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행히 우리나라는 백 년전 경허성우대선사께서
출현허셔가지고
일대강사로서 생사에 무상함을 철저히 깨달으시고,
식음을 전폐하고 송곳으로 무릎을 찌르면서 용맹정진을 하신 결과 확철대오를 해가지고 한국에 활구참선법을
재 천양을 해가지고,
그 밑에 만공(滿空), 혜월(慧月), 혜봉(慧峰),
그밖에 많은 선지식들이 출현을 해가지고, 또 그 밑에
많은 훌륭한 눈 밝은 선지식이 나와가지고 오늘에
우리 귀로 그러헌 활구참선법을 듣게 된 것입니다.
활구참선법과 의리선 어디에 분간이 있느냐하면,
이론으로 따지고 분별심으로 따져서 이리저리 따져가지고 알아들어가는 참선, 이것이 바로 의리선이요
죽은 참선, 사구선(死句禪)이라 하는 것입니다.
활구선(活句禪)은
이론을 사용허지 아니하고 분별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심지어 경전에 있는 말씀, 부처님께서 설하신 경전에
있는 말씀까지도 이 참선을 허는 데에 동원이 되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이리 따지고 차츰차츰 따져서 더듬어 들어가는 거,
이러헌 참선은 아무리 따져서 그럴싸한 결론을 얻었다하더라도 마침내 그것은 분별심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라
분별심이 벗어... 남아있는 동안에는
그것은 중생심이요, 생사심이요,
따라서 그것은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아는 것은 어디까지나 아는 것이지 그것은 깨달음이
아닌 것입니다.
깨달음은 분별심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분별을 버리는 곳에서 깨달음에는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분별심을 어떻게 허면 버리느냐?
화두 공안 ‘공안’이라는 것은 어찌 보면 일종에 수수께끼 비슷헌 것이지만 세상에 수수께끼라 하는 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지식과 상식을 총동원해가지고 이렇게도 따져보고 저렇게도 맞춰보고 해가지고
‘아, 이것이로구나.’ 이렇게 알아맞힐 수 있는 것은 이것은
수수께낍니다.
그러나 이 공안은, 화두는,
그러헌 분별심으로 알아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못 무조건하고, 거두절미하고 ‘이 뭣고?’
부모미생전본래면목(父母未生前本來面目)이 무엇인고?’ ‘어째서 정전백수자(庭前柏樹子)라 했는고?’ ‘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다못 그렇게만 의심을 해가는 것입니다.
무슨 조건도 필요 없고 이러쿵저러쿵 전혀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불법에 경전을 읽은 사람이건 안 읽은 사람이건,
유식헌 사람이건 무식헌 사람이건,
그저 바보가 되아가지고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무자화두를 하는 사람은 ‘어째서 무라 했는고?
‘이뭣고’를 하는 분은 ‘이 뭣고?’
다못 천 번이고 만 번이고 그렇게 의심을 일으켜서
그 일으켜진 의심을 관조해갈 뿐인 것입니다
첫댓글 일체 중생 참 나를 깨달라 생사의 윤회에서 벗어 나기를 발원합니다_()_
나무 관세음보살 성불하십시요.
고맙습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