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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대에 달린 놋 뱀을 바라보라! (21:4-9)
오늘은 사순절의 끝자락인 종려주일, 고난주일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려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시는 주간입니다. ◀제목 소개!▶
민수기는 광야 여정의 책입니다. 죽음의 땅 애굽을 벗어나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 걸어가는 백성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민수기는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벗에나 천성을 향해 걸어가는 성도들의 이야기 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광야 길은 인생길입니다. 그런데 그 속에는 불평과 반역의 이야기로 얼룩져 있습니다.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노예들을 불러내 하나님이 구원해 주시고 홍해를 육지처럼 건너게 했습니다. 만나와 메추라기로 배불리 먹여 주셨고, 반석을 쳐 생수가 흘러나게 했습니다. 수많은 적들을 물리쳐 주셨습니다. 이쯤 되면 매일같이 감사하고 찬송하며 살아야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저들은 눈만 뜨면 원망이요 입만 열면 불평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라워' 입으로는 찬양하면서도 감사가 없고 믿음이 없이 세상을 근심 걱정 염려로, 원망과 불평으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오늘 민수기의 이야기는 바로 나 자신의 자화상입니다. /믿/
▶민수기를 보면 10장 이후 어리석은 백성들의 불평불만으로 넘쳐나고 있습니다.
▶11장; 하나님을 원망하다가 행진 후미에 큰불이 떨어지는 사건이 있었고,
▶12장; 미리암이 지도자 모세를 비방하다가 문둥이가 된 사건이 나오고,
▶13-14장; 열 정탐 군의 원망이 나옵니다.
▶16장; 고라 일당이 반역하다가 지진을 만나 몰사 당한 사건이고,
▶20장; 마실 물이 없다고 불평했고,
▶오늘 21장은 길 때문에 불평하다가 불 뱀 떼가 나타나 백성들을 물어 죽이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 당시 배경은 이렇습니다. 이스라엘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향하여 진군하는데 그 여정길이 에돔 땅에 이르렀을 때, 에서의 후손들인 에돔 백성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 땅 밟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에돔을 돌아 홍해 쪽으로 가다가 그만 심신이 지쳐버리고 말았습니다.
본문에 '마음이 상했다'는 말은 흔히 쓰는 말로 '속이 상했다'는 정도의 뜻이 아니라 낙심하여 '짧게 자르다'라는 의미로 '이제껏 자신들과 함께 하신 하나님과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대한 약속은 멀게만 느껴졌고, 앞길을 가로막는 광야의 돌풍과 사막의 열기로 인내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에 대한 소망보다 현재 광야에서 당하고 있는 시련으로 절망감에 사로잡힌 채 척박한 땅만 바라보고 걸어갈 때에 하나님을 원망하는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잘사는 사람 애굽에서 끄집어 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고. 먹을 것도 모자라고 마실 물도 모자란다고. 매일같이 먹는 만나와 메추라기 같은 음식엔 넌더리가 난다고 불평'이었습니다.
▶성경은 불평과 원망 죄를 간단하게 취급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불 뱀 떼를 보내 백성들을 모조리 물어 죽게 했습니다. 당황한 백성들이 모세를 찾아왔고 모세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합니다. '하나님! 이 백성들을 이대로 죽어가게 하시겠습니까? 용서하시고 살려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종아! 장대 높은 곳에 불 뱀 모양의 놋 뱀을 만들어 달아라. 누구든지 쳐다보면 낫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순종함으로 놋 뱀을 쳐다본 자는 모두 나았다고 하는 간단한 얘기가 오늘 본문의 이야기입니다.
기독교는 계시의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사실 종교입니다. 사건 종교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뻐하시는 뜻을 사건을 통해서 나타내시고 역사적 사실로써 우리에게 계시하면서 교훈을 주십니다.
한마디로 너희는 원망하고 불평하던 이스라엘처럼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면 너희에게도 똑같은 저주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고전10:10-11절에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할/
여기 장대에 달린 놋 뱀은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 사건입니다.
①구약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는?
⑴여자의 후손입니다(창3:15). 여기서 '여자의 후손'은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인류역사상 남자 없이 태어난 사람은 성령으로 잉태되어 오신 예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⑵창3:21절의 가죽옷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상징합니다.
⑶창22장의 아브라함이 이삭을 모리아 산상에 번제로 드린 사건도 예표입니다.
⑷유월절 양의 피입니다(출12:13). 장차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할 때 구원받는 유일한 표적은 마음의 문설주에 믿음으로 바른 예수님의 피 밖에 없습니다.
⑸아사셀 양입니다(레16:10/20-22). 레위기에 보면 이스라엘 민족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아사셀 양의 머리에 안수한 뒤에 모든 죄를 걸머지운 채 광야로 떠나보냅니다. 이것도 세상 죄를 지고 화목 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⑹제단 뿔입니다(출27:2/레4:18, 25, 30, 34). 성막 안에 제단이 있는데 이 제단에는 네 모퉁이에 네 뿔이 있고, 그 뿔은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금으로 쌌습니다. 그리고 제사장은 속죄 제물의 피를 제일 먼저 그 제단 뿔에다 바릅니다. 그리고 범죄 하여 죽을 죄인이라도 성전에 들어가 제단 뿔을 붙잡으면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솔로몬 왕은 즉위한 후에 정적을 숙청하는 중에 형 아도니아가 부친 다윗 왕의 후궁이었던 미인 아비삭을 달라고 하다가 죽을 것을 알고 제단 뿔을 붙잡았는데도 솔로몬 왕은 그를 끌어다 죽였고(왕상1:50-51), 요압이 도망하여 제단 뿔을 붙잡았을 때 역시 끌어다 죽였습니다(왕상2:28-31). 성경학자들은 솔로몬이 지은 죄 중에 가장 큰 죄, 우상 숭배의 죄보다 더 큰 죄는 바로 제단 뿔을 붙잡은 사람을 죽인 죄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⑺기생 라합의 붉은 줄입니다(수2:18). 여리고 성이 무너질 때 붉은 줄을 창문에 드리운 라합은 의로워서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실 때 예수를 믿고 십자가의 피 공로를 의지한 자는 다 구원을 받습니다.
⑻도피성입니다(신4:42/19:3-5,11). 실수하여 사람을 죽였을 때에 '도피성'이라는 곳을 만들어 그리로 달려가 숨으면 아무도 끌어내거나 죽이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바로 구원의 도피성이 되십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고 영접하면 그의 십자가의 피가 그를 보호하시고 구원하십니다.
⑼그리고 오늘 본문의 놋 뱀 사건입니다. /할/
우리가 살아가면서 무엇을 보느냐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좋은 것을 보아야지 나쁜 것을 보면 그만큼 손해가 큽니다.
▶어느 젊은이가 골동품 가게에 취직을 했습니다. 골동품 가게는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는 것이 생명이기 때문에, 그 젊은이는 처음부터 가짜를 가려내는 법을 배우길 원했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가짜를 골라내는 법은 가르쳐 주지 않고, 6개월 동안 진품만 잔뜩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주인은 가짜를 하나 가져와서 점원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것을 보자마자 가짜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진짜만 보니 가짜를 알겠더라'는 것입니다.
보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내 눈앞에 무엇이 있느냐,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서 인생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학생의 눈에는 항상 책이 보여야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습니다. 교사의 눈에는 제자가, 의사의 눈에는 환자가, 목사의 눈에는 성도가, 기업가의 눈에는 근로자가 보여야 합니다. 또 정치가의 눈에는 국가의 장래가, 어머니의 눈에는 가정의 행복이 보여야 합니다. 올바로 보기만 하면 우리는 성공하고 승리하며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②성경에는 특히 성도들이 보아야 할 것들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⑴주의 얼굴을 바라보라! 시17:15절에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⑵위의 것을 바라보라! 골3;1절에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⑶하나님께서 좋은 것으로 상주실 것을 바라보라!(히11;6).
⑷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라!(히12;2).
⑸하나님의 날이 임할 것을 바라보라! 벧후3;12절에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⑹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할 것을 바라보라! 벧후3:13절에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올바른 것만 보면 올바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사람은 보는 것에 따라서 인생이 달라지게 됩니다. 성공하려는 사람은 성공을 바라보아야 하고, 행복하게 살기 원하는 사람은 행복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아멘!/
▶오늘 본문에 모세의 말대로 장대에 달린 놋 뱀을 바라본 사람은 생명을 구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원망, 불평하며 땅만 쳐다본 사람은 불 뱀에 물려 죽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줍니까? 바라볼 것을 바라본 사람, 순종한 사람은 살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모세의 말에 순종하고, 주의 종에게 순종하는 사람은 삽니다. 이런 사람들은 믿음으로 바라본 자들입니다. 그러나 불순종하는 사람은 그 불순종으로 인해 죄를 짓고, 또한 그 죄 값으로 인해 병들고 망하고 죽게 된 것입니다.
우리 인생도 때로는 고통과 고난이 있을 수 있습니다. 자신이 원하고 바라는 대로 안 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에 상처를 받고 과거의 축복과 사랑은 다 잊어버린 채, 현실만 보고 원망과 불평에 빠지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원망과 불평은 뱀(사단)을 불러들이고 뱀은 결국 우리를 물어 독(죄)으로 인해 죽게 만듭니다. 불신과 원망과 불평은 우리 몸에 독이 퍼지게 해 건강을 잃고 병들게 만듭니다. 기쁨을 잃고 기도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불 신앙에 빠져 하나님의 축복의 반열에서 서서히 떠나게 만듭니다. 가난과 저주와 질병으로 멸망하고 죽음을 당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어려움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승리하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할/
③우리는 원망하지 말고 불평하지도 맙시다(4-5).
대개 원망하는 사람들에게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타당한 이유가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원망해서는 안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길로 인하여' 마음이 상했다고 했습니다. 물론 빨리 가면 좋겠지만, 매사가 빨리 되었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지름길로 가지 않고 돌아갈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시간이 걸릴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마음에 상처를 받아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믿음을 가지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인내하며 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과 모세를 향해서 원망'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원망'이라는 것은 '대항하고 대적하고 반대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들은 먼저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라고 원망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홍해를 건너게 하신 것은 그들을 광야에서 죽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살게 하시려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시려고 인도하여 내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과 미래의 일은 내다보지 않고 당장에 죽을 것만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죽을 것을 생각하지 말고 살리시는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들은 또한 '식물도 없고 물도 없다'고 원망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없어서 죽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굶어 죽은 사람도, 목말라 죽은 사람도 없는데 이스라엘 백성은 죽을 것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때까지도 하나님께서 내리신 만나 때문에 살았으면서도, 하나님의 축복에는 감사치 않고 오히려 '박한 식물이 싫다'고 불평하였습니다.
감사하는 신앙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망각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과 은총도 '싫다'고 말하므로 써 결국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원망의 말을 삼가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마음이 상한 상태로만 그냥 있었어도 하나님의 진노는 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입술로 원망, 불평함으로써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할/
▶왜 원망하는가?
⑴과거의 은혜를 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홍해를 갈라지게 하여 건너가게 하시고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시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자 원망이 튀어 나왔습니다.
⑵욕심 때문에 원망합니다.
⑶믿음이 없기 때문에 원망합니다. 요셉은 형들에 의해 애굽의 종으로 팔려갔어도 형들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옥중에 갇혔어도 하나님을 찬미하고 감사했습니다.
⑷어리석어서 원망합니다. 옛말에 '안되면 조상 탓, 잘되면 내 탓'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일이 뭔가 안되어 갈 성싶으면 곧바로 다른 사람을 원망하고 탓합니다. 이러한 원망은 아담 때부터 있었습니다. 원망은 습관입니다. 그리고 원망의 말은 바로 바로 자신을 향해 쏘는 화살입니다.
▶옛날에 작전을 아주 잘 세우는 한 장군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장군이 세우는 작전은 늘 화창한 날에만 승리할 수 있는 작전이었습니다. 그 날도 화창한 날이라 병사들은 싸우기 전부터 승리를 확신하면서 즐거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비가 오는 바람에 그만 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장군은 하늘을 욕하면서 일제히 하늘을 향해 활을 쏘라고 병사들에게 명령했습니다. 결국, 그 화살은 다 어디로 갔을까요? 이렇듯 다른 사람을 원망하는 것은 자신을 욕하는 어리석은 행위입니다. /할/
⑸원망과 불평은 마귀로부터 옵니다.
⑹원망과 불평은 축복을 가로막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승리합니까? 감사하는 사람이 승리한다고 했습니다. 불평하는 사람은 다 실패합니다. 사업을 해도 실패한 사람들이 불평이 더 많습니다. 불평과 원망은 자신의 인생만 망치는 것이 아니라, 남의 인생도 망칩니다. 그러나 감사는 긍정적인 믿음을 가지게 합니다. 앞으로 전진하여 성공하고 승리하게 합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나와서 은혜 받고 감사하는 사람은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불평하며 원망하는 사람은 불 신앙의 사람입니다. /믿/할/
④원망과 불평의 결과는 심판입니다(6).
원망과 불평은 뱀을 불러들이고, 뱀은 우리를 물어서 몸에 독이 퍼지게 합니다. 다시 말해서 원망과 불평은 우리 몸에 치명적인 독이 되는 것입니다.
'불뱀'은 중동 지역에 많던 독사의 한 종류입니다. 이 뱀은 등에 불타는 듯한 붉은 반점이 있는데다가 독성이 강해서 사람이 한번 물리면 온몸에 독이 퍼져서 불같이 뜨거운 열을 내다가 죽게 만들기 때문에 '불뱀'이라고 불렸습니다. 그러니까 불평과 원망은 몸에 열이 펄펄 나게 해서 우리를 죽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물과 불로 심판하십니다. 그래서 홍수가 나기도 하고, 지진이 터지기도 합니다. 때로는 전쟁이 나기도 하고, 전염병이 돌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원망하는 자는 약속의 땅, 축복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감사하지 못하고 원망, 불평하는 믿음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부르짖고 기도를 해도 그 기도가 하늘에 상달되지 못하며, 따라서 응답도 받지 못합니다. /할/
▶어느 병원에 한 임산부가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그 병원은 기독교 병원이었기 때문에 복도에도, 병실에도 예수님의 액자가 걸려 있었습니다. 기독교인이 아니었던 그 임산부는 액자를 보고 이유 없이 반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곧 간호사를 불러서 그 액자를 좀 떼어 달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간호사는 '저는 그 액자를 떼어 낼 권한이 없다'고 하자, 여자는 화가 나서 자기 남편이 누군 줄 아느냐며 원장을 불러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원장 역시 그 액자를 떼어 낼 수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 병원에서는 그 액자를 떼 낼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요? 그러면 내가 직접 떼지요' 이렇게 말하고 나서 임산부는 무거운 몸으로 의자에 올라가서 그 액자를 떼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내 아이는 절대로 저 사진을 보지 못하게 할겁니다' 큰 소리를 쳤습니다.
드디어 때가 되어 그 여자는 출산을 했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말했던 대로 그 여자의 아이는 영원히 예수님의 얼굴을 볼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장님으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대항하는 사람, 기독교에 대항하는 사람, 그래서 하나님 앞에 저주받고 심판 받은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오늘날에도 하나님을 대항하는 사람, 감사치 못하는 사람, 그래서 가난과 질병, 고난과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이 무척 많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원망, 불평하는 죄에 빠지지 말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시50;23절에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아멘!/
⑤백성들의 죄를 회개하는 모세의 기도를 보자!(7)
이스라엘 백성은 뱀에 물려 독이 퍼져 죽게 되자, 비로소 회개를 했습니다. 사람들은 얻어맞아야 회개를 합니다. 오늘날도 병들어 죽어가고, 아주 망해 버려야 회개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스라엘은 '원망하므로 범죄하였사오니'라고 했습니다. 원망과 불평은 죄가 됩니다. 하나님 앞에 원망한 것도 죄가 되고, 모세를 원망한 것도 죄가 됩니다. 왜? 불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뱀에 물려 죽어 가면서 모세를 찾아갔고, 모세는 백성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뒤늦게라도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구원과 은총을 베풀어주십니다. 대하7;14절에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
▶회개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 죄를 용서하시고, 질병에서 고쳐 주십니다.
▶하나님은 회개를 통해서 축복하십니다. 회개하는 순간부터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게 됩니다. 요일서1;9절에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어떤 죄라도 용서받지 못할 죄는 없습니다. 죄악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저주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천부여 의지 없어 두손들고 옵니다' 자복하고 통회하면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시고 은혜와 축복을 베풀어주십니다.
▶어떤 남자가 차를 몰고 가는데 갑자기 트럭이 나타나서 브레이크를 밟는다고 밟았는데 차가 돌아 그만 옆의 차를 받아 버렸습니다. 수리비를 계산하니까 700만 원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보험 기간이 만료되어 보험 혜택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밤에 잠을 자지 못하고 끙끙대고 있자니, 그의 아내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아내에게 낮에 있었던 사고에 대해 말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아내는 그 얘기를 듣자마자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고 외쳤습니다. '700만 원이 나가는데 뭐가 감사해?' '당신이 트럭에 치었으면 내가 과부가 되었을 텐데, 이렇게 무사하니 얼마나 감사해요?' /할/
아내는 남편이 다치지 않은 것만도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그 얘기를 듣고 보니 그도 그랬습니다. 돈만 없앴기에 망정이지 몸이 다쳤으면 어떻게 할 뻔했습니까? 그래서 자기도 뒤늦게 하나님 앞에 감사하며 회개했다고 합니다.
원망할 때는 기쁨과 평강이 사라지고 잠도 안 왔는데, 감사를 드리고 나니 마음이 편안해져서 단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어떤 경우에라도 원망이나 불평하지 마시고, 원망하고 불평한 죄가 있다면 회개하시고, 감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⑥놋 뱀을 쳐다본즉 살리라!(8-9)
하나님은 모세에게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고 하셨습니다. 모세는 놋을 녹여서 불뱀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 놋 뱀을 쳐다보라고 말했습니다.
▶뱀에 불 뱀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가 있습니다.
⑴불과 같은 맹렬한 독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⑵이 뱀에 물리면 불과 같이 펄펄 끓는 열이 나기 때문입니다. ⑶뱀이 불같은 색깔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불 뱀은 모래 색깔입니다. 모래 위에서 기어다니면 도저히 구별할 수가 없습니다. 사막에서 이슬만 먹고 자랐기에 맹 독이 있어서 한번 물리면 그대로 즉사하는 무서운 뱀입니다.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불 뱀에 물려 죽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연이 아니라고 믿었습니다. 틀림없이 하나님이 벌을 준 것이라고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모세에게 말했습니다.
7절에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하므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해결책을 알려 주셨습니다. 불 뱀을 놋으로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놋 뱀을 들고 다니면서 불 뱀에 물려 죽어 가는 사람들에게 보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살 것이라고 생명의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모세는 그렇게 하였습니다. 놋 뱀을 만들어 장대에 달았습니다. 그리고 불 뱀에 물려 고통을 받고 있는 이들에게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장대를 들고 이 불 뱀을 보는 이들은 다 살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믿음으로 순종하여 그 놋 뱀을 보는 이들은 다 생명을 받았습니다. 오늘 본문 이야기입니다. 놋 뱀에 대한 예수님의 해석을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3:14절에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놋 뱀을 해석하면서 성경에서 가장 귀중한 진리인 요3:16절이 나왔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아멘!/
그렇습니다. 요3장에 나오는 니고데모는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은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나무에 달리실 것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을 보고서야 '아! 그 밤에 하신 말씀이 이것이었구나'하고 깨닫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어야 영생을 얻는구나'라고 깨닫고 아리마대 요셉과 함께 예수님의 장례를 치릅니다. /할/
그렇습니다. 장대에 달린 놋 뱀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이 해석을 바울은 더 피부에 와 닿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놋 뱀에 대한 바울의 해석을 바울은 이렇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갈3:3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불 뱀이 저주받은 것은 예수님이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저주받으신 것으로 바울은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불 뱀을 보는 사람마다 고침 받은 것은 예수 십자가를 보는 이마다 생명을 얻은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모세가 만든 놋 뱀은 정확하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런 것일까요?
⑴비천해 지신 예수님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금으로 뱀을 만들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은으로 만들거나 다이아몬드로 만들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불 뱀을 만들어 장대에 달라고 하실 때에 하필이면 놋으로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놋은 당시 가장 흔한 금속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필이면 놋으로 뱀을 만들라고 하신 데에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첫째 해석은 색깔해석입니다. 놋으로 뱀을 만들어 장대에 달면 햇빛에 비취면서 놋이 꼭 불뱀 색깔을 내기 때문에 놋으로 불뱀을 만들라고 하셨다는 이론입니다.
두 번째 해석은 놋은 열에 가장 잘 견디는 금속이기 때문입니다. 영국 소방수들이 불에 금속들을 넣어서 몇 도에 녹는가를 실험하여 보았습니다. 금은 1069도로 아주 높은 온도에서 녹았습니다. 그런데 놋은 금보다 더 강한 불인 1085도에서 녹았습니다. 불에 잘 견디는 금속이 놋이기 때문에 놋으로 뱀을 만들었다는 설입니다.
세 번째 이론은 가장 흔한 금속이 광야에서 놋이기 때문에 놋으로 불 뱀을 만들었다는 이론입니다. 광야에서 가장 천한 금속입니다. 놋 뱀은 바로 우리 주 예수님의 상징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 땅에 가장 비천한 몸으로 오셨습니다. 마구간에 오셨습니다. 목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버림받으신 비천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나타내기 위하여 놋으로 불 뱀을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도였습니다.
성막은 뜰, 성소 그리고 지성소 세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뜰에 있는 성물인 번제단과 물두멍은 놋으로 만들었습니다. 성소 안에 있는 세 성물, 분향단과 떡상은 겉에만 금을 입혔습니다. 지성소 안에 있는 법궤는 겉에서 속에도 금으로 만들었습니다. 갈수록 귀한 성물입니다. 놋은 당시 제일 흔하고 천한 금속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천한 분이 아니라 천하게 되신 분이십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후8:9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할/
⑵저주받으신 예수님입니다. 놋뱀은 저주받은 뱀입니다. 장대에 달린 뱀입니다. 살아 있는 뱀이 아닙니다. 죽어서 장대에 걸려 있는 저주받은 뱀입니다. 이는 저주받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불 뱀이 저주받은 것을 본 이들은 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내 저주를 담당하셨음을 믿기만 하면 내 저주가 살아지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 저주를 담당하신 분이십니다. 살아 있는 뱀이 아니라 저주받은 뱀입니다.
▶남편을 일찍 여의고 외동딸과 함께 외롭게 살아가는 한 중년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사랑하는 딸이 가출하여 술집에서 남자들의 술이나 따라 주면서 살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 여인은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딸이 있을 만한 곳을 다 다니면서 전단지를 뿌렸습니다. 그 전단지에는 어머니의 사진과 함께 이런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딸아. 어미가 너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단다. 너를 사랑한단다.'
어머니는 딸의 사진을 넣으면 딸이 부끄러움을 당할 가 두려워 자기 사진을 넣은 것입니다. 결국 딸 사진 대신 자기 사진을 넣은 것입니다. 드디어 딸은 어머니 품으로 돌아 왔습니다. 그리고 통회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어머니의 깊은 사랑을 도저히 외면할 수 없었어요. 저를 위하여 대신 수치를 당하신 은혜와 사랑에 감사 드려요.'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놋 뱀은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나무에서 저주받으심으로 우리는 구원받았습니다. /아멘!/
⑶놋은 변치 않은 믿음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으심으로 우리는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나 저절로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믿어야 합니다. 놋 뱀을 쳐다보면 나을 줄 믿는 사람에게만 생명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할/
의사가 암을 낫게 하는 약 연구에 평생을 바쳤습니다. 죽을 때가 되어서야 드디어 그 약을 만들 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후배 의사들 손에 그 약을 쥐어 주면서 말했습니다.
'내가 이 약을 만드느라고 생명을 다 바쳤다. 너희 후배들은 이 약으로 암 걸린 사람들에게 주어 고쳐라' 후배 의사들은 그 약을 들고 다니면서 암 환자들에게 외쳤습니다. '이 약 먹어야 살아!' 오직 한 가지 외침이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영생의 약을 만들어 놓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의 피입니다. 복음입니다. 우리는 영생을 얻지 못 한 이들을 만나면 외쳐야 합니다. '이 사람아! 구약과 신약이라는 약을 먹어야 영생해! 복음을 먹으면 영원히 살 수 있어' 외쳐야 합니다.
그러면 이 말을 듣는 사람은 저절로 영생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믿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구원을 이루는 오직 하나의 길입니다. /믿/아멘!/
⑷불 뱀은 죽음이었고, 놋 뱀은 생명이었습니다. 불 뱀은 병이었고, 놋 뱀은 회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회복입니다. 놋 뱀을 쳐다보는 사람은 다 살았습니다. 순종하는 사람에게만 생명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순종이 없이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보는 이들은 다 건강하여졌습니다. 불 뱀에 물렸으면 약을 쓰고 주사를 맞는 것이 아니라 놋 뱀을 보면 살 수 있습니다. 상식으로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 비상식적으로 고침을 받았습니다. 놋 뱀이 신비한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는 믿음에 하나님이 회복의 역사를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할/
▶바라본다는 것이 무엇인가?
⑴바라보는 것은 관심입니다. 신앙생활은 관심입니다. 천국에 대한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에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에 대한 관심이 곧 하나님에 대한 과심입니다.
⑵바라보는 것은 배우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예수님을 배워야 합니다. 모든 학습은 모방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배우는 신앙의 모방은 오직 예수이십니다. 바울이 그 분을 본받아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우리들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자신 있게 말했습니다. '나를 본 받으라' /할/
보고 배우지 않고는 절대로 발전이 없습니다. 보고 배우지 않고는 능력을 확대할 수 없습니다. 혼자 배우는 운동, 혼자 배우는 악기, 혼자 하는 학문 등등은 한계가 있습니다. 선생님을 보고, 열심히 학습을 해야 그 선생님만큼 될 수 있습니다.
⑶바라보는 것은 인정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바라보며 주님 되심을, 구세주 되심을 인정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의 주인이시므로 모든 문제의 해결이 십자가에 있습니다.
군인이 상관을 향하여 인사 때마다 '충성'을 외칩니다. 한두 번하고 마는 것이 아닙니다. 군인인 한에 있어서 상관을 향하여 죽을 때까지 '충성' 하면서 충성을 서약합니다. 사랑의 고백도 한두 번에 그칠 일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한 계속 되어야 할 고백입니다. 주님의 주인 되심도 영원히 반복되고 확인되어야 할 고백입니다. /할/
▶D.L 무디가 지은 시 가운데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그대 자신을 바라보라/반드시 실망할 때가 있을 것이다./친구를 바라보라/배신의 쓴잔을 맛보리라/남편이나 아내를 바라보라/어느 때인가 헤어지고 죽음으로 갈라서리라/자식을 바라보라/철이 나기 전 세상을 떠나리라/돈이나 명예를 바라보라/어느 날 허무함을 맛보리라/그러나/주 예수를 바라보라/영원한 생명을 얻으리라> /할/
그렇습니다. ▶장대에 달린 놋 뱀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⑴회개하는 마음으로 바라보는 자를 살리십니다. 재앙을 만난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함으로 구원의 길이 열렸습니다. 하나님께 원망하다가 불 뱀으로 인하여 회개합니다. 회개가 살길입니다. 문제의 원인은 죄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겸비하고 자세를 낮추고, 그리고 회개해야 합니다.
사55:7절에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 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⑵믿는 마음으로 바라보는 자를 살리십니다. 놋 뱀을 바라보라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영적으로는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다는 그 말씀을 믿고 십자가 바라보고 예수 믿으면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⑶순종하는 마음으로 바라보는 자를 살리십니다. '바라보라 그러면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 약속을 믿고 바라보는 것은 순종하는 믿음입니다. '예수를 믿으라 그러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 약속입니다. 그 약속을 그대로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무슨 소리, 뱀독이 퍼져 가는데 놋 뱀 바라보면 산다고? 허튼 소리, 병원에 가야지. 독을 빼야 살지, 응급처치를 해야 살지'하며 그날 거기서 놋 뱀을 바라보지 않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다 죽었습니다. /할/
오늘 본문에 백성을 상하게 만든 뱀은 '불 뱀들' 복수로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저들을 구원하는 놋 뱀은 단수로 되었습니다. 죄는 많고 다양합니다. 그러나 치유의 길은 오직 하나 장대에 달린 놋 뱀입니다. 행4;12절에 '예수 그리스도 외에 구원을 얻을 만한 천하 인간의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느니라' /아멘!/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원망하지 맙시다. 불평하지 맙시다. 오직 예수만 바라봅시다. 오직 하나의 조건은 '쳐다 보라'입니다. 이것은 종말적인 메시지요 마지막 통첩입니다. 여러분! 신앙이 무엇입니까? 영혼의 눈을 떠서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성도는 어떤 사람입니까? 주님을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마치 항상 태양을 향하는 해바라기처럼 항상 주님을 바라보는 '주(主)바라기'입니다. 히브리 기자는 말씀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그는/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할/
우리의 구세주이신 위대한 주님을 향해 영적인 믿음의 눈을 고정시키라는 말씀입니다. '보면 살리라!' 예수님을 보면 삽니다! 부디 이 말씀 붙잡고 날마다 구원의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는 참 행복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아멘!/ (2011년 4월 17일 종려주일예배 설교)
출처: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이것을 바라보라! (민 21:4-9)
사람은 누구나 다 아침에 눈을 뜨면 잠들기까지 많은 것들을 보며 살아가게 됩니다. 눈으로 보는 것은 단순히 보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눈에 보여 지는 것을 통해 생각을 하게 되고, 그 생각에 따라 행동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보는 것에 따라 행동이 각각 다르게 나타납니다. 이 행동에 따라 성공과 실패, 행복과 불행이 결정됩니다. 인류의 시조인 아담과 하와의 경우를 통해 그 증거를 찾을 수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죄를 범하게 된 것은 눈으로 보는 것이 시작이었습니다. 창세기 3장 6절 말씀에“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눈으로 봄으로 인해 탐심이 일어났고, 그 탐심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범죄로 이어졌습니다. 그 결과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행복은 산산조각이 났고, 그 저주는 자자손손에게 이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잠언 4장 25절~26절에 말씀하시기를“네 눈은 바로 보며 네 눈꺼풀은 네 앞을 곧게 살펴 네 발의 행할 첩경을 평탄케 하며 네 모든 길을 든든히 하라.”고 했습니다. 눈이 볼 것을 올바로 볼 때, 살아가는 길이 평탄하며, 그 길이 든든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은 무엇을 바라보며 살아야 하겠습니까?
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3장 14절 말씀에“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 본문인 민수기 21장 4절~9절을 인용하신 말씀입니다.
이 사건의 경위는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해방되어 젓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향해 나아가는 동안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메마른 광야에서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그들의 생각에는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이면 만사형통 할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계속되는 고난 가운데 그들은 하나님과 모세를 향해 불평하며 원망했습니다. 이들이 원망하게 된 것은 여러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길에 대한 불평이었습니다. 직선 코스로 간다면 금방 들어갈 수 있는 길인데, 시나이 반도를 빙 돌아서 가는 것이었습니다. 둘째는, 먹는 것에 대한 불평이었습니다. 메마른 광야에서 싱싱한 식물은 구할 수 없고,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만나와 메추라기뿐이었습니다. 왜 이런 것만 먹어야 하느냐는 불평이었습니다. 셋째는, 마실 물이 귀했습니다. 가도 가도 끝없는 광야인지라 물이 매우 귀했습니다. 그들은 목이 마를 때마다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이러한 불평과 원망은 마침내 모세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서 노예로 살지라도 배불리 먹고 마시는 것이 더 낫겠다고 아우성을 치며 모세를 죽이려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불뱀을 땅에 보내어 사람들을 물어 죽게 했습니다. 광야의 뱀은 독이 많아 더욱 무섭습니다. 독사라 할지라도 햇빛을 받지 못하면 독이 많지 않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곳 뱀들은 그늘이 없는 광야 사막인지라 햇빛을 많이 받으므로 독이 많았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여름을 지난 가을철 뱀은 독이 많아 위험합니다. 그 까닭은 긴 여름 햇빛을 많이 받았기 때문입니다. 광야에서 뱀에게 물린 사람들은 모두 다 즉사했습니다. 이때 백성의 지도자들이 모세에게 나아와 자기들의 잘못을 인정하며, 하나님께 기도하여 자기들을 살려주기를 간청했습니다. 이때 모세는 하나님께 기도여 응답을 받았습니다. 그 내용이 본문인 민수기 21장 8절인“불뱀을 만들어 장대위에 달라 그것을 보면 살리라”하신 말씀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지시대로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매어달고, 이 불뱀을 쳐다보는 자는 누구나 살아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상한 방법이었습니다. 그냥 용서하시고 살려 주시는 것이 아니라 장대위의 놋뱀을 쳐다보라는 조건을 붙이셨습니다. 이 말을 믿고 쳐다보는 자마다 살았습니다. 뱀을 보고 살았던 사람들은 그 뱀에게서 어떤 마술적 힘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놋뱀을 우상으로 섬겼다는 기록이 성경에 있습니다. 열왕기하 18장 4절에 보면“여러 산당을 제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 것을 부수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히스기야 왕 때에 와서야 이 놋뱀 우상을 부수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이 놋뱀의 형상을 사용하는 곳이 있습니다. 군대 의사인 군의관의 마크는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의 형상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유대인들이 잘 이해할 수 있는 지난날의 역사를 들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뱀은 마귀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뱀에게 물린 사람들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죄인 된 사람을 가리킵니다. 장대위에 달린 놋뱀은 세상 죄를 지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그 놋뱀을 바라본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앙망하는 믿음을 의미하며, 그 놋뱀을 바라보는 자가 나음을 입은 것은 죄 사함을 받고 구원 얻는 것을 가리킵니다.
당시 불뱀에 물려 죽어간 사람들은 뱀의 독을 없이 하기 위해 여러 가지 할 수 있는 방법은 다 동원했을 것입니다. 발달했던 애굽의 약도 써보았을 것이고, 칼로 상처를 내고 상처속의 독을 빨아내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불뱀의 독을 해결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처럼 이 세상 사람들은 모두가 사탄의 상징인 불뱀에게 물렸습니다. 그것은 곧 사탄의 미혹으로 범한 죄악입니다. 인간이 범한 죄악은 무엇으로도 깨끗하게 고칠 수 없습니다. 방법은 오직 한 가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쳐다보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 살아날 수 있습니다. 참으로 단순합니다. 이처럼 기독교 진리는 단순합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구원의 선물입니다.
우리는 이 단순한 생명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전해야 들을 수 있고, 들어야 믿음이 생기게 되며, 믿어야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되고, 주의 이름을 불러야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로마서10:13~16). 광야에서 불뱀에게 물린 사람들이 구원 얻는 계기가 무엇입니까? 장대 위의 놋뱀을 쳐다보면 산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이처럼 범죄한 인간들이 구원 얻는 길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에 대한 생명의 소식을 듣는 것입니다. 들으려면 전하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생명의 소식을 전하는 것은 우리들이 해야 할 몫입니다.
구원은 인간의 어떤 노력이나 공로로 얻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생명은 하나님의 고유 권한에 속해 있습니다. 식물이나, 동물 등 모든 생명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고유 권한에 속해 있습니다. 인간의 영혼 역시 육안으로는 볼 수 없지만 생명입니다. 오늘날 유전공학이 발달했다고는 하지만 기존의 것으로 개량하거나 변형하는 것일 뿐 창조는 아닙니다. 이 지구상의 모든 생물학자들을 총동원한다 할지라도 풀 한포기 만들 수 없습니다. 생명은 창조주 하나님의 고유 권한에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영혼의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받을 수 있을 뿐, 인간의 어떤 노력이나 선행이나 공로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인간의 노력 밖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고유 권한에 속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이 행한 선행이나 어떤 공로를 생각하기 쉽습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16절에 말씀하시기를“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하셨습니다.
미국에 무디 목사가 어느 날 탄광촌에 전도를 하러 나갔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구원을 얻어 영생을 누리게 된다고 했습니다. 무디의 전도를 받은 광부들은, 아무 노력도 없이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가? 하면서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무디 목사가 물었습니다. “여러분들, 석탄을 지하 몇 미터에서 캡니까?” “백여 미터가 되지요.” “그 깊은 지하 갱도를 힘들어 어떻게 오르내립니까?” “그것은 힘들지 않습니다. 엘리베이터를 타면 되니까요.” “바로 그것입니다.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데에도 사람이 특별히 할 일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만들어 둔 엘리베이터를 타면 높고 낮은 곳을 아무 힘도 들이지 않고 오르내릴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피로 이루어 놓으신 그 공로를 믿으면 구원을 얻습니다.”라고 설명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을 받는 데에는 인간의 노력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됩니다.
천국 가는 엘리베이터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삼위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믿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말씀하시기를“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12장 2절에는“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하므로 불뱀의 재앙을 만나 무수한 사람들이 죽어갈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구원의 길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것은 장대위의 놋뱀을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그 놋뱀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누구나 다 살아났습니다. 이에 대해 본문 9절에 말씀하시기를“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민수기 21:9)고 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원받는 것은 쉬운 것입니다.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이 장대에 달린 뱀을 바라보듯,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3:14~15 에“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하셨습니다.
二. 풍랑을 다스리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14장에는 예수님이 단순한 인간이 아니라 사람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이심을 나타내는 증거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능력 있는 말씀을 사모하는 자와 병고침 받기를 원하는 수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이 계신 곳에 운집했습니다. 해가 저물어 저녁이 되었는데도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허기진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신 예수님은,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그들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그 무리의 수가 오 천 명이 넘었습니다. 이들이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이 열 두 바구니나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신비로운 기적을 행하신 후 제자들에게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도록 하셨습니다. 제자들을 보내신 예수님은 산 속에 가셔서 밤이 깊도록 기도하셨습니다. 밤 4경(3시~6시 사이)에 제자들이 풍랑을 만나 고난을 겪고 있는 모습을 보신 예수님은 바다 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오셨습니다. 어두운 바다 위를 사람이 걸어오는 것을 본 제자들은 유령인가 하여 크게 놀랐습니다. 어부들에게는 풍랑 이는 바다위에 유령이 나타나면 그 배는 침몰할 징조로 여기는 것이 고금의 속설로 되어 있습니다. 자기들을 죽이고자 찾아온 저승사자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두려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자들 가까이 오신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마태복음 14:27)하셨습니다. 그때에 베드로가 말하기를“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위로 오라 하소서”(마태복음 14:28)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오라”하셨습니다. 이때 베드로는 물위를 걸어 예수님께로 나아갔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며 물위로 걸어가던 베드로가 바람과 파도를 바라보자 그만 물속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베드로는 소리 지르며 건져주시기를 간구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즉시 건져주시며 말씀하시기를“믿음이 없는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마태복음 14:31)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풍랑이 일고 있는 바다 위를 걸었습니다. 상상 밖의 기적을 행했습니다. 이처럼 바다 위를 걸었을 때가 언제였습니까? 물위로 걸어오라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예수님만 바라보고 나아갔을 때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바라보던 베드로의 눈이 바람과 파도를 바라보았을 때 그만 무서움이 밀려왔고 그는 물속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같은 바다였습니다. 같은 장소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바라볼 때는 바다 위를 걷는 기적을 체험했으나, 바람과 파도를 바라보았을 때 물속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같은 환경이지만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물위를 걷기도 하고 물속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이 사건은 단순한 베드로 한사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삶의 지혜를 가르쳐 주는 대단히 소중한 교훈입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이 세상은 거센 풍랑이 일고 있는 바다와 같습니다. 그래서 세상을“고해(苦海)”라고 말합니다. 바다에는 항상 풍파가 있듯, 이 세상 역시 항상 고난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풍랑은 누구도 예외가 있을 수 없습니다. 이처럼 누구에게나 고난의 풍랑 끊임없이 밀려옵니다. 이 거친 세파를 이기는 방법을 본문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거친 파도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어떠한 경우의 어려움이라 할지라도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바라볼 때 풍파를 이길 수 있습니다. 파도와 바람을 바라본다면 그 사람은 풍파에 빠져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군인들이 받는 유격 훈련 가운데, 깊은 계곡을 외줄 하나를 의지하여 건너는 것이 있습니다. 수십 미터 계곡 아래에는 험한 바위와 깊은 물이 흐르고 있습니다. 아래를 내려다본다면 현기증이 나서 누구도 건널 수 없습니다. 그러나 건너편 언덕을 바라볼 때 무사히 건널 수 있습니다. 이처럼 무엇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어려운 환경을 이기고 성공자가 될 수도 있고, 그 환경에 짓밟히는 실패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세상을 이긴 사람들은 모두가 다 하나님만 바라보며 살아간 사람들이었습니다. 반면 실패한 사람들은 모두가 세상풍파만 바라보며 살아갔습니다. 실패하고 승리하는 것이 환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의 시각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내 자신이 무엇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성공과 실패, 행복과 불행이 결정됩니다.
2차 대전 때 유럽 연합군 포로수용소에서 군의관들이 만들어낸 새로운 병명이 있었습니다.“가시 철망 병”이란 것입니다. 이는 극도로 우울해지고, 먹어도 살이 안되고, 전신이 쇠약해져 누워만 있으려는 증세였습니다. 원인도 모르고, 치료방법도 없는 병이었습니다. 철망 속에 갇혀있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온 병이라 하여“가시 철망 병(Barbed-wire sickness)”이라는 병명을 붙여 불렀습니다.
이 환자들의 행동을 정신 분석학적으로 면밀히 분석해본 결과 그들은 모든 일에 하루 종일 불평과 불만과 원망으로 매일 매일을 보내는 사람들이었음이 밝혀졌습니다. 다시 말해 불평불만 증후군을 보이는 정신병인 셈입니다. 이들은 날마다 자기를 감옥에 가두고, 희망을 빼앗아가고, 감사할 여유를 박탈해간 수용소의 가시 철망만을 바라보며 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같은 수용소 안에 갇혀 있으면서도 어떤 사람들은 이 병에 걸리지 않고 건강했습니다. 이들에 대하여 조사해본 결과, 그들은 똑같은 환경이지만 들국화도 바라보고, 푸른 하늘에 떠다니는 뭉게구름도 쳐다보고, 고향도 그려보고, 사랑하는 사람도 생각하고, 더욱이 하나님께 기도하며 찬송하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단 한 명도 이 병에 걸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절망적인 환경에 처했을 때 무엇을 바라보는가 하는 것은 이처럼 중요합니다.
모세가 요단강 건너편 가나안 땅을 눈앞에 둔 때에, 열두 정탐꾼들을 보내며 40일간 탐지하고 돌아오도록 했습니다. 같은 땅을 같은 기간 동안 살펴보고 돌아왔는데, 그 시각은 너무도 큰 차이를 보였습니다. 민수기 13장 22절~23절에 보면 열 명의 정탐꾼들은 말하기를“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그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도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를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정탐꾼인 여호수아와 갈렙은 민수기 14장 9절에 말하기를“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똑 같은 상황을 두고 한편 무리는“우리는 그들 보기에 메뚜기와 같다.”고 했으며, 한 편 무리는“저들은 우리의 밥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정 반대의 견해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들이 보고 말한 대로 되었습니다. 그들이 한 말을 하나님께서 낱낱이 다 듣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람들을 보시고 민수기 14장 28절에 말씀하시기를“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대로 그들 보기에 자신들은 메뚜기와 같다고 말한 사람들은 메뚜기처럼 아무 힘없이 광야에서 모두 다 죽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고 말한 여호수아와 갈렙은 자신의 말처럼 그들을 밥 먹듯 삼키고 그 땅을 점령했습니다.
구약성경 사무엘상에는 블레셋 나라가 골리앗 장군을 앞세워 이스라엘을 침략한 전쟁기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골리앗을 바라본 사울 왕을 비롯한 모든 군인들은 불안에 떨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때 형들을 면회하러 간 소년 다윗은 이 광경을 보고 말한 것을 사무엘상 17장 46절-47절 기록하기를“너는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머리를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로 오늘날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다윗이 말한 대로 골리앗은 소년 다윗이 던진 물매 돌에 맞아 죽고, 전쟁에 승리했습니다. 똑 같은 상황이었으나 사울 왕은 블레셋 군대와 골리앗을 보았고, 다윗은 하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영국의 토마스 칼라일 이라는 사람은 세계적인 역사가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7년이란 긴 세월에 걸쳐 <불란서 대 혁명사>의 원고를 탈고했습니다. 칼라일은 더없이 기뻐하며 머리를 식힐 겸 잠시 외출을 했습니다. 칼라일이 잠시 외출한 사이 그 집의 하녀가 방 청소를 하고 난로 불을 피우려고 쏘시개를 찾다가 누렇게 퇴색된 원고뭉치를 못 쓰는 휴지로 착각하고 그것을 불쏘시개로 사용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하여 칼라일이 7년에 걸쳐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불란서 대 혁명사>는 삽시간에 재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밖에서 돌아온 칼라일은 이 사실을 알고 기가 막혔습니다. 그는 일주일 동안 밥도 먹지 않고 실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칼라일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가운데 문득 이러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더 좋은 작품을 쓰라는 하나님의 뜻인지도 모른다. 다시 더 좋은 작품을 쓰자”이렇게 다짐한 그는 다시 7년이란 긴 시간을 전성을 들여 불후의 명저 <불란서 대 혁명사>를 쓰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험한 세상 살아가는 동안 무엇을 바라보시겠습니까? 세상을 살아가는 가운데, 누구에게나 풍파는 있기 마련입니다. 그것은 곧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고난도 염려도 없는 곳이 있습니다. 그 곳은 주검들이 있는 무덤입니다. 풍랑이 내 삶을 엄습해올 때 풍파를 바라보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베드로처럼 무서워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내 목자가 되심을 믿고, 바라며, 간절히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로서 풍랑을 밟고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三. 예수 그리스도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4장 35절에“너희가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느 날 제자들과 사마리아 지역을 통행하셨습니다. 이곳을 지나시면서“수가”라는 동네 우물곁에서 피곤한 몸을 쉬시기 위해 잠시 앉으셨습니다. 그 동안 제자들은 음식을 마련하기 위해 동네로 들어갔고, 예수님은 혼자 우물곁에 계시는데, 바로 그때 한 여인이 물을 길러 나왔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은 만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우물가에서 만난 여인에게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복음을 들은 이 여인은 기뻐하면서 동네로 달려가 만나는 사람들에게“와 보라 이는 그라스도가 아니냐!”(요한복음 4장 29절)하고 전했습니다. 이 여인이 전하는 소식을 듣고 많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몰려오고 있었습니다. 이때에 음식을 구하려갔던 제자들이 와서 음식을 내어 놓으면서“랍비여 잡수소서.”(요한복음 4장 31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양식이 있느니라.”(여한복음 4:32) 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누가 주님께 잡수실 음식을 드렸는가 하고 의아해 했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또 말씀하시기를“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한복음 4:34) 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영적인 말씀인데 제자들은 육신의 양식을 생각했기에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양식이란 예수님의 관심을 양식에 비유하신 것입니다. 지금 제자들의 관심은 무엇입니까? 점심식사를 하기 전이었음으로 시장할 때였습니다. 그래서 동네에 들어가서 먹을 음식을 구해왔습니다. 그러므로 허기를 면하기 위해 얼른 점심식사를 하는 것이 그들의 관심사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관심은 불쌍한 사마리아 여인의 영혼이었습니다. 이 여인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에게 복음을 전하시며 자신이 메시야임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이 여인을 구원시키신 주님의 마음의 만족은 허기진 사람이 배불리 먹은 후의 만족과 같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양식이 있느니라.”(요환복음4:32)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관심은 언제나 영혼 구원이었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관심사는 무엇입니까? 재물입니까? 명예입니까? 건강과 장수입니까? 물론 그것도 중요합니다만 우선 예수님의 관심사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지체인 성도들의 본분입니다. 예수님의 관심사는, 우리 성령님의 관심사는 오직 영혼구원입니다. 한 영혼 한 영혼이 주께 돌아와서 구원 얻게 되기를, 굶주림 사람이 먹을 음식을 찾듯, 오직 영혼구원을 위해 지금도 애타게 기다리시며 이 시간도 일하고 계십니다.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양식이 있느니라.”(요환복음4:32)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요한복음 4장 35절에 말씀하시기를“너희가 넉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고 하셨습니다. 눈을 들어 희어져 추수 때가 된 밭을 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복음을 전하므로 그 자리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구원받은 이 여인이 동네로 달려가서 예수님의 소식을 전하자 곧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달려왔습니다. 이 광경을 가리켜 하신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농사의 파종은 10월 중순경에 하여 4월 중순경에 추수를 하게 됩니다. 아마 이 때가 12월 중순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때는 온 들판에는 푸른 보리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 보리밭 사이로 여자의 증거를 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께로 달려오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구원을 갈망하는 무리들을 보신 예수님은 희어져 추수할 때가 되었다고 하신 것입니다. 희다고 하신 것은 당시 사마리아 사람들이 흰옷을 즐겨 입었으며 흰옷을 입은 무리들이 보리밭 사이로 달려오고 있었기 때문에 이 광경을 보시고 하신 표현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사마리아 여인 한 사람에게 증거된 복음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요환복음 4장 39절에“여자의 말이 그가 나의 행한 모든 것을 내게 말하였다 증거하므로 그 동리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을 먼저 구원하신 후 그 사람을 통해 또 다른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방법을 쓰셨습니다. 영혼구원의 이 귀한 일을 천사를 통해 하지 않으시고 먼저 믿은 우리들을 통해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에 동참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곧 복음증거를 통한 영혼구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가능한 모든 시간에,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가능한 많은 사람들을 전도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삶의 본분이며, 지혜입니다. 이것이 복 받는 길이기도 합니다. 복음증거의 거룩한 역사에 동참하는 사람이 받을 축복에 대해 요한복음 15장 2절에 말씀하시기를“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열매를 많이 맺는 나무는 더 맺게 하시고자 잘 돌보며 가꾸어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특히 세 가지를 바라보라고 하셨습니다.
첫째, 구원을 받기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둘째, 험한 세상 이기기 위해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셋째, 나로 인해 또 다른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추수를 기다리는 무르익은 곡식처럼 구원을 바라는 수많은 불신 영혼들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여기에 생명이 있고, 삶의 승리가 있고, 삶의 보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2:1-10
여러 해 전에 텔레비전에서 개구장이 스머프라는 만화영화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초록색 꼬마들이 주인공인 만화였는데, 등장인물 가운데 투덜이 스머프라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이 친구는 이름대로 입만 열면 투덜댑니다. 매사가 불평이고 불만인 그런 친구였습니다.
실제로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무슨 일에 대해서도 늘 투덜대고 불평을 늘어놓는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함께 여행을 할 때 제일 힘들게 하는 사람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힘든 건 누구나 다 마찬가진데 혼자 힘든 것처럼 힘들어서 못 가겠다거니, 밥이 맛이 없다거니, 왜 이런 길로 가냐느니 하면서 매사에 불평이고 불만인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하고 같이 여행을 하게 되면 다른 사람들까지도 마음이 불편해지고 여행하는 내내 그 사람이 신경 쓰여서 뭘 제대로 할 수가 없게 됩니다.
제가 아는 어떤 교회의 사모님 가운데 그런 분이 한 분 계셨습니다. 해외 한인교회 목사님의 사모님이었는데, 이 분은 뭐가 그리 못마땅한지 매사가 불평이었습니다. 그 교회에서는 한 달에 한번 정도 행사가 있어서 교인들이 음식들을 만들어 와서 함께 밥상공동체를 하곤 했는데, 해외 생활이 대개 그렇지만, 다들 바쁘고 음식 만들 재료 구하기도 만만치 않고 해서 상당히 부담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래도 아무도 불평하지 않고 다들 정성껏 음식들을 만들어 와서 맛있게 나누곤 했는데, 행사가 끝나고 나면 사모님이 항상 불평인 겁니다.
다른 건 다 그만두고라도, 교인들이 저마다 열심히 준비해서 가지고 왔는데, 고맙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으면서, 나중에 들리는 얘기는 교인들이 아무도 안 도와줘서 사모님이 자기 혼자 일 다 했다고 불평하고 다닌다는 겁니다. 그래서 한번은 행사가 있을 때 어떤 집사님이 자기가 주관해서 하겠다고 해서 잘 마쳤는데, 이번에는 또 그게 영 못마땅한 겁니다. 그래서 무슨 일을 그렇게 엉망으로 했냐는 둥, 행사에 참석했던 사람들 보기 창피해서 얼굴을 못 들겠다는 둥 하면서 또 불평인 겁니다. 그 교회 교인 가운데 사모님에게 상처받고 시험 들어서 교회를 떠난 사람들이 하나 둘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불평은 말하는 사람에게도 독이 되고, 듣는 사람에게도 독이 됩니다. 불평은 자기에 관한 일이 아니라고 해도, 듣는 사람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듭니다. 불평하는 말을 자꾸 듣고 있으면 자기도 모르게 자기도 불평하는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불평을 자꾸 하게 되면 모든 게 점점 더 불만스러워지고, 불평할 일들은 점점 더 늘어가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말씀이 바로 이런 불평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불평이 얼마나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나온 지 벌써 여러 해가 지났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에돔이라는 나라 근처에 도착했습니다. 모세는 에돔땅을 지나서 가나안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에돔왕에게 부탁을 했는데, 에돔왕은 거절합니다. 할 수 없이 이스라엘은 에돔을 우회해서 가야 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모세의 형 아론이 세상을 뜨게 됩니다. 그 얼마 전에 모세의 누나 미리암도 세상을 떠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오던 지도자들이 하나씩 둘씩 그들 곁을 떠나고 있었고, 가나안에는 언제쯤 들어가게 될 지 알 수도 없고, 게다가 빠른 길로도 가지 못하고 멀리 돌아서 가야하고, 여러 가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치고 마음이 조급해졌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며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합니다.
“어찌하여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왔습니까? 이 광야에서 우리를 죽이려고 합니까? 먹을 것도 없습니다. 마실 것도 없습니다. 이 보잘것없는 음식은 이제 진저리가 납니다.”
이들의 불평은 정당한 것이었을까요? 그들이 이렇게 먼 길을 돌아와야 했던 것은 그들이 선택한 것이었습니다. 일찍이 하나님께서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레 겁을 먹고 그 길로 가기를 포기하는 바람에 이렇게 먼 길을 돌아와야 했던 것이었습니다. 이건 하나님을 원망할 일도, 모세를 탓할 일도 아닌, 바로 자기 자신들의 결정이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또, 왜 자기들을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왔느냐고 불평합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힘들 때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투덜대던 불평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불평은 정말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나라도 일본의 식민지로 있다가 해방이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어려운 일이 참 많았겠지요.
전에 일본이 지배할 때는 그냥 시키는 대로 하기만 하면 됐지만, 이제는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일을 우리 스스로 알아서 해야 하니까, 얼마나 힘이 들었겠습니까? 게다가 우리는 기술도 없고 자본도 없고 뭐든지 부족한 형편이니, 살림살이가 식민지 시절보다 못한 게 많았을 겁니다. 그렇다고, 왜 우리를 해방시켰냐고 불평할 수 있습니까? 식민지 시절이 더 나았다고, 그 때로 돌아가자고 말하는 게 타당한 일이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런 불평은 그들을 노예상태에서 해방시켜 자유를 주시고 그들에게 자기 땅과 자기들의 나라를 세우게 해주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을 완전히 무시하고,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를 악한 일로 바꾸어놓으려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또 먹을 것도 없다, 마실 것도 없다고 불평합니다. 지금까지 수십 년 동안 굶어죽지 않고 목말라 죽지 않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다 잊어버렸습니다. 방금 전에도 사막에서 바위를 쳐서 물이 쏟아져 나와서 모든 사람들이 시원하게 목을 축였는데, 이미 그 일은 다 잊어버렸습니다. 그들이 진저리가 난다고 하는 보잘 것 없는 음식은 만나를 말합니다. 그들을 오늘까지 살게 해 준 만나가 진저리가 나는 보잘 것 없는 음식이라는 겁니다. 그들은 그들이 경험한 수많은 기적들까지도 불평거리로 만들었습니다. 감사하고 찬양할 일들까지도 불평하는 그들의 마음은 도대체 어떻게 된 걸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왜 이렇게 불평하고 원망하면서 하나님과 모세를 탓하는 것일까요?
불평은 만족하지 못하는 데서 옵니다. 불평은 정말로 뭐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지금 있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깁니다. 다 가지고 있으면서도 하나가 없으면 그게 불만스럽고 불평하게 되는 겁니다. 하얀 색으로 깨끗하게 벽을 칠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한쪽에 조그만 검은색 점이 찍혀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 검은 점에 신경이 쓰이기 시작하면, 다른 흰 부분은 다 눈에 들어오지 않고 오직 검은 점만 눈에 자꾸 띄게 되고, 결국 흰 벽 전체가 그 검은 점 하나 때문에 망쳤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불평이라는 게 꼭 이와 같습니다. 별로 대수롭지 않은 일로 불평을 하기 시작하면, 결국은 다른 모든 것이 다 불평거리가 되고 마는 경험을 우리도 종종 하지 않습니까?
만족하지 못하는 것은, 실제로 뭐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욕심이 많아서 그렇습니다. 아무리 가져도 더 가지고 싶은 욕심, 아무리 많아도 부족해 보이는 욕심 때문에 만족할 줄 모르고, 만족할 줄 모르니까 자꾸만 불평이 생기는 겁니다. 우리가 자꾸 남과 우리를 비교하고, 남들이 가진 것을 부러워하고, 나 자신에게 불평하는 것도 욕심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은 내가 가진 것을 다 가지고 거기다가 내게 없는 것도 가졌습니까? 내가 남을 부러워하듯이, 남도 나를 부러워할 수 있는 건데, 우리는 우리에게 있는 건 생각하지 않고 우리에게 없는 것만 생각하면서 남들을 부러워하고, 불평을 합니다. 욕심 때문입니다.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욕심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끊임없이 불평을 늘어놓은 것이, 정말로 그들이 가진 것이 없고 모든 게 부족하기만 해서였을까요? 그들이 그렇게 초조해하고 조급해진 것이 그들이 사막에서 버려졌기 때문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사막에서 그 어느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그들을 인도하시고,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적절하게 공급해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만족할 줄 모르고 불평만을 늘어놓았습니다. 그들의 욕심이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것이었습니다. 야고보서 1:114-15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시험을 당하는 것은 각각 자기의 욕심에 이끌려서, 꾐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을 낳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욕심 때문에 하나님께 대드는 죄를 지었습니다. 그 죄의 결과는 참으로 참담한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백성들에게 불뱀을 보내셨습니다. 불뱀은 물리면 불에 타는 것처럼 열이 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불뱀이 사람들을 물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많이 죽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거친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켜주셨는데, 그것을 너무나 잘 아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이 광야에서 우리를 죽이려고 하느냐고 원망하고 불평했을 때, 그들의 불평이 그들에게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불평은 불뱀과도 같아서 불평하는 사람 자신을 죽입니다. 그리고 그 불평을 듣는 사람까지도 상하게 합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불뱀은 사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초한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불뱀은 하나님이 보내신 것이라기보다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평 그 자체였는지도 모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내뱉은 불평의 말들이 거꾸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물고 찌르고 죽인 겁니다.
불평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도 그렇지만, 우리 신앙에 있어서 피해야 할 함정입니다. 불평하기 시작하면, 우리가 그 불평에 빠져서 점점 더 불평거리가 많아지고, 그러다보면 거기서 헤어 나오지 못해서 스스로 불평에 파묻혀버리게 됩니다. 불평은 마치 밑 없는 늪과 같아서, 한번 발을 들여놓으면 헤어 나올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불평은 습관성입니다. 한번 두 번 불평하다 보면, 불평이 입에 붙게 되고, 말마다 불평이 되고 우리 삶 자체가 불평이 됩니다. 모든 게 불만스럽고 만족할 줄 모르게 되고 삶에 기쁨이 없어집니다. 불평은 처음에는 조그만 점 하나에 불과하지만, 거기 집착하게 되면 그게 온통 벽을 가득 채워버리게 되는 겁니다. 더구나 불평은 자기 자신만 불행하게 만드는데서 그치지 않고, 함께 있는 사람들, 그 불평의 말을 듣는 다른 사람들까지 불편하게 만들고 불행하게 만들어버리는 무서운 독인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불평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많이 가지고 가득 채우면 불평이 없어질까요? 불평은 실제로 뭐가 부족하고 많이 가지지 못해서 생기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건 아무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불평하지 않으려면 만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 만족하기 위해서는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내 욕망을 채워야 만족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내 욕심을 비워야 만족하게 됩니다.
욕심을 버리려면, 감사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불평하고 불만스러워했던 이유가, 감사할 줄 몰랐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그들을 지키시고 인도하셨는데도 감사할 줄 몰랐기에 그들은 모든 게 불만이었습니다. 그래서 늘 이집트로 돌아가자고 하고, 늘 배고프고 늘 목마르고 늘 초조했던 겁니다. 감사할 줄 모르니까 다른 사람이 나에게 해준 건 기억도 나지 않고, 모든 걸 자기 혼자 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감사할 줄 모르니까 자기가 가진 건 보이지도 않고 남에게 있는 것만 보이게 됩니다.
아까 어떤 해외 한인교회 사모님 이야기를 했었는데,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답니다. 그날도 교회에서 행사가 있어서 교인들이 음식을 하나씩 만들어 왔는데, 한 집사님이 좀 늦게 가지고 왔답니다. 사모님은 다짜고짜 화를 내면서, 집사가 도대체 뭐하는 사람이냐, 이제 가지고 오면 어떻게 하느냐, 자기가 맡은 일도 제대로 못하면서 무슨 집사냐 하고 막 몰아붙였다는 겁니다. 그 집사님은 잠자코 듣고 있더니, 자기가 오늘 도저히 교회에 올 수 없는 형편이었는데, 다른 사람 편에 음식만 보내려고 하다가 그래도 사모님 얼굴이라도 보고 가려고 굳이 왔노라고 하고는 돌아갔답니다. 그 후로 그분 가족들을 교회에서 볼 수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해외 생활하면서 그렇게 바쁘고 힘든 상황에서 그래도 교회 일이니까 최선을 다해서 봉사하려고 하는 교인들을 보면서, 고마운 줄 알고 감사해야 할 텐데, 감사할 줄 모르면 마땅히 감사하고 고마워해야 할 일 까지도 불만스럽고 불평하게 됩니다. 우리가 불평하는 건 감사할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감사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있으면 있어서 감사하고, 없으면 없어서 더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건강하면 건강해서 감사하고, 아프면 아파서 감사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어떤 외국 아이가 이런 글을 썼습니다. 오늘 나는 버스 안에서 아름다운 금발 소녀를 보았어요. 소녀는 무척 쾌활해 보였고, 나도 저렇게 예뻤으면 하고 부러워하며 생각했어요. 그런데 버스에서 내리려는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난 소녀가 한쪽 목발을 짚은 채 통로를 절뚝거리며 걸어갔어요. 소녀는 통로를 지나가며 가만히 웃었어요. 오, 하나님, 제가 투덜거리거든 용서하세요. 제게는 다리가 두 개나 있어요. 세상에 부러울 게 없잖아요.
난 사탕을 사려고 걸음을 멈추었어요. 사탕 파는 소년이 매력적이었어요. 말을 걸자 소년은 무척 기뻐하는 것 같았어요. 혹시 내가 지각하더라도 그리 나쁠 것 같지는 않았어요. 그러다가 내가 떠나려 할 때 소년이 말했어요. “고마워, 친절하게 대해주어서... 너랑 이야기하면 정말 즐거워. 알다시피 난 볼 수가 없어.” 오, 하나님, 제가 투덜거리거든 용서하세요. 제게는 눈이 두 개나 있어요. 세상에 부러울 게 없잖아요.
그후 거리를 지나가다가 눈이 파란 아이를 보았어요. 그 아이는 뛰노는 아이들을 바라보았어요. 아이는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나는 걸음을 멈추고 말했지요. “얘야, 너도 가서 아이들과 놀지 그러니?” 아이는 앞만 뚫어지게 바라보았어요. 그제서야 난 아이가 듣지 못한다는 걸 알았어요. 오, 하나님, 제가 투덜거리거든 용서하세요. 제게는 귀가 두 개나 있어 세상에 부러울 게 없잖아요.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갈 수 있는 다리가 있고 타오르는 저녁노을을 볼 수 있는 눈이 있고 듣고 싶은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가 있으니 오, 하나님, 제가 투덜거리거든 용서하세요.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고, 나에게 필요한 것을 아시고, 채워주십니다. 이 사실을 믿고 감사해야 합니다. 감사하지 못하는 건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이지요. 나에게 필요하지도 않고 나에게 해로운 것을 주시지 않았다고 불평하고 투덜대고 원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혹시 나에게 무엇인가가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간구하면 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면 하나님께서 주실 것이고,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어떤 것도 불평할 이유, 원망할 근거는 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뱀에 물려서 많이 죽게 되자 백성이 모세에게 와서 간구합니다. “주님과 어른을 원망함으로써 우리가 죄를 지었습니다. 이 뱀이 우리에게서 물러가게 해달라고 주님께 기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모세가 하나님께 백성들을 살려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불뱀의 모양을 만들어서 기둥 위에 달아놓고서, 뱀에 물린 사람이 그것을 보면 살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모세는 구리로 뱀의 모양을 만들어서 기둥 위에 달아놓았고, 뱀에게 물린 사람이 구리로 만든 그 뱀을 쳐다보면 살아났습니다.
우리는 언제 불평을 합니까? 언제나 지금 우리가 있는 환경이나 우리의 모습을 보고 불평합니다. 먼 장래를 내다보며 불평하지는 않습니다. 지금 당장 내 주변의 모습이나 나 자신의 모습이 만족스럽지 않고, 우리 욕심 같지 않아서 불평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고개를 들어 높이 달린 불뱀을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더 멀리, 더 높이 바라보는 사람은 불평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사람은 불평할 이유가 없어집니다. 지금 당장의 모습이 구차하고 부족해도, 지금 당장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운동선수가 훈련을 하면서 힘들고 지쳐도 불평하지 않는 것은, 경기에서 우승할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소망을 갖지 못한 채 그냥 훈련만 하고 있다면 오래 가지 못해 지쳐서 포기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불평을 늘어놓은 것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리라는 소망을 굳게 지키지 못하고, 당장 광야 생활의 어려움만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도, 지금 당장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힘들고 어려운 일들만 생각하면 불평하게 됩니다. 그런 일들이 좀 오래 계속되면 지치고 초조해지게 되고, 우리의 불평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갑니다. 결국 신앙을 포기하고 주저앉는 사람들도 나오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까지도 우리를 지키시고 은혜 안에 살게 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복주시며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시리라는 소망이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한 겨울의 추위를 이겨낼 수 있는 것은 곧 봄이 오리라는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겪는 아픔과 슬픔을 이겨낼 수 있는 것은 아픔이나 슬픔이 금방 지나가리라는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더 이상 아픔도 없고 눈물도 없는 하나님 나라로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소망 때문에 우리는 불평할 수 없습니다. 불평해서는 안 되는 겁니다. 소망이 우리가 불평하지 않는 이유입니다.
신앙생활에서 그리고 우리의 교회 생활에서 우리는 불평하지 맙시다. 불평은 자기도 다치게 하고 다른 사람도 상하게 하는 독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오직 감사뿐입니다. 우리 삶이 고달프고 누추하다고 불평하지 맙시다. 그것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입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 많지 않고 부족한 것 투성이라고 불평하지 맙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서 채워주시고, 우리를 만족하게 해주십니다. 일이 잘 안 풀리고 억울하고 속상하다고 불평하지 맙시다. 하나님은 이미 다 아시고, 우리가 갈 길을 열어놓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할 일은 불평이 아니라 감사입니다. 우리가 가질 것은 불평이 아니라 소망입니다. 소망 가운데 범사에 감사하며 살아가시는 성도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출처: 은혜로운 향기 글쓴이: 경이로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