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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사영 묘 written by 한국의 능원묘 |
▲ 황사영선생 묘역 전경 |
황사영(黃嗣永, 1775~1801)의 본관은 창원(昌原). 세례명은 알렉산드르. 자는 덕소(德紹). 아버지는 한림학사 석범(錫範)이다. 정약종(丁若鍾)에게 사사했다. 1790년(정조 14)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정약종의 형인 약현(若鉉)의 딸 명련(命連)과 혼인하고 정약종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1791년 진산사건(珍山事件)을 계기로 일어난 신해박해의 와중에서도 신앙을 지켰으며 관직 진출을 단념했다. 1795년 숨어서 전도하던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를 만나 그의 측근으로 활동했으며, 명도회(明道會)를 조직하여 남송로(南松老)·최태산(崔太山)·손인원(孫仁遠)·조신행(趙信行)·이재신(李在信) 등과 함께 교리를 연구하고 전교활동을 벌였다. |
▲ 율정 양평해장국집 좌측 뒷편에 황사영선생 묘역이 있습니다. |
▲ 해장국집 측면에 철책을 두른 쌍분 뒷편에 황사영선생 묘역이.. |
1796년에는 이승훈(李承薰)·홍낙민(洪樂敏)·최창현(崔昌顯)·주문모와 협의하여 베이징[北京]에 서양 선교사 파견을 요청하기도 했다. 1798년 경기도 고양에서 서울 애오개[阿峴洞]로 이사하여 신도 자제들에게 글을 가르치면서 계속 전도활동을 했다. 1801년(순조 1)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충청도 제천의 배론[舟論]으로 피신하여 은거했다.
그곳으로 찾아온 황심(黃沁)과 상의한 끝에 베이징 주교에게 박해의 전말을 알리고 조선교회 재건책을 제시하는 백서(帛書)를 작성하여 옥천희(玉千禧)를 통해 중국으로 보내려고 했으나 발각되어 같은 해 9월 체포되었다. 서울로 압송된 뒤 11월 서소문 밖에서 처형당했다. 1984년 한국순교자 103위 시성식 때 교황 요한네스 파울루스 2세로부터 성인 서품을 받았다. |
▲ 좌우측에서 바라 본 황사영선생 묘역 |
* 황사영 백서 사건은... 1801년(순조 1) 천주교신자 황사영이 신유박해(辛酉迫害)의 내용과 대응방안을 적어 중국 베이징[北京]의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려고 한 밀서(密書).
황사영은 정약현(丁若鉉 : 丁若鏞의 맏형)의 사위로서 정약종(丁若鍾)에게 교리를 배워 천주교에 입교했으며, 알렉산드르라는 세례명으로 서울지역의 천주교 전파에 지도적인 역할을 했다. 1801년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일어나자, 황사영은 충청도 제천(提川)의 배론[舟論]이라는 토기 굽는 마을로 몸을 숨겼다. |
▲ 황사영선생 묘 |
그러던 중 박해를 피해 배론에 찾아온 황심(黃沁)과 함께 조선교회를 구출할 방법을 상의한 끝에, 베이징에 있는 구베아 주교에게 신유박해의 전말과 그 대응책을 편지로 적어 도움을 요청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옥천희(玉千禧)와 황심이 10월에 떠나는 동지사(冬志使) 일행에 섞여 편지를 가지고 가려 했는데, 9월 20일과 26일에 체포되었으며, 이어 황사영도 9월 29일 붙잡힘으로써 그들의 계획은 실패했다. 황사영백서는 길이 62㎝, 넓이 38㎝의 흰 비단에 1만 3,311자를 먹으로 쓴 편지이다.
황사영백서의 내용은 크게 3가지로 구분된다. 첫째, 주문모 신부의 처형 등 신유박해의 순교자 내력을 설명한 후 이번 박해로 천주교가 이 땅에서 멸망할 위기에 처했음을 언급했다. 둘째, 조선 교회의 재건을 위해 서양의 여러 나라로 하여금 재원(財源)을 지원해주도록 요청했다. |
▲ 황사영선생 묘역 전경 |
셋째, 신앙의 자유를 획득할 수 있는 방안으로 ① 교황이 청나라 황제에게 편지를 보내어 조선도 선교사를 받아들이게 하거나, 조선을 청나라의 한 성(省)으로 편입시켜 감독하게 하는 것, ② 서양의 그리스도교 국가들에게 호소하여 배 수백 척과 군사 5만~6만 명을 조선에 파견하여 조선국왕으로 하여금 전교사(傳敎師)를 받아들이거나 조선이 정복되는 것 중 하나를 선택하게 하자고 주장했다. 위의 내용 중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한 황사영의 대책은 충격적인 것이었으므로 조선정부는 관련자들을 처형함은 물론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한층 더 강화했다. 아울러 같은 해 10월 파견된 동지사에게 진주사(陳奏使)를 겸하게 하여 신유박해의 정당성과 중국인 주문모 신부의 처형 등에 관한 내용을 담은 토사주문(討邪奏文)을 보냈다. |
▲ 좌측면과 후면에서 바라 본 황사영선생 묘역 |
또한 그때 황사영백서 중 중국의 감호책이나 종주권행사에 대한 내용을 빼고 서양선박과 군대를 동원하여 조선을 멸망시키려 했다는 사실을 강조하여 923자로 축소시켜 만든 가백서(假帛書)를 청나라 예부(禮部)에 제출했다. 황사영백서의 원본은 압수되어 의금부에 보관되었다가, 1894년 갑오개혁 후 옛 문서를 파기할 때 당시 교구장이었던 뮈텔 주교의 손에 들어가 1925년 한국순교복자 79위 시복식(諡福式) 때 교황에게 전달되어 현재 로마 교황청에 보관되어 있다. |
황사영 묘역 위치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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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율정 양평해장국집)에서 빨간선을 따라서 가면 황사영선생 묘역이 있습니다. 소재지 : 경기 양주시 장흥면 부곡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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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상단 중앙의 화살표 지점에 황사영선생 묘가 있습니다. 송추IC를 기준으로 위치를 가늠하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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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귀한 글 잘 보았습니다. 고맙습니다.
간다면서 못간 곳입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