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의 기준 / 박남희 (시인, 문학평론가)
누군가 나에게, 당신은 좋은 시를 쓰고 싶은가 아니면 쓰고 싶은 시를 쓰고 싶은가 물으면 나는 무어라고 대답을 할까? 좋은 시라는 말에는 객관적인 기준이 많이 적용되고, 쓰고 싶은 시라는 말에는 보다 주관적인 기준이 작용하고 있으므로 이 두 가지 명제를 뚜렷이 구분해서 한쪽만 선택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까지 어떤 시를 쓰려고 노력했을까를 생각해보면 부단히 좋은 시를 쓰려고 노력했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그동안 내가 쓴 시들은 내가 쓰고 싶은 시가 아니라 타인에게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한 시일까를 생각해보면, 언뜻 수긍하기 어렵다.
이처럼 좋은 시와 쓰고 싶은 시의 기준을 나누는 변별점을 찾기란 쉽지 않다. 만약에 내가 ‘좋은 시’를 쓰고 싶다라고 한다면, 여기서 좋은 시는 동시에 ‘쓰고 싶은 시’도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좋은 시와 쓰고 싶은 시의 변별점을 찾는 일은 무의미한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199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폐차장 근처」라는 시로 등단을 했는데, 사실 이 시는 내가 신춘문예에 당선하려고 작정하고 쓴 시가 아니라 마흔이 넘은 나이에 등단도 못하고 그동안 해 놓은 것이 아무 것도 없는 나 자신이 마치 폐차처럼 느껴져서, 어느 쓸쓸한 가을 날 외롭고 쓸쓸한 기분으로 그 때의 내 마음을 즉석에서 표현한 것이다. 나는 그 당시 서울신문에 9편을 투고 했는데, 내가 신춘문예용(?)으로 작정하고 쓴 시를 맨 앞에 놓고 당선작이 된 시는 맨 마지막에 끼워 넣은 것이었는데, 그 마지막 시가 덜컥 당선이 된 것이다. 나는 어리둥절해서 나의 등단작을 다시 읽으면서 내가 그동안 모르고 있었던, 그 시가 당선이 된 이유를 어렴풋이 깨닫게 되었다. 당시에 나는 그 시가 당선될 만한 좋은 시라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는데 심사위원들은 그 시를 좋은 시로 뽑은 것이다.
이런 황당한 경험을 하면서 나는 좋은 시의 기준이 객관적이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어쩌면 우리가 각자 가지고 있는 음식의 취향만큼 다양한 것인지도 모른다. 가령 우리 문단에서 좋은 시를 쓴 시인에게 주는 문학상만 하더라도 선정 기준과 취향이 너무나 달라서 그 상의 정체성마저 모호해질 때가 많다. 어떤 상의 권위는 그 상을 선정하는 심사위원의 수준이나 권위와 무관하지 않고, 그 상이 세계적으로, 또는 국내에서 얼마나 전통과 귄위가 있는 상인지, 그동안 그 상을 누가 받았는지, 그 상의 심사과정이 얼마나 공평하고 객관적인 것인지, 그 상의 상금이 얼마인지 등, 다양한 지표를 통해 그 상의 위상이 결정된다.
2024년은 그동안의 우리 문학이 드디어 세계적으로 그 위상을 인정받은 해라는 점에서, 새로운 가능성과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해였다. 더욱이 노벨문학상을 받은 한강의 소설이 시적인 문체라는 강점을 가지고 있고, 한강 작가가 소설가이면서 동시에 시인이라는 점에서, 시를 쓰는 우리도 자긍심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은 한강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어떤 마음으로 썼을까를 짐작해보면, 아마도 노벨문학상을 받을 만한 좋은 작품을 쓰려고 작정을 하고 글을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그가 쓴 소설들이 5.18이나 4.3 사건 등 우리 역사의 뼈아픈 통점을 건드린 것들이고, 그가 소설을 쓰면서 동시에 그 시대를 온몸으로 앓으면서 고통 속에서 글을 썼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런 한강 작가의 작가의식은 그동안 수많은 문학상의 이력을 훈장처럼 달고, 그런 문학상을 통해 자신의 높아진 듯한 위상에 자부심을 갖고 싶어 하던, 우리 같은 속물들에게 스스로의 부끄러운 모습을 돌아보게 하는 거울이 되어주었다.
매년 1월 1일이면 우리나라에만 있다는 신춘문예 당선작들이 일제히 쏟아져 나와 문청들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나 역시 각 신문사에서 발표한 당선작들을 개인의 사이버 공간에 정리해 놓고 꼼꼼히 읽으면서 그 해 당선작들의 새로운 경향을 파악하고, 그 중 특색 있는 당선작들을 선정해서 꼼꼼히 분석해보곤 한다. 그러면서 내가 매년 느끼게 되는 것은 당선작들이 대부분 기존의 당선작들이 지니고 있는 강점과 경향에서 그게 벗어나 있지 않다는 점이다. 기존 당선작들이 지니고 있는 강점을 주관적으로 요약해보면, 현실에 뿌리를 내리고 있어서 허황되지 않으면서, 어법이나 문체가 낯설면서 새롭고, 이에 걸 맞는 비유와 시적 화두와 상상력을 통해 자신만의 새로운 시적 공간을 창출해내는 시쯤 될 것이다. 그런데 매년 공통적으로 느끼게 되는 것은 신춘문예 선정 기준이 심사위원마다 다르다는 점이다. 그리고 신춘문예 당선 시를 읽고 우수하다고 느끼는 시의 기준도 독자마다 다르다. 그러므로 문청들이 매년 새롭게 당선되는 신춘 시를 읽으면서, 앞으로 자신이 써야 할 시에 대해 혼란을 느끼게 되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글을 쓰는 모든 시인이나 작가는 공통적으로 좋은 글을 쓰려는 마음가짐이나 욕망을 갖고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좋은 시를 정의하는 기준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어서 일정한 시행착오나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글을 쓰는 이들은 자신만의 글쓰기에 대한 믿음과 인내가 필요하다. 확실한 것은 문학상이 좋은 글의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 없고, 유명한 학자나 평론가의 평가도 좋은 시의 절대적인 기준을 담보해주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좋은 시를 쓰려는 강박관념을 버리고 평생에 걸쳐서 자신만의 성향과 개성을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좋은 시를 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나는 언젠가 좋은 시를 생각하다가 윤석중 시인이 작사한 동요 ‘옹달샘’을 떠올린 적이 있다. “깊은 산 속 옹달샘 누가 와서 먹나요 새벽에 토끼가 눈 비비고 일어나 세수하러 왔다가 물만 먹고 가지요 맑고 맑은 옹달샘 누가 와서 먹나요 달밤에 노루가 숨바꼭질 하다가 목마르면 달려와 얼른 먹고 가지요”라는 가사 속의 옹달샘을 시로 비유하자면 그것은 숲속의 토끼나 노루가 가장 읽고 싶어 하는 좋은 시일 것이다. 하지만 깊은 산속에서 옹달샘을 발견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옹달샘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나 자신이 토끼나 노루가 되어야 한다. 즉 나 자신을 변화시키지 않고는 좋은 시를 쓸 수 없다. 그러므로 시인은 자신을 변화시키기 위해 시의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곳에서는 문학상이나 문학을 통해 얻고 싶은 돈이나 명예는 한낱 돌덩이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 계간 <시결> 2025년 봄호 ---------------------------
* 박남희 시인(문학평론가) 1956년 경기 고양 출생. 숭실대 국문과 및 고려대 대학원 국문과 석/박사과정 졸업 1996년 〈경인일보〉, 199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 『폐차장 근처』 『이불 속의 쥐』 『고장난 아침』 『아득한 사랑의 거리였을까』 『어쩌다 시간여행』 평론집 『존재와 거울의 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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