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지도자에서 친일자본가까지 그 평은 너무나 대조적이고 다양했죠. 정주영회장이 한국경제건설의 아버지에서 노동계에서 일부과격파들에겐 노동자 탄압의 원흉이라는 평가처럼...
인촌의 친일논쟁의 종지부를 찍은것은 그 누구도 아닌 일본에 의해서 결론이 났답니다. 90년대 초반에 일본에서 비밀문서가 공개되면서 일제시대의 당시 조선총독부산하 경시청비밀자료 중 일제의 주요감시대상 목록이 공개되면서 밝혀지게 된 것이랍니다. 당시 일제는 조선인들중 주요감시대상을 4등급으로 분류했는데 1등급은 독립군과 그 친족 등 반란세력으로 정하고 2등급은 최대의 요주의 감시대상으로서 독립군에 대한 간접지원이 의심되고 언제라도 유사시에 일본제국에게 적대적인 인물들이었죠. 3등급은 적대세력, 4등급은 의심이가는 정도 등의 분류였습니다.
그 감시대상 등급 중 2등급 요주의 감시대상에 인촌이 올라있었던 겁니다. 친일파가 일제에 반란을 꾀하는 요주의 감시대상? 웃기는 말이 되어 버리죠? 그 이후로 학계에선 인촌의 친일논쟁은 종지부를 찍은 거랍니다. 이젠 누구도 거기에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이 없죠.
왜 총들고 만주로 가지 않았냐라는 말을 한다면 할말이 없죠. 하지만 민족의 독립이 독립군만에 의해서 쟁취되는게 아니랍니다. 독립군이 만주에서 목숨을 받쳐 싸울수 있는 뒷 받침은 당시 민중의 뜻이었던 군자금이 없었다면 더욱 어려웠겠죠.
또한 인촌이 자신의 안량한 안신을 위해서 친일행각을 벌였다면 왜 돈안되는 교육사업을 했겠습니까? 당시 인촌이 인수한 보성전문은 우리민족의 유일한 정통 교육기관이었습니다. 아시다싶이 대한제국의 내장원경이었던 이용익선생이 교육구국의 일념으로 부국자강을 위해 이땅에 최초로 지금의 법대와 경영대학인 법학과와 이재학과를 만들면서 보성전문을 설립한 것입니다. 인촌이 보성전문을 인수 할 당시 보성전문은 독립운동가이자 민족종교 지도자였던 천도교 교령 손병희선생께서 운영하고 계셨죠. 일제의 탄압으로 재정난에 허덕이고 있을때 당시 조선인 최대의 민족자본가였던 인촌이 인수하고 자신의 모든 사재를 털어 민족의 자존심인 보성전문을 반석위에 세웠고(지금 본관이 그때 세운거랍니다.) 지금의 고려대학교가 된 것입니다.
보성전문의 역사적 의의는 실로 엄청나죠. 만약 일제의 탄압으로 인해 결국 보성전문이 없어졌다면 그야말로 일제시대에서의 우리민족의 교육의 대가 끈어지는 것이죠. 근대화의 교육에 있어서 우리 자신들의 자주적인 교육은 없어지고 미션계 외래 교육과 일제의 신민교육만이 남는 그런 일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알았기에 인촌이 자신의 모든것을 바쳐 보성전문을 살린 것 이었죠.
일제 패망 직전인 일제말기 탄압은 극에 달하고 조선총독부는 동아일보등 당시 우리민족계열 신문 들은 모두폐간시키고 매일신보라는 일제의 기관지만을 남겨놓고선
****학군지원병 모집을 위해 당시 민중들에 의해 존경을 받았던 인사들의 이름을 도용하여 학도병지원선동 글을 날조해서 실었죠.*****
이 때 일제 기관지에 실렸던 그 "학도병지원", "일본찬양" 이란 글 들이 나중에 일부 주장자들에 의해 친일로 몰린 이유였답니다.
해방 후 빨갱이 박헌영조차 인공내각에 인촌을 문교부장관으로 추대할 정도로 젊은 청년들이 존경하던 인촌이었기에 일본은 유독 인촌의 이름을 여러차례 도용하였습니다.
총을 들고 만주로 가는 것만이 민족을 위하는 것 일까요? 일제말기 탄압이 극에 달하던 시절 분루를 삼키면서 민족교육을 지켜내고 독립의 밑거름이 되었던 것은 의미가 없는 것일까요?
장정이란 책을 읽어보셨습니까? 김준엽 전 고대총장님께서 일제시절 만주에서 독립군으로서 독립운동과 이후의 현대사를 쓰신 책입니다.(최근에 5권이 완간되었죠) 이시대의 마지막 진정한 선비라고 일컬어지는 독립군이자 전 고대총장이셨던 올곧은 그 분이 인촌이 친일파였다면 고대에 남아 있었겠습니까?
세상에는 함부로 말할 수 없는 것이 많답니다.
사람마다 어떤 대상에 대한 평가는 다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확한 역사적 사실과 근거에 의한 판단이어야지 떠도는 말을 진실처럼 여긴다면 지성인으로서의 자세는 아닌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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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치욕적인 날이 어디 있을까?
1919년 1월부터 宋鎭禹,玄相允先生등과 中央高普 숙직실을
본거로 獨立運動을 펼방책을 熟議해서,
3.1운동의 불을 당겼고,
1950년에 제2代副統領에 당선되셨으며,
이승만독재를 반대하여,부통령직도 미련없이버리셨다.
親日派가
어떻게 政府에서 國民葬으로 장례를 격상 시켜주었으며,
독립운동하신 애국지사에만 수여되는 建國勳章무궁화章이
어떻게? 인촌선생에게 추서되였겠나?
해방맞아 극에달한 反日感情이 고조된 그 시점에서
선생이 親日派였다면 현명한 우리국민들이,
副統領으로 뽑았을까?
親日派죽음에
온나라 국민들이 왜? 눈물바다로 슬픔을 함께 하였을까?
그날 국민장의 울고불고하는 모습들이 走馬燈 같건만..
선생님을 親日派로 몰아세우다니?
돌아가신 인촌께서
억울한 이소리를 들으셨다면,
어떻게 생각하셨겟나?
中央高普서부터 普成專門, 高麗大學출신에
이르기까지 그많은 弟子들 모두들 어디갔나?
모두가 복지부동하고 있으니?
선생님이 억울하게親日로 몰린대도
누구한사람 나서 따져줄사람도 겨우다섯손가락 안밖이고,
기껏따진사람도 人生八旬에 소석李哲承 한사람이니
참으로 답답하구려!
집에서 기르던개도 밖에나가 얻어맞고,
들어오면 기분이 하루종일 나쁘거늘 하물며
故人이 되셔 말못한다해서 선생님을 親日派로 모는데도,
그 많은 안암골 호랑이들 그기백과 젊음은 어듸가고,
불쌍한 종이호랑이가 되였는가?
民族高大가 4.19혁명때만 하여도
선배들의 올바른 國家觀과 正義感과 覇氣로 똘똘뭉쳤건만
주사파다, 전대협시대부터
尊敬하는 인물도, 先後輩도 모르는 앞뒤없는 電車같이
高麗大學 校庭의 仁村先生 銅像에
밧줄을 목에걸어 撤去一步前에 일어났던 사건주인공등등..
싸가지없는 놈들이 국회의원에 당선되여 ~
眼下無人에다 左衝右突에 天方地軸이니
民族高大가 親日高大로 變身되였으니?
嗚呼! 痛哉라 !
이일을 어찌할꼬?
ㅡ 끝 ㅡ
추신 :
당시 인촌선생님께서
친일 인사로 오해받은 경위를 설명하자면
일본제국주의가 패망직전에
일제말기의 타압은 극에 달했고,
日帝의 기관지신문 매일신문만을 남겨놓고,
東亞,朝鮮등..당시 우리민족계열 신문들은 모두 폐간시키고,
日本學軍募集을 위해
당시民衆들에 의해 尊敬받았던 이름을 盜用하여
學徒兵 自願글을 捺造(날조)하여 실었조
그런와중에 일제기관지에 실렸던 "學徒兵募集"
"親日讚楊"이란글들이 나중에 억울하게도
親日派로 몰린 理由였습니다.
그당시 나라를 위한길에는
총을 들고 만주로가는것도 민족을 위한길이요,
국내에 남아 일제말기 탄압을 무릅쓰며,분루를삼키면서도,
민족후진교육을 지켜내고, 독립의 밑거름이 되였던
인재양성의 길은 더험한 가시밭길이 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와서 이게뭡니까?
끝으로 仁村의 親日論爭의 終止符를 찍은
결정적인 단서는 왜놈의 비밀문서에 의해서 심판이났습니다.
발견된 일본비밀문서에 의하면
당시 일본제국주의는 조선인들중 중요감시 대상을
4등급으로 분류했는데
1등급은 독립군과 그친족반란세력
2등급은 최대의 감시대상으로서,
독립군에 대한 간접지원이 의심되고, 언제라도 유사시에
일본제국에게 적대적인 인물이엿고,
3등급은 적대세력,4등급은 의심이 가는부류등이 었다.
인촌김성수선생님은 이상4등급중
2등급 감시요시찰 대상에 올라 있었든 것입니다.
이 사실이 알려진 이후부터
學界에선 仁村의 親日派論爭이 막을 닿게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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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민족주의자 김성수 (김중순 著 일조각 刊) 에서 발췌
190페이지
실제로 많은 학생들이 학도병으로 동원되어 전선에 보내지고 있을 때 총독은
한국인 저명인사들에게 학도병 동원을 촉구하는 논설을 매일 신보에 쓰도록
했다.......
명단에는 김성수, 송진우, 여운형, 안재홍 이광수, 장덕수, 유진오등이 있었다.
유진오는 김성수가 그런 글을 쓰지 않을 것 같다고 하자 김병규는 자신이 대
신해서 글을 쓰겠다고 했다...........................
유진오는 "내가 김성수의 이름으로 게재된 글의 저자를 밝히는 이유는 그 글
로 인하여 해방후 인촌이 부당한 비판과 오해를 받았기 때문이다"라고 밝히
고 있다. ....
192페이지
학도병 출신의 보전 학생들은 신문에 어떻게 쓰여졌건 그것을 실제 김성수가
생각했던 바가 아니라고 주장 한다...........................................
"왜 내가 학도병 동원에 간여 하겠는가? 나는 한국 젊은이들의 교육에 헌신
하였지 그들을 동원하도록 주선한 것이 아니다" 김성수는 덧붙여 다음과 같
이 말했다고 한다, 일본이 그토록 적극적으로 학생을 동원하는 이유는 그들이
전쟁에서 거의 패배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전쟁을 통해 한국의 지식인들을
제거하고자 하는 것이다. 내 말을 이해 하겠는가?"
이철승은 그 말을 가능하다면 징집문제를 기피해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 했다
고 한다. 일부 보전 교수들 역시 학생들에게 징집을 기피하라고 권고 하였다.
일례로 보전교수였던 안호상은 입원중에 찾아온 이철승에게 "일본의 패망은
분명하니 징집을 기피하라"고 귀엣말을 했다고 한다.
동아일보에 실린 이철승의 글은 김성수가 그에게 학도병 반대 지하운동을 조
직하도록 지시 했다고 한다................... 김성수는 전쟁은 곧 끝날것이고 그에
따라 매일 신보에 실린 그의 글을 포함하여 모든 것들이 잊혀질 것이라고 생
각하였을지도 모른다.
일본당국이 그를 강제로 참여하게 했다......"본인은 대중앞에서 강연을 잘할 모
르기 때문에 다음연사의 강연을 경청해 주시고 그의 강연내용이 제생각과 같
다고 생각해 주십시오" 라고 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