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원기 94년 12월 5일 토요정례법회 ○
☆ 청년 강연
서품 6장과 일산 이재철 선진님을 주제로 청년 6단 류현진 교우님의 강연이 있었습니다.
★ 김제원 교무님 설법
일산님 같은 경우는 대종사님과 구도과정만 같이 안 하셨지 대각 이후 대종사님과 그대로 같이 일을 보좌하시고 쭉 함께 하셨다.
대종사님이 먼저 6월에 가시고 당신은 11월에 가셨다.
일산님을 볼 때 대종사님보다야 얼굴도 사실 딸리죠. 사심이 많은 사람은 일산님이 더 멋있게 보인다.
일산님의 몇 가지 특이한 점을 같이 생각을 해보자.
특히 현진교우가 강연을 잘 한 것이 남 얘기를 하듯 하지 않은 것이다.
소개에서 그치지 않고 본인과 결부시켜서 생각해보고 대조해보고 한 것이 참 잘 했다.
그래서 더 공감이 되고 지식차원에서 그치지 않고 본인의 마음공부에 연결이 된 것 같다.
어떤 일을 할 때 나와 연결시켜서 하는 것이 참 중요하다.
제가 부직자 때 어떤 의견을 내면 제가 모시고 있던 교무님께서 “너라면 하겠냐?”고 항상 되물으셨다.
너는 안 할려면서 그 의견을 내놓지 말라고 하셨다. 니가 좋을 때 다른 사람도 좋다.
너라면 할 수 있는 것을 의견을 내서 해라. 자기는 빠지만셔 너희들만 해라 하는 경우가 있다.
저도 억울한 경우가 있다. +1 법회에 자기는 빠지면서 교무님은 법회봐라고 한다.
나는 명절 때 쉴테니 교무님은 법회를 봐라. 그래서 1월2일 청년법회를 쉬기로 했다.
1월1일 신정절기념식을 하고 3일날 익산총부에 가서 종법사님 신년하례를 갈 것이다.
앞으로 매년 신정절 후 첫 번째 일요일은 총부에 가서 기도도 하고 종법사님 법문도 받들고
종법사님 기운도 받아서 한 해를 잘 살 수 있도록 할 것이다.
일반 교도님들은 거의 빠지지 않고 간다. 청년들은 아직 잘 몰라서 관심없어서 안 가는 사람도 있을 수도 있는데,
그런 사람은 남들 은덕 입을 때 자기는 못입을지도 모른다.
어른을 뵌 다는 것. 또 종법사님이 법력도 있으시지만 많은 대중이 그 분을 받드는 신앙적 기운들이
우리에게 다시 또 위력적으로 환원된다는 것을 생각을 해봤으면 좋겠다.
일산님은 아버지가 함평 영광지방의 동학 접주셨다. 동학이라는 것이 세계적으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우리 나라 국력이 세지면 동학에 대해 많은 연구가 될 것이다.
교무님 중에 한 분은 우리나라에서 동학에 대해 가장 큰 권위를 가지고 계시고 도올 김용옥 선생도 그 분야에 관심도 많고
옛날에 개벽이라는 영화도 김용옥씨가 기획을 해서 만든 것이었다.
동학이라는 것이 원불교와도 관계가 있고 한국사에서 대단한 의미가 있다.
양반들이 일으킨 것이 아니라 농민들이 외세에 의하지 않고 자체적으로 한 것으로 상당히 큰 의미가 있다.
그런 동학 접주의 아들이 일산 이재철님이시다. 4남매 중에 아들이 딱 하나였다. 독자였다.
아까 현진교우가 말했듯이 영광지방에서 “봉사가 만져봐도 양반”이라고 했다.
옷매무세 말씨 눈빛 인물 모든 행동거지가 양반의 표상같은 분이셨다. 그 쪽 집안이 인물들이 다 좋으시다.
한산님 같은 경우도 운타원님이 “한산님 같은 분만 계시면 결혼을 하겠다”고 하실 정도 였다.
한산님 설법을 듣고 출가할 마음을 내시기도 했다. 그 분의 설득력 인물 대의가 그렇게 훌륭하신 분이다.
일산님은 외교 뿐만 아니라 경제에도 밝으셨고 도산님도 보화당도 세우시고 신용협동조합을 운영하셨다.
고산님은 달마도 글씨 선에 일가견이 있으셨다. 다 교정원장도 하셨다. 아까 서정원장이 교정원장이다.
도산님도 열반하셨을 때 대종사님이 평펑 우셨다는 법문이 있다.
고산법사님도 아마 교정원장 교령 등을 하셨다. 고산법사님은 사실 대산종사님과 쌍벽을 이룰 정도로 능력도 있으셨다.
일본에서 스님들이 찾아와서 알현하고 가기도 했다.
응산종사님도 많은 일을 하셨다. 대종사님이 아주 아끼신 집안이었고 또 대종사님께 많은 보은을 했다.
그 집안에 전무출신들이 수십명이 나와서 교단에 보은을 하셨다.
일산님의 손녀가 정타원 이정은 교무님 대구교구장으로 퇴임하셨다.
사실 우리 교당의 복사기도 일산님 손자분이 사주셨다. 이윤성씨라고 강남쪽에서 사무기기 사업을 하신다. 원로원에도 기증을 하셨다.
고산님을 운타원님이 모셨고, 제가 운타원님을 모셨다.
태성교우도 그렇고 동기 교무 중에 도산님 집안이 있는데 저와 아주 잘 통하는 면이 있었다.
초기역사라 그런지 몰라도 대종경 선진님들을 하다보니까 직접적으로 나도 많은 은혜를 받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분도 조금만 생각해보면 제가 그 분들에게 은혜를 입어서 여러분들에게 나누는 것이 되니까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 은혜를 받은 것이다.
일산님은 사산 오창건 선진님이 인도를 하셨다.
처음에 만났는데 일산님은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어머니를 모시고 살면서 마음에 이 세상이 혼란한데
그것을 끌어갈 의인이 없다는 것을 한탄하며 살고 있었다.
그러다가 대종사님을 만났는데 대종사님이 나는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하시며 의중을 물으셨다. 개교의 동기죠.
그런 포부를 말씀을 하시니까 일산님이 그것을 듣더니 환희용약.
너무 기뻐하시면서 바로 그 자리에서 스승으로 모시겠습니다 하며 사제지의를 맺으셨다.
일산님의 부드러운 모습도 있지만 강직한 모습도 많이 있다. 부드럽지만 강직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
결정을 잘 못한다. 그런데 일산님은 바로 결정을 탁 하셨다.
원만성을 두루 갖추셨다. 그 후 방언공사 저축조합 혈인법인 등을 같이 하면서 원망하기도 했다고 한다.
일을 안 해봐서 같이 일 하는데 자기는 너무 힘들어 하니까 그런 것 때문에 편히 지냈던 것에 대해서 후회하시기도 했다고 한다.
대종사님이 내가 꿈에 이런 책을 봤으니 구해다달라고 하신 말씀을 받들고 불갑사에 가서 금강경을 가져다주신다.
일산님도 생일이 몇 달 빠르다. 약간 동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바로 스승으로 모시고 절대적으로 받드는 모습이 정말 대단하다.
그 자리에서 사제지의를 맺으면서 대종사님이 비범하다는 것을 알았는데 그런 것을 몸에서 찾으려고 하셨다.
그래서 아까 현진교우가 말한 것처럼 상투머리를 틀어서 머리에 이적같이 보이셔서 그런 짓 그만하라고 하셨다.
대종사님이 40명 중에 그런 허망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떨궈내고 8명만 남겼는데 그 분들도 그런 것이 없지 않았다.
팔산님도 한문을 숭상하니까 받아적으라고 하면서 막 불러내시니까 팔산님이 이 양반이 촌양반이 아니네 하셨고,
책을 갖다 태우라고 했을 때 아까워서 돌 밑에 감춰놓으니까 대종사님이 돌 밑에 뭐가 있는 것 같다고 하셨다.
삼산님은 학구적으로 받들어주셨고 일산님은 외교적으로나 원불교 방어막으로 하셨고 팔산님은 기개있게 후원도 해주시고 강단있게 해주셨다.
팔산님은 나이도 훨씬 많고 일산님은 동갑이다.
그 유가집안의 영광바닥에서 나이가 훨씬 많거나 동갑인데 스승으로 받들게 된 것이 대종사님의 어떤 능력이신가 하는 생각이 든다.
대종사님의 위력 또 그것을 받드는 제자들의 마음이 얼마나 훌륭하고 소중했느냐?
멀리서 지내왔던 것도 아니고 같은 동네에서 친구고 동생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제지간의 관계로 한 것이 대종사님이 역시 주세불이구나 그분들을 강하게 끌고 갈 수 있는 강한 힘이 있으시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든다.
일산님은 당신을 세우시지 않으셨다. 어떻게 하든 대종사님께 다 밀어드렸다.
인물도 좋으시고 똑똑하신데 당신이 박수 받을만 하다. 요즘 탤런트 못지 않다.
인물만 그런 것이 아니라 키도 그렇고 학식도 그렇고 심법도 그렇다. 그래도 대종사님께 다 바쳤다.
아까 대의에 맞다는 법문도 그렇다. 대종사님을 받드는 마음이 나온다. 대종사님은 다 아신다. 대의 대체를 아는 것이다.
이 대종사님을 향하게 하는 마음. 그런 것들이 훌륭하신 것이다.
저도 여기에 근무하면서 대종사님을 앞세우고 종법사님을 앞세우는 그 분들을 받드는 마음이 얼마나 앞서느냐?
여러분도 단장이 자기 인연만 만들고 교무에게 연결을 안 시킨다던가.
자기를 자꾸 드러내면 힘이 나고 안 드러나면 힘이 안나고 할 것인가. 일산님은 그렇지 않고 그대로 주인정신으로 사신 것이다.
원불교 일을 당신 일처럼 하셨다. 그러면서 모든 것을 다 대종사님께 밀어드린 것이 정말로 아름다운 심법이다.
정말로 훌륭한 사람이라는 것은 그런데서 찾을 수 있다.
학벌 좋고 그런 것도 좋지만 그 사람의 심법이 어른을 스승을 향해서 받들어 드리고
어떤 어려운 일이 있으면 나서서 해결하고 좋은 일 있으면 자기는 쏙 빠져준다.
전무출신의 도에 보면 몸은 천하의 뒤에 서서 일하고 마음은 천하의 앞에 서서 일한다는 것이 있다.
전무출신 뿐만 아니라 원불교의 제대로 된 교도라면 이 정신이 맞다. 몸은 천하의 뒤에 서서 온갖 굳은 일을 다 한다.
그러나 마음은 우주를 감싸고도 남고 스승님을 받들면서 창생을 제도하는 마음으로 하신다.
자칫하면 이것이 따로 논다.
우주의 큰 마음을 가지니까 소소한 일을 못하거나 소소한 일을 하니까 큰 마음을 못 갖는다.
그런데 몸과 마음이 확실하게 위 아래를 다 해나갈 수 있는 그것이 전무출신의 정신이고 원불교도의 정신이다.
참 나를 아는 사람이라면 초기교단의 현실을 아는 사람이라면
대종사님의 이념 목적 제생의세의 정신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교당을 보니 똘똘하고 돈도 있고 인물도 좋다. 그런데 겨우 교당에 오는 것이 자기 박수받으려고 온다.
사회에서 대우 받은만큼 대우 받으려고 하고 대우받은만큼만 하려고 한다. 그것은 아니다.
이 법당에 들어오면 누구나 평등해야 한다.
잘난 사람이 더 하심해야 한다. 교무도 잘난 사람이 더 대종사님을 종법사님을 받드는 것이 예이고 도이다.
그것이 진정한 큰 사람이다. 그것이 제대로 된 신앙적인 심법 이다.
거짓 나에 속으면 자꾸 나를 드러내려고 하고 자꾸 나를 드러내려고 한다.
교당 일도 대중 앞에 박수 받는 일은 중간에 포기를 잘 안 하고 어떻게든 끝까지 가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타이핑 하는 것처럼 뒤에서 하는 것은 1년을 가기가 힘들다. 이것은 사람이 계속 바뀐다.
타이핑 하는 것이 사람이 제일 많이 바뀐다.
일산님 같이 그렇게 훌륭한 인품을 갖추셨지만 그렇게 대종사님을 받들어드리고 하심하는 모습이 성자다운 모습이시고
스승을 제대로 받드는 모습 아니겠느냐?
아까 조광지 얘기가 나왔다.
보통 박수 받을 일에는 제가 할게요 하고 나서는데 곤란한 일 욕얻어 먹는 일 쪽팔리는 일에는 잘 안 나서려고 한다.
이것은 그냥 상식적으로 말씀드리는 얘기다.
교무님과 부교무님의 관계에서 보면 교도와 얽힐 수도 있다.
누가 그 사람을 섭섭하게 했느냐 할 때 훌륭한 부직자는
“죄송합니다. 교무님은 이렇게 시키셨는데 제가 몰라서 어두워서 부족해서 못해드려서 이렇게 되었습니다.”한다.
욕 얻어먹는 일은 자기가 나선다. 지혜가 부족한 부직자는 자기가 잘못한 것도 가만히 있던지 자기가 빠져버린다.
이것이 왜 그러느냐? 나라는 것. 소아를 벗어버려야하는데 소아에 묶여버리면 자기의 치부를 가리려고 한다.
약자일수록 그렇다. 약자일수록 방어기제가 크다.
강자들은 얼마든지 내가 잘못 안 했어도 잘못했다고 할 수 있고 저 사람이 거짓말 하는 것을 알면서도 속아주는 척한다.
그것이 강자의 모습이다.
약자들은 자기가 잘못한 것도 방어를 하고 조금만 잘 해도 자랑하고 싶어 한다. 이것이 강자 약자의 차이이다.
하다보면 억울한 일이 있을 수도 있고 때로는 몰라줄 때도 있고 때로는 섭섭한 일도 있다.
이 때도 그런가보다 하고 받아줄 수 있어야 하는데 내가 좁은 마음에 있으면 바로바로 반응해버린다. 아
닌데요 아닌데요 하면서 방어를 한다.
직장에서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직장에서도 마음공부라는 것은 삼학이라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내가 모시는 상사를 드러나게 해주고 안 좋은 것은 막아주어야하는 것이다.
주먹세계 같이 내가 처자식 해결해줄테니까 니가 감옥에 다녀와라 하는 것이 아니다.
내 상사를 내가 드러나게 해주고 빛나게 해주고 내가 잘못 안 했어도 상사가 곤란하면 내가 받아버리고.
이런 심법이 있는 사람은 상사가 끌어줄 것이고 내가 상사가 되었을 때 이런 인연들이 온다.
꼭 그런 것은 아니고 배신하기도 하지만 이렇게 하는 것이 큰 사람이다.
많은 사람이 착각한다. 안암교당 떠나면 저 안 볼 것 같죠? 직장 떠나면 그 상사 안 볼 것 같죠? 해외로 도망가면 안 볼 거 같죠?
현실적으로 몇 다리 건너면 다 만나게 되어있다. 그리고 진리적으로도 그 빚이 절대 안 없어진다.
배신하고 도망간 것은 진리적으로 절대 없어지지 않는다.
은혜를 준 것도 마찬가지이다. 은혜를 줬는데 몰라준다고 실망할 필요없다. 결국은 알아준다.
몰라준다하더라도 결국은 순환의 이치를 따라서 나온다.
인과품 법문을 보면 뒤에서 모르게 욕하는 것도 다 천지가 알아서 기운이 응한다. 뒤에서 모르게 칭찬 하는 것도 다 연결이 된다.
저도 잘 몰랐었는데 살아보니까 어떤 사람에게 안 좋은 기운을 가지고 있으면 묘하게 그 사람도 나에게 해꼬지를 하거나 얽히게 되더라. 뒤에서 욕했는데 그 사람은 나에게 잘해주는 일이 있나? 그 사람은 대단한 심법이다. 대개 그렇지 않다.
나에게도 짚어봐야한다. 왜 그럴까? 내가 모르게 그런 마음을 갖지 않았었나 하는 생각을 해볼 필요가 있다.
원불교를 다니면 저 사람을 만나면 생각이 깊다. 참 심법이 넓다. 뜻이 참 크다. 대의가 있다. 저 사람이 하는 일을 도와주고 싶다.
이렇게 되어야 한다.
만날수록 쫌팽이 같고 뺀질이 같고 미꾸라지 같으면 안된다.
경계따라 마음은 능소능대하다. 마음이라는 것은 본래 크다고 할 것도 없고 작다고 할 것도 없다.
경계를 만났을 때 내가 그러지 않아도 될만한데 마음이 넓게 쓰여지기도 하고 내가 생각하기에도 왜 이렇게 마음이 좁게 쓰여질까 할 때도 있다.
그런데 그 때도 한 마음 잘 챙기면 바꿔서 쓸 수도 있다. 이게 대소유무다. 본래 크고 작고가 없다. 이것이 대이다.
그런데 경계따라 얼마든지 커질수도 작아질 수도 있다. 이것이 소다. 그런데 또 유무따라 변한다. 내 마음이 그렇다는 것이다.
마음공부는 이 유무자리를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
원래 크고 작고 하는 것이 없다는 것을 깨쳐서 그리고 경계따라 얼마든지 클수도 있고 작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서.
그 때 마음공부를 어떻게 해서 마음을 쓸 것인가? 습관대로 쓸 것인가? 욕심나는대로 쓸 것인가? 감정대로 쓸 것인가?
아니면 그것을 탁 챙겨서 서원에 대조해서 법문에 대조해서 스승님 마음에 대조해서 얼마든지 그것을 바꿔 나갈 수 있다.
이게 우리의 마음공부이다.
원불교를 만난 사람들은 일원상같은 마음을 가졌으면 좋겠다. 우주를 다 담아도 남아야지.
마음을 좁게 쓰는 사람은 자기가 봐도 자기가 안 이쁠 것이다. 때로는 좀 손해를 봐도 된다.
잔머리 써서 이해관계만 따지지 말고 이해를 넘어서서 시비를 보고, 더 넘어서서 대소유무를 보고 능소능대하게 마음을 쓴다면
그 사람은 일원상의 진리를 그대로 적용한 사람이다.
이해만 보고 살 것이냐? 아니면 더 나아가서 옳은가 그른가?
옳다면 손해를 보고 힘들 것 같아도 내가 하든가. 더 나아가서 마음공부의 원리에 대조해서 내 마음이 이렇구나 하는 것을 알아채고.
이것이 일과 이치가 다 같이 연마가 된다.
공부라는 것이 정신수양 따로 배우고 사리연구 따로 배우고 하지만 실지의 경계에서는 일과 이치가 따로 아니다.
동시에 대소유무 시비이해가 같이 돌아간다. 동시에 수양연구취사가 함께 돌아간다.
명절대재 때도 주인정신에 대해서 말했다. 성불제중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주인정신으로 살면 그것이 삼학공부이다.
주인정신이 있으면 그 일 그 일에 일심이 되고, 그 일 그 일에 적극적으로 내 일처럼 찾아서 해 나간다.
이것이 주인정신이고 삼학공부를 제대로 하는 것이다. 일산님은 그렇게 하셨다.
대종사님이 시키신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알아서 주인정신으로 이것은 이렇게 처리 저것은 저렇게 처리하셨다.
대종사님은 일산님이나 도산님께 일 시키시고 별로 걱정을 안 하셨을 것 같다.
예를 들어 은선 교우의 상사가 내가 저 사람에게 일을 맡기면 걱정이 없다 할 것이냐
아니면 저 사람에게 일만 시키면 걱정이 되는 사람이 될 것이냐?
여기서도 각 부장 수석차장 차장이 있는데, 교무님 제 일은 알아서 잘 하겠습니다 할 것인가?
아니면 눈치보거나 뭐라고 하면 ‘교무님 그럴 수도 있지 왜 부드럽게 안 하십니까’ 할 것인가?
대종사님은 복이 너무너무 많으신 것 같다.
초기 교단에 정말로 어려운 상황에서도 제자들이 이탈이 없이 다 같이 가셨다.
대종사님의 위덕이시고 그 분들의 신심이시고 그런 것 같다.
그 중에 한 분이 바로 일산님이시다. 주인공이라는 것이 대장만 해서 주인공인 것은 아니다.
일산님도 우리 교단에서 대종사님 못지않은 주인공으로 사셨다. 당신이 가진 재주와 능력과 역량을 가지고 새부처님을 보좌하셨다.
보좌가 주인공 아닌 것이 아니다.
요즘 선덕여왕에서도 고현정이 주연이 아니고 조연이지만 주연보다 더 주목받고 떴다.
그것이 바로 처처불상 시대에 맞는 얘기이다.
옛날 미국영화를 보면 한 놈만 불사신이다. 남들은 살짝만 맞아도 다 죽고 자기만 산다.
그런데 요즘엔 드라마를 봐도 주연도 조연도 다 같이 산다. 이것이 처처불상 사상에 맞다.
자기도 좀 다칠 수도 있어야지 혼자만 불사신인가? 너도 부처 나도 부처. 너도 주인공 나도 주인공. 이것이 맞다.
안암교당에 여기 앉아있는 여러분도 제원교무만 주인. 종법사님만 주인하는 분이 있습니까? 저는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뉴스를 보다보면 프로농구 A팀과 B팀이 싸웠는데 A팀의 누가 잘 해서 이겼습니다.
하면 자기 혼자 열심히 하고 다른 선수들은 다 뒷바라지만 하고 아무 것도 안 했나?
아나운서가 그 사람을 칭찬하는 것은 좋지만 다른 사람들은 뭐가 되는가?
축구할 때 골 넣은 사람만 있어야 하는가? 수비도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수비가 있어야 골을 막고 공격을 받춰줄 수 있다. 골을 넣은 사람과 수비하는 사람이 똑같이 중요하다.
11명이 다 중요하다. 야구도 마찬가지이다. 다 중요하지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안암교당에서도 마찬가지다. 구인제자가 다 중요하고 다 그 역할을 해 냈듯이.
나머지는 시다바리가 아니라 다 같이 했듯이 여기서도 마찬가지이다.
원불교에서도 종법사님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다 같이 주인이 되어서.
주인(主人)은 누구냐? 왕(王)보다 높은 사람이다. 공(公, 空)을 아는 사람이다. 주인공이라고 한다.
주인은 바로 자기의 참 존재를 깨치고 참 존재를 위해서 활동하는 사람이다.
직책의 높낮이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오래 있었느냐 없었느냐에 있는 것도 아니다.
물론 회장이 더 열심히 하긴 하겠지만 단장도 중앙도 단원도 부장도 수석차장도 차장도 다 중요하다.
부장 수석차장은 회의에 일찍 오고 그냥 차장은 늦게 오는가? 이것은 주인의식이 아니다.
자기 스스로 주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일산님이 대종사님이 시키신 일만 했을 것 같은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당신이 알아서 챙겨서 하셨다.
직책의 유무를 떠나서 남이 알아주든 몰라주든. 알아주면 힘이 나긴 한다.
그런데 생각해봐라. 내가 나를 알아줘야한다. 공부의 초반에는 타력이 중요하다.
그런데 궁극적으로는 자력이다. 그 자력은 몰라줘도 상관없다. 중요한 직책을 안 맡아도 상관없다.
나는 이번에 단장 중앙 안 맡아서 편하다? 이것은 주인이 아니다.
단원일 때 어영부영 했는데 단장중앙되서 열심히 하면 다른 사람들은 ‘너도 단원 때 열심히 안 했으니 나도 열심히 안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생각을 안 하려고 해도 그런 생각이 든다. 언제 어떻게 입장이 바뀔지 모른다.
코메디를 보면 길 다가 처음 본 사람인데 부딪히고 싸웠다. 그런데 나중에 봤더니 장인어른 될 사람이다. 아니면 오늘 면접관이다.
그런 예화가 많이 있다.
시골교당 교무님이 도시에 있는 교무님에게 단상 하나만 사달라고 했다. 한 사람은 안 사주고 한 사람은 3개가 있었는데
그 중에 안 좋은 것을 줬다. 그런데 나중에 봤더니 내가 그 교당으로 발령을 가게 되었다.
“그 때 좋은 거 사줄걸..” 하셨다고 한다.
일산님 참 멋있죠?
어떤 사람은 멋있게 생겨서 여자나 사귀러 다니고 어떤 사람은 자기 얼굴 자랑하러 다니는데
일산님은 그 잘생긴 얼굴로 사적으로 하지 않으시고 공적으로 활용해서 쓰셨다.
일산님의 공심. 그 공심에 경의를 표하고 저런 선진님을 모시게 되었다는 것에 대해서 정말로 감사하고
우리도 그런 선진님의 발자취를 나에게 대입시켜서 해 나간다면 스승님에 대한 보은도 되고 내 진급도 될 것이다.
☆ 질문과 답변
오선허 교우님 : 직장에서 무능한 상사가 있는데 그 무능한 상사가 동료들에게 미움을 받고 공공의 적이다.
강자는 이럴 때 어떻게 처신해야 합니까?
교무님 : 살다보면 상사가 나보다 똑똑한 사람도 있고 혹시 부족한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정말 훌륭한 사람은 어떻게 할 것 같은가?
어떤 제자가 “스승의 허물이 보이면 어떻게 해야합니까?” 하고 질문을 했다. “니가 복이 없는 것을 한탄해라.”
그리고 니가 채워드려라. 그것이 참으로 큰 심법이다.
원불교인의 심법이다.
직장 상사 중에는 전생의 닦은 바 업력도 다르고 습관도 다르고 인연도 다르고 능력도 다르고 스타일도 다르다.
그런데 그것을 이것은 잘 하지만 저것은 못한다고 시비만 할 것인가?
잘하는 것은 배우고 부족한 것을 내가 채워드릴 것인가?
너무 예민해도 안된다. 전투적이어도 안된다.
전투적인 생각은 남들이 안 하려는 것을 내가 한다는 쪽으로 해야지
겨우 한 다는 것이 상사에게 달려들고 뒤에서 씹고 이간질하고 몰아내자고 해야하겠는가?
어떤 사람은 가는 데마다 상사를 몰아내려고 한다. 단체에서 제일 나쁜 놈이다. 제일 죄업이 크다.
부족한 상사가 있으면 메워드리고 보태드리고 나는 빠지면 된다. 채워드리고 내가 나서면 그런 사람은 클 수가 없다.
그 불만족스러움을 어떻게 처리하면 되는가? 그것을 받들면서 내가 실력을 키워 장이 되었을 때 그것을 해결하면 된다.
저도 부교무 때 불만이 있었다. 저에게도 여러분이 불만이 있을 것이다. 부교무님도 불만이 있을 수 있다.
인연따라 특성따라 그럴 수도 있고 내가 잘못봐서 그럴 수도 있고 그것이 사실일 때도 있다.
부직자 때 좋은 방법이 있으면 일단 건의를 해본다. 교무님이 안 들어주시면 안한다.
나중에 내가 장이 되었을 때 그 개선안을 내놓고 펼치면 된다. 완벽한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완벽한 조직의 문화가 어디 있겠느냐?
완벽한 사회를 만들어가려는 노력이고 내가 그것에 일조하려고 태어나서 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뒤에서 쑤시고 어지럽게 만들려고 나온 사람이 아니다.
내가 들어가서 그런 것을 잠재우는 사람인가? 분란을 일으키는 사람인가?
그러면 또 어떤 사람은 원불교는 너무 기백이 없겠네요?
진짜 기백이라는 것은 도와줄 자리에 도와주고 개선할 것은 개선안을 내놓고 남들 안볼 때 적극적으로 하는 것이다.
청소 하나만 해도 다르다. 요즘 수한교우과 선허교우가 청소를 열심히 해서 복도와 소법당이 깨끗하다.
청소를 안 하면 기운이 맑지 않다. 그런데 청소를 깨끗이 하면 기운이 깔끔하고 맑다.
내가 있는 직장 집에서 누가 보든 안 보든, 시켜서만이 아니라 안 시켜도.
한 번 시켰으면 그 다음부터는 알아서 하고, 안 시켜도 알아서 한다면
그 사람들의 마음에 기쁨과 희망을 주고 낙원세상을 건설하는 것이 아니냐?
꼭 시켜서만 하고 보일 때만 해야 하는가? 찾아서 하는 것이 주인이다.
그러면 저 사람이 인정을 안해줘도 내가 스스로 이쁘다. 내가 스스로 기쁘다. 기쁨이라는 것이 인정을 받았을 때도 기쁘다.
그런데 인정이라는 것은 내가 요구한다고 해서 오는 것이 아니다. 그건 그 사람 마음이다.
요구는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을 조용히 알아서 하다보면 묘하게 다 안다.
사은님이 알고 직장상사도 다 안다. 설사 몰라도 그 사람이 나가고 나면 더 확실히 안다.
“저 사람이 보물이었네.” 그런데 나가고 났더니 “아 시원하다” 이러면 되겠습니까?
삼학팔조 몰라도 그 사람이 나가고 났더니 그 사람이 보물이었구나 하는 사람이 진짜 마음공부 잘 하는 사람이다.
결석 안 했어도 그 사람 나가고 나서 “그 놈 잘 갔다.” 하는 사람은 문제가 있는 것이다.
원불교나 불교를 넘어서야 한다.
남궁부 교우님 : 예를 들어 미리 말을 안 해도 하고 상사를 채워드리는 것이 자기가 힘이 있어야는데,
어느 때는 챙겨드렸지만 내가 힘들 때는 못하기도 합니다. 그런 것을 할 수 있는 근원적인 힘은 어떻게 얻어야합니까?
교무님 : 똥개가 실수로 방바닥에 오줌을 쌌다. 평소에 이쁜 짓을 했으면 “어쩌다 그랬냐” 한다.
평상시에 미운 개는 “이 놈의 개가...” 한다. 오줌 한 번 싼 것이 그 사람 평상시에 했던 것에 따라서 반응이 달라진다.
나는 자력이 아직 부족하니까 나중에 도와주겠다는 심법이 정말로 자력이 없어 못 도와줘 미안한 마음인가?
이기심을 합리화시키고 있는 것인가? 본인이 안다.
평상시 그 사람의 심법 마음 실행이 어땠느냐에 따라 다르다. 그것이 습관이 된다.
지금 입교 연원 안 대는 사람들이 나중에 나이 먹어서 될 것 같은가? 지금 아까워서 헌공 못하는 사람들이 나이 먹어도 똑같다.
지금 간부 안 하려는 사람이 나이 먹어도 쉽지 않다. 하나가 하나가 아니다.
그것이 다 나를 만들어가고 있는 과정이다.
언제 잘 할 것인가? 다음에? 다음은 카페다.
언제냐?
우리가 마음공부 한다는 것은 내가 한 순간에 어떤 마음이 축적되고 있고
어떤 마음을 만들어 가고 있고 어떤 것을 길들여 가고 있는가를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 바탕해서 정말 자력을 기르니까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 하면서 못 도와주는 것이지
“아이고 다행이다. 나는 아직 안 되. 핑계 잘 댔다” 하는 마음인지 본인이 안다. 저도 다 안다.
제가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은님도 다 아신다.
저 사람의 심법이 어떤가? 할 수 있는데 핑계 대는 것인지 마음 자체가 별로 없는 것인지
아니면 마음은 진짜 있는데 사정이 안 되는 것인지 아신다.
전농교당 지을 때 밀타원님이 오셨다. ‘이 분 믿고 한 번 추진해봐야겠다’ 하고 교도님들 한 분 한 분 다 만났다.
“이렇게 훌륭한 교무님 오셨는데 우리 전농교당이 몇 십년이 되도록 우리 교당도 못 지어서 되겠느냐?” 했다.
만나보면 정답이 나온다. 직책 다 필요없다.
정말 그 사람이 진심으로 “제가 형편이 어렵지만 하는데까지 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사정이 이렇니까 이렇게 하겠습니다.”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미꾸라지 같이 아들 핑계 대고, 진작 말씀하시지 하고... 핑계인지 마음인지 안다. 이것이 알고보면 다 축적이 된다.
‘공부삼아!’ 자력양성에 나오는 말이다. 공부삼아서 해 보아라. 그 일 그 일에 대해서 공부삼아 해보아라.
내가 희사심이 없다면 공부삼아 해봐라. 내가 봉사심이 없다면 공부삼아 봉사해봐라.
내가 하기 싫은 마음이 났을 때 공부삼하 해봐라. 핑계대고 싶을 때 공부삼아 그 핑계를 빼고 일을 해봐라.
그것이 모이고 모여서 그 사람의 인격이 되고 습관이 된다.
그 사람의 인격이나 습관 에너지 법력이 그런 하나하나가 모이고 모여서 되는 것이다.
따라 해 보세요. “공부삼아!” “공부삼아!” 참 괜찮죠? 내 힘이 좀 부족하더라도 공부삼아 해보아라.
공부삼아 해보면 저력이 될 것이다.
물론 그 사람이 서원이 크다던가 신심이 있다던가 하면 원동력이 있다.
그 때 그 때 공부삼아 하겠다는 마음이 있다면 나태심도 어느정도 해결하는 횟수가 늘어날 것이고 여러 가지가 잘 될 것인다.
여러분들 마음에 ‘나는 현재 이러니까 어쩔 수 없어.’ 하는 것은 공부삼아 하는 것이 아니다.
원불교학과 처음에 들어갔을 때 가장 아끼는 물건을 내놔라 할 때 정말 아까웠다.
낼 때의 그 마음. 그런 것이 바로 보시심. 희사심. 욕심을 놓는 마음. 그것을 훈련시키는 것이다.
그것 해보지 않은 사람은 못한다. 그런 것들을 공부삼아 해보아서 습관화시켰으면 좋겠다.
박원허 교우님 : 윗사람이 어둡거나 해도 따라야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따르다가 타성에 젖으면 본인도 고여서 같이 썪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 하는 프로젝트를 8년째 하고 있는데 교수님과 아랫사람을 연결하는 중간역할을 하는게 아니라
오히려 끊어놓고 있었습니다. (질문이 영상에 곳곳이 짤려나가. 다 적지 못하였습니다. 죄송합니다)
교무님 : 질문은 현실적이고 좋다. 하지만 정답은 지금까지 했던 말이 맞다.
제 손에서 전무출신이 여러명이 나왔다. 원남교당에서 9명이 나왔는데 제가 추천해서 한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 분들이 전무출신 하는데 큰 교무님은 거의 하신 일이 없지만 다 큰교무님 추천으로 했고
저는 그래도 상관없다. 더 들어가면 진리는 안다.
원허교우가 말한대로 중간 사람이 다 따먹었다. 그것을 보고 원허교우가 배웠다. 고마운 스승이다.
저렇게 하면 안 되겠구나. 그 사람이 어디 가면 추천 못 받는다.
성질 급한 놈은 그 위의 상사에게 찔러버린다.
결국은 들통이 난다. 들통이 안나도 결국 진리가 있다. 그 사람은 언젠가 더 큰 손해를 보게 될 것이다.
원허교우도 자기를 다시 돌아봐라. 그런 상사는 거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곳에 가도 있다.
원허교우님 : 그런데 일이 안 되는데도 시킨 일만 해야합니까?
교무님 : 해야한다. 그러면서도 일이 돌아가게 해야한다.
타성에 젖는 것도 내 마음이 젖는 것이다. 왜 핑계를 외부에서만 대는가? 다 죽어가는 집단도 내가 살릴 수도 있다.
그 상사 때문에 죽여야 하는가? 그것은 내 개인적인 감정이다.
시킨 일만 하면 내 마음은 죽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내가 맡은 분야 중에 독자적으로 할 수 있는 부분을 하면서 살려가면 된다.
그 사람이 영생동안 나와 같이 사는 것이 아니다. 얼마든지 내 것을 함축하는 기간으로 삼고 하면 된다.
원허교우 같은 경우는 젊으니까 불합리한 것들을 용납을 잘 못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본인도 불합리한 점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은 그런 불합리가 어느 조직에 가도 있다. 그 사람이 법강항마위냐? 출가위냐? 보통급도 안 된다.
그 사람이 그 사람의 입장에서 그 사람의 인격만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내 상사다. 아랫사람은 아랫사람의 입장에서 그 도만 행하면 된다.
현실적으로 이런 예가 많이 있다. 저 원장만 저 교감만 저 상사만 그런 것이 아니라 어느 직장에 가도 그런 사람은 있다.
원불교도는 어떤 직장에 가도 인화를 해야한다. 서로 상생 관계를 만들어가는 역할을 해야한다.
그것을 분석해서 이치적으로 따져서 달라들자는 것이 아니다. 어떤 도움을 줄 것인가를 생각해보아라.
시중교우도 그렇게 하다가 결국 나왔다. 그래서 많이 혼났다.
약자는 어떠한 불합리가 있어도 참고 일단 받들어주고 내가 강자가 되는 것이 도이다.
내가 있음으로써 그 집단에 도움이 되어야한다. 따지는 것만 좋아하면 안 된다.
윤혜정 교우님 : 병원 송년회 총괄을 맡아서 기쁜 마음으로 큰 그림을 그리고 동영상도 만들고 ppt도 만들고 그랬다.
그런데 그런 전례가 없어서 추진하려고 하는 일들을 “뭐 이런 것까지 하느냐”고 해서 맥이 빠진다.
너무 고민이 되고 힘들어서 친구에게 상담을 했다.
“이거 해서 진급을 할거냐 봉급이 오르냐? 뭣 때문에 그렇게 힘들게 하냐?”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얼굴이 빨개지고 힘이 빠졌다. 이런 때 마음을 공부삼아 마음을 돌리고 해야합니까?
교무님 : 직장에서 일을 맡아서 하는데 주위에서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씹는다.
이런 것이 어쩌다 있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있는 것이다. 안 해봐서 그런다. 또 따지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도 당연하다. 어디 가도 있다.
그 다음에 아프리카도 도와주는데 직장에서 그것을 못 도와줘?
길 가다가 구세군 자선냄비에 돈도 넣고 음성꽃동네도 가는데 내 직장에서 대중에게 은혜가 되는데 그것을 못하겠느냐?
내가 주인의식으로 해라. 그런 시비는 공부삼아 받아드려라. 그런 시비 속에서 좋은 의견이 있을 수도 있다.
그 사람의 방향에 대한 생각. 생각이 있으니까 그래도 그런 말도 한다. 관심이 있는 것이다.
의뢰생활 하는 것. 부정당한 의뢰는 받아주지 말아라.
그런데 예를 들어 선허가 아침에 청소하면서 “교무님은 자기 집인데 청소 하나도 안 하고 시켜먹기만 하네?”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최대한 자력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저 사람에게 이런 도움을 어떻게 줄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해야한다. 윗사람이 그 시간을 다른 곳에 알뜰하게 쓸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꼭 그 사람이 해야 하는 것은 놔둬야한다.
소규모집단에서 직장상사가 너무나 도에 어긋난다. 몇 번 얘기해보다가 나와야한다. 나와야하는데 자력이 있어야 한다.
자력이 없으면 나오지도 못한다.
직장상사는 쉽게 안 바뀐다. 그리고 그런 직장 상사는 어디를 가든 있다.
내 자력을 키우는 것이 정말 중요한 것이다. 도와주다 성질 부릴 거면 안 도와주는게 낫다.
부정당한 의뢰는 안 들어주는 것이 원칙이지만, 바빠서 그러면 도와줄 수도 있다.
그런데 습관적으로 하거나 한가하면서도 그러면 도와주면 안 된다.
부정당한 의뢰라도 요청을 하면 어느 정도는 들어주는 것도 인간생활의 관계에서는 좋다.
안 맞는 것도 어느 정도는 합력해주는 것이 아랫사람의 도이다.
아랫사람일 때 아랫사람의 도를 잘 하는 사람이 윗사람이 될 수 있다. 자기는 못 하면서 윗사람이 되겠다는 것은 천만의 말씀이다.
그래서 역사를 공부해야한다.
자기가 생각할 때 어떤 사람도 어떤 집단도 완벽한 것은 없다. 시대의 흐름을 따라서 수정할 것이 계속 나온다.
그렇다면 내가 그것을 어떻게 보충을 할 것인가? 아니면 강 건너 불구경 하듯 남 이야기 하듯 할 것이냐? 이것은 주인의식이 아니다.
하여간 내가 그 직장에서 나갈 때까지는 주인으로 일해야 한다. 나가서도 사실 합력해줘야 한다.
그 일 그 일에 일심이라는 것은 내가 처한 그곳에서 주인으로 살라는 것이다.
제가 처음에 교학과에 갔을 때 불만이 너무 많았다. 그러다 가만히 생각해봤더니 내가 남 얘기하듯 하고 있었다.
또 이러면 내 인상만 안 좋아지지. 내 업력만 쌓이지. 이 사람들과 계속 해야 하는데 왜 남 얘기 하듯 해서 뭐하겠는가?
내 자식처럼 하나로 보이는가? 남의 자식처럼 보이는가? 교당일도 남일 같이 보이는가? 직장일도 남일처럼 보이는가?
교감은 뛰어다는데 나는 한가하게 있어? 같이 뛰어가면서 어떤 것을 도와드릴까요 해야지.
원불교 다니는 사람은 어디 가서나 환영받는 사람. 어디가 서나 조금 손해 보는 사람. 어디 가서나 도움을 주는 사람이다.
나갈려고 하면 잡는다. 그런데 갈려고 하는데 잘 가 하면 되겠느냐?
그리고 유종의 미를 잘 해야한다. 단 끝날 때도 잘 끝내야한다. 인연이라는 것은 끝난 것이 아니다.
보통 사람은 힘들 때 잠적한다. 이런 사람은 앞으로 사회 생활을 끊어버리겠습니다 하는 것이다.
원불교 만나기 전에 나에게 잠수 탄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과의 인연은 끝이다.
감사합니다
* 타이핑 해주신 김호겸 교우님 감사드립니다
첫댓글 이것저것 썼다가 지우고~ ㅎㅎ...~ ^^; 교무님 강연 말씀 중 자력양성은 정말 동감되는 말씀이었음...~ 단지 내 상황은 조금 틀리다는 느낌이 있었는데 어필이 제대로 안되었었나봐요~ ㅠ_ㅠ; 암튼~ 불합리함을 따지는 것 이전에 내 할 일을 다하면서 창조적인 최선을 다했다는 자긍심은 있기에~ ^^; 그 결과 국산화 성공하고 내년부터는 일반인은 몰라도 그 소재 부품들이 들어간 제품들이 나온다는...^^; 마음 심뽀에 대해서는 더 생각해 봐야겠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