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편에서는 그레이시 주짓수가 어떻게 MMA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무술로 성장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이번 편에서는 그레이시 주짓수와 이종격투의 시초인 UFC가 탄생하게 된 과정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호리온 그레이시와 UFC의 탄생
'로마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았다' 라는 말이 있듯이, 오늘날의 BJJ와 이종격투경기가 하루아침에 갑작스럽게 생겨난 것이 아니었다. 이점에 대해서는 지난 칼럼에서 브라질리안 주짓수가 어떤 경로를 거쳐 MMA(Mixed Martial Arts)계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치는 무술이 되었는가를 보았으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초창기의 이종격투시합은 '최강'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하였다. 어떤 무술이 최강이고 누가 최강인가? 에 대한 의문과 그것을 입증해 보이려는 시도가 이종격투의 출발이라고 할 수 있다.
[사진] UFC에서의 호이스 그레이시
이러한 이종격투경기의 시도는 UFC가 등장하기 이전부터 있어왔다. 특히 현대 도복무술의 진원지라고 할 수 있는 일본에서는 그러한 시도가 20세기 초부터 시작되었다. 브라질에 주짓수를 전수한 마에다 미츠요의 격투 기행을 비롯해 안토니오 이노키의 이종격투시합, 그리고 이노키의 뒤를 이어 실전 프로레슬링을 지향하는 단체들에 의한 다양한 시도가 UFC가 개최되기 이전까지 계속되었다.
이종격투시합은 격투시합의 종착점을 의미한다. 서로 다른 성격의 기술과 그것을 익힌 선수들이 격투하기 위해서는 시합의 규칙이 모든 무술의 기술을 포용할 만큼 '오픈' 되어 있어야 한다. 그래서 그 시합 모습은 처음 접한 사람들이 보기에는 매우 생소하고, 익숙하지 못하기 때문에 잔인해 보일 수도 있다. 또한 상대와 치고 받기도 하고 바닥에서 뒹굴면서 싸우는 방식을 격투 문외한이 처음부터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따라서 일본처럼 격투가 대중화되어 있고 사랑받는 곳에서조차, 외부의 영향 없이 자체적으로 이종격투시합이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일본의 격투단체가 서서히 이종격투를 시도하던 와중에 갑작스럽게 도화선의 불을 붙이는 사건이 발생했다. 바로 1993년 미국 콜로라도 덴버에서 열린 제 1회 UFC(Ultimate Fighting Championship)대회가 그것이다.
UFC는 이종격투팬이라면 누구나 알다시피 브라질에서 미국으로 이민 온 호리온 그레이시라는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대회다. 초창기 이종격투대회의 출발이 그렇듯 UFC도 '최강'에 대한 의문과 이것을 입증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표면적으로는 다양한 스타일의 무술가들이 서로 기량을 겨뤄 최강을 가리자는 의미였지만, 원래는 그레이시 주짓수가 실전에서 얼마나 강하고 유용한 기술이냐를 입증하기 위한 것이 목적이었다. 말하자면 UFC는 '그레이시 챌린지'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호리온 그레이시는 엘리오 그레이시의 장남이다. 호리온은 양자로 키워진 홀스 그레이시나 동생인 힉슨에 비해 브라질에서 주목받을 만큼의 '챌린지' 활동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레이시家의 남자답게 어린시절부터 오랜기간 동안 익혀온 주짓수 실력만큼은 어디에서건 통할 정도로 강했다. 그는 그레이시 남자들 중에서 매우 기회주의적이고 계산이 빠르다는 평가를 받았는데, 가문에서도 대학을 마친 사람은 그와 홀스 뿐이다. 호리온은 1969년 17살 때 처음으로 미국에 왔고 하와이에서 1년간을 지냈다고 한다. 69년이라면 브라질에서 엘리오와 바헤트에 의해 처음으로 BJJ협회가 설립된지 2년 후이다. 그가 왜 어린 나이에 미국에 갔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주짓수 협회도 설립되고 엘리오, 카우손, 홀스등의 연이은 활약으로 브라질내에서는 이미 그레이시家 사람들이 먹고 살만한 일은 충분히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그가 미국에 건너가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가 17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돈벌이도 할 수 없어서 길거리에서 구걸을 하다가 다시 고향에 돌아오고 말았을때, 모든 이들이 그를 두고 바보라고 놀려댔다고 한다.(左.호리온 그레이시)
그러나 호리온은 브라질 내에서는 출세에 한계가 있다고 보고, 미국에서 성공하면 세계적인 성공이라 생각한 끝에 다시 도미하게 된다. 호리온이 27세때인 1978년의 일이었다. 당시 그는 이혼하고 아이 둘이 딸린 아버지인데다, 주위의 만류도 상당했지만 개의치 않았다고 한다. 어쨌든 그는 아메리카 드림을 가슴에 품고 미국에 왔지만,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주짓수를 제외하곤 아무것도 없었다. 그레이시 주짓수를 가르쳐 볼까도 했지만 당시는 이소룡을 필두로한 동양무술의 붐이었던 시기라 화려하지 않고 세간에 알려지지도 않은 주짓수를 사람들이 배우려고도 하지 않았다. 70년대 초반 호리온보다 먼저 미국에 건너온 칼레이 그레이시도 이 때문에 주짓수 교습을 그만두고 복사공장에서 일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래서 역시 17살때와 마찬가지로 해변에서 노숙을 하기도 하고 구걸을 하기도 하는 등 완전히 거지꼴로 여기저기 방랑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아는 사람의 도움으로 월 25달러를 받는 청소부로 어느 부잣집에 취직하게 되었는데, 집주인이 '스타스키와 허치'라는 영화의 조감독이었다. 그는 청소를 열심히 했고 안주인의 눈에 들어서 '브라질인 타입은 신선한데 영화배우 한번 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의에 그때부터 단역배우 일을 하게 된다. 그 후 그는 십년간 TV 드라마의 엑스트라를 하게 된다. 그러나 호리온은 자신이 출세할 수 있는 길은 그레이시 주짓수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단역배우 십년간 꾸준히 주짓수를 여러 사람에게 알리고 다녔다. 처음에는 무료로 가르쳤는데 1989년도 즈음에는 차고를 개조한 도장의 수련생만 120명을 넘었고 대기자만 80명을 헤아릴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그는 종종 격투대회에도 출전했는데 어느날 킥복서와 싸우는 모습을 영화'리쎌 웨폰'의 제작자가 와서 보고는 무술감독으로 기용했다. 그래서 '리쎌 웨폰'의 멜 깁슨이나 르네 루소를 가르치고 직접 스턴트맨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이처럼 꾸준한 노력으로 마침내 '플레이 보이'지에 호리온과 그레이시 주짓수에 대한 시리즈 기사가 실리기도 하는 등 점점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도장이 커지고 '어떤 사람이라도 자신 있으면 도장에 찾아와 나에게 도전해 보라'는 '챌린지'식의 발언등으로 유명세를 타자 격투가들이 찾아와 호리온에게 도전하는 일이 많아졌다. 뿐만 아니라 체육관에서 소규모의 발레투도 경기를 열어 직접 선수로 출전하기도 했는데, 호리호리한 호리온이 쉽사리 거구의 격투가들을 이기는 장면이 지방 방송국에 의해 방영되자 더욱 유명해졌다. 도장이 커지자 그는 당시 브라질 주짓수 선수권과 발레투도를 제패하고 있던 힉슨과 호일러, 헬슨, 마차도 형제와 17세의 호이스 그레이시도 브라질에서 불러왔다.
1992년에는 도장의 수련생이자 광고인이었던 아트 데이비란 사람과 손을 잡아 '챌린지' 장면을 찍은 캠코더 영상을 비디오로 제작해 통신 판매해서 큰 성공을 거둔다. 이 테잎이 그 유명한 '그레이시 액션비디오' 이다. 이러한 성공에 고무된 그들은 '그레이시 주짓수' 교육용 테잎을 만들어 팔게 되는데, 이것도 대성공을 한다. 그레이시 주짓수와 발레투도가 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호리온과 아트 데이비는 역시 수련생이자 영화 '코난'을 감독했던 존 밀레스를 영입해 대대적인 규모의 발레투도 시합을 기획하게 된다. 그리고 이 기획서를 가지고 스폰서를 찾던 중 새로운 PPV 컨텐츠를 찾고 있던 SEG사에 의해 채택되어 뉴욕에서 이 이벤트에 대한 구체적인 사항을 협의하기에 이른다.(右.UFC의 경기장인 옥타곤)
회의끝에 도출된 이벤트의 제목은 'War of the Worlds' 줄여서 WOW라는 다소 촌스런 명칭이었다. 특정 무술을 대표하는 수준높은 무술가들이 극한의 싸움을 한다는 컨셉으로 인해 경기장 디자인에 여러 의견이 엇갈렸다. 유리로 보호벽을 만들자는 안건부터 전기 철조망, 해자를 파서 악어를 풀어놓자는 등의 황당한 안건이 나왔지만, 결국 호리온에 의해 팔각의 철망 링이 선택되었다. 옥타곤이라 불리는 이 경기장은 인기 격투 비디오 게임인 '모탈컴뱃'을 연상시키는 강렬한 인상과 함께 브라질 발레투도 시합에서 선수가 링 바깥으로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한 목적으로 채택되었다. 대회명칭도 UFC(Ultimate Fighting Championship)로 교체되었다.
제1회 UFC는 토너먼트제 시합으로 결정되었다. 감독은 앞서 말한바 있는 호리온의 제자이자 '코난'의 감독인 존 밀레스였다. UFC가 토너먼트로 결정된 데에는 최후에 한 사람만 싸워 살아남는다는 드라마틱한 전개가 흥행에 도움이 될 거란 존 밀레스의 판단에다, 그레이시 파이터가 최후의 승자가 되면 더욱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되리라는 호리온의 꿍심이 합쳐졌기 때문이다. 그레이시를 대표해서 UFC에서 싸울 전사는 호이스 그레이시로 선택되었다. 이것은 허약해 보이는 신체가 거구를 이겼을 때 얼마나 열렬한 호응을 받을 수 있는지 이미 카를로스, 엘리오시절에 검증이 되었기 때문이다. 원래는 호이스 다음에 힉슨이 UFC에 출전할 예정이었지만 힉슨과는 도장문제로 사이가 원만하지 못한데다 본인 스스로도 사양하였고 호리온 입장에서도 자신에게 고분고분하고 늘 곁에 있어준 호이스가 더 믿음이 가기도 하였다.(左.UFC의 로고)
11월에 콜로라도 덴버에서 시합을 열기로 결정하고 호리온과 아트 데이비가 선수 섭외에 나섰다. 무규칙의 격투대회(NHB)가 열릴것이라는 소문이 퍼져 나갔지만 아무도 진짜 그렇게 시합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대회가 제대로 열릴리가 없다.'라고 장담하는 관계자가 있을 정도였다. 호리온은 루머에 아랑곳하지 않고 잡지에 광고를 내고 유명 선수와 체육관에 팩스를 보냈다. 주최측인 SEG에서도 흥행에 도움이 될만한 선수를 원했다. 그러나 주최측에서도 이런 대회에 거물급 선수가 나올리가 없다고 예상한데다 구색만 맞추고 장사만 잘되면 그만이라는 심산이었고 호리온은 호리온대로 호이스가 시원하게 이겨버리면 되었기 때문에 당시로서는 아무도 UFC가 현대 이종격투의 출발점이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