리 가까이 오지 마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
6 그분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나는 네 아버지의 하느님, 곧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그러자 모세는 하느님을 뵙기가 두려워 얼굴을 가렸다.
7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내 백성이 겪는 고난을 똑똑히 보았고, 작업 감독들 때문에 울부짖는 그들의 소리를 들었다.
정녕 나는 그들의 고통을 알고 있다.
8 그래서 내가 그들을 이집트인들의 손에서 구하여, 그 땅에서 저 좋고 넓은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데리고 올라가려고 내려왔다.”
13 모세가 하느님께 아뢰었다.
“제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가서,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고 말하면, 그들이 저에게 ‘그분 이름이 무엇이오?’ 하고 물을 터인데, 제가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하겠습니까?”
14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나는 있는 나다.” 하고 대답하시고, 이어서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있는 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여라.”
15 하느님께서 다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 곧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신 야훼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여라.
이것이 영원히 불릴 나의 이름이며, 이것이 대대로 기릴 나의 칭호이다.”
▥ 제2독서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 10,1-6.10-12>
1 형제 여러분,
나는 여러분이 이 사실도 알기를 바랍니다.
우리 조상들은 모두 구름 아래 있었으며 모두 바다를 건넜습니다.
2 모두 구름과 바다 속에서 세례를 받아 모세와 하나가 되었습니다.
3 모두 똑같은 영적 양식을 먹고,
4 모두 똑같은 영적 음료를 마셨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을 따라오는 영적 바위에서 솟는 물을 마셨는데, 그 바위가 곧 그리스도이셨습니다.
5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들 대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으셨습니다.
사실 그들은 광야에서 죽어 널브러졌습니다.
6 이 일들은 우리를 위한 본보기로 일어났습니다.
그들이 악을 탐냈던 것처럼 우리는 악을 탐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10 그들 가운데 어떤 자들이 투덜거린 것처럼 여러분은 투덜거리지 마십시오.
그들은 파괴자의 손에 죽었습니다.
11 이 일들은 본보기로 그들에게 일어난 것인데, 세상 종말에 다다른 우리에게 경고가 되라고 기록되었습니다.
12 그러므로 서 있다고 생각하는 이는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 복음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13,1-9>
1 바로 그때에 어떤 사람들이 와서, 빌라도가 갈릴래아 사람들을 죽여 그들이 바치려던 제물을 피로 물들게 한 일을 예수님께 알렸다.
2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그 갈릴래아 사람들이 그러한 변을 당하였다고 해서 다른 모든 갈릴래아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
3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
4 또 실로암에 있던 탑이 무너지면서 깔려 죽은 그 열여덟 사람, 너희는 그들이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큰 잘못을 하였다고 생각하느냐?
5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
6 예수님께서 이러한 비유를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자기 포도밭에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심어 놓았다.
그리고 나중에 가서 그 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았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였다.
7 그래서 포도 재배인에게 일렀다.
‘보게, 내가 삼 년째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네.
그러니 이것을 잘라 버리게.
땅만 버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
8 그러자 포도 재배인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9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
오늘은 사순 제3 주일입니다.
이번 주일의 말씀전례를 알아듣기 위해서는 먼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취하신 행동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으시러 예루살렘으로 가시겠다고 마음을 정하신 다음, 그러니까 ‘출애굽’의 시간을 다 채우시기로 마음을 정하신 다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히브리 역사 가운데 일어난 매우 의미심장한 사건들을 상기시키면서 가르침을 주고 계십니다.
사실 탈출과 해방의 목적은 하느님을 향하여 나아가 그분께 도달하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일을 완수하시며, 제1독서의 ‘출애굽’의 사건은 아버지께로 건너가시는 빠스카의 예표가 되며, 제2독서의 그리스도란 바위에서 그 구원의 물을 마셨으니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화답송에서는 이를 베푸신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에 대한 축복의 찬양을 노래합니다.
특별히 우리가 제1독서에서 하느님 이름의 계시를 통해 알아들어야 할 중요한 사실은, 소명이 하느님께로부터 어떤 임무를 부여받음이 아니라 그 이전에 하느님의 계시를 받은 대상으로 선택되었다는 사실이며, 그러기에 하느님의 신비에 대한 무엇인가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 신비는 다름 아닌 우리와 더불어 관계를 맺고 우리와 함께 계시며 당신 백성에게 호의와 자비를 보이시는 사랑하시는 분이심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마치 하느님의 신비를 간직하게 된 모세가 더 이상 자기 스스로 행동하지 않고 하느님께서 자신 안에서 역사하시도록 자신의 몸을 맡겼듯이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어떤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갈릴래아 사람들을 죽여 그들이 바치려던 제물을 피로 물들게 한 일을 알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
(루카 13,3.4.)
그렇습니다.
사실 우리가 멸망하는 것은 지은 죄 때문이 아니라 죄를 회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곧 아버지께 향하여 나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회개'란 죄를 뉘우치고 하느님께로 돌아옴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곧 내면적, 정신적 뉘우침과 행위의 실천적 돌아옴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자신의 죄를 알고 ‘뉘우치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베풀어진 하느님의 사랑과 용서를 깨닫고 ‘돌아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기에 '회개'는 단순한 죄의 인식이나 자기 성찰 혹은 자기 반성, 또는 단지 죄가 없는 죄의 공백 상태나 죄의 진공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분의 용서와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이는 뉘우쳤기에 용서받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베풀어진 용서를 깨닫고 뉘우치는 것이요, 그리하여 용서하신 하느님의 사랑에로 돌아옴입니다.
이처럼 '회개'는 단순히 죄의 어둠을 벗어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빛으로 나아감이요, 하느님의 사랑에로 돌아와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가 회복됨입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옴'이라는 복음을 선포하시면서 '회개'를 촉구하셨습니다(마르 1,15; 마태 4,17)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마르 1,15)
그러니 무엇보다도 먼저 ‘하느님 나라가 왔다’는 ‘복음을 믿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것은 먼저 베풀어진 하느님 사랑인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의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할 것이다.”(루카 13,3)라는 말씀은 우리가 지은 죄 때문에 멸망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멸망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곧 자신의 완고함과 고집으로 이미 온 하느님 나라를 믿지 않고 이미 베풀어진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기에 멸망할 것입니다.
그리고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 비유’(6-8절)는 시급히 회개할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곧 열매 맺지 않는 무화과나무는 회개한 자에 합당한 행동과 생활을 보이지 않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과수원 주인이 열매 맺지 않는 나무를 잘라내라고 하자 과수원 재배인은 말합니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루카 13,8)
그렇습니다.
범한 죄로 본다면 저는 이미 뽑혀도 수백 번 뽑혀지고 말았을 열매 맺지 않는 쓸모없는 나무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여기 주님의 정원에 심겨져 있다는 것은 이미 용서받았다는 표시요, 자비를 입고 있다는 표시요, 또한 주님께서 저를 사랑하고 희망하고 기다려주고 믿고 계신다는 표시입니다.
참으로 오늘도 주님께서는 제 둘레를 파고 축복과 말씀의 거름을 주시며 열매 맺도록 기다리시고 돌보시고 희망하시고 계십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제가 뉘우치고 당신의 사랑으로 돌아가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루카 13,8)
주님!
당신께서는 열매 맺지 못하는 저를 그냥 버려두지 않으시고 손수 저의 둘레를 파고 축복의 거름을 주셨습니다.
지금도 당신께서는 여전히 말씀의 거름을 주시고, 믿고 사랑하고 돌보아 주시고, 기다리고 희망하고 계십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의 향기 담은 열매를 맺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심보를 바꾸는 것>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많이 사랑합니다.
한 주간 행복하셨습니까?
행복하시게 지내신 분은 행복에 행복을 더하시고, 혹시라도 행복하지 못하셨다면 지금부터 행복을 만드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모두가 잘 되기를 바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하지 못한 것은 우리 마음이 문제입니다.
이 시간 주님의 마음을 닮을 수 있는 은혜가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를 회개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죄를 뉘우치고 슬퍼하는 것을 회개라고 알고 있습니다.
회개란 쉬운 말로 심보를 바꾸는 것입니다.
자기의 인생관을 바꾸는 것입니다.
이 지상의 마음가짐에서 하늘을 향한 마음으로 탈바꿈하는 것입니다.
신자 중에 가장 무서운 신자는 누구라고 했죠?
배신자.
그러면 신부가 제일 싫어하는 신자는 누구라고 했죠?
원불교 신자.
‘원망’하고 ‘불만’ 가득하고 ‘교만’한 신자입니다.
이런 사람의 마음이 ‘사랑’하고 ‘포용’하며 ‘겸손’의 마음으로 바뀐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어찌 되었든 대표적인 배신자 베드로는 위기를 모면하고자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닭이 두 번째 울 때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울기 시작하였습니다.(마르 15,72)
주님의 말씀이 사실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인간의 연약함을 의탁할 수밖에 없다는 깨달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새롭게 태어나서 주님의 으뜸제자로 주님의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던 인물입니다.
그가 말합니다.
“이 말은 확실하여 그대로 받아들일 가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 가운데 첫째가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하느님께서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1티모2,15-16)
“나는 내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내 달리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하늘로 부르시어 주시는 상을 얻으려고, 그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필리 3,14)
바로 이것이 회개의 모습입니다.
만약에 과거에 매여서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다면 하느님의 복음을 전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결국 회개는 과거를 하느님의 자비에 철저히 맡기고 오늘을 사는 것입니다.
과거는 지나간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올지 모르는 신비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섭리에 맡겨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바로 오늘이 선물로 주어졌고 오늘을 통해서 미래가 열립니다.
그러므로 미래를 희망하는 만큼 오늘을 사랑으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세관장 자캐오라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루카 19,6) 하고 이르시자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루카 19,9)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캐오는 과거를 청산하고 새 삶의 변화된 모습을 구체적 행동을 통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행동의 변화 없는 회개는 있을 수 없습니다.
한 신부님께서 오랜만에 출신 본당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 오래도록 살고 계신 신자분이 반가워 하시며 환영해 주었습니다.
그러더니 한 말씀하셨습니다.
“신부님, 오랜만에 친정에 오셨는데 떡이라도 해 오셨습니까?”
신부님께서 능청스레 대답하셨습니다.
“네, 그러잖아도 떡을 해 오려고 했는데 집사람이 없어서 못해왔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핑계를 댑니다.
집사람 핑계는 왜 댑니까?
남편을 탓하고, 자식을 탓하며 부모를 원망하고 이웃을 시기하는 마음, 탓을 남에게 돌리는 심보를 고쳐야 합니다.
잘된 것은 자기가 잘해서 그런 것이고 잘못되면 조상 탓으로 돌리는 마음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그것이 삶의 회개입니다.
십자가의 오른쪽 강도를 보십시오.
예수님과 함께 매달린 죄수하나가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하며 예수님을 모독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른쪽에 매달린 강도는 그를 꾸짖으며 말하였습니다.
“같이 처형을 받는 주제에 너는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느냐? 우리야 당연히 우리가 저지른 짓에 합당한 벌을 받지만, 이분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갈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 23,42-43)
왼쪽 강도의 모습을 통해서 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남을 비방하고 모욕하는 마음입니다.
사실 주변에서 일어나는 남의 잘못된 일을 보면 “내 그럴 줄 알았다. 네가 사는 것이 그 모양이더니 결국 그 꼴이구나”하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남을 심판하는 태도를 가질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성찰하고 추스르는 근신의 태도를 취하는 것이 믿는 이들의 자세입니다.
그의 안쓰러운 모습에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고 또한 회개의 기회로 삼는 겸손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오른쪽 강도처럼 마지막 순간에라도 마음을 돌려서 간구하면 주님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하고 약속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회개의 기회를 미루지 마십시오.
오늘 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사람들이 당한 불행이나 고통,실로암 탑에 깔려 죽은 사람이나 그들은 ‘죄가 많아서’, ‘믿음이 없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고 하셨고,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루카 13,5)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재앙을 당하기 전에 미리 준비하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주변에 벌어지는 모든 상황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지를 말해주는 메시지입니다.
지금 여기서 준비하고 있으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결코 우리의 멸망을 두고 보실 분이 아니십니다.
방탕했던 아들의 비유(루카 15,21)을 보면 작은 아들이 “아버지, 저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 저는 감히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라도 삼아주십시오.” 하고 말합니다.
방탕하였던 아들은 겸손되이 저 밑바닥으로 내려갔습니다.
아버지의 머리 위에 올라가서 아버지를 애먹이던 그가 품팔이꾼, 종의 모습으로 내려갈 수 있는 마음의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사랑, 아버지집의 풍요로움에 대한 기억 때문입니다.
우리도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로운 사랑에 대한 기억을 통해 하느님을 삶의 첫 자리에 모실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도 정작 내 좋은 일에는 들러리로 전락시키고 마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요?
주님, 주님! 하면서도 참으로 그분을 주님으로 모시지 못하고 오히려 종으로 취급하는 경우가 많음을 솔직히 인정해야겠습니다.
작은 아들이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기도 전에 이미 아들을 용서한 아버지, 그 아버지께서 우리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한 주간 아버지의 품에 안기는 기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감이 곧 회개요, 그리고 그 회심은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죽는 순간까지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을 되새기며 주님의 사랑을 드립니다.
성 아프라테스의 말씀으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마음의 할례를 받고 회개의 눈물로 다시 태어나는 이들은 참으로 행복합니다.”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원장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너무 빨리 꿈을 확정해버리면 안 되는 이유>
오늘 복음의 주제는 ‘회개’입니다.
빌라도는 갈릴래아 사람들이 성전에서 제물을 봉헌할 때 그들을 죽여 그들의 피가 제물에 물들게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드렸더니 예수님은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분명 회개하지 않은 이는 ‘제물에 봉헌하는 이의 피가 섞이지 않은 것’에 대해 비판하시는 것입니다.
도대체 제물에 피를 섞는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요?
또 실로암 탑이 무너져 ‘열여덟’ 명이 깔려 죽었는데 이에 대해서도 회개하지 않으면 그렇게 된다고 하십니다.
실로암은 ‘파견된 자’란 뜻이 있습니다.
만약 누군가에게 파견되었는데 그 뜻을 이루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요?
파견한 자의 뜻이 아닌 다른 뜻입니다.
지금 그 뜻이 죽는 것입니다.
그 뜻이란 분명 돈에 대한 욕심, 육체에 대한 즐거움, 힘에 대한 욕망일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파견되어 일을 수행할 때 이 세 가지가 아니면 그 일을 완수하는 데 장애가 될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열여덟을 ‘세속(6)+육신(6)+마귀(6)’의 합으로 봅니다.
그러며 말씀하시는 것이 포도밭에 자라나는 한 그루의 무화과나무 비유입니다.
포도밭에 웬 무화과나무일까요?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자신들의 부끄러운 곳을 가리기 위해 사용했던 것이 무화과나무 잎입니다.
반대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우리가 되어야 하는 나무를 말할 때 사용했던 상징이 ‘포도나무’입니다.
우리는 참 포도나무에 접붙여진 가지입니다.
다시 말해 회개한 자는 자기가 되고 싶어 하는 무화과나무의 삶을 버리고 주님이 되기를 원하시는 포도나무의 삶으로 전환하는 일이란 뜻입니다.
이를 위해 지금 내가 추구하고 싶어 하는 것을 버려 나의 주인이 내가 아닌 하느님임을 증명해야 합니다.
이 예배가 제물을 드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제물에는 내 피가 들어있어야 합니다.
나를 섬기는 것이 아닌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어야 그분의 뜻을 들어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이를 위해 세속-육신-마귀와 싸워 이기는 노력을 해야만 합니다.
어쨌건 그것이 살아있다면 주님의 뜻을 내 안에서 이뤄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포도나무는 주인이 맺기를 원하는 열매를 맺어줍니다.
반면 무화과나무는 주인이 원하는 열매를 맺지 않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열매를 맺습니다.
왜냐하면 주인은 ‘포도밭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무화과나무는 주인의 계획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 것들은 결국 잘립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꿈이 무엇인지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피가 섞인 제물도 봉헌해야 하고 삼구도 죽여야 합니다.
일본 애니매이션 ‘베르세르크 – 황금시대’의 내용입니다.
여기저기 전쟁터에서 돈을 받고 싸워주는 가츠란 인물이 주인공입니다.
가츠는 뛰어난 실력으로 적의 장수를 죽이고 두둑한 상금을 챙기고는 그를 붙잡아두려는 나라를 등지고 정처 없이 떠도는 삶을 삽니다.
그러다 ‘매의 단’이란 용병부대를 만나고 그 대장 ‘그리피스’와 한 판 붙습니다.
그런데 가츠도 그리피스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약속대로 그리피스의 오른팔이 되기로 합니다.
결투에서 지면 그렇게 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본래 그리피스의 오른팔이 되기로 했던 그리피스를 좋아하는 캐스커라는 여자 군인이 있었는데 그녀는 느닷없이 나타난 가츠가 밉기만 합니다.
그런데 그리피스는 큰 야망이 있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자기만의 왕국을 가지고 싶었습니다.
천민 출신이지만 왕국을 갖는 게 꿈이었습니다.
매의 단의 인기는 점점 치솟고 그리피스는 한 왕국의 공주의 마음까지도 빼앗습니다.
이 와중에 가츠는 그리피스가 자신을 친구가 아닌 자기 야망을 채우기 위한 도구 정도로 취급하는 것을 느끼고는 그리피스를 떠나기로 합니다.
막아서는 그리피스와 대결을 하는데 이제 그리피스가 가츠의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그리피스는 자기 오른팔이 자신을 떠난 아픔을 달래기 위해 공주를 찾았으나 군사들에게 발각되어 갇히고 고문당합니다.
그리고 매의 단도 쑥대밭이 됩니다.
이 사실을 멀리 있는 가츠가 듣게 됩니다.
가츠는 그리피스와의 옛정을 위해 특공대를 조직하여 그리피스를 구출해냅니다.
그러나 그는 이미 걸을 수도 없고 칼을 들 수도 없는 몸이 되어버렸습니다.
매의 단은 이제 가츠를 우두머리로 캐스커를 그의 오른팔로 삼고자 합니다.
가츠는 그 책임이 무거웠지만 어쩔 수 없이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캐스커도 사랑하게 됩니다.
반면 더 이상 남은 게 없는 그리피스는 자살을 시도합니다.
그런데 하늘이 어두워지더니 마왕들이 나타납니다.
그리피스를 마왕으로 만들어주겠다고 합니다.
그들은 오래전부터 그리피스의 야망을 보았고 그게 바로 그리피스라고 합니다.
마왕이 되려면 야망을 위해 친구들을 바쳐야 하는데 그 친구들이 매의 단입니다.
그리피스는 마왕이 되어 자기 왕국을 가져보기 전에는 죽기 싫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청대로 매의 단을 악마들에게 바칩니다.
이 와중에 매의 단은 전멸했고 가츠만이 어떤 힘의 도움으로 왼팔만 잃고 그곳을 탈출합니다.
그리고 깨닫습니다.
자신의 소명은 마왕이 되기 위해 동료들을 제물로 바친 그리피스와 마왕들과 싸우는 것임을.
그리피스는 태어나서 그냥 산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무언가 이뤄내겠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자신의 왕국을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이 욕망 속에서 그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은 그저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결국엔 악의 힘까지 빌려 엄청난 힘을 지닌 마왕이 되었지만, 친구가 없습니다.
반면 가츠는 자신의 꿈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열심히 살면서 자신이 왜 살아야 하는지를 찾았습니다.
그러면서 자신도 모르게 누군가를 도와주고 구해 주고 또 진정한 사랑도 하게 됩니다.
자신을 이용한 사람을 구하기도 하지만 또 배신당합니다.
그리고 점점 자신의 꿈에 흐릿하게 보였던 미래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피스가 마왕들이 원한 자신들의 후계자였다면 자신은 천사들이 뽑은 마왕과 대적하는 군사였음을.
우리 삶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구약의 요셉도 짚단과 별들이 자신들에게 절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가족들에게도 존경받는 인물이 될 것이란 꿈입니다.
그러나 그 꿈이 어떻게 실현될지는 몰랐습니다.
다만 자신을 그 꿈을 위해 봉헌하였습니다.
요셉은 그 꿈을 위해 하느님께 자신을 제물로 드렸습니다.
이것이 우물에 빠지는 것입니다.
나의 죽음입니다.
그리고 열여덟에 대항하는 욕망을 죽였습니다.
이것이 상징적으로 보티파르의 아내의 유혹을 이기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이 과정을 통해 그는 하느님의 뜻을 성취해 드렸습니다.
그러니 요셉은 다른 형제들보다 먼저 하느님의 꿈을 찾을 수 있었던 회개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자녀들에게 “앞으로 뭐가 되고 싶니? 네 꿈은 뭐야?”라고 묻는다면 이는 아이들에게 자신만을 위해 사는 사람으로 살도록 종용하는 것이 됩니다.
“하느님께서 너에게 바라시는 꿈이 무엇일까?”를 찾게 만들어야 회개한 사람입니다.
죽을 때까지 이 꿈을 찾지 못한다면 오늘 복음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
내가 너무 명확한 꿈을 가지면 그 꿈이 자신을 멸망으로 이끌게 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꾸게 하시는 꿈은 처음엔 명확히 깨닫기 어렵습니다.
다만 포도나무로 자라기 위해 그분의 뜻에 접붙여져야 합니다.
분명 우리는 어떤 목적으로 창조되었습니다.
내 꿈이 아니라 주님의 꿈을 찾기 위해 자신을 제물로 봉헌하고 삼구를 이기는 노력을 한다면 분명 포도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나를 어떻게 쓰시기를 원하는지는 지금 명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흐릿하게 보일 뿐입니다.
다만 “내가 무엇이 되기를 원하는 것일까?”에 대한 의문은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꿈을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 요셉에게 먼저 명확한 꿈을 알려주었다면 그는 분명 도망쳤을 것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신약의 요셉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을 받아들일 능력으로 성장했다면 그만큼 조금 더 명확하게 알려주십니다.
그렇게 나아가는 게 좋습니다.
꿈은 내가 이루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당신께 접 붙어 있는 나를 통해 이루시는 것입니다.
만들어진 것은 만드신 분께 자신을 맡길 때 가장 가치 있는 삶을 살게 됩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수원가톨릭대 교수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사랑은 천 개의 얼굴을 지니고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듣기에 참으로 섬뜩한 말씀,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강한 경고성 말씀을 우리에게 전하고 계십니다.
“실로암에 있던 탑이 무너지면서 깔려 죽은 그 열여덟 사람, 너희는 그들이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큰 잘못을 하였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
(루카 복음 13장 4~5절)
이어서 더 강경한 어조로 우리에게 신속한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보게, 내가 삼 년째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네.
그러니 이것을 잘라 버리게.
땅만 버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
예수님 경고 말씀을 묵상하면서 도대체 왜 자비 충만한 예수님께서 이토록 무서운 경고 말씀을 건네시는가에 대해서 묵상해봤습니다.
묵상 결론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던지시는 강한 경고성 발언조차도 사랑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입니다.
경고 이면에는 우리 죄인을 향한 예수님의 극진한 사랑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 세상 어떤 부모가 자기 자녀의 타락과 방황을 보고 수수방관만 하고 있겠습니까?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할 것입니다.
타이르기도 하고, 사정도 해보고, 때로 파격적으로 감싸 안아 주기도 할 것입니다.
그런 모든 노력이 먹혀들지 않을 경우 어떻게 합니까?
너무도 안타까운 나머지 마음에 없는 말도 하게 됩니다.
‘너 계속 그런 식으로 나가면 자식 하나 없는 것으로 생각하겠다. 호적에서 빼버리겠다.’ 등등.
아이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부모라면 아이가 고층 아파트 베란다 근처에 어른거리지 못하도록 혼을 낼 것입니다.
아이가 뜨거운 국 냄비에 가까이 가지 못하도록 회초리도 들 것입니다.
아이가 빨간 신호등인데도 길을 건너간다면 호되게 야단칠 것입니다.
예수님의 강한 경고 그 이면에는 우리를 향한 한없는 사랑과 연민이 마음이 담겨 있음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배신과 타락을 안타까워하시는 하느님,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우리에게 발걸음을 되돌리기를 간절히 바라시는 하느님께서 오늘 다시 한번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고 계십니다.
결국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분이 어떠한 시련을 주시든, 어떠한 고통과 십자가를 주시든, 그 모든 행위 그 이면에는 우리를 향한 극진한 사랑, 강력한 구원 의지가 자리 잡고 있음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사랑은 천 개의 얼굴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그 누군가를 진실로 사랑한다면 그를 지지하고 격려하고 칭찬도 해줍니다.
그러나 반대로 그의 탈선이나 그릇된 삶 앞에 침묵해서는 안 됩니다.
그가 안고 있는 부족함이나 취약점들을 용기 있게 지적해주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오히려 더 큰 사랑이고 이웃을 성장시키는 노력입니다.
우리가 서로 남남이라면 상처나 고통을 주고받을 하등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 서로 사랑하기에 상처도 고통도 주고받는 것입니다.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는 곧 이스라엘 민족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다른 민족들이 받아보지 못한 주님의 총애를 받아왔습니다.
율법을 받았고, 예언자를 받았습니다.
계약을 받았고 성전을 받았습니다.
이제 주님께서는 이 민족에게 결정적인 선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들은 가장 결정적인 선물마저도 거부하고 발로 차버렸습니다.
결국 이 민족의 운명은 끝이 날 판국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교회와 성사를 받았습니다.
새로운 계약의 복음을 받았으며, 언제나 우리 가운데 현존하시는 주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누구도 하느님께서 자신을 외면하신다고 불평할 수 없습니다.
그저 감사하면서, 감지덕지하면서 주님께서 불러주신 각자의 처지에 합당한 삶을 기쁘게 살아가는 것, 오늘 우리에게 주어지는 가장 큰 과제입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한다>
오늘 복음 말씀은 “나중으로 미루지 말고 지금 바로 회개하여라.”라는 가르침입니다.
빌라도가 갈릴래아 사람들을 죽인 일은 ‘살인 사건’이고, 실로암 탑이 무너진 일은 ‘불의의 사고’입니다.
그런 사건과 사고는 인간 세상에서 늘 일어나는 일인데, 유대인들은 그런 일을 ‘죄인들에게 내리는 하느님의 벌’로 생각했고, 그런 일로 죽은 사람들을 ‘천벌을 받은 죄인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 아니다.”라는 말씀은, “그런 사건과 사고는 하느님께서 내리신 벌이 아니고, 죽은 사람들은 천벌을 받은 죄인들이 아니다.” 라는 뜻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죽은 사람들이 죄인이 아니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사건과 사고가 천벌이 아니라는 것뿐입니다.
아주 가끔 예외적으로 천벌이 내리는 경우가 있긴 합니다.
“정해진 날에 헤로데는 화려한 임금 복장을 하고 연단에 앉아 그들에게 연설을 하였다.
그때에 군중이 ‘저것은 신의 목소리지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다.’하고 외쳤다.
그러자 즉시 주님의 천사가 헤로데를 내리쳤다.
그가 그 영광을 하느님께 돌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벌레들에게 먹혀 숨을 거두었다.”
(사도 12,21-23)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건들과 사고들은 하느님의 심판과 처벌이 아니라 인간 세상의 불행한 현실일 뿐입니다.
그러니 그런 일로 죽은 사람들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 큰 죄인'으로 판단하면 안 됩니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라는 말씀은 “그 일이 하느님의 심판과 처벌은 아니지만,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심판과 처벌은 ‘그런 식으로’ 갑자기 닥칠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지금 바로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으면서 방심하고 있다가 갑자기 심판의 날을 맞이하는 경우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의 날에도 노아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였는데, 홍수가 닥쳐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또한 롯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짓고 하였는데, 롯이 소돔을 떠난 그날에 하늘에서 불과 유황이 쏟아져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사람의 아들이 나타나는 날에도 그와 똑같을 것이다.”
(루카 17,26-30)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사고팔고 심고 짓는 일은 죄는 아니고 인간들의 ‘일상적인 삶’인데, 여기서는 방심한 상태로 살면서 회개하지 않는 모습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언젠가 종말과 심판이 오더라도 오늘은 아니겠지.”라는 생각, 또 “나도 언젠가는 죽겠지만 오늘은 아니겠지.”라는 생각, 그런 생각으로 하루하루 살면서 회개를 나중으로 미루기만 하는 모습,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그렇게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시는 경고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포도밭에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심어 놓았다.
그리고 나중에 가서 그 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았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였다.
그래서 포도 재배인에게 일렀다.
‘보게, 내가 삼 년째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네.
그러니 이것을 잘라 버리게.
땅만 버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러자 포도 재배인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
(루카 13,6-9)
이 말씀도 지금 바로 회개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삼년 째 와서 열매를 찾아보지만 찾지 못한다.’는 말은 하느님께서 죄인들이 회개하기를 기다리신다는 뜻입니다.
“어떤 이들은 미루신다고 생각하지만 주님께서는 약속을 미루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여러분을 위하여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2베드 3,9)
그런데 하느님께서 언제까지 기다리실지 그것은 아무도 모릅니다.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 라는 말은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지금’이 회개와 구원을 위한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올해’와 ‘내년’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뜻으로는 ‘오늘’과 ‘내일’일 수도 있고, ‘지금’과 ‘조금 뒤’일 수도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다음 말씀이 연상됩니다.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루카 12,20)
여기서 ‘오늘 밤에’ 라는 말은 ‘몇 시간 뒤’로 생각됩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몇 시간’은 회개하라고 주신 마지막 기회입니다.
(사람에 따라서 ‘몇 분’이 될 수도 있고, ‘며칠’이 될 수도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의 날이 마치 밤도둑처럼 온다는 것을 여러분 자신도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평화롭다, 안전하다.’ 할 때, 아기를 밴 여자에게 진통이 오는 것처럼 갑자기 그들에게 파멸이 닥치는데, 아무도 그것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어둠 속에 있지 않으므로, 그날이 여러분을 도둑처럼 덮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빛의 자녀이며 낮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밤이나 어둠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잠들지 말고,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도록 합시다.”
(1테살 5,2-6)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진노의 심판을 받도록 정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차지하도록 정하셨습니다.”
(1테살 5,9)
회개하지 않는 사람에게 ‘그날’은 ‘갑자기 닥치는’ 무서운 심판 날입니다.
그러나 늘 깨어 있는(회개하는) 사람에게 ‘그날’은 학수고대하며 기다리는 ‘구원의 기쁜 날’입니다.
나에게 ‘그날’이 어떤 날이 될지는 지금 내가 어떻게 사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만나라! 회개하라! 시작하라!”>
온통 우울하고 어둔 소식들입니다.
어렵고 힘든 시절에는 시(詩)가 참 좋은 힘이, 위로와 구원이 됩니다.
진리는 시공을 초월하여 언제 어디서나 영원한 현재성을 지닙니다.
아주 예전 자작시가 오랜 후 이렇게 강론에 인용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 했습니다.
'하늘길’과 '산은 나이도 먹지 않나보다'라는 두 편의 시를 소개함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참 많이도 굽었다
하늘빛 찾아가는 길
순탄대로 곧은 길만은 아니다
첩첩의 장애물 나무들옆
좁은 틈바구니
하늘빛 찾아 이리저리 빠져나가다 보니
참 많이도 굽었다
조금도 부끄러울 것 없다
거룩한 아름다움이다
살아있음이 찬미와 감사다
하늘빛 가득 담은
내 사랑
침묵의 소나무야!”
그때 소나무는 지금도 여전히 수도원 성전 앞 정원에 건재하고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환경중에도 제자리에 믿음의 뿌리 깊이 내리고 하늘빛 희망을 찾아 하늘 사랑 가슴에 가득 품고 꾿꾿이 살아가는 신망애(信望愛) 영적 도반(道伴)들이 곳곳에 있음은 큰 위로와 힘이 됩니다.
“산은 나이도 먹지 않나 보다
아무리
세월 흘러도
봄마다
신록의 생명
가득한 산
꿈꾸는 산
산은 나이도 먹지 않나 보다
세월도 비켜가나 보다
늘 봐도 새롭고 좋은 산이다”
16년 전 써놓은 시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한 내 사랑, 내 도반 불암산입니다.
“불암산이 떠나면 떠났지 난 안 떠난다” 다짐하며 정주의 삶을 늘 새롭게 했던 불암산입니다.
절망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때일수록 흔히 나오는 질문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입니다.
30년 전 1992년 1월 15일,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렸던 왜관 수도원 종신서원식 미사 때 제 강론 제목이자 제 두 번째 졸저의 제목이기도 합니다.
오늘도 여전히 현실성을 지니는 물음이자 오늘 강론 제목입니다.
첫째, “만나라!”입니다.
삶은 만남의 연속이자 만남의 여정입니다.
만남에 따라 내 운명이 결정됩니다.
참 좋은 만남이 참 좋은 삶을 만듭니다.
이런 만남 역시 은총이자 선택입니다.
만남 중의 만남이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참 나를 찾아 참 나를 살기 위해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주님을 만나야 참 나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만나 세례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되지 못했다면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요.
주님을 만났기에 오늘의 내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다시피 광야의 외로움과 고독중에 장인 이트로의 양떼를 치던 모세가 주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끝내 참나도 만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주님이 모세를 찾아 오기전 모세는 분명 주님을 간절히 찾았을 것입니다.
주님을 찾는 간절하고 항구한 갈망이 있을 때 주님은 찾아와 만나 주십니다.
모세는 불타는 떨기나무 가까이에서 주님을 만납니다.
“모세야, 모세야!”
“예, 여기 있습니다.”
“이리 가까이 오지 마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
눈만 열리면 내 삶의 자리 지금 여기가 주님을 만나는 불타는 떨기나무의 자리입니다.
이어 모세는 주님께 소명을 받고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당신 이름을 계시하십니다.
이제 모세는 예전 모세가 아닙니다.
주님을 만남으로 참나를 찾았으니 결정적 운명의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삶은 주님과 만남의 여정입니다.
한 두 번의 만남이 아니라 모세와 주님의 관계처럼 살아 있는 그날까지 우리의 주님과의 우정도 날로 깊어져 가야 합니다.
이래서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가 필수입니다.
아무리 육신은 노쇠해 가도 주님을 찾는 영적 갈망은 날로 커져야 하고 주님과의 영적 우정은 날로 깊어져야 합니다.
둘째. “회개하라!”입니다.
주님과의 만남에 즉시 이어지는 회개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날 때 회개요 겸손이요, 참나의 발견입니다.
마음의 고질적 병인 무지의 치유에 답은 회개뿐입니다.
하느님 안 제자리로 돌아와 제정신으로 제대로 사는 회개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회개입니다.
참 자기를 발견하여 참 나를 살게 하는 회개입니다.
주변에서 보게 되는 많은 불행을 겪는 사람들은 죄가 많아서 그런 일이 생긴 것이 아닙니다.
우리 역시 회개하지 않으면 언제든 겪을 수 있는 불행입니다.
바로 이런 무수한 불행한 사건들 지체없이 회개하라는 회개의 표징들입니다.
주님은 빌라도의 악행과 실로암 탑의 사고를 예로 들면서 우리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
회개하지 못하고 죽는 것보다 큰 불행은 없을 것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가 탈출기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하지 않아 자초했던 불행을 실감나게 묘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 대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으셨습니다.
사실 그들은 광야에서 죽어 널브러졌습니다.
그들은 악을 탐냈던 것처럼, 우리는 악을 탐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들 가운데 어떤 자들이 투덜거리는 것처럼 여러분은 투덜거리지 마십시오.
그들은 파괴자의 손에 죽었습니다."
그대로 오늘 광야 인생 여정중에 있는 우리에게 참 적절한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되는 말씀입니다.
무지의 악을 탐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기후위기를 비롯한 대부분의 불행이 무지의 탐욕에서 기인함을 봅니다.
끊임없는 회개를 통해 원망이나 불평을 하느님 찬미와 감사로 바꾸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살길은 회개 뿐이요 무지의 병과 악에 대한 궁극의 답도 회개뿐입니다.
셋째. “시작하라!”입니다.
회개하라고 연장되는 날들입니다.
살아 있을 때 회개지 죽으면 회개도 없습니다.
살아있을 때 찬미와 감사지 죽으면 찬미도 감사도 없습니다.
그러니 살아있는 동안 늘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새롭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최선을 다하며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의 가르침입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를 베어내자는 포도원 주인에 대한 포도 재배인의 간청입니다.
열매를 맺지 못한 이들은 회개의 열매를 맺지 못한 이들을, 포도원 주인은 하느님을, 포도 재배인은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
주님의 은총에만 맡겨서는 참으로 무책임한 일입니다.
주님의 은총에 응답하여 우리 친히 늘 새롭게 분투의 노력을 다하는 것입니다.
회개와 더불어 늘 내 삶의 나무를 정성껏 가꾸고 돌보는 것입니다.
참으로 회개의 여정에 충실하여 늘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사랑의 책임을 다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회개의 열매, 사랑의 열매입니다.
잘 살다 잘 죽는 것보다 큰 축복은 없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날마다 주님을 만나고 회개하고 늘 새롭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루하루 회개하고 사랑하며 잘 살라 주어지는 선물의 날들입니다.
1787년 4월 11일 모차르트는 이런 글을 남겼다 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사랑은 음악이다.
하느님은 하느님이시다.
그리고 이는 나를 끝없이 행복하게 만든다
숭고한 지성도 환상도 아니다.
그렇다고 이 둘이 합쳐져서 천재를 만들지도 않는다.
사랑! 사랑! 사랑!
이것이 천재의 영혼이다.”
끊임없는 회개의 은총이 겸손과 사랑의 참나를 만들어 줍니다.
회개의 여정은 사랑의 여정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주님과의 우정을 날로 깊게 하시며 참나를 살게 하십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루카 13,3.5)
많은 이들이 비극적으로 목숨을 잃은 일을 알리는 이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재앙을 하느님의 징벌로 여기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어떤 사건으로 고통을 당하는 피해자에게서 '그런 일을 당해 마땅한' 탓을 찾기보다 연민과 애도를 보내기를, 그리고 그 사건을 통해 하느님께서 각자에게 보내시는 메시지를 깨닫기를 바라십니다.
회개는 부르심입니다.
초대입니다.
회개가 비단 희대의 사기꾼과 살인마같은 이들에게 요구되는 거라고 생각한다면 회개의 의미를 너무 편협하게 축소하는 거지요.
회개, 회심은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살펴 '하느님 자녀다움, 그리스도의 신부다움'에서 벗어난 부분을 성찰하고 그 자리에서 방향을 바꾸어 '하느님 자녀다움, 그리스도의 신부다움'을 향해 나아가는 겁니다.
모든 인간은 완벽할 수 없기에 이 '다움'에서 벗어난 부분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답지 못함'에 실망하고 주저앉아 고착되지 않고 다시 방향을 하느님의 사랑에로 향하는 아름다운 신뢰의 여정이 곧 회개, 회심입니다.
제1독서는 이집트 왕자로 지내다가 동포를 돕느라 살인까지 저지르고 타지로 도망가 살던 모세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는 대목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에서 겪는 고난을 보시고 성조들과 맺었던 계약을 기억하신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해 민족적 해방의 역사를 시작하시려는 겁니다.
하느님의 신비스런 현현과 자기에게 내리시는 소명에 두려움을 느끼는 모세에게 하느님께서는 당신 이름을 알려 주시지요.
“나는 있는 나다.”
(탈출 3,14)
신학교에서 철학을 배울 때 "있음(存在)이 선(善)이다!"(Ens est bonum!)란 진술을 듣고 충격적으로 받아들인 적이 있습니다.
좋은 것, 멋진 것을 선으로만 생각했는데 있는 것(존재)이 선이라뇨!
그렇다면 하느님이 '선'이시라면 있는 분이시기 때문이고,'선 자체'이신 분이라면 '있음 자체'라는 뜻이 됩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당신 스스로를 '야훼', 즉 "나는 있는 나다."(탈출 3,14)고 하시는가 봅니다.
이렇듯 모든 살아 있는 사람이나 동물, 식물들은 살아 있기에 선입니다.
그 어떤 사람도 다 선입니다.
살아 있음은 그래서 축복입니다.
계곡 낭떠러지 바위틈에서 자라고 있는 소나무나 야생화가 더 아름답고 귀하듯이, 지금 삶의 조건이 취약한 가운데서도 해맑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더 아름답고 귀합니다.
있음(有)이 선이고 없음(無)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니 그대 있음에 내가 있고, 하느님 계시니 내가 있습니다.
하느님은 모세의 옛 죄나 지금의 상태를 책망하고 꾸짖으시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을 위한 새 계획을 향해 그를 존재적으로 돌려세워 방향을 바꾸어 주십니다.
이렇게 모세는 회개의 순간을 마주합니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루카 13,8)
복음에서는 또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잘라 버리라고 요구하는 포도밭 주인과 한 해만 더 기회를 주길 청하는 포도 재배인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포도밭 주인을 심판자이신 하느님으로, 포도 재배인을 중재자 예수님으로 보는 견해도 가능하겠지만, 오늘 제게는 이 말씀이 다른 각도에서 다가옵니다.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 즉 우리를 위해 '주님께서 친히 회개를, 회심을 하시는구나!'라고 말입니다.
그분께서 그동안 해오시던 재배 방식을 바꾸어 더 아끼고 더 섬세히 돌보시기로 마음을 바꾸시는 겁니다.
무화과나무가 무화과 열매를 맺어 자기다움을 회복하도록, 주님의 많은 사랑과 자비를 체험하고도 이웃과 세상을 향해 작은 열매 하나 제대로 맺지 못하는 돌 같은 우리가 '하느님 자녀다움, 그리스도의 신부다움'을 회복하도록 말입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강한 어조로 우리의 진정한 회개를 촉구합니다.
"서 있다고 생각하는 이는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1코린 10,12)
이만하면 잘 살고 있다고, 내가 지은 죄라면 다 내 주변에서 얼쩡거리며 나를 건드리는 타인들 탓이라고, 아무리 내 속을 뒤져봐도 회개할 게 없다고 생각한다면 이 권고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민족 구원이라는 원대한 꿈을 시작하셨지만, "영적 양식을 먹고 영적 음료"(1코린 10,3.4)까지 마신 그들도 탐욕과 불평을 일삼다가 결국 "광야에서 죽어 널부러졌습니다."(1코린 10,5)
사도는 이를 "본보기, 경고"라고 반복해 이야기하며 우리의 느슨해진 양심을 흔듭니다만, 그 과정에서 가장 아프고 상처받으신 분은 그 모든 일을 사랑으로 계획하시고 끌어가신 하느님이십니다.
사순 제3주일에 우리는 우리의 '다움'을 회복시켜 주시려고 더 큰 수고를 결심하시는 주님을 만납니다.
회개는 우리 각자 알아서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주님의 일이 되었습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회개는 거름을 주었는데도 열매 맺지 못하면 잘라내 버려질까 두려움에 떨며 자기를 뒤지고 난도질하며 추궁하지 않고, 그토록 나를 귀하게 여겨 애지중지 살려내시려는 하느님 사랑을 기억할 때 가능합니다.
사실 과일나무는 심어서 바로 열매를 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수도원 밭에 사과나무 묘목을 심었는데 3년이 지나서야 1-2개 달리기 시작하더니 5년이 되니 좀 달리더라구요.
제대로 달리게 되려면 10년은 되어야 할 것 같더라구요.
오늘 나무 주인도 꽤 성급해 보이는군요.
3년이 지나도 아무 결실 없으니 잘라 버리라구요.
포도 재배인이 옳습니다.
1년만 더 기다리면 그때부터 열리기 시작한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그때도 안 열리면 잘라 버리라고 하는 종의 말은 이미 그럴 리가 없음을 알고 하는 말일 테지요.
뭐든지 다 때가 차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조차도 '때가 차서'야 오게 됩니다.
회개도, 영적인 깨달음도 때가 차야 오게 됩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이제 봄입니다.
올 한 해만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열매 맺어야만 하는 올해입니다.
절박한 마음으로 여러분의 '때'가 충만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명심하십시오.
딱 올 한 해입니다.
더이상 기회가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복음의 종처럼 믿고 확신합니다.
1년 후 벗님 여러분이 소담스런 열매를 맺으리라는 것을, 예수님 친히 여러분을 기르고 가꾸어서 회개의 열매를 맺도록 하시리라는 것을.
오늘 내 삶의 조건이 풍요롭지 못하고 힘들고 고통스러울지라도 이렇게 살아 있음을 경축합시다.
그리고 함께 있어 주는 모든 이들에게도 감사하고 축복합시다.
"하느님, 저에게 많은 은혜를 베풀어주셔서가 아니라 그냥 있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가족, 친지, 친구들에게도 고백합시다.
뭘 잘 해 줘서가 아니라 함께 살아줘서, 함께 있어줘서 진짜 고맙다고...
그래서일까요?
사도 바오로는 오늘 코린토인들에게 이렇게 말하네요.
"그들 가운데 어떤 자들이 투덜거린 것처럼 여러분은 투덜거리지 마십시오."
(1코린 10,10)
그저 살아 있음에 감사드리는 주일 되시길 축원합니다.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의 지구’라는 다큐멘터리를 보았습니다.
생명이 넘쳐나는 우리의 지구는 아름다운 별입니다.
극지방, 열대지방, 사막, 깊은 바다, 얕은 바다, 물이 있는 지구를 보여주었습니다.
다큐멘터리는 지구는 살아있는 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 몸의 한 지체가 아프면 몸이 아픈 것처럼 지구도 어느 한 곳에 문제가 생기면 지구 전체에 영향을 준다고 합니다.
기후의 변화는 생태계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합니다.
아마존의 밀림을 무분별하게 개발하면 그 영향이 아프리카의 사막에도 있다고 합니다.
지구 환경에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인간이라고 합니다.
인간이 오염시킨 강에는 생물이 살기 어려워진다고 합니다.
인간이 남획한 동물은 멸종 위기에 있다고 합니다.
특히 지나친 탄소 배출은 지구 온난화를 가져오고 이는 극심한 가뭄, 강력한 태풍, 커다란 산불로 이어진다고 합니다.
그러나 다큐멘터리는 희망을 보여주었습니다.
인간이 보존하려는 의지가 있으면 생명의 다양성이 지켜진다고 합니다.
멸종 위기에 처한 동물도 늘어난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은 아름답습니다.
그 아름다운 세상을 아름답게 가꾸려는 인간의 노력과 의지가 필요합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전해 주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내 백성이 겪는 고난을 똑똑히 보았고, 작업 감독들 때문에 울부짖는 그들의 소리를 들었다.
정녕 나는 그들의 고통을 알고 있다.
그래서 내가 그들을 이집트인들의 손에서 구하여, 그 땅에서 저 좋고 넓은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데리고 올라가려고 내려왔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겪는 고난을 보았고, 이스라엘 백성의 울부짖음을 들었고, 이스라엘 백성의 고통을 알고 계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인들의 손에서 구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으로 이끌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모세에게 맡겨 주셨습니다.
모세는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10가지 재앙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떠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 주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먹이셨습니다.
바위에 샘을 열어주셔서 이스라엘 백성이 마시도록 하셨습니다.
40년간 광야에서 지내던 이스라엘 백성은 마침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이 기억하는 구원의 역사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이 기억하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구원의 역사와 예수님의 관계를 이야기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느님께서 열어주신 샘에서 물을 마셨듯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구원의 샘물을 마신다고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나라를 선포하셨고,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전하신 복음은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의로움이 드러나는 하느님나라입니다.
하느님나라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 자비를 베푸는 사람, 온유한 사람,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예수님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이 들어간다고 하셨습니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과 표징입니다.
예수님께서 ‘열려라’라고 말씀하시니 듣지 못하는 사람이 들었고,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였고, 보지 못하는 사람이 보았습니다.
이것이 기쁜 소식입니다.
예수님께서 ‘일어나라’라고 말씀하시니 죽은 소녀가 일어났습니다.
죽은 나라자로 무덤에서 나왔습니다.
이것이 기쁜 소식입니다.
복음은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이 세상에서 하느님나라를 체험하게 되고, 죽더라도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이것이 초대교회가 기억하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것이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신앙의 신비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모두가 약속의 땅으로 들어간 것은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았던 사람, 교만했던 사람, 우상을 섬겼던 사람은 광야에서 죽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충실하게 따라야 한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전하셨던 복음을 실천해야 한다고 합니다.
겸손해야 한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고 하십니다.
그것은 ‘회개’입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오면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사순시기는 은혜로운 회개의 때입니다.
회개한 것을 삶으로 실천하는 한 주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저희가 단식과 기도와 자선으로 죄를 씻게 하셨으니 진심으로 뉘우치는 저희를 굽어보시고 죄에 짓눌려 있는 저희를 언제나 자비로이 일으켜 주소서.
주님은 자비롭고 너그러우시며, 분노에는 더디시나 자애는 넘치시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어느 책에서 이런 구절을 읽었습니다.
“의인은 사람의 잘못을 비난할 때 고통을 느끼지만, 악한 사람은 그것을 즐긴다.”
이 글을 읽으며 스스로 생각해보십시오.
‘나는 의로운 사람인가? 아니면 악한 사람인가?’
‘뒷담화만 하지 않아도 성인이 된다’라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뒷담화는 주로 사람의 잘못이 그 내용을 차지합니다.
따라서 누군가를 판단하고 단죄하는 행동은 결코 의롭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죄는 점점 그 무게를 더해 간다는 말이 있듯이, 뒷담화가 습관처럼 내 안에 자리 잡게 됩니다.
즉 뒷담화를 즐기는 악한 사람이 되어갈 것입니다.
심심풀이로 판단하고, 때로는 그냥 지고 싶지 않아서 판단하고 단죄합니다.
죄의 무게는 점점 무거워질 것입니다.
이런 잘못된 판단에서 나오는 뒷담화는 어제 오늘날만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마찬가지로 이런 뒷담화로 죄를 더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엄청난 사건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총독 빌라도가 성전에서 제물을 바치고 있는 갈릴래아 사람들을 학살해서 제단이 피로 물든 끔찍한 사건이었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실로암 탑을 공사하는데 탑이 무너져서 18명이 깔려 죽은 사건이었습니다.
이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안타까운 죽음에 함께 하면서 남아있는 가족들에게 위로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당시의 사람들은 이 죽음에 대해 이상한 생각을 했습니다.
죽은 사람들이 안 되었다고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죄 때문에 생긴 불행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불행이 죄의 값으로 받는 하느님의 벌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이어 나오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통해 전해주십니다.
주인이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를 베어버릴 의사를 표명했지만, 포도 재배원은 일 년의 시간을 달라고 요청하지요.
이처럼 예수님 덕분에 우리는 회개의 시간 여유를 부여받았습니다.
내가 의로워서 시간을 부여받은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남의 죄를 탓하기보다는 먼저 자기 죄에 대한 참회를 통해 회개의 길로 들어서야 합니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루카 6,41)라는 주님의 말씀을 명심하며 의로운 사람이 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해야 할 것입니다.
곧바로 회개해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 인천교구 갑곶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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