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세상의 소금입니다.
마 5:13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팔복을 말씀 하셨습니다. 이 팔복은 하늘백성이 누리는 영적인 복입니다. 하나님께서 자녀된자들에게 주신 고귀한 선물이에요. 그리고 그 팔복에 바로 이어서 하신 말씀이 오늘 본문입니다. 복 받은자로서 그냥 그대로 끝이 아니라는거에요. 하늘 복을 받은 사람들로서 당연히 나탸나야할 모습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로서 그 모습에 합당한 역할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제일먼저 소금으로 비유하신거에요.
먼저 우리가 기억해야할 것은요, 우리는 이미 “세상의 소금이다’ 라는 사실입니다. 본문이 이렇게 시작을 하죠?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 “세상의 소금이 되어라” 이렇게 말씀 하시지 않으셨어요. 이미 우리는 세상의 소금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소금될 자격 없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 믿었더니 하나님의 은헤가 임한거에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니 우리는 이미 세상의 소금이 되었다는 거에요. 우리가 감당 해야할 몫이 있다는 것입니다. 당장 천국가도 좋지만 또한 살아 가야 할 이유가 분명히 있다는 거에요.
앞뒤 좌우분들 우리 인사 합시다. “당신은 세상의 소금입니다.”
세상의 소금이란 말씀을 두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해 봅니다. 먼저는 “세상의 소금”이란 말이고 두번째는 “세상의 소금”이란 말입니다. 똑 같은 말인데 뭐가 다르죠? 액센트가 다릅니다. 하나는 세상에 액센트를 주었고 하나는 소금에다가 액센트를 주었습니다.
먼저 “세상의 소금” 입니다. 포인트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세상속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있는 소금이라는 거에요. 예수 믿기전에도 우리는 세상속에서 살았습니다. 예수 믿고도 여전히 세상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다릅니까? 그 전에는 소금이 아니었어요. 소금이 필요한 존재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달라진거에요. 세상이 필요한 소금이 되었다는것입니다.
다른 이유 아니에요. 앞에서도 말씀 드렸지만 하나님의 은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이에요.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더 이상 땅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에요. 하늘에 속한 새로운 피조물이 된것입니다. 그러기에 이제는 내가 사는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예수표” 소금이 된것입니다. 여전히 같은 내 이름이지만, 여전히 같은 내 생김새지만 이제는 십자가의 사랑이 농축되어 있는 사랑의 소금이 된거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세상속에서 구별하셨지만 따로 살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여전히 세상속에 살도록 하셨습니다. 여전히 세상과 부대끼며 살도록 하셨어요. 왜요? 우리를 세상속의 소금으로 살아가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 세상이 예수표 소금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이 하나님의 사랑의 소금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소금으로 만들되 세상속에 사는 소금으로 두신거에요. 그래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라고 말씀하시는것입니다.
세상은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과 공간입니다. 그런에 이게 참 만만하지가 않아요. 어떤때는 경쟁도 해야하고 어떤때는 어울리기도 해야합니다. 뚝 똘어져서 우리끼리 살면 그나마 모르겠는데 세상속에서 우리는 살아갑니다. 그 속에는 우리보다 잘난 사람도 많습니다. 많이 가진 사람, 똑똑한 사람도 많아요. 그러니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기는 커녕 아차 하는 순간에 오히려 세상물이 들어 버리고 맙니다. 자칫 눈에 보이는것 때문에 시험들고, 그 속에서 살다보니 나도 모르게 남들과 비교가 되어 우리의 신앙마저 흔들힐 수도 있는 그런 곳입니다.
제가 러시아에 있을때는 신학교에서 시역을 했습니다. 그 안에서 학생들 하고 먹고 자고 같이 했어요. 이곳은 모스크바 교외에 있었는데 큰길에서 한참이나 들어와야 합니다. 숲 속에 그 건물 하나만 있었어요. 문명과 차단된 수도원 분위기에요. 거기다가 일년의 반은 눈 속에 있습니다. 거기다가 새벽예배부터 시작하면 강의가 있고 밤예배까지 얼마나 뜨거운지를 모릅니다. 늘 찬양하고 기도하고 예배하고 그런 속에서 살았어요. 정말 세상과 구별된 느낌을 맏았어요.
거기다가 영적으로 참 강했어요. 가끔씩 학생가운데는 귀신에 사로잡힌 사람들도 있었어요. 자다가 밤 열두시면 일어나서 숲 속으로 들어가서 귀신한테 기도하는 거에요. 거기까지 좆아가서 잡아오기도 했습니다. 어떤 학생은 틈만 나면 침대보로 자기 목을 조르기도 했어요. 그런데 그냥 조르는게 아니라 완전히 귀신한테 씌어 있는 모습이에요. 악한영이 자살하게끔 자꾸 유도하는거죠. 한 여학생은 면도칼로 자해하는 사람도 있었어요. 영적인 전쟁이 대단히 심했어요. 그런데 정말 감사한것은 손 얹고 기도하면 귀신이 떠나가는 거에요. 저는 그때 목사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악한 영들은 떠나갈지어다 믿음으로 외치니까 귀신들이 다 도망을 가는거에요.
그때는 제가요 정말 세상말로 하면 뭔가 금방이라도 도통할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어요. 여기가 천국이구나. 믿음으로 안되는 일이 없구나. 정말 육신적으로는 힘들었지만 그게 힘든즐을 몰랐어요. 늘 행복햇고 늘 기뻤습니다. 세상과 동 떨어진속에서 사니까 그게 가능하더라고요.
그런데 미국에 공부를 하러 왔습니다. 속세로 다시 들어 온거죠. 처음 올때는 진짜 쏘련에 있던 그 순수한 믿음으로 그냥 왔어요. 그런데 당장 걸리는것들이 한두가지가 아닌거에요. 당장 차가 필요한데 차 살돈이 없었습니다. 학교옆에 방을 잡았으니까 학교는 걸어가면 되는데 학교만 간다고 다 되는게 아니잖아요. 교회가야 하는데 라이드 부탁하기도 뭐해서 걸어갔습니다. 라미라다 바이올라 학교 근처에서 노르웍 파이오니아 알론드라까지 걸어가는데 두 시간이 더 걸리더라고요. 처음 한두번은 괜찮았어요. 쏘련에 있던 그런 기분으로 찬양하며 걸어 갔습니다. 그런데 조금 지나니까 그게 안되더라고요.
슈퍼도 걸어 갔습니다. 한 한시간을 걸어가는데 처음에는 운동삼아 좋다 그런데 몇번 하니까 그게 아니에요. 올때는 손에 든게 있잖아요. 비닐봉지가 늘어져서 손가락이 얼마나 아픈지……… 한번은 비빌봉지를 양손에 들었는데 한쪽이 틑어져 버렸어요. 참 난감하더라고요. 틑어진것을 한손에 안고 올 수도 없잖아요. 사과도 몇개 그 속에 있었는데 이게 떼굴떼굴 굴러가서 차도로 떨어져 계속가는 거에요.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오르는것 있죠. 생땡 달리는 차들을 보면서 차 없는 내 신세를 생각하니 더 화가 나는거에요. 러시아에서 그런 일 보다 수 십배 수 백배 더 한 일을 만났거든요. 그래도 화가 별로 안 났습니다. 그런데 세상속에 들어오자마자 달라지더라고요. 그래 떨어진것 발로 막 차버렸습니다.
물론 그날 밤에 회개 많이 했습니다. 성령께서 그때 이런 음성을 주시더라고요. “내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한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가 되느냐 ? 하는거였어요. “너는 세상속에 드러오자마자 너의 마음에 안차는 그러한 작은것도 화를 내는데 나는 죄악으로 가득찬 이 추한 세상을 사랑하여 나의 독생자를 죽게까지 하지 않았는가? 하는 음성이었어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세상속에 살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버려두신게 아니에요. 세상과 함께 하며 그 속에 살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과 강건함으로 이겨나가기를 원하십니다. 보헤사 성령을 그래서 우리에게 주셨어요. 성령의 음성따라 사는 진정한 경건이 그거에요.
그런데 여러분 거기에서 멈추지 말라는거에요. 오히려 그 세상에서 이제는 소금이 되었으니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소금처럼 살라는것입니다. 썩어가고 냄새 나는 곳에서 내가 같이 썩지 않고 오히려 나로 인하여 내 주변을 변화 되게끔 하라는거에요. 다른 힘이 아니라 예수의 힘으로, 다른 능력이 아니라 십자가의 능력으로 할 수가 있음을 믿습니다.
자 그러면 구체적으로 우리가 세상의 소금으로서 어떤 역할을 하여야 하는가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소금의 가장 큰 역할은 맛을 내는것입니다. 아무리 음식재료가 좋고 아무리 솜씨가 훌륭해도 소금이 없으면 맛이 나지를 않습니다. 아무리 유명한 설렁탕이라고 해도 소금을 안치고 먹는다고 생각해 보세요. 생각만 해도 속이 느글느글합니다. 소금이 들어 감으로서 짠 맛을 낼뿐아니라 모든 맛의 조화를 이루어 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맛을 낼 것을 말씀하시는 거에요.
소금이 필요한 맹탕세상에서 우리보고 맛을 내는 소금의 역할을 하라는거에요. 이 맹탕에 우리가 있음으로서 맛이 나야한다는 거지요. 세상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당신들에게서 예수 맛이 납니다. 당신들에게서 인간미가 납니다. 당신들에게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느껴집니다. 당신들 때문에 살맛이 납니다. 이런 소리가 있어야 한다는거에요. 남을 배려하는 마음. 겸손과 온유가 밴 태도. 관용을 베푸는 말 한마디. 격려하고 용기를 주고 남을 살리는 일. 이런것들을 생각하고 찾고 노력하는 모습이 예수 믿는 사람의 모습이라는 거에요.
그런 우리들을 통하여 주변이 바뀔것을 기대하시는것입니다. 맹탕이 바뀌어서 간이 잘된 맛있는 세상으로 우리로 인하여 바뀌어야 한다는거죠. 이 땅의 하늘나라가 그렇게 이루어져 가기를 원하시는거에요. 하늘나라의 확장이 그렇게 되어가기를 기뻐하시는것입니다.
에수 그리스도의 맛을 내는일에 우리모두 귀하게 쓰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소금은 부패하는 것을 막습니다. 요즈음은 냉장 냉동시설이 워낙 좋으니까 썩는 것 방지 하는데 소금이 별로 쓰일데는 없지만 예수님 당시에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제가 어릴때만 해도 그렇습니다. 제가 아주 어릴 때 자란 경북지역은 산간 내룩 지방입니다. 동네에서 생선파는 가계가 하나 있었는데 지금도 기억이 나는데 생선이란게 온통 소금으로 범벅을 해 놓은 소금절이였습니다. 그러니까 절대 썩지를 않아요. 그런데 먹기는 사실 쉽지가 않습니다. 밥한숫가락 입에 넣고 고기 한 저름 뜯다보면 고기는 안 뜯어지고 밥이 다넘어 갑니다. 식구들 밥 다 먹어도 고등어는 그냥 남아있어요. 그런데 그렇게 구워서 몇일을 가도 절대 안 상해요.
여러분 세상이 얼마나 썩어가고 있는지를 모릅니다. 뉴스보세요. 온통 썩는 냄새에요. 돈 때문에 썩습니다. 권력때문에 썩어요. 쾌락으로 인하여 썪습니다. 욕심의 쓰레기장이 되버렸어요. 인긴미가 썩어가고, 사람과의 관계가 썩어가고 무엇보다 심령이 썩어 문들어져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게서는 우리더러 그 속에서 썩지 않게 하는 소금의 본분을 감당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 들으면서 막연하다 하는 생각이 들지 모르겠어요. 나 한사람이 어떻게 썩어가는 세상을 막을 수가 잇단 말인가?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세상이 그렇게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그 세상은 내가 소금으로서 뿌려 질만한 비로 그곳을 말씀하는거에요.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지만 깨달은 사람들에게는 그 세상이 바로 나 자신이잖아요.
소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소금인것을 깨달은 사람들에게 세상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에요. 바로 나의 주변 내가 있는 곳에서 시작하는거에요. 무엇보다 그곳에서 썩어가고 있는 심령들 먼저 돌아보는것입니다. 썩아가는 심령을 회복시키는거에요. 상한 심령을 고치는것입니다. 내가 있는곳 나의 주변에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을 알게 하는거에요. 한 사람 한 사람 그리스도인들이 모두가 그 소금의 역할을 잘 감당한다면 이 세상은 분명히 달라질 것입니다.
바닷물은 짭니다. 그런데 실제 바다의 염분은 2-3%밖에 안된답니다. 그 2-3%의 염분으로 인하여 바다가 바다가 될 수가 있어요. 통계에 의하면 이곳 LA 한인의 75%가 기독교 신자라고 말을 한다고 합니다. 거기서 이것저것 제하고 반을 잘라내도 30%가 신자들입니다. 이 신자들이 모두 자기가 처한 삶의 터전에서 소금의 역할을 잘 감당한다면 여러분 이곳 l.a 만이라도 정말 썩지 않는 세상을 만 들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거창하게 구호를 달지 않아도 내가 있음으로서 내 옆에 있는 상하고 지친 영혼들이 다소나마 편안해 지고, 나의 따뚯함으로서 그들의 상처와 아픔이 그나마 위로가 되고 회복이 될 수 있다면…….. 우리로 인하여 분명히 세상은 그 썩어감을 멈출수가 있을거에요.
신창원이란 유명한 도둑 기억하시죠? 감옥에서 탈주까지 하여 세상을 떠들석하게 했던 사람입니다. 그를 담당햇던 무료 변호가가 그와 상담을 하다가 마지막으로 이런 질문을 하였어요. "살아오면서 가장 아쉬웠던 게 있다면 뭐였어요?" 그가 이헣게 대답했습니다. "어릴 때 정말 누가 조금만 따뜻이 대해줬더라면 이렇게는 안 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린 시절 누구 한 사람이 한줌의 사랑이나마 그에게 베풀어주었던들 그가 그렇게 썩지 않았을것이란게 그 변호사의 이야기였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런 부탁을 하십니다. 그것은 소금의 맛을 잃지 말라는거에요. 예수님 당시 사해주변에서 나오는 소금은 수분이 들어가면 그 맛을 잃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그러면 길에다가 뿌렸대요
예수님께서는 이 맛을 잃은 소금을 생각하시면서 우리들에게 부탁을 하시는거에요. 우리가 예수표 소금이라는것을 늘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랑, 은혜의 감격, 구원의 기쁨, 영혼을 향한 긍휼 잃지 말라는것입니다.
여러분 소금이 소금의 역할을 할려면 녹아야 합니다. 우리도 그래요. 맛을 잃지않고 세상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환경속에서 소금같이 녹아서 들어가야 합니다. 십자가 사랑가지고 들어가는 거에요. 희생가지고 들어가는 거에요. 섬김가지고 들어가는 거에요. 소금이 녹듯이 나 자신을 낮추고 나를 녹여서 들어가야 합니다. 여러분의 가정에서 그렇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직장에서 사업체에서 학교에서 그렇게 녹으시기를 소원합니다. 여러분의 가는 모든주변이 예수표 소금된 여러분으로 인하여 행복해 질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
첫댓글 빛과 소금과 밀알이 되야할텐데 모하나 제대로 역할을 못하고 평생을 허비하는 것 같네요
어둠을 밝히는 빛도, 맛을 내는 데 필요한 소금도, 생명의 뿌리인 밀알도 아닌 기냥 잡초로다가 ....
늘 좋은 설교말씀 감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