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십년 지기 친구였던 너를 떠나보내며
이강촌
그를 떠나보낼 생각을 하게 된 두어 달 전부터 나는 그를 다듬기 시작했다. 분무를 뿌려 유리창을 닦고 몸둥아리에 험집이 없는가 살피고 그의 살갛을 만지고 또 어루만지면서 마지막으로 보내야하는 그에게 ‘늘 친구가 되어주어서 고마웠다’라는 마음을 전했다. 그가 떠나는 날 나는 새 주인에게 전자키 두개를 건네주면서 ‘내가 주는 선물이 작게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라는 말을 하고 돌아서는 가슴이 아렸다. 주차장 큰 기둥 뒤에 숨어서 그가 건강한 엔진소리를 남기고 떠나는 걸 보고서야 마음을 쓸어내렸다. 사람이나 애장품이나 애완하던 동물을 떠나보내는 마음, 떠나보내야 하는 결심을 하기까지는 누구나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이십대 후반의 푸른 나이에 나는 운전 면허증을 만들었고 처음 만나게 된 친구가 ‘브리샤’라는 친구였다.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이라 통행금지 해제시간인 새벽 네 시만 되면 집에서 살며시 빠져나와 조심스레 자동차를 몰고 대구에서 가장 혼잡한 동성로를 호기롭게 달렸다. 1970년대 그때만 해도 여자가 차를 몰고 길에서 어정거리면 택시운전사들에게 욕을 먹기 십상인지라 터엉 비어있는 새벽 도로에 나오면 내 세상인 듯싶었다.
그렇게 내 승용차 사랑은 시작되었고 차를 몇 번 바꾸긴 했지만 지금까지 자동차는 그 무엇보다 그 누구보다 친절한 나의 친구였다. 명품 옷도 보석도 화장품도 내겐 필요 없었다. 오직 전자키 하나로 속내를 드러내주고 내가 원하는 데로 움직여주는 그만 있으면 아프고 가슴 답답하던 삶들에도 위로가 되도 충전도 되었다.
속을 털어 놓을 친구가 필요할 때도 사람인 친구를 찾는 것보다는 시간 맞추기나 속내를 드러내는데도 그가 편했다. 그에게 몸을 싣고 액셀을 밟으면 속이 뻥 뚫렸고 그 시대의 산골이나 시골길은 대부분 비포장이었는데 그는 덜컹거리는 소리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기는 했지만 결코 갈 길을 마다하지는 않았다.
어느 가을날이었다. 그 때쯤이면 단풍이 기막히게 고울 안동 지래 마을이 생각나서 나섰다가 비포장 길에 지친 나머지 당일 돌아오지 못하게 되었다. 할 수 없이 압싯골 어느 농가에 들러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다. 그때 칠십대로 보이던 노부부는 비어있던 방에 군불을 지피며 썰렁한 늦가을의 아랫목을 살펴 주었고 아침밥상에는 군불아궁이 숯불에서 구운 귀한 안동 고등어가 올려져있었다.
돌아보면 오십 여 년 동안 그는 나에게 무한하게 넓은 세상을 보여 주었고 가슴 허허로울 때 바르게 갈 길을 일러주고 들 뜬 꿈을 고이 잠재워주기도 했다. 꿈도 많고 호기심도 많던 푸른 시절이라 대한민국 한반도 그 어디에라도 이정표만 믿으면 된다고 생각하고 나섰다가 고생한 적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남해 땅끝 마을을 가다가 길을 잘못 들어 헛길을 돌고 돌기는 했지만 끝내는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남의 나라에 이민 가서 살던 뉴질랜드에서의 이민생활 수년 동안은 지금 생각하면 아찔한 적도 있었다. 빨리 눈에 들어오지 않는 영어로 길게 적혀진 이정표만 보며 태평양 바다를 끼고 빤하게 나 있는 길을 달리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꽤나 멀리 가 있었고 날은 어두워지고 있었다. 가로등도 없는 세상은 사방이 새까맣기만 했는데 거기다가 비는 또 폭포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잃고 방향감각까지 잃어버려 낭패한 마음으로 두려워지기까지 했던 나는 행여나 있을 주유소를 찾았다. 밤이 깊어지진 않았으니 그래도 불을 밝히고 있는 주유소는 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 때 마침 내 자동차는 경찰차의 눈에 띄었고 길눈 어두운 동양 여인이 당황스러워하며 내미는 주소를 받아 든 경찰은 따뜻한 손 내밀며 앞장서서 길을 에스코트해 주었다. 친절하고 따뜻했던 영국 사람인 경찰은 내가 뉴질랜드를 더 사랑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고 당시에 교민지에 연재하고 있던 칼럼을 쓰는데 또 한 페이지의 주제를 만들어 주었었다. 지금도 생각하면 위험하고 아찔한 날이었지만 ‘참 멋있는 경찰이 있는 나라’라는 추억이 남아 있다.
누구보다 그 무엇보다 나를 이해해주고 위로해주던 친구, 이제 그를 보내주어야 할 때가 왔음에 미련을 거두고 아쉽게 보내고 있는 내게 아들형제가 내 등을 쓰담쓰담했다. 지난 가을에 경노 운전면허 교육을 받고 면허증을 갱신하는 것 보면서 아슬아슬한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던 아들형제, 오십을 살아 온 아들들 평생에 승용차를 타고 다닌 엄마만 보았으니 그만두시라는 권고도 조심스러워 못하고 있던 그들은 자신들의 마음도 쓰담쓰담 했을 것이다.
‘어머니^^이제 저희가 어머니의 발통이 되고 이정표가 되어 드릴께요’
지금에 사 길게 지난날을 돌아본다. 승용차를 몰고 다니기엔 이정표도 비포장의 길도 만만찮고 버거웠던 시절, 그 길에 선명하게 적혀있지 않아 때로는 방황했으나 바르다고 생각되던 내 인생의 이정표를 얹어보며 아린 가슴을 쓸어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