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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순정시대 純淨時代 원문보기 글쓴이: 淨傳
제1강 먼저 부처의 의미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先明佛義]
1) 부처의 정의[佛之釋義]
첫 번째 표는「부처의 정의」로,「불(佛)」이라는 글자의 뜻을 풀이하였습니다. 이 글자는 인도의 범어를 음역한 것으로,「불(弗)」자의 음을 따고 옆에 사람 인(人)자를 붙여서 새로 만든 글자지요.
이 글자는 범어의「불타야(佛陀耶)」를 줄인 것이며, 중국 사람이 뒤의 음을 생략하여 간단하게「불(佛)」이라고 했습니다. 「불」이라는 글자의 의미에는 모든 우주와 인생이 다 포함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안에는 본체와 현상과 작용이 다 들어 있지요. 체(體)는 우리가 보통「불성(佛性)」이라고 하는 것인데, 오직 불성만이 진실합니다. 사실 불성이란 응당 단 하나의「성(性)」을 말해야 하므로, 불경에서는 언제나「자성(自性)」이라고 합니다.
유정(有情)중생 -동물- 의 자성을 불성이라 하고 무정(無情)중생 -식물ㆍ광물- 의 자성을 법성(法性)이라고 하지요.「불」의 의미는 지혜이며, 깨달음[覺悟]입니다.「지(智)」는 체, 즉 성체(性體)이고,「각(覺)」은 자성에서 일어난 작용입니다. 자성의 본체가 지혜이고, 자성의 작용이 큰 깨달음[大覺]인 것이지요.
비록 한자인 지각(智覺)이란 두 글자로「불(佛)」이란 글자의 뜻을 부분적으로 번역할 수는 있겠지만, 그 완전한 뜻을 번역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원래의 음을 그대로 쓰고, 주해를 다는 것입니다. 여기서의 지(智)는 우리가 보통 말하는 지혜가 아니고, 여기서의 각(覺)도 우리가 보통 말하는 깨달음[覺]이 아닙니다. 이것은 모두 중국 문화의 개념 속에는 없는 것들이지요.
먼저「지자(智者)」가 내포하고 있는 뜻을 말해 보겠습니다.
지(智)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으니, 일체지(一切智)와 도종지(道種智), 그리고 일체종지(一切種智)입니다. 이들은 모두 불교 용어입니다.
첫 번째 뜻인「일체지(一切智)」는 현대 철학 용어로 말하면, 우주의 본체를 정확하게 이해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지혜가 불법에서 말하는 일체지입니다. 일체지 밑의 괄호안에는「법의 총상을 아는 것[知法總相]」이라는 간단한 주석이 붙어 있지요.「법」이라는 글자를 불학(佛學)에서는 대명사로 쓰이는데, 전 우주와 인생의 총대명사입니다.
우주 인생의 일체 이론과 일체의 현상, 그리고 일체의 과정과 일체의 일체, 크게는 모든 우주와 작게는 티끌 하나까지, 우리가 요새 말하는 원자나 기본 입자 같은 것을 다「법」이라 부릅니다. 그러므로 법은 우주 만유의 총대명사인 것이지요.
「총상(總相)」은 공통적인 현상이므로, 어떤 법에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모두가 갖는 공통의 현상, 이 모습을 총상이라고 부릅니다. 모든 법의 서로 다른 모습을 별상(別相)이라고 하며, 차별되는 현상을 말합니다. 불법에서 말하는「인연으로 생겨난 법의 성질은 공하다[緣生性空]」는 말에서, 성공(性空)은 총상이고 연생(緣生)은 별상입니다.
총상은 현대 철학에서 탐구하는 우주의 본체에 해당하고, 별상은 철학에서 말하는 현상에 해당합니다. 그렇다면 본체는 어떤 모습일까요? 본체는 공상(空相)으로 불법에서 말하는 공적(空寂)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공은 무(無)가 아니고 공은 유(有)입니다. 이 말은 좀 이상하지요? 어째서 공이라고 했을까요? 공이라고 한 것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접촉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진짜로 존재합니다.
전파를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우리가 무선 라디오의 주파수를 맞추면 바로 소리가 들립니다. 전파가 공간에 꽉 들어차있지만, 눈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전파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잡으려고 해도 잡히지 않지만, 그러나 확실히 있습니다. 그러므로 불법에서 공이라고 하는 것은 있는 것이며 없는 것이 아닙니다.
《반야심경》에서는 말합니다.『색이 곧 공이며 공이 곧 색이다[色卽是空, 空卽是色]』일체법의 총상은「만법이 다 공하다[萬法皆空]」는 것이니, 어떤 법도 공하지 않은 것은 없습니다. 본체로 말하자면 일체법이 다 공합니다.
현대의 과학자들도 이 말에는 다 공감하지만, 다만 불법에서 말하듯 그렇게 정밀하고 심오하고 자세하게 설명하지 못할 뿐입니다. 현대 과학자들도 모든 물질은 다 기본 입자의 조합이며 그 조합의 방정식이 다르기 때문에 각기 다른 원소가 생기고, 그 원소에 다시 각기 다른 방정식이 더해지기 때문에 우주의 만물, 즉 삼라만상이 있게 된다고 합니다.
바닥까지 뿌리를 캐보면 결국 다 동일한 물질, 즉 기본 입자이지요. 과학자들이 발견한 가장 작은 이 물질이 조합되어 모든 물건들이 만들어졌다면, 그렇다면 이 작은 물질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요? 이 물질의 끝은 또 어디일까요? 과학자들도 이를 모릅니다.
그러나 불법에서는 좀 더 심오하게 설명합니다. 이 기본 물질이 어디에서 오느냐 하면, 견분(見分)에서 변해 나온 것입니다. 이 말은 곧 정신과 물질이 한 몸이라는 뜻이지요.
《유식론(唯識論)》에서「견상동원(見相同源)」이라고 하는 것은, 견분과 상분(相分)이 모두 자증분(自證分)에서 변화되어 나온 것으로, 하나의 동일한 본체를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자증분은 자성이고 견분은 오늘날 말하는 정신세계이며, 상분은 물질의 세계입니다.
불법에서 물질이라고 하는 것은 4대(大), 즉 지ㆍ수ㆍ화ㆍ풍(地水火風)을 말합니다. 4대란 물질에 네 가지 특성이 있다는 말인데, 이로써 만법과 10법계의 의정장엄(依正莊嚴)으로 변화되어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지대(地大)」는 하나의 물질입니다. 비록 아주 작지만 그래도 나름의 부피를 가지고 있지요. 땅은 부피를 가진 물질이기 때문에 땅은 물체를 표시합니다.「화대(火大)」는 온도와 에너지를 나타내고,
「수대(水大)」는 습도를 나타냅니다.
요즘 사람들이 양의 전극을 띄고 있다 음의 전극을 띄고 있다 하는 말을 불경에서는 화대와 수대로 표현하는 것이지요.「풍대(風大)」는 움직이는 것으로 정지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기본적인 물질은 이와 같은 네 가지 특성을 갖고 있습니다.
이 세계의 모든 물질 현상은 변하지 않는 것이 없으며 움직이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일체 물상이 다 자기 자리에서 변화하며 움직이고 있습니다. 어째서 그런가 하면, 그 물상을 조성하고 있는 기본 입자가 동상(動相)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으로 보면 모든 법은 공상(空相)이며, 모든 법은 다 공합니다. 분석공(分析空)이라는 말입니다. 오늘날 과학자들이 분석해 낸 것은 일종의 분석공입니다. 분석해 보니 마지막에는 하나의 기본 입자만 남더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불법에서는 더 깊이 들어가, 그 기본 입자가 어디에서 오는지 관찰합니다. 법성 안의 무(無)에서 유(有)가 나옵니다. 없는 가운데 있을 수 있고, 있었다가 또 없음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공(空)과 유(有)는 다르지 않습니다. 공과 유는 둘이 아니고 하나입니다. 다시 말하면 정신이 물질로 변할 수 있고, 물질도 또 변하여 정신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결코 요새 말하는 질량과 에너지 등가의 법칙[質能互變]에서의 질량과 에너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물질의 에너지[能]이지, 진여 본성의 에너지나 정신적인 에너지는 아닙니다. 정신적 에너지는 물질적 에너지로 변할 수 있고, 물질적 에너지도 물질로 변할 수 있습니다.
이 단계까지는 과학자들도 아직 발견하지 못하였지만, 과학이 계속 진보하면 반드시 이 원리를 발견하게 되리라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일체법의 본체에서 관찰해 보면 그것은 공상입니다.
진정으로 일체법이 공상임을 이해하면 어떤 좋은 점이 있을까요?
좋은 점은 너무나 많습니다. 번뇌가 없어지고 분별과 집착이 없어져서, 마음이 경계 속에서 청정하고 평등하게 드러납니다.
부처님의 마음은 청정하고 평등한데, 부처님은 그 마음을 어디서 얻으셨겠습니까? 부처님은 법의 총체적인 모습을 아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청정은 어떻게 얻었을까요? 일체의 법에 집착하지 않고 분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모든 법이 원래 한 가지이며 다르지 않음을 아셨습니다. 모든 경계는 좋고 나쁨이 없이 똑같은 기본 입자로 이루어졌고, 원료가 같으므로 모든 법은 평등하지 않은 것이 없음을 아셨습니다. 평등한 마음은 여기에서 일어났습니다. 마음이 평등하니 당연히 청정해진 것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 지혜이며 이런 지혜는 아라한이면 얻을 수 있습니다.
불법에서는「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을 추구합니다. 일체지(一切智)가 눈앞에 나타나는 것을「정각(正覺)」이라고 하며, 진정한 깨달음[覺悟], 정확한 깨달음을 뜻합니다. 우주와 인생에 대해서 미혹하지 않고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을 정각이라고 합니다.
이 정각이 그렇다고 원만한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단지 일체법의 총체적인 모습, 즉 일체법이 평등하고 공적하다는 것만 알 뿐, 현상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는 모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다 기본 입자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맞습니다. 그런데 그 기본 입자가 어떻게 이 물건을 만들었을까요? 10법계의 의정장엄과 삼라만상은 어떻게 생긴 것일까요? 이건 현상을 말하는 것이니, 한 층 더 높은 학문입니다.
우주 만상을 정확하고 명료하게 아는 지혜를「도종지(道種智)」라고 합니다. 도종지의「종(種)」은 종류입니다. 우주 공간에는 동물ㆍ식물ㆍ광물 가릴 것 없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종류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많은 종류들이 어떻게 생겨났을까요? 보통 사람들은 알 수가 없습니다. 분명 신이 만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신이 만물을 만들었다면 신은 너무 바빴을 겁니다. 하루 종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만들어야 했을 테니까요. 게다가 기껏 사람들을 만들어놨더니 나중에 또 신(神)에게 반발까지 합니다. 그렇다면 이건 신이 스스로 골칫거리를 만든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기에 대해서는 종교학자들도 답을 찾지 못하고, 그저 신이 만들었으려니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은 어디서 나왔습니까? 사람의 마음속에서 변화되어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물을 만들었다면 그럼 누가 하나님을 만들었습니까? 우리 모두가 하느님을 만든 것입니다. 우리가 그를 신으로, 하느님으로 인정하지 않으면, 그도 어쩔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니 하느님이 만든 것은 아닙니다.
「도(道)」는 도리이고 순서입니다. 어떤 도리와 어떤 과정으로 현재와 같은 삼라만상이 이루어지게 되었을까요? 이 학문은 상당히 복잡한데, 이런 지혜를 도종지라고 합니다. 이것은 보살의 지혜이지요. 이런 지혜가 눈앞에 나타나는 것을「정등정각(正等正覺)」이라고 하며, 정각보다 한 단계 높은 경지입니다. 우주의 본체를 알뿐 아니라 일체 현상이 발전하는 과정까지 알지요.
「법의 총체적인 모습을 아는 것[知法總相]」이 체에 대한 인식이라면 「법의 별상을 아는 것[知法別相]」은 현상에 대한 인식입니다.
세 번째 지혜는 가장 원만하고 가장 구경한 지혜입니다. 우주와 인생의 진상에 대해 그 구경(究竟)을 원만하게 훤히 이해하여 터럭만큼의 미혹도 없고 터럭만큼의 오차도 없는 것이지요. 이런 지혜를「일체종지(一切種智)」라고 합니다. 일체는 앞에서 말한 일체지이고, 종지(種智)는 도종지입니다.
우리는 본체와 현상을 나누어 말하지만, 사실 본체와 현상은 하나입니다.《심경》의 말로 설명하면, 일체지는『공(空)」이고 도종지는「색(色)」이며, 일체종지는「색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으며 색이 곧 공이고 공이 곧 색이다[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라는 말입니다. 원래 하나이며 둘이 아닌 것이지요.
만약 여러분이 하나임을 발견하면 여러분은 바로 문에 들어서게 됩니다. 이 불법의 문을 불이법문(不二法門)이라고 부르지요. 여러분은 불이법문에 들어선 것입니다. 총(總)과 별(別)이 둘이 아님을 알면 불문에 들어선 것이지만, 만약 총과 별이 둘이면 여러분은 입문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성(性)과 상(相)이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기용(起用) 중의 정지(正知)와 정견(正見)이며, 우리들이 말하는 부처님의 지혜[佛知]이고 부처님의 견해[佛見]입니다.
《법화경》에서의『부처님의 지견을 열어 보여 깨달아 들어간다[開示悟入佛之知見]』는 말입니다. 이 지혜가 나타나는 것을「무상정등정각」이라고 부르는데, 오직 부처님만이 원만히 증득하셨습니다.
세 가지 지혜는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어서, 하나가 셋이며 또 셋이 하나이기도 합니다. 나한은 일체지에 치우치고 보살은 도종지에 치우치며, 오직 부처님만이 원만합니다.
불교 공부를 할 때에 가장 똑똑한 수학 방법은 지견이 원만해야 하며 치우쳐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주관은 치우친 것이고 객관은 원만한 것이지요. 모든 부처님에게는 터럭만한 주관적인 관념도 없어서, 원융하고 자재합니다. 아라한은 주관적인 관념을 가지고 있고, 보살도 약간의 주관적 관념은 가지고 있으므로 원만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현명하게 공부하려면 객관을 배워야 하며, 주관적인 관념이 존재하지 않아야만 원만한 지혜를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 세 가지 지혜는 어디에서 얻을 수 있을까요? 한마음[一心]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행문(行門)에서 단도직입적으로 무상정등정각을 구하는 것이 바로《아미타경》에서 사용하는 일심불란(一心不亂)의 방법입니다.
중국의 어느 종파도 염불을 하지 않는 종파는 없습니다. 선종까지도 말입니다. 선종에서도 예불시 저녁에는 다들《아미타경》을 읽으며 아미타불을 외웁니다.《화엄경》의 수행 방법은 2천여 종류나 되니 상당히 많지요.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염불법문입니다.
선재동자 53참은 시작부터 끝까지 다 염불법문을 수행하는 과정이었습니다. 그리고 보현보살이 극락으로 돌아가도록 인도한 것은 어떤 법문이라도 정각과 정등정각을 성취할 수는 있지만, 무상정등정각을 성취할 수는 없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만약 무상정등정각을 이루려면 반드시 염불법문을 닦아야 합니다. 염불법문은 일심불란을 상징하니, 오직 일심불란만이 일체종지에 도달할 수 있지요. 그러므로 염불법문은 일체종지를 수학하는 방법과 수단인 것입니다. 참으로 불가사의하지요.
「각자(覺者)」는 지혜의 작용을 말합니다. 지(智)는 체(體)이고 각(覺)은 용(用)입니다. 체가 있으면 용이 있지요. 만약 작용이 없다면 비록 이 몸을 얻었다 하더라도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습니다. 이 작용이란 것이 바로 불법에서 말하는 해탈입니다. 만약 3덕(德) -법신(法身)ㆍ반야(般若)ㆍ해탈- 으로 말하자면 불(佛) -불성(佛性)- 이 곧 법신이고, 지자(智者)는 반야이며, 각자(覺者)는 해탈입니다. 해탈은 대자재를 얻는 것이지요.
작용은 또 두 방면으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자신에 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환경에 대한 것입니다. 자신에 대한 것을「각찰(覺察)」이라 하고 환경에 대한 것을「각오(覺悟)」라 합니다.
여기에 두 개의 전문용어가 나오는데, 첫째가「번뇌장(煩惱障)」이고 둘째는「소지장(所知障)」입니다. 번뇌는 그 자체가 장애이지만 소지(所知) 자체는 장애는 아닙니다. 소지는 우리가 응당 알아야 할 것이지요. 그런데 그 꼭 알아야 할 것이 지금 모르는 것으로 변해있다면, 여기에는 틀림없이 뭔가 장애가 있는 것입니다. 이 알아야 할 것을 방해하는 것을 소지장이라고 합니다. 이 두 용어가 내포하고 있는 뜻을 반드시 꼭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번뇌장(煩惱障)」: 견사번뇌(見思煩惱)의 총칭입니다.「견(見)」은 견해이고「사(思)」는 사상이니, 견해와 사상에 착오가 생겨서 수많은 번뇌를 가져 오는 것이지요. 견사번뇌 중에서「아견(我見)」이 첫째입니다.
《유식론》에는 128근본번뇌를 비롯하여 등류(等流)와 수번뇌(隨煩惱) 같은 많은 숫자가 나옵니다.《백법명문론(百法明門論)》은 26개로 귀납하여 정리하는데, 그 가운데 6개는 근본번뇌이고 20개는 수번뇌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은 크게 분류하여 귀납한 것일 뿐, 매 종류 안에 포함하고 있는 숫자는 정확히 알 수도 없을 정도로 헤아릴 수 없이 많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번뇌는 무량무변합니다.
우리가 번뇌를 끊고 싶으나, 이 번뇌는 나무처럼 가지와 잎이 한량없이 많기 때문에 뿌리를 찾아서 근본을 끊어야만 쉽습니다.
번뇌장의 뿌리는「아집(我執)」입니다. 내가 있기 때문에 번뇌가 있는 것이니까요. 만약 내가 없다면 번뇌는 발을 디딜 곳이 없습니다. 번뇌장의 근원은 아집이고 소지장의 근원은 법집(法執)이니, 이 두 집착이 깨지면 이 두 장애도 사라집니다. 그래야 비로소 마음을 밝혀 견성하여[明心見性] 부처가 되고 조사가 될 수 있습니다.
갖가지 번뇌는 우리의 몸과 마음을 요란하게 흔들어 열반을 장애합니다. 열반은 범어이며, 보통 원적(圓寂)이라고 번역합니다. 원(圓)은 공덕이 원만한 것이고, 적(寂)은 청정 적멸한 것입니다. 우리의 진여본성 -불성(佛性)ㆍ자성ㆍ청정심- 은 분명 원만한 공덕이며 청정한 적멸이니, 육조께서 말씀하신「본래 청정, 본래 구족(本來淸淨, 本來具足)」과 같습니다.
현재 우리의 마음이 청정하지 못하다면, 청정하지 못한 원인은 여러분에게 번뇌가 있기 때문입니다. 번뇌가 있기에 청정하지 못하고 번뇌가 있기에 자재하지 못하며, 번뇌가 있기에 무량무변한 고통의 과보[苦報]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불교를 공부하려면 가장 먼저 번뇌를 끊어야 합니다.
불교를 공부하면 최소한 운명을 바꿀 수 있어야 합니다. 업을 바꾸는 일[轉業], 이것이 가장 최소한이지요. 만약 이조차도 못한다면 공부해 봤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원료범(袁了凡;《료범사훈(了凡四訓)》의 저자 -역자 註)은 확실하게 자기의 운명을 바꾼 사람입니다. 타이완에서도 수많은 불교 공부하는 사람들이 후반부 반평생의 운명을 불교를 공부하면서 스스로 바꾸었습니다.
이병남 선생님은 올해 96세가 되셨는데, 선생님 말씀으로는 원래 선생님의 수명은 이렇게 길지 않았고 기껏해야 69세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금년에 96세이시니, 스스로 수행으로 얻으신 수명인 것이지요.
제가 불교 공부를 하기 전에 많은 사람들이 저의 관상도 봐주고 점도 쳐주었는데, 다들 제가 45세를 넘기지 못할 거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금년에 59세가 되었으니, 이 역시 수행으로 얻게 된 것이지요. 이것이 불교 공부의 가장 작은 좋은 점인데, 우리는 이미 얻은 셈입니다. 만약 이것조차도 바꿀 수 없다면 불교 공부는 아무런 효과도 없는 것이며, 아무런 성적도 못 거둔 것입니다.
업을 바꾸려면 어디서부터 바꿔야 할까요? 바로 이 두 장애부터 바꿔야 합니다. 이 두 장애는 모두 일체지ㆍ도종지ㆍ일체종지 등의 지혜에 의지하여 깨뜨릴 수 있습니다. 이 두 장애는 지혜를 막고 우리의 청정심을 막아서, 우리의 원만한 공덕을 방해합니다. 그리고 장애의 결과는 6도 윤회(六道輪回)로 변해 나타납니다. 6도 윤회는 누가 만드는 것입니까? 번뇌장이 만듭니다. 그러므로 번뇌장이 타파되면 6도 윤회는 바로 사라집니다.
아라한은 선정의 공부로 제9정[滅盡定]을 성취하는데, 6도에는 4선(禪) 8정(定)이 있을 뿐, 제9정은 없으므로 제9정은 6도를 초월한 것입니다. 제9정은 아집을 깨뜨리고 번뇌장을 끊어서, 6도 윤회가 없어집니다. 따라서 아라한에게는 6도 윤회가 없습니다.
6도 윤회는 자기 스스로 만든 것이며 자기가 지은대로 자기가 받는 것이므로, 절대 하늘을 원망하거나 남을 탓해서는 안 된다는 설명이 되지요. 뒤의 제5강에서 12인연에 대해 말하면서, 그때 여러분에게 윤회란 도대체 어떤 것인지 다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번뇌는 업력을 발동시켜서 여러분을 윤회 속에서 끊임없이 자꾸 태어나게 하고 그 속에서 돌고 돌게 합니다. 번뇌는 속박하는 성질을 갖고 있으므로, 여러분을 자유롭지 못하게 하고 유정 중생들을 속박합니다. 이 속박은 형체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에게 번뇌가 있다면, 마음에 생각하는 일이 너무 많아 자재하지 못하게 됩니다. 다만 번뇌가 있기만 하면 여러분은 생사윤회를 벗어날 방법이 없습니다. 번뇌는 열반을 방해하고 생공[生空] -인아공(人我空)- 을 방해합니다.
「소지장(所知障)」은 법집(法執)을 근본으로 합니다. 세간 출세간의 일체법에 대해 집착을 일으킨다면 이것 역시 일을 복잡하게 만듭니다. 그 숫자는 얼마나 될까요? 번뇌장과 마찬가지로 무량무변합니다. 소지장은 우리가 본래 알고 있던[所知] 경계를 알지 못하는[無知] 경계로 바꾸어 버립니다.
부처님께서는《화엄경》에서 말씀하셨습니다.『일체 중생이 다 여래의 지혜와 덕상을 가지고 있다[一切衆生皆有如來智慧德相]』. 그렇다면 우리의 지혜는 부처님만큼이나 커서, 부처님이 모르는 것이 없으시다면 우리도 원래는 모르는 것이 없어야 합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본래의 능력을 잃어버리고, 모르는 것이 없던 사람이 아는 것이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배워도 배워지지가 않으니 큰일 아닙니까? 이걸 어쩌다 잃어버렸을까요? 장애가 있기 때문인데, 이 장애가 바로「법집」입니다. 일체의 법에 대해서 분별과 집착을 일으켰기 때문에 장애로 변하여 우리의 일체 지혜를 상실하게 된 것입니다.
이 말을 의심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지식이란 것은 반드시 배워야 알게 되는 것인데, 어떻게 배우지도 않고 안단 말인가 하고요. 진정한 지혜는 학습하는 것이 아닙니다.
불경에「무사지(無師智)」라는 말을 자주 나오는데, 여기에서의 사(師)가 바로 학습입니다. 학습하지 않는 것은「자연지(自然智)」로, 공부가 필요 없이 자연히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을 믿기는 어려울 겁니다. 상식으로 상상할 수 있는 일도 아닐뿐더러, 또 여러분이 평생 동안 이런 사람을 본 적도 없으니, 당연히 믿지 못하겠지요. 그러나 이것은 진실입니다.
《육조단경》에 의하면, 육조대사는 글을 배운 적이 없어 글자를 몰랐고, 또 밖에 나가 참학(參學)한 적도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선근이 깊고 두터웠기 때문에, 장작을 팔러 다니다가 어떤 사람이《금강경》을 읽는 소리를 듣고, 단 몇 구절을 듣고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수백 번, 수천 번을 읽어도 깨닫지 못합니다.
그가 사람이라면 우리도 사람인데, 어째서 그가 한 일을 우리는 하지 못하나요?
그는 경전 읽는 소리를 들었을 때에 아집이나 법집을 갖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서 듣자마자 바로 깨달음을 얻은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경전을 듣고 독송을 하더라도, 아집과 법집이 있으면 그게 다 장애입니다. 장애가 너무 무거우면 당연히 깨닫지 못하지요. 그러므로 불법은 집착을 깨뜨리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만약 일체 집착이 없다면, 듣자마자 깨닫고 보자마자 깨달을 것입니다. 깨닫고 나면 그 후의 경계는 모르는 것이 없고[無所不知] 못하는 것이 없는[無所不能] 경계로 변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육조대사께 경전의 도리를 물으며 가르침을 청하곤 하였습니다. 그러면 육조 스님은 말씀하셨답니다.『나는 글자를 모르니, 당신이 읽어서 들려주십시오.』가르침을 청하는 사람이 한 번 읽으면 육조대사가 바로 풀어 설명해 주셨지요.
육조대사는 배운 적이 없지만 뜻은 완전히 명료하게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런 장애가 없었으므로 6근이 바깥의 6진 경계를 접촉하면 모두 지혜로 변한 것이지요. 이것이 무사지이며 자연지입니다.
마음이 청정하려면 마음속에 어떤 작은 것도 있어서는 안 됩니다. 아주 작은 것이라도 있다면 그것이 바로 장애이며, 번뇌장 아니면 소지장입니다. 소지장은 보리 -각성- 를 방해하여, 여러분이 일체의 법을 깨닫지 못하고 미혹하게 만듭니다. 번뇌장이 일어날 때에는 반드시 소지장을 같이 끌고 오지만, 소지장이 일어날 때에 반드시 번뇌장을 데리고 오는 것은 아닙니다.
이 두 가지 장애 가운데 하나는 열반을 방해하고 하나는 보리를 방해한다고 하지만, 사실 엄격하게 말하면 번뇌장은 열반을 방해하는 동시에 또 보리를 방해하며, 소지장은 보리를 방해하는 동시에 열반을 방해하기도 합니다. 단지 어떤 종류의 장애가 어떤 방면에 좀 더 큰 장애가 된다고 말하는 것 뿐, 사실 모두 다 장애인 것이지요.
「각찰(覺察)」은「번뇌장에 대한 것[對煩惱障]」인데, 대(對)는 대응한다는 뜻입니다. 번뇌장은 병이고 각찰은 약이므로, 이 약을 가지고 병을 치료한다는 말이지요. 각(覺)은 각오(覺悟)이고 찰(察)은 관찰입니다. 요새 우리가 말하는 반성과 같은데, 반성과 성찰의 공부를 하는 것이지요. 만약 깊이 반성하지 못하면 우리는 경계 안에서 항상 미혹하여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번뇌를 일으키게 됩니다.
아래 두 구절에서는 번뇌장의 피해를「침해함이 도둑과 같지만, 도둑인 줄 깨달으면 (도둑이) 무능해진다[侵害如賊, 覺賊無能]」고 비유하였습니다. 적(賊)은 도둑이니 여기까지 들어왔다면 우리의 재물은 손실을 입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마치 번뇌장이 일어난 후에는 우리의 진실한 성품의 공덕이 나타나지 못하고 청정심도 나타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마음이 본래는 청정한 것이지만 이 번뇌를 한 겹 뒤집어쓰면 청정하지 않게 됩니다. 그렇지만 깨달으면 바로 회복되지요.
깨달음은 도적을 무능하게 한다는 말은 여러분이 만약 각찰하면 도적은 작용을 하지 못하여 능력을 발휘할 수 없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번뇌는 무섭지 않지만 번뇌인 줄 깨달음이 더딜까 두렵다고 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부디 빨리 깨달으십시오.
그런데 어떤 방법으로 깨달을까요? 여기에 우리의 수행과 공부의 관건이 있습니다. 먼저 번뇌의 형상을 알고 그것을 인식해야겠지요. 번뇌의 형상에 대해서는 경전과 논문 등에서 장문의 문장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만, 간단히 말하면, 이른바 5욕7정이 바로 번뇌의 모습입니다. 7정이란 기쁨ㆍ성냄ㆍ슬픔ㆍ즐거움ㆍ사랑ㆍ미움ㆍ욕심을 말합니다.
《유식론》과《백법명문론》을 읽으면 번뇌의 형상에 대해서 대략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 다음에는 이런 형상이 눈앞에 나타나면,“ 아, 나에게 번뇌가 일어나는구나.”하면서 그 자리에서 저절로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이 깨닫기만 하면 번뇌는 작용을 일으킬 수 없게 변해 버립니다.
가장 간단하게 구별할 수 있는 방법이 하나 더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청정하고 광명한 것인데, 만약 모든 물질 환경과 인사 환경 속에서 우리의 이 마음이 청정하지 않고 광명하지 않다면 그것은 번뇌가 있어서이고 장애가 있어서입니다. 이럴 때에는 반드시 관조(觀照)를 해야 합니다. 일단 관조를 하면 번뇌는 바로 없어집니다.
그렇다면 관조란 무엇일까요? 어떤 방법으로 관조할까요?
여러분, 한 마디「아미타불」이 바로 관조이며, 관조의 방법입니다. 나무아미타불이라는 이 여섯 글자에서「나무(南無)」는 귀의(歸依)이고「아(阿)」는 무(無)이며,「미타(彌陀)」는 량(量),「불(佛)」은 깨달음으로 번역됩니다. 따라서 이 부처님 이름을 번역하면「무량한 깨달음에 귀의합니다[歸依無量覺]」라는 뜻이 되지요.
모든 것을 다 깨닫고자 한다면, 어찌 이 한 마디 부처님 명호가 깨달음으로 돌아가게 도와주고 깨닫지 못한[不覺] 경계에서 빠져나오게 도와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들은 깨달음에 의지하여야지 번뇌에 의지하여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어 순경계에서 탐심(貪心)이 일어나면, 여러분은 곧바로 탐심이 번뇌임을 각찰하여야 합니다. 청정심에는 탐애(貪愛)가 없습니다. 탐심이 막 일어나려고 할 때 나무아미타불을 외면 탐욕에서 돌이킬 수 있습니다. 탐(貪)은 깨닫지 못한 것이며 번뇌이며 미혹이니, 여기에서 고개를 돌리면 각(覺)에 의지하게 됩니다.
깨달은 마음은 청정하여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데, 이 부처님 명호는 효과가 있어서 외울 때마다 번뇌로부터 빠져나오게 합니다. 만약 부처님 명호를 잊어버리면 번뇌가 곧바로 작용을 일으켜, 하나에 하나를 이어 점점 많이 늘어나고 상속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염불은 번뇌를 끊는 공부입니다.
염불을 할 때에는 이처럼 해야만 일심불란(一心不亂)을 얻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염불법으로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르면 번뇌가 일어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비록 번뇌가 있더라도 염불 공부가 아주 잘 되면 부처님 명호가 번뇌를 완전히 항복시킵니다. 이것이 바로「공부가 덩어리를 이루는 것[功夫成片]」입니다. 정토종에서 업을 가진 채로 왕생한다[帶業往生]고 하는 것이 바로 이겁니다. 결정코 왕생할 수 있습니다.
왕생하기 전에 우리의 몸과 마음은 아주 자재합니다. 하루 온종일 아무런 번뇌도 없기 때문입니다. 번뇌가 없으니 즐겁고 아주 자재하지요. 공부가 더욱 깊어지면 염불로 번뇌를 끊어 번뇌장을 몽땅 깨뜨리며 아집을 없애 염불삼매를 얻게 됩니다. 이것을「사일심불란(事一心不亂)」이라고 합니다.
만약 공부가 더더욱 깊어지면 소지장까지도 깨뜨리게 되어서, 「이일심불란(理一心不亂)」을 얻게 됩니다. 이일심불란이 바로 성불 -분증불(分證佛)- 입니다. 왜냐하면 이일심불란은 마음을 밝혀 견성하고[明心見性], 견성하여 성불하는[見性成佛]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부처님 명호가 말로 다할 수 없이 오묘하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많은 염불하는 사람들은 미신에 빠져 있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종일 아미타불을 외우면 아미타불이 자기를 지키고 도와주리라고 생각하지요. 아미타불은 자기를 상대도 않으리라는 생각은 하지 못합니다. 아무 효과가 없다는 걸 어떻게 아냐고요?
설사 하루에 부처님 명호를 10만 번을 외운다 하여도 성질은 여전히 사나워서, 남들이 한번 기분 나쁘게 하면 몇날 며칠을 화내고 그러다 몇 마디 좋은 말을 해주면 또 며칠씩 기뻐한다면, 이래서야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는 번뇌가 조금도 끊어지지 않고 번뇌가 자주 일어나는 것이므로, 부처님 명호가 번뇌를 누르지 못하여 왕생도 하지 못합니다.
서방 극락세계에 왕생하려면 하루에 몇 번이나 부처님 명호를 외워야 아미타불께서 와서 맞아 인도해 주시는지 아미타불은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정토종의 경론을 다 뒤져도 그런 말은 없습니다.
조건이라면 한 마음으로 어지럽지 않은[一心不亂] 것과 마음이 전도되지 않는[心不顚倒] 것이지요. 평생에 단 한 번 부처님 명호를 외우더라도 그 한 번의 부처님 명호를 일심불란하게 외운다면 왕생할 수 있습니다. 하루에 10만 번 부처님 명호를 외우더라도 일심불란하게 염불하지 못하면 갈 수 없습니다.
《아미타경》에 아주 분명하게 나와 있습니다. 왕생의 기준은 일심불란과 심불전도(心不顚倒)라고 말입니다. 번뇌장을 깨뜨리는 것이 일심불란이고, 소지장을 깨뜨리는 것이 심불전도입니다. 정토의 법문은 교의와 완전히 상응하므로, 교의에 통달할 수 없다면 이 아미타불 염불도 잘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무량한 많은 법문이 다 이 두 가지 장애를 깨뜨리기 위한 것이며, 정토 법문에서 아미타불을 염불하는 것도 예외가 아니어서 역시 두 가지 장애를 깨뜨리려는 것입니다.
마명(馬鳴) 보살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본각은 본래 있고 불각은 본래 없다[本覺本有, 不覺本無]』 본래 있는 것은 당연히 회복할 수 있고 본래 없는 것은 당연히 끊어버릴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반드시 믿어야 합니다. 이것을 자신(自信)이라고 하는데, 자신을 믿는다는 것이지요.
불법에서 말하는 신심이란, 믿고 이해하며 행하고 증득하는[信解行證] 가운데 첫째인 자기 자신을 믿는 일입니다. 그런 다음에라야 여러 부처님과 보살들이 우리를 위하여 증상연(增上緣)을 지어 돕고, 우리가 스스로 믿도록 도우며, 우리가 스스로 깨닫도록 도우며, 우리가 스스로 수행하여 스스로 증득하도록 돕는다는 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일체를 자신에게 의지하여야 합니다. 자기를 의지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은 도와줄 수 없습니다.
「각오(覺悟)」는「소지장」에 대응하여 다스리는 것입니다. 여기에도 비유가 나오는데,「잠에 빠진 듯 혼미하지만 깨어나면 분명해진다[昏迷如睡, 覺卽分明]」는 것입니다. 우리가 잠이 들었을 때에는 아무 것도 모르지만, 잠에서 깨어나면 다시 회복되지요. 일체 경계 안에서 분별과 집착과 망상을 일으키면서 외부 환경의 진상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는 것을 잠든 것에 비유하였고, 일체 경계 안에서 분별과 집착과 망상을 갖지 않아서 능력이 다시 회복되는 것을 다시 깨어나는 거에 비유하였습니다.
그러나 분별과 집착은 말이 쉽지 진정으로 끊어 제거하기는 정말 쉽지 않습니다. 따라서 초학자들은 반드시 선정 공부[定功]에서 시작해야 하는데, 이 말은 반드시 선정을 닦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선정을 닦기 전에 반드시 계율을 닦아야 합니다. 계율이 선정을 도와주기 때문입니다.
무시겁(無始劫) 이래 우리의 습기(習氣)는 너무나 깊습니다. 습기는 번뇌입니다. 번뇌가 너무 무거우면 반드시 계율의 조목에 따라 억지로 수행하고 공부해서라도 먼저 악업을 끊도록 자기를 단속해야 합니다. 악업을 끊어 제거한 다음에는 선업에 조차도 집착하지 않아야 선정을 얻고 마음이 청정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청정심에서는 저절로 지혜가 생겨나고, 지혜가 나타나면 두 장애를 깨뜨려 제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자성 안에 본래 구족한 대지(大智)와 대각(大覺)을 회복하는 것이 바로 성불입니다.
아래에「자행ㆍ화타ㆍ행만(自行ㆍ化他ㆍ行滿)」이라는 세 구절이 있지요.
자행(自行)은 자기 학습으로, 이론과 방법에 따라 수행하는 것입니다.
화타(化他)는 중생을 교화하는 것이니, 가르치고 배우면서 서로 격려한다는 말이지요. 중생을 교화하는 일이 자기의 깨달음을 돕는다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을 도우려는 마음을 내지 않으면 자기 자신도 원만하게 깨달음을 성취할 방법이 없습니다.
행만(行滿)은 자행과 화타가 원만한 것입니다. 만약 자기 수행만 하고 남을 교화하려 않는다면 그건 소승(小乘)입니다. 마치 아라한처럼 주동적으로 남을 교화하지 않는 것이지요. 아라한은 여러분이 먼저 가르침을 청해야 가르쳐 주며, 주동적으로 가르쳐 주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보살은 그렇지 않습니다. 보살은 중생의 초청받지 않은 친구[不請之友]가 되어 중생이 청하지 않아도 찾아와서 가르쳐 줍니다. 자기 수행과 타인 교화를 겸할 수 있으면 대승의 보살이고, 자기 수행과 타인 교화가 원만해지면 그것이 바로 부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