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강 하류 성당에서
대한을 이틀 앞둔 일월 셋째 주말이다. 전날은 낙동강 하류 물금으로 나가 둔치에 조성된 황산공원을 거닐다 호포에서 지하철로 자갈치를 둘러왔다. 지금은 수운이 완전히 끊겼지만 50년대까지 김해 대동에서 양산 물금으로 나룻배가 운행되어 그곳을 ‘월당나루’라 불렀다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4대강 사업으로 조성된 낙동강 생태 탐방선은 운항을 멈추어 선착장은 썰렁했다.
토요일은 남강 하류 강가 트레킹을 가고자 합성동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출발하는 농어촌버스를 타려고 이른 아침 길을 나섰다. 냉이를 캘 수 있을런가 싶어 꽃삽을 챙겼다. 마산역 광장으로 오르는 주말 노점은 설을 앞둔 정취를 느낄 수 있었다. 채소와 과일과 함께 손으로 빚은 두부가 펼쳐져 오가는 손님들을 맞았다. 도시락을 준비 못해 김밥을 대신해서 빵을 두 개 사 배낭에 넣었다.
동마산병원 앞에서 정한 시각 터미널을 출발한 의령 지정면 두곡행 버스를 탔다. 서마산에서 칠원 읍내를 거쳐 함안 대산으로 가면서 승객들이 모두 내리고 송도교 건너 마산마을에서 마지막 손님으로 내렸다. 낡고 좁은 다리가 남겨진 옛길에서 벼랑으로 뚫린 길을 따라 걸으니 옅은 안개에 아침 햇살이 퍼지는 즈음 강변이었다. 해가 뜰 때와 질 무렵 풍경 사진이 멋지게 나올 때다.
지리산 중산리 천태샘에서 발원한 남강물이 진주를 거쳐 의령에서 거름강으로 불리는 지점이다. 한자어로는 나눌 ‘기(岐)’ 자를 쓰는 ‘기강’으로도 불리는데 임진왜란 때 의병장 곽재우가 왜구와 맞닥트려 최초의 승리를 거둔 현장이기도 하다. 마산마을에서 더 내려간 강 하류 언저리 홍의장군 승전을 기린 보덕각과 휘하 장수 손인갑 부자 충절을 후세에 전하는 쌍절각이 세워져 있다.
물길이 흘러오는 방향을 거슬러 올라가니 비닐하우스 곁에 한 무리 기러기들이 먹이를 찾아 먹다 이방인을 경계하며 목을 뺐다. 녀석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몸을 낮추고 발소리를 죽여 걸었음에도 일제히 날아가 내가 놀라게 해서 그런가 싶어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강변으로 따라 더 걸으니 예전에 농사를 짓던 밭뙈기는 묵혀졌는데 하천 부지 무단 경작을 금하는 푯말이 보였다.
아침에 길을 나설 때 배낭에 꽃삽을 챙겨감은 그곳에 자랄 냉이를 캘 수 있으러나 싶었는데 사정이 여의하지 못했다. 경작을 금하니 농작물과 함께 자랄 잡초 냉이도 검불에 치여 제대로 생육하지 못했다. 전에는 마늘이나 양파를 심어둔 이랑에 영양분을 받아 수북하게 자랐는데 야위기도 하고 개체수가 현저히 줄었다. 거기다 간밤은 서리가 내렸고 땅은 얼어 캘 여건이 못 되었다.
냉이를 캤다면 왔던 길을 되짚어 송도교를 건너 대산 구혜에서 창원으로 돌아갈 참인데 진로를 바꾸었다. 성당마을과 백야마을을 거쳐 지정면 경계 벼랑에서 정곡면 적곡으로 갔다. 강 건너 대산 들판은 비닐하우스단지였고 물길이 흘러온 언저리는 갯버들과 갈대들은 제 모습을 그대로 유지했다. 4대강 사업 때 지천으로는 굴삭기가 모래흙을 퍼내지 않아 하상이 온전한 상태였다.
적곡에서 제방을 따라 걸어도 되나 이전에 두 차례 지난 적이 있어 이번엔 지름길인 마을 앞으로 갔다. 담양 전씨 집성촌 적곡은 남강댐이 건설되기 전에는 여름이면 물난리를 자주 겪었는데 지금은 옥답으로 바뀌었다. 상류로부터 실려 온 모래흙이 충적토를 이루어 물 빠짐이 좋아 비닐하우스 농사로 소득이 높아졌다. 적곡에서 백곡 앞으로 가서 남강을 가로지른 백곡교를 건넜다.
함안 법수에서 강변 둑방길을 비켜 국도를 따라 들판을 더 걸어 가야로 가서 창원으로 가는 농어촌버스를 탔다. 귀로에 ‘백곡교에서’를 한 수 남겼다. “중산리 천태샘에 시작된 남강 물길 / 법수들 북쪽으로 강 건너 의령 백곡 / 아득히 함안천 벼랑 악양루가 맞는다 // 강바닥 충적토는 잔모래 층을 이뤄 / 물살이 할퀴어도 갯버들 살아남아 / 겨우내 찬바람에도 수액 올라 윤난다” 25.0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