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한계
다카하시 사부로(高橋三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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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유대주의에 삼켜지는 것을 단호하게 저지하는 중대한 과제를 이룩한 인물이며, 그가 써서 남긴 많은 서간들은 신약성경의 중추부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로서도 한 사람의 인간인 이상 그 한계를 피할 수 없었다. 이해하기 쉽게 예를 들어 보면
“부인들은 교회에서는 조용해야 한다. … 만일 뭔가를 배우려 한다면 집에서 남편에게 묻는 것이 좋다.(고전 14:34)”
라고 한 말은 당시의 시대적 제약에 의한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바울이 바리새인으로서 그리스도인 박해에 광분했던 당시의 법률적 사유형식이 이방인의 사도로 소명을 받은 후에까지 남아 있다는 큰 문제가 있다. 이것이 얼마나 중대한 화를 후세에 남기게 되었는가 하는 점에 대해 아래에서 차례로 고찰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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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다마스코 성밖에서 부활의 주 예수님을 만나 이방인의 사도로 소명을 받을 때, 자신이 복음 전체를 파악하였다고 믿었다. 그래서 생전의 예수님께 직접 사사받았던 선배 사도들로부터 예수의 언행에 대해 배울 필요를 인정하지 않고 바로 독자 전도활동을 시작했다. 그 때 그의 탐구의 발자취는 구약의 예언 성취로서의 예수의 생애를 파악한다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바울의 주요저서가 되는 로마서 중에 구약의 인용이 실로 아주 많은 수에 이른다는 점에서 그 사정을 잘 알 수 있다. 그리고 그에게는, 이사야 53장이 말하는 ‘고난의 종’이 백성의 죄를 지고 대속의 죽음에 이르렀다는 서술이 예수의 죽음을 이해하는 결정적 근거가 되었다는 점에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 결과 예수가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대속의 죽음을 이루었다고 하는 그의 속죄론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로 굳어진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 과정을 열린 마음으로 보면, 예루살렘에 군림했던 대제사장을 중심으로 하는 제사장집단이 민중과 이방인 빌라도까지 합세하여 예수의 위를 덮친 것이 아닌가. 결국 인간이 하나님을 심판하고 하나님의 아들을 단죄하여 죽음으로 몰았다는 것이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 아닌가. 그러나 바울에게는 그러한 십자가 이해가 빠져있었다.
그러나 예수 자신이 스스로의 죽음에 대해 바울과는 다른 견해를 말씀하셨던 중요한 사실이 있다.
마태복음 21장 33절 이하에 예수가 말씀하신 포도원의 비유이다. 포도원의 주인이 농장의 사용료를 받기 위해 종들을 보냈을 때 농부들은 반란을 일으켜 어떤 자는 모욕하여 쫓아보내고, 후에 계속된 심부름꾼을 차례로 살해하기에 이르러 주인은 최후수단으로 자신의 아들을 보냈다. 그러자 농부들은 “저 사람은 앞으로 주인될 사람이다. 자, 그를 죽여 재산을 손에 넣자.”고 말했다. 그리고는 그를 잡아 포도원 밖에 데리고 나가 죽였다.
“이 비유를 들은 제사장과 바리새인이 자신의 일을 가리켜 말한 것임을 깨달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마치 ‘인간의 하나님을 향한 총반격’을 예표하는 것이 아닌가. 바울이 만일 이 비유를 알고 있었다면, 저 십자가를 이 예수의 예언성취로 이해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생전의 예수의 언행에 대해 일절 알 필요를 인정하지 않았던 바울에게는 이 예언이 닿지 않았다. 이 일이 바울 신학의 근본적 결함의 원인이 되었다. 바울 뿐만 아니다. 이후에 계속된 교회사상가들의 머리에도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구원을 법률적 사유로 이해한 견해는 계속되었고, 오늘날까지 파급되었다. 결국 구원에 참여하기 위해 어떤 신앙이 필요한가 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의견이 사분오열되고, 그 결과 총수 200에 이르는 분파가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그뿐 아니라 정통신앙에 반한 이단이라고 단죄하여, 사람들을 무고한 죽음으로 몰아간 참사가 계속 이어졌다. 또한 종파간의 싸움은 많은 전쟁의 시발점이 되었고, 그 참상은 현대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주고 있다. 이 참담한 실정을 볼 때 법률적 사유형식이 바울에게 남아있었던 점은 얼마나 커다란 결과를 불러왔는지 확실히 드러난다.
3
그러나 다행한 것은 이 법률적 사유 형식은 신약성경 전체에 퍼져 있지 않다. 예를 들면 요한복음 15장의 “나는 참 포도나무, 나의 아버지는 농부다.”하는 말씀으로 시작하는 예수의 말씀 속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보인다.
“나에게 붙어있어라. 그러면 나는 너희들과 연결된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않으면 스스로는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들도 나에게 붙어있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 …… 만일 사람이 나에게 붙어있고 또 내가 그 사람에게 연결되어 있으면 그 사람은 열매를 풍성하게 맺을 것이다. 나에게서 떨어져서는 너희가 무엇 하나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나에게 붙어있지 않으면 가지처럼 밖에 던지워 마른다. 사람들은 그것을 모아 불에 던져 태워버린다.”
이 최후의 부분은 확실히 하나의 심판사상의 표명이다. 여기에는 법률적 사고가 전혀 보이지 않고, 인격적 수용으로서 복음이 그려져 있는 것이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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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말한 것처럼 바울적 속죄론이 그후 교회사를 일관하여 현대에까지 파급되어 대제사장을 중심으로 하는 제사장 집단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위에 덮쳤다고 하는 원죄적 인식을, 예수의 죽음은 증언하고 있지만 그 인식이 사라지고 말았다.
만일 저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의 그리스도인들이 이 일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다면 천황 중심의 황국사상이 흉악한 침략전쟁에, 국민을 몰아세워갔던 사실을 반복하고 있음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 사실에 대해 영적인 눈가림 속에 안주하고 있었다. 그래서 전쟁은 사람을 죽이는 죄로서 전쟁을 반대한다는 비전평화 사상이 대두되었지만, 천황제에 대한 신앙적 비판에는 눈을 감고 있었다.
5
우찌무라간조(內村鑑三)도 또한, 바울의 신앙사상을 그대로 받아들인 인물이었다. 그런데 친구 니토베이나조(新渡戶稻造)는 자신의 신앙이 우찌무라와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자신의 입신을 말하면서 자신은 정문으로가 아니라 옆문으로 들어온 자이며, 그것은 비애의 문이었다고 술회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다른 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속을 들여다보면 그리스도로 인하여 모두가 일치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는 일고교장시절 우수 제자들을 다수 우찌무라의 문하로 보냈다. 그리고 이 인물들이 무교회의 중추를 담당한 인재로서 중요한 과업을 해냈던 일은 실로 중대한 공헌이었다. 그 제자의 한 사람이 스승 우찌무라를 향하여 “니토베 선생의 신앙도 괜찮습니까?”라 물었을 때 우찌무라는 대답하지 않았다고 한다. 추측컨대 그것으로 괜찮다라고는 말하지 않았으리라.
이런 배타성이 그 후 무교회에도 면면히 꼬리를 드리워 무교회의 섹트화 위험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무교회인 상호간에 심각한 상호비판이 끊이지 않고 현재까지 그 영향이 이어지고 있다. 무교회 자체에도 하나의 새로운 종교개혁이 필요한 것이다. 그 경우 니토베이나조는 실로 귀중한 신앙의 유산을 후세에 남겼다. 사토마사히로(佐藤全弘)씨가 ‘新渡戶稻造전집’의 편집을 담당할 뿐 아니라 그 후에도 ‘新渡戶稻造연구’의 간행을 정력적으로 계속하여 온 것은 앞에서 말한 인식에 기초한 것이 아닐까 나는 생각하고 있다. 니토베가 동경여자대학 학장이었던 당시, 학생들에게 “여러분은 사랑과 배려가 있는 사람이 되기 바란다.”라고 간곡히 타이른 것에도 그의 신앙의 성격이 여실히 드러나 있다. 그리고 참으로 이점이야말로 우찌무라 직계의 무교회인 사이에서 은근슬쩍 빠져버린 것이라는 사실에 우리들은 눈을 크게 떠야 한다.
6
우리들은 바울에 의한 한계를 여기까지 어렵게 써 왔는데, 성서자체도 또한 (성령의 인도에 의해 쓰였다고 하지만 인간이 쓴 것인 이상) 하나의 한계를 갖고있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 이해하기 쉽게 예를 들면, 히브리서는 오래된 대제사론을 주제로 하는 문서인데 예루살렘에 군림한 대제사장이 참 대제사장되는 예수를 단죄하여 죽였다고 하는 사실은 일절 다루지 않는다. 이것을 히브리서의 결정적 결함으로 기록할 수 밖에 없다. 더구나 무교회인 중에서는 ‘올 수 밖에 없는 제2의 종교개혁은 히브리서에 의해 이루어지리라’고 예언한 사람까지 나왔지만, 이것이 근거없는 공론이었다는 것은 지금 의문의 여지가 없다. 혹은 이미 일반화하여 일시적으로 열렬히 제창되었던 성서무오론 등도 존재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지금까지 말한 인식에 입각하면 우리들의 성서 읽기는 근본적으로 변해야 한다. 그리고 얄궂은 일이지만 이렇게 바울이 무시한 생전의 예수에 대한 언행록이 결정적 중요성을 갖고 있음을 재확인해야 할 것이다.
첫댓글 오래 전에 번역해 둔 글이어서 어색한 부분을 다시 약간 수정하였습니다. 'パウロの限界 再考'라는 글을 올리기 위한 기초작업으로 올린 글입니다. 길지만 읽어보시면 다카하시 사부로 선생의 의도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글이 다카하시 선생의 최종 논고(論考)라고 하네요.
잘 읽었습니다.
아주 중요한 자료임에 틀림없는것 같습니다.
그래서 다카하시 선생에게 신앙을 배운 제자들도 다른 의견을 내고 있지요. 다음글 '바울의 한계 재고'가 그런 글입니다.
다만 일본인의 특질상 완곡하게, 너무 완곡하게 표현을 하다보니, 대놓고 돌직구를 던지는 우리에겐 무척 답답하고 소심한 반대의견처럼 느껴집니다.
대속을 부정하신다면 다카하시 선생님의 속죄론은 어떤 것인지 궁금합니다
@순례자 다카하시의 속죄론을 한 번 찾아봐야겠습니다.
ㅈㄴㅅ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