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춘기의 방황을 끝내고 지식의 상아탑이라는 곳의 문턱을 간신히 넘은 나는 세상이 시시해 보였다. 위와 간이 찢어져라 술을 마셔대던 나는 언제부턴가 이유 없는 복통을 앓기 시작했다. ‘술을 줄이라’는 의사의 지시도 따라봤지만 증상은 호전되지 않았다. 몇 군데 병원을 찾아다녔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용하다는 한의원까지 이르게 됐다. 칠이 다 벗겨진 간판하며 녹슨 문고리까지 ‘오히려 병을 옮아오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원장은 또 얼마나 해괴한지 모르겠다. 테이프로 칭칭 감은 안경하며 다 해어진 의사 가운까지 보니 “다음에 올게요”라는 말이 절로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그는 내 배를 여기저기 쿡쿡 찔러대더니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원인이 뭔가요?” 기대도 하지 않고 그에게 물었다. “속이 많이 상했어요. 이 약을 아침저녁으로 공복에 복용하세요”라며 그는 고약한 냄새가 나는 환약을 건넸다. 의심이 앞섰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결과는 의외였다. 그 병원을 다녀온 뒤 사흘이 지나자 복통이 사라진 것이다. 나는 이 얘기를 인터넷에 올렸다. 다음날 게시판의 글을 확인한 나는 깜짝 놀랐다. “냄새나는 염소똥 같은 약 받으셨죠? 거긴 언제나 그 약만 줘요.” 아연실색한 나의 눈을 사로잡는 한 문장이 있었다. “그 한의원 영험한지는 모르겠지만 ‘플라세보 효과’ 하나는 끝내주네요.” “플라세보? 이게 도대체 뭐지?”
“플라세보? 이게 도대체 뭐지?”
1 플라세보는 환자를 위한 치료약?
‘플라세(시)보’라는 단어의 어원은 라틴어로 ‘그렇게 될 것이다’라는 뜻이다. 지금은 ‘위약僞藥’, 즉 ‘약효가 없는 가짜약’이라는 뜻으로 더 많이 쓰인다. 약효도 없는 약으로 어떻게 환자를 치료하냐고? 말도 안 될 것 같지만 사실이다. 통계가 이를 증명한다. 제약업계에는 위약을 복용하고도 병의 증상이 호전되었다는 보고가 무수히 많다. 이런 위약 복용이 실제 약보다도 더 큰 효과를 보였다는 결과도 있다. 2008년 미국 시카고 대학교 프리처 의학원은 시카고 지역에 사는 231명의 의사를 조사해 <일반 내과 의학 저널>에 발표했다. 그 결과는 놀라웠다. 무려 45%의 의사들이 환자들에게 플라세보를 처방한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현재 플라세보에 관해 이루어진 연구는 극히 드물다. 그렇기 때문에 최근 <영국 의학 저널>이 전 세계 679명의 내과의사와 류머티즘 전문의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는 더욱 주목을 받고 있다. 영국, 뉴질랜드와 이스라엘, 그리고 덴마크와 스웨덴에서는 플라세보가 일상적으로 처방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응답자 중 18%는 환자를 안심시키기 위해, 15%는 환자의 무리한 약물치료 요구 때문이라고 말했으며 6%는 실제로 증상이 완화되길 바라서, 또 다른 6%는 환자가 계속 불평하는 게 듣기 싫어서 플라세보를 처방했다고 밝혔다. 환자의 치료를 위한 것은 단지 6%뿐이라는 데 주목하라. 내 절친한 의사 친구의 말도 이런 사실을 뒷받침한다. “사실 환자들 중에는 별다른 처방이 필요 없는데도 약을 지어주지 않으면 한발짝도 움직이지 않으려는 환자들이 있어. 그들에게는 플라세보만이 유일한 해결책이지.”
그렇다면 플라세보를 금지시켜야 되는 것 아니냐고? 환자를 조롱하는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의사들조차 “플라세보를 처방하는 다른 의사에게 진료 받기를 권유받는다면 어쩌겠는가?”라고 묻자 대다수의 응답이 “다른 의사를 찾겠다”고 대답했을 정도니 말이다.
2 과도한 항생제 처방이 문제
2006년, 미국 의학 협회의 윤리 위원회는 임상실험에서의 플라세보에 관한 첫번째 보고서를 발간했다. 윤리 위원회는 플라세보에 관해 부정적인 견해를 제시했다. “환자에게 사전에 아무런 언급 없이 플라세보를 처방하는 것은 신뢰를 떨어지게 해 환자와 의사 관계를 손상시키며 결국 의학적으로 피해를 받는 환자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이 보고서의 주된 골자다. 미국 의학 협회가 언급한 ‘의학적 피해’에 대해 좀더 구체적으로 알아보자. 환자가 머리가 아플 경우 의사는 여러 가지 진찰을 해보지만 결정적인 이유를 찾아낼 수 없어 “이 약이 머리 아픈 데는 효과가 좋습니다”라며 플라세보를 처방한다. 만약 의사나 환자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증상이 있다면 어떻게 될까? 환자는 “이제 머리가 아프지 않을 거야”라며 약을 복용한다. 비록 플라세보가 두통에는 심리적이든 다른 어떤 이유로든 간에 효과를 발휘할지 모른다. 하지만 발견되지 않은 증상은 그러는 사이에 더 악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플라세보의 부정적인 효과는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놀라운 사실은 의사들이 아무런 거리낌 없이 비타민이나 항생제 등을 플라세보로 사용한다는 대답이다. 미국 시카고 대학교의 연구에서 응답자의 3분의 1 가량이 환자의 증상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도 항생제, 속칭 ‘마이신’이라고 불리는 약을 처방한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 매사추세츠 종합병원은 미국 본토에서 호흡기 질환으로 응급실에 실려 오는 환자들의 46%가 항생제 처방을 받는다고 밝혔다. 항생제 처방이 뭐 큰일이냐고? 이 문제는 단순히 ‘돈 낭비’ 문제가 아니다. 미국 질병 통제와 예방센터는 이런 과도한 항생제 처방 때문에 ‘슈퍼세균’이 생긴다고 주장한다. 어떤 약을 써도 효과가 없고 한 번 걸렸다 하면 치명적인, 그런 세균 말이다. 이런 과도한 항생제 처방을 두고 100% 의사의 잘못이라고 할 수 있을까? 매년 미국에서는 수십 건의 감기환자가 발생한다. 그 환자들은 의사들에게 “빨리 고쳐달라”고 재촉한다. 항생제 처방을 받지 못한다면? 더 생각해볼 것도 없이 항생제를 주는 다른 의사에게 가면 그만이다. 이런 악순환이 결국 슈퍼세균이 자랄 수 있는 환경을 만든다는 것이다.
3 당신에게 맞는 의사를 찾는 게 최선
플라세보 효과의 좋은 예가 하나 있다. 바로 ‘글루코사민’이다. 관절통증에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 이 성분은 사실 그 효과가 미미하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관절염에는 글루코사민이 최고라고 믿고 있다. 시중에는 관절염에 효과가 좋다는 아스피린이나 비스테로이드계열 약품이 나와 있지만 위장출혈 등의 부작용이 있다는 얘기가 있다. 아직 그 수치는 작지만 글루코사민을 복용해서 효과를 봤다는 사람들이 종종 있기 때문에 의사로서는 환자가 원한다면 “그 약 효과 없어요. 이게 더 낫습니다”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의사들은 글루코사민 역시 플라세보 효과의 하나라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약이 아니다”라는 가설을 입증하는 또 다른 사례가 있다. 2008년 <영국 의학 저널>이 과민성대장증후군 환자 262명을 대상으로 조사했다. 실험 대상자들은 치료대기자 그룹과 차갑고 까칠한 의사로부터 진료를 받는 그룹, 그리고 따뜻하고 친절한 의사에게 진료를 받는 그룹으로 나뉘었다. 3주와 6주 후에 각 그룹의 환자들을 살펴보니 치료 경과는 뚜렷하게 나누어졌다. 치료대기자 명단에 있던 사람들과 까칠하고 차가운 의사로부터 진료를 받은 그룹은 거의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따뜻하고 친절한 의사의 관리를 받은 환자들은 상태가 월등히 호전된 것으로 나타났다. 60%가 넘는 그룹의 환자들이 “몸이 훨씬 좋아진 것 같다”고 대답했다. <영국 의학 저널>은 이를 통해 환자와 의사의 관계가 중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병이 낫기 위해서 필요한 첫번째 조건은 환자와 의사간의 상호 신뢰다. 의사는 환자의 특성을 파악해 정신적, 신체적으로 돌봐야 한다. 환자가 어떤 아픔이 있는지 진심으로 대해주고 함께 고민하며 환자의 질병을 어떻게 치료할 것인지 구체적으로 계획을 설명해주어야 한다. 환자는 의사의 질문에 성심성의껏 대답해야 한다. 당신에게 맞는 의사를 찾도록 하라. “이 사람이 내 평생 주치의구나”라는 생각이 든다면 믿어라. 그것이 진정한 플라세보 효과다. 
플라세보, 언제부터 우리 주위에 있었을까?
200년에 이르는 환자를 치료하기 위한 ‘공갈약’의 역사
1811년 후퍼 의학사전은 환자들에게 치료목적보다는 위안을 목적으로 하는 모든 처방을 ‘플라세보’라고 정의했다.
1937년 미국 코넬 대학교 의사들이 플라세보가 후두염 환자들에게 효과가 있다고 발표했다. 최초의 플라세보 효과로 알려져 있다.
1940년 제약회사들이 카보캡Cabocap과 오베칼프Obecalp를 제조하기 시작했다. 이 약들은 환자들의 인공분만을 유도하기 위해 사용됐다.
1955년 헨리 K.비처 박사가 최초로 여러 질병에 대한 플라세보의 처방 적정량을 발표했다. 플라세보 처방을 받은 환자의 35%가 효과를 봤다고 그는 말했다.
1970년 플라세보 처방을 내리는 약품 중 40%가 환자의 치료를 전혀 기대할 수 없는 비타민이나 영양제라는 사실이 알려졌다.
1987년 영국 의사들이 플라세보가 환자의 상태를 호전시킬 수 있다고 발표했다.
2006년 미국 의학협회 윤리위원회가 처음으로 환자의 동의없이 처방하는 플라세보에 대해 경고했다.
2009년 월그린Walgreen과 CVS는 여전히 플라세보 효과가 있는 약품이라고 자사 웹사이트에 올려져 있다. 어떤 성분으로 구성되어 있는지는 밝히지 않은 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