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金銅彌勒菩薩半跏思惟像)】
「국보 제83호, 삼국시대, 국립중앙박물관」
‘모나리자’와 ‘반가사유상의 미소’는 같은 듯, 아주 다르다. ‘모나리자’는 레오나르도 다빈치라는 당대 최고의 명장이 한 정숙한 여인의 ‘미소’를 순간 포착해 묘사한 것으로 서양 미술사에서 최고 명작의 반열에 오른 작품이다.
‘모나리자’보다 한참 앞선 7세기 전반의 작품 ‘반가사유상’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 정진하는 보살이 연화대(蓮花臺) 위에 한쪽 다리를 구부려 다른 쪽 무릎 위에 올려놓은 모습이다(半跏趺坐). 그렇게 편한 자세로 앉아서 정진하던 중 깨침의 절정인 ‘득도(得道)’의 순간에 아주 옅은 미소가 입가에 퍼진다. 자연스러운 모나리자의 미소와 구도자의 깨침의 순간에서 터진 감동적인 미소!
같은 맥락에서, 근대 조각의 시조 로댕(Auguste René Rodin, 1840~1917)의 ‘생각하는 사람(Le Pensueur, 1881~1882)’을 빼놓을 수 없다. 조형적 시각에서 보면, 근육질에 역동적(力動的)인 묘사가 어딘지 ‘사색’ 하면 떠오르는 우리네 정서와는 사뭇 거리감이 있다.
그리고 독일 철학자 야스퍼스 (Karl Jaspers, 1883~1969)는 1960년대에 일본 교토를 방문했을 때 고류지(廣隆寺)가 소장한 일본 국보 1호 ‘미륵보살반가상’을 보고 찬탄(讚歎)하는 마음이 담긴 귀한 인상기를 남겼다.
“나는 지금까지 철학자로서 인간 존재의 완성된 표현이라는 여러 가지 모델을 접해왔습니다. 이를테면 고대 그리스 신의 조각도 보았고, 로마 시대에 만든 뛰어난 조각들도 많이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에는 아직 완전히 초극하지 않은 지상적, 그리고 인간적인 것의 냄새가 남아 있었습니다. 이성과 미의 이상을 표현한 고대 그리스 신의 조각을 보아도 지상의 때와 인간적인 감정이 어딘지 모르게 남아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사랑을 표현한 로마 시대 종교 조각에도 인간 존재의 극도로 정화된, 즉 기쁨이라는 것이 완전히 표현되지는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런 것들은 지상의 감정의 때를 남긴 인간의 표현이고, 인간 실존의 제일 깊은 곳까지 도달한 자의 모습을 표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고류지의 이 미륵보살에는 그야말로 극도로 완성된 인간 실존의 최고 이념이 남김없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지상의 모든 시간과 속박을 넘어서 달관한 인간 존재의 가장 정화되고 가장 원만한, 가장 영원한 모습의 상징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오늘날까지 몇십 년간 철학자로서의 삶을 살면서 이것만큼 인간 실존의 평화로운 모습을 구현한 예술품을 본 적이 없습니다. 이 불상은 우리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영원한 마음의 평화를 최고조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옛 그림의 마음씨》 (이우복, 학고재, p.247~249, 2006)
당시 살아 있는 신성(神聖)으로까지 숭앙받던 철학자 야스퍼스가 일본의 ‘반가사유상’을 보고 남긴 글이다. 야스퍼스가 그 ‘불상’을 본 것은 일본이었지만, 그건 사실상 우리 ‘반가사유상’에 대한 찬사나 진배없다.
왜냐하면 그가 본 ‘목조반가사유상’은 한반도에서 건너간 조형물로, 아마도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을 제작한 장인 또는 그와 같은 공방에서 일한 장인이 만든 작품이 일본에 전해졌을 것이라는 게 학계의 통론이기 때문이다. 특히 작품에 쓰인 나무가 한반도에서 많이 자라는 적송(赤松)이기에 이 이론에 신빙성을 더한다.
야스퍼스는 서양, 특히 기독교 문화권에서 살아온 철학자이기에 그 ‘불상’을 보며 남긴 찬시(讚詩)와도 같은 헌사(獻辭)가 더욱 값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불상’의 조형물이 전하는 심오한 내면세계를 느끼긴 했어도 불교에서 득도(得道)라는 깨침의 순간, 그 솟구치는 조용한 희열까지는 미처 지각(知覺)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주 오래전에 완벽한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을 조형하면서 그 심오한 불심(佛心)을 자연스레 표현해낸 예인(藝人)이 있었다는 사실에 머리가 절로 숙여진다. 인생은 짧지만 예술은 길다는 말이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의 영원한 미소에 고스란히 담겨져 전해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