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쿠스 형제의 개혁
그라쿠스 형은 당시 로마의 대토지 소유자의 토지 확장과 중소토지 소유자의 몰락을 막아서 국방력의 재건을 꾀하기 위하여 대토지소유의 제한, 토지의 재분배를 정한 토지법안을 통과시키고 자작농의 창설을 기도하였다.(BC 133년) 그러나 토지문제로 원로원(元老院)과 대립하고 또 위법으로 호민관의 재선을 노렸기 때문에 운로원 보수파의 불만과 반대가 폭발하여 시가전 끝에 암살되었다.
그리고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의 동생은, 누만티아전쟁에서 종군한 후 형 티베리우스가 정한 토지분배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어 BC 132년과 BC 123년의 호민관으로서 형의 유지(遺志)를 이어받아 개혁 입법을 하였다.
그 주된 내용으로 싼값으로 곡물을 공급하는 곡물법안, 로마 시민 식민시(植民市)를 설치할 토지(식민시)법안, 군무에 관한 각종 규정을 정한 군사법안, 이탈리아 동맹시 사람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는 시민권 법안, 부당소득 단속법정의 지배권을 기사(騎士)의 손에 맡기는 재판법안 등이 있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원로원 세력을 누르는 데에 실패하고, 무력으로 대항하려다가 자살하고 동지 3천 명도 살해되었다.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 실패로, 로마사(史)는 공화정 말기의 당파싸움의 시대와 내란의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개혁의 배경 :
포에니 전쟁이전 지중해는 카르타고와 로마 두 제국이 평화적으로 공존하고 있었다. 하지만 두 제국은 곧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된다. 결국, 전쟁에서 승리한 로마는 기원전 146년 지중해에 대제국을 건설한다. 전쟁의 승리는 로마에게 세게 대제국이라는 수식어를 안겨다 주었지만 전쟁은 이전부터 계속 되어온 사회?경제적 변화를 더욱 가속화 시켰다. 원로원은 또 다시 기득권 세력으로 변모해 나갔고, 전쟁으로 인한 병사들의 많은 희생으로 자영 농민층은 크게 몰락해 가고 있었다. 이 위기 속에서 속주들의 노예 반란과 자연 재해 등으로 인한 곡물 문제는 로마를 더욱 압박해 나갔다. 이러한 혼돈된 상황은 공화정의 모습을 변질시켰다. 이에 티베리우스는 군사력 증강, 출산율 증대, 도시 곡물문제의 항구적 해결, 그리고 도시 실업자 구제라는 국가의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기 위해 토지 소유 시민을 육성하러 하였고 , 또 이를 위해 농지법을 제정하였던 것이다. 그 뒤를 이은 가이우스는 곡물 정책으로 실제로 아사의 위험에 처했던 굶주린 시민들을 긴급 구호하였고 그들의 생계에 도움을 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불경기 종식과 고용 증대에 크게 기여하였다.
백과사전에 나온 그라쿠스 형제의 설명:
그라쿠스 [Gracchus, Gaius Sempronius, BC 160 ?~BC 121]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의 동생으로, 누만티아전쟁에서 종군한 후 형 티베리우스가 정한 토지분배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어 BC 132년과 BC 123년의 호민관으로서 형의 유지(遺志)를 이어받아 개혁 입법을 하였다.
그 주된 내용으로 싼값으로 곡물을 공급하는 곡물법안, 로마 시민 식민시(植民市)를 설치할 토지(식민시)법안, 군무에 관한 각종 규정을 정한 군사법안, 이탈리아 동맹시 사람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는 시민권 법안, 부당소득 단속법정의 지배권을 기사(騎士)의 손에 맡기는 재판법안 등이 있다.
그러나 원로원 세력을 누르는 데에 실패하고, 무력으로 대항하려다가 자살하고 동지 3천 명도 살해되었다.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 실패로, 로마사(史)는 공화정 말기의 당파싸움의 시대와 내란의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의 의 :
그들의 법안은 그 자체로는 별로 새로운 것이 없었으나 그들의 활동은 후세에 큰 영향을 끼쳤다.
즉, 그들은 수세기에 걸쳐 공동화하였던 민중의 기관인 호민관 제도와 민회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음으로써 지배계급에 대한 반역을 시도하였던 것이다.
첫댓글 글씨가 너무 작아요 ㅠ ㅠ 압박 심함-ㅁ-;;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