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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가톨릭 사랑방 원문보기 글쓴이: 솔빛
니고데모를 가르치는 그리스도. 야콥 요르단스
2011년 4월 15일 사순 제5주간 금요일
예레20,10-13 요한10,31-42
“내가 아버지의 일을 하지 않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내가 그 일을 하고 있으니 나를 믿지 않더라도
내가 하는 일만은 믿어야 할 것이 아니냐?
그러면 너희는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될 것 이다”(요한 10,31-42)
독선이 아닌 확신과 시비가 아닌 사랑이 /김찬선신부님
“마르고 미싸빕”
오늘 예레미야서에 나온 말입니다.
생소한 말이지만 우리말로 번역하자면
사면초가의 상태에 몰린 사람을 일컫는 말입니다.
참 부끄럽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지만
저는 마르고 미싸빕이 된 적이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마르고 미싸빕이 된 적이 거의 없음이 미안한 것은
어떤 이유에서건 사면초가에 몰린 분들에 대해서입니다.
이런 미안함은 인간된 情理로서 이해가 되지만,
그런데 부끄러움은 어떤 의미일까요?
예레미야처럼 불의한 사람에 의해 사면초가에 몰린 적이 없고
예수님처럼 하느님을 위해 사면초가에 몰린 적이 없다는 뜻입니다.
제가 불의와 적극적인 타협을 하지는 않지만
많은 경우 저는 불의하다고 생각되는 것에 대해 조용함으로써
소극적인 타협을 하는 것입니다.
하여 사람들과 척지지 않았고 그래서 궁지에 몰린 적이 없습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
다시 말해서 소극적 타협을 하는 이유는 대개 다음 몇 가지입니다.
첫째는 그 불의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대단한 것도 아닌데
그 사소한 것을 가지고 일일이 시비하여
관계를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관계가 틀어지는 것을 감수하는 것은 큰 불의에 대해서만이고
사소한 불의는 그냥 넘어가자는 것입니다.
둘째는 조심스러움 때문입니다.
대다수가 맞다고 하는데 나만 아니라고 하는 것이 맞는지
확신이 서지 않기에 조심스러운 것입니다.
셋째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소극적인 타협을 하는 제일 큰 이유는 무엇보다도 두려움 때문입니다.
사면초가의 두려움을 감수할 정도로 진리를 사랑하거나
사면초가가 되어도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기에 외롭지 않은 사람만이
사면초가를 무릅쓰지
그렇지 않은 사람은 누구나 이 두려움에 굴복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사면초가에 몰린 주님과 예레미아는
하느님께서 자신과 함께 계시다는 확신이 있으며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기에 자신이 하는 말이나 하는 일이
다 하느님에게서 나온 것이라는 확신이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얘기합니다.
“주님께서 힘센 용사처럼 제 곁에 계시니”
주님께서도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나도 아버지 안에 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내가 하느님 안에 있고
하느님도 내 안에 계시기에
나는 진리 안에 있고 진리를 실천하고 있다는,
독선이 아닌 확신이 저에게 있기를.
나의 말은 나와 그의 우리 공동체가 정의롭기를 바라는,
그래서 시비가 아닌 사랑의 말이기를.
이 새벽 기원하여 봅니다.
기득권을 지키려고 /송영진 신부님
유대인들이 돌을 집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아버지의 분부에 따라 너희에게 좋은 일을 많이 보여 주었다.
그 가운데에서 어떤 일로 나에게 돌을 던지려고 하느냐?"
'좋은 일'이란 '선한 일, 인간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대답합니다.
"좋은 일을 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을 모독하였기 때문에 당신에게 돌을 던지려는 것이오."
유대인들의 말을 보면 예수님께서 좋은 일을 하셨다는 것은 인정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느님을 모독한 사람은 죽여야 한다는 율법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그 율법대로 할 뿐이라는 태도를 보입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유대인들의 율법주의나 근본주의적인 태도가 문제인 것 같은데
그 다음의 대화를 보면 그게 그렇지도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하소연하듯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이 말씀은 '내가 하느님을 모독했다면 나에게 돌을 던져도 좋다.' 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신 일들을 보면
하느님을 모독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결국 이 상황에서의 핵심 쟁점은
유대인들의 율법주의나 근본주의가 아니라,
예수라는 인물이 하느님을 모독했느냐, 아니냐? 입니다.
그런데 복음서의 전체 내용을 보면 그게 또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 율법을 어기는 것을 보고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고 싶어 한 적이 많기는 하지만,
결정적으로 죽일 생각을 한 것은 라자로를 살린 뒤였습니다(요한 11,53).
백성들의 민심이 예수님에게 쏠리는 것을 보고 두려워한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정치적인 영향력과 기득권을 잃을까봐 두려워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죽여야 할 이유로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더 낫다(요한 11,50).'는 것을 내세웠습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도 상관없고, 메시아라도 상관없고,
로마 군대가 와서 민족을 짓밟는 일을 피하려면 예수를 죽여야 한다는 것이
그들이 사형을 결정한 이유였습니다(요한 11,48).
로마 군대가 와서 민족을 짓밟는 일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사실은 민족이 아니라 자기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였습니다.
로마제국과 민족을 언급한 것은 핑계일 뿐입니다.
또 하느님을 모독했다는 죄를 씌운 것은 여론을 속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 죄를 뒤집어씌워야
예수님을 따르는 백성들을 속이고 쉽게 죽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기득권층에서 자기들의 기득권을 지키고 반대파를 제거하기 위해서
뇌물죄라는 누명을 씌우는 것을 자주 보게 됩니다.
그런 돈을 받은 적이 없다는 피고와 돈을 준 것이 확실하다는 원고측 증인..
국민의 존경을 받는 깨끗한 이미지의 정치인을 추락시키는 아주 좋은 방법입니다.
또 스캔들을 조작하는 것도 아주 효과적인 방법인 것 같습니다.
나중에 결백하다는 것이 드러나더라도
이미 당사자는 만신창이가 되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주로 한 일은 회개를 선포하는 일이었습니다.
일반 백성들만 상대로 활동했다면 안 죽었을 텐데 그는 헤로데도 공격했습니다.
헤로데는 회개하기가 싫어서,
또 세례자 요한 때문에 자기의 왕권이 약화되는 것을 막으려고
그냥 예언자의 입을 막아버렸습니다.
예수님의 주 공격 대상은 바리사이들, 율법학자들, 헤로데 당파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당시 이스라엘의 기득권층입니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나 기득권층을 공격하면 박해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기득권층에게 회개하라고 말하는 예언자들은 박해를 받습니다.
세례자 요한이나 예수님이 이 시대에 다시 오신다고 해도
복음서의 내용과 다른 생애를 살게 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설마... 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글쎄... 과연?
“나는 아버지의 분부에 따라 너희에게 좋은 일을 많이 보여 주었다.
가운데에서 어떤 일로 나에게 돌을 던지려고 하느냐?”
돌멩이에 담긴 의미 /양승국신부님
예나 지금이나 단단한 돌멩이는 대단히 위험한 ‘살상도구’입니다.
혹시라도 지금까지 살아오시면서 돌에 맞아보신 적이 있습니까?
저는 어린 시절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의 개구쟁이였습니다.
틈만 나면 동네 형들 사이에 끼어 산으로 들로, 천방지축 여기저기 몰려다니고,
놀러 다니기를 그렇게 좋아했습니다. 그러다보니
크고 작은 사건사고도 많이 겪었습니다.
한번은 형들 따라 다른 동네 ‘원정’ 갔다가
별것도 아닌 것으로 시비가 붙었는데,
마침내 동네 아이들 사이의 패싸움으로 번졌습니다.
처음에는 두 편 사이로 연탄재나 작은 돌들이 날아다녔는데,
나중에는 주먹만한 돌들까지 던져댔습니다.
정신없는 와중에 제 뒤통수에 뜨거운 느낌이 있었는데,
그길로 저는 쓰러져서 의식을 잃고 말았습니다.
나중에 깨어나서 보니 적십자 병원 응급실이었습니다.
피를 얼마나 흘렸던지 침대에서 일어나는 데 어질어질한게
제대로 걷기도 힘들 정도였습니다. 더구나 그 후유증이 얼마나 오래 가던지.
사실 돌멩이 맞기 전까지 저는 나름대로 ‘한공부’했었는데,
그 뒤로 성적이 많이 떨어진 기억이 생생합니다.
어떻게 보면 치명적인 살상도구가 ‘돌멩이’인 것입니다.
사실 유다 근동지방, 아랍 세계에서는
사형방법 가운데 하나로 꾸준히 사용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동족 유다인들을 한번 보십시오.
예수님께 던지려고 다들 주먹만한 돌멩이를 하나씩 각자 손에 들고 있습니다.
그들은 명백한 살상 의지를 갖고 예수님을 포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 입장에서 볼 때 참으로 기가 막히고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구원을 위해 그 멀고도 어려운
‘육화강생의 여행길’을 걸어오셨는데, 그들의 보답은 돌팔매질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두 눈동자는 멸망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가련한 동족들을 향한
구원의지와 연민의 정으로 이글거리는데, 그들의 눈동자는
너무도 뜻밖에 복수심과 적개심으로 이글거렸습니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정말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양손에 돌 하나씩 들고 부릅뜬 눈으로 예수님을 쳐다보고 있는
유다인들의 모습을 상상해봅니다. 그리고 그 순간 내가 만일
예수님이었다면 어떻게 대응했을 것인가 묵상해봅니다.
제 마음 안에 ‘폭풍 분노’가 일었을 것입니다.
제 눈동자는 분노로 타올랐을 것입니다.
무엇이든 마음만 먹으면 다 이룰 수 있는 예수님이셨습니다.
하늘에서 불을 내려 그들을 싹쓸이 했을 것입니다.
제대로 본때를 보여줬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보십시오.
폭력 앞에 결코 폭력으로 맞서지 않으십니다.
차근차근 조리 있게 말로 설득하십니다.
제발 그들이 깨달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마지막 1%의 가능성도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그들을 이해시키려고 노력하십니다.
그래도 끝까지 그들이 말을 듣지 않자,
그저 홀연히 그들 사이를 빠져나가십니다.
참으로 대단한 인내의 예수님이십니다.
끝까지 참아주시고, 마지막 순간까지 기대하시는 자비의 예수님이십니다.
거듭되는 우리 인간의 배신과 배은망덕,
무지와 그로 인한 숱한 죄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우리를 참아주시는 예수님을 통해서 자비 자체이신 하느님
아버지의 모습을 다시 한 번 확인해 볼 수 있는 복음이었습니다.
미움의 파괴력 /강동진 신부님
"이때에 유다인들은 다시 돌을 집어 예수께 던지려고 하였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내가 아버지께서 맡겨주신 좋은 일들을 많이 보여주었는데 그 중에서
어떤 것이 못마땅해서 돌을 들어 치려는 것이냐?'하고 말씀하셨다"
유다인들은 예수께서 좋은 일을 많이 하셨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병이 낫고, 눈을 뜨고, 귀가 열리고,
몸이 성해졌던가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감동했던가요?
유다인들로서는 결코 흉내낼 수 없는 일이었죠. 그런데도 유다인들은 예수님이
하느님 행세를 했다 해서, 그래서 하느님을 모독했다 해서 예수님을 돌로 치려
합니다. 한번 트집을 잡고 미움에 사로잡히자 그동안 얼마나 좋은 일을 많이
했는지는 안중에도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미워하고 증오할 때에는 언제나 이와 같은 일이 발생합니다.
인간은 언제나 좋은 면과 나쁜 면을 동시에 지니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좋은
면은 격려해서 발전시키고, 나쁜 면은 충고하여 고치도록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미움에 사로잡히면, 한번 증오하기 시작하면 그 사람에게 좋은 면이
있었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게 됩니다. 오직 나쁜 면밖에는 없는 듯이 보이는
것이지요. 미움에 사로잡히면 이처럼 눈이 머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움의 감정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이성을 마비시키는 무서운
힘이 있습니다. 미움에 사로잡히는 순간 이성을 잃지 않으려 애써야 합니다.
한마디로 하면 자기 마음에 들지 않아서입니다 /이경기신부님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이스라엘 사람들이 고대하던 그리스도
메시아이심을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할 수 없는 신기하고 놀라운 기적도 일으키셔서 병자들을
낫게 하고 소경도 눈뜨게 하며 군중들을 빵 다섯 개로 배불리 먹이기도 하셨습니다.
더욱이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진리를 깨닫도록 가르쳐주셨습니다.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을 배척하였습니까?
한 마디로 하면 자기 마음에 들지 않아서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스라엘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부귀영화를 누렸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에 왕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자기 멋대로
나라를 이끄는 바람에 이스라엘은 수백년을 다른 나라의 지배하에 있었고
예수님 당시에도 이스라엘은 로마의 속국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언젠가 우리를 이 속박에서 해방시켜 줄 위대한 왕,
즉 그리스도(메시아)가 오셔서 잘 먹고 잘 살게
해 주겠지’라고 기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 메시아라는 말은 같은 뜻입니다.
그 뜻은 기름부음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기름부음 받은 자는 곧 이스라엘의 왕을 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으로부터 성령의 기름을 받은 자이시고
모든 인간을 죄와 죽음과 어둠에서
해방시켜 주시는 진정한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라고 우리는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의 유다인들이 고대하던 메시아는 진정한 메시아가 아니라,
지금 이 나라를 속박에서 풀어주고, 부귀와 권세를 누리도록
해 주는 그런 메시아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거부한 것입니다.
그들이 필요로 하던 메시아는 순전히 세속적인 메시아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교에서는 아직도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바로 지금 이스라엘의 대부분 사람들이지요.
하지만 구약의 하느님은 착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당신의 뜻을 모두 가르쳐 주셨습니다. 구약의 모든 예언은 예수님에게서
다 이루어졌고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도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에게 한번 물어봅시다. 나는 과연 어떤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가?
내가 믿는 하느님은 과연 어떤 하느님이신가? 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각각 다른 모습의 하느님을 믿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모두 자기나름대로의 잣대를 가지고,
자기 나름대로의 기대를 가지고 하느님을 믿고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내게 돈을 벌게 해 주는 하느님,
어떤 사람은 귀신을 쫓아주는 하느님,
어떤 사람은 내 마음을 평화롭게 해주는 하느님,
또 다른 사람은 내 잘못에 벌을 주시는 하느님,
어떤 사람에겐 그냥 심심풀이해소용 하느님,
어떤 사람은 나를 폼나게 해 주는 하느님 등등
각자가 기대하는 하느님의 모습은 다를 것입니다.
과연 나는 어떤 하느님을 믿는가? 이 문제는 우리 온 인생의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상한 하느님을 믿던 사람들에 의해 배척받으시고
억울한 사형을 당하셨던 것입니다. 그들이 믿었던 것은 참하느님이 아니라,
자신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하느님이셨던 것입니다.
이 또한 자기중심의 이기적인 생각이 아닙니까?
내일 모레는 주님수난 성지주일입니다.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열렬히 환영하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치는 참 어이없고, 이상한 주일입니다.
이 성지주일을 지내면서 우리 자신은 어떤 하느님을 믿고 있는지,
과연 나는 예수님을, 하느님을 내 잣대로 재어보고서
내 삶에 도움이 안된다고 십자가에 못박아 없애버리라고 소리치는
이상하고 어이없는 신앙을 가진 엉터리는 아닌지요.
겉만 겸손한 사람 /전삼용신부님
제가 사제가 되기로 한 것은 25세 이후인데,
그 전에 대학 다닐 때 신부님이 되면 어떻겠느냐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는 사제가 될 생각이 하나도 없었음에도 그렇게 청하는 분께,
“저는 그럴 자격이 안 됩니다.”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럴 자격이 안 된다’는 말이 얼핏 들으면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말처럼
들릴 수 있겠지만 실제로는 자신을 낮추는 말이 아니고 사제가 되기 싫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제가 되어 신자들에게 성당에서 봉사를 하라고 하면
가장 많이 듣는 대답이 “저는 그럴 능력이 안 돼요.”입니다. 물론 정말
능력이 안 된다고 느껴서 그렇게 대답하기도 하겠지만 많은 경우는
“하기 싫어요.”라는 말을 그렇게 돌려 말하는 것일 것입니다.
사람은 무엇을 거부하면서도 사실은 자신을 낮추는 모습을 보입니다.
저는 그런 대답이 나오면 으레 “그런 것이라면 상관없어요. 어차피 내 능력으로
할 수 있는 건 없으니까요. 주님께서 어떤 일을 위해 부르신다면 합당한 능력도 주실 거예요.
능력이 안 된다는 것을 아는 것이 어쩌면 참 좋은 일입니다.”하며 응수합니다.
그러면 실제적인 이유들을 대기 시작합니다.
“시간이 없어서요. 부모님이 허락하지 않아서요. 아는 것이 없어서요. ...”
저는 이런 말들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그것이 큰 이유가 되지 않음을 설명합니다.
정말 구체적으로 따지고 들어가서 보면 봉사를 하지 못할 이유를 지닌 사람은 5%도 안 됩니다.
그러나 사람은 무엇을 거절하면서도 자신이 겸손하게
보이고 싶은 마음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참 겸손은 받아들이는 능력이지 거부하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겸손한 사람은 모든 것을 받아들입니다.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하며
주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이 겸손이지 ‘감히 내가 어떻게?’라고 하며
거부하는 것이 겸손이 아닙니다. 만약 성모님께서,
“제가 어떻게 하느님의 어머니가 돼요, 말도 안 돼요!”했더라면
성자의 강생도 구원도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겸손은 받아들이기 위해서 자신을 비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겸손이 사랑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사람이면서 하느님으로
자처한다고 하면서 하느님을 모독한다고 그분을 돌로 치려고합니다.
“좋은 일을 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을 모독하였기 때문에
당신에게 돌을 던지려는 것이오. 당신은 사람이면서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있소.”
예수님은 성경 구절을 들어 당신의 말씀을 정당화합니다.
“너희 율법에 ‘내가 이르건대 너희는 신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으냐?
폐기될 수 없는 성경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고 하였는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시어 이 세상에 보내신 내가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하였다 해서, ‘당신은 하느님을 모독하고 있소.’ 하고 말할 수 있느냐?”
성경에는 정말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이들을 모두 신,
즉 ‘하느님’이라 불렀습니다. 그 이유는 하느님의 말씀, 즉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됨으로써 그 분의 신성에 참여하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하느님이 될 수는 없지만 인간은 그분의 말씀을 통하여
하느님의 영원성에 참여하고 그렇게 영원한 신들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니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이고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만약 성체성사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룬다면, “예수님이 사신 것처럼 살아야지요.”라고
신자에게 말하면 “제가 감히 어떻게 예수님처럼... 전 예수님이 될 수 없어요.”라고
겸손하게 대답합니다. 우리는 이 말이 이젠 주님처럼 살기를 원치 않는 마음에서
나오는 교만임을 알게 됩니다.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를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심판해서는 안 되지만 굳이 판단하려면
그 사람의 겸손으로 판단하라고 배웠습니다. 우리들은
사람들 앞에서 겸손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만 속은 안 그런데 겉으로만
겸손한 모습을 보이고 본인도 그것이 겸손이라고 믿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오늘 사람이 신이 될 수 없다고 믿었던 겉으로만 겸손했던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믿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겸손한 척 하려해도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주님의 뜻이라고 하셨던, "매사에 감사하십시오.
항상 기도하십시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했던 것들은
참으로 겸손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들입니다. 겸손하면서 불만이 많을 수 없고
겸손하면서 기도하지 않을 수 없으며 겸손하면서 기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구원받았음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겉으로는 겸손한 모습을 보이면서도
항상 불만족이고 기도도 안 하고 우울하기만 하면 겉보다는 먼저 자신의
본질에 신경 써야 할 것입니다. 사람 흉내만 내는 원숭이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말과 행동도 겸손해야 하지만 진정 본질이 겸손한 모습인지 살필 줄 알아야겠습니다.
“그때에 유다인들이 돌을 집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하였다.”
배은망덕 앞에서도 /양승국 신부님
극도의 배신감에 밤잠을 설쳐본 적이 있으십니까?
의외로 부모 자식 간이나 친구 동료 등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자주 느끼게 되는 감정입니다.
이쪽에서는 성심성의껏 최선을 다해 헌신했는데,
그토록 오랜 세월 한결 같이 뒤를 보살펴주고 자상하게 챙겨줬는데,
내 모든 것을 다 바쳐서 돌봐주었는데, 결국 돌아오는 것은 비난의 화살이요,
‘○○가 되가지고 나한테 해준 게 뭐냐고’고 대듭니다.
그런 순간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어 할 말을 잊게 됩니다.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어 정신이 멍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동족들로부터 느끼셨던 심정이 그랬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당신을 낮추고 또 낮추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셔서 우리 사이에 머무르셨습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하신 일들 하나 하나는 모두 우리를 위해 좋은 것이었습니다.
오랜 병고로 신음하는 환자들에게 치유의 은총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생명수 같은, 순금 같은, 보배 같은 생명의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우리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온 몸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우리의 친구가 되셔서 우리와 동고동락하셨습니다.
앞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새로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를
미리 보여주셨습니다. 결국 그 누구도 하지 못한 일,
영원한 생명의 나라를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육화강생은 너무나도 과분한 은총입니다.
수백 번 수천 번 감사를 표해도 모자랄 사건입니다.
너무나도 감지덕지한 황송스런 사랑입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의 하는 짓을 보십시오.
감사를 표하기는커녕 손에 손에 하나씩 돌을 들고 있습니다.
누군가를 향해 돌을 들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의도적이며 적극적인 ‘살의’가 있다는 것입니다.
죽이기로 마음먹고 달려든다는 것입니다.
이런 동족들 앞에 예수님께서 느끼셨던 배신감, 비애감은
그야말로 하늘을 찔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모습을 보십시오.
진노하시지도 않으십니다. 징벌을 내리지도 않으십니다.
안타까운 마음에, 불쌍하고 가련한 마음에 또 다시 설득하십니다.
끝까지 대화의 창구를 열어놓으십니다. 그리고 간곡히 당부하십니다.
“그게 아니란다. 정말 그러면 안 되는 것이란다. 지금이라도 돌아가는 분위기
파악하고 마음 바꿔먹어라. 내게로 돌아와라.”며 신신당부하십니다.
우리 인간들의 배은망덕함, 돌까지 드는 노골적인 적대감 앞에서도
끝까지 인내하시는 예수님,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생명의 위협 앞에서도
항상 우리들의 영혼, 우리들의 구원을 먼저 생각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이 유난히 따뜻하게 느껴지는 아침입니다.
참된 예수님 상 /정명숙 수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신원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당신이 누구요?”라고 묻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나는 위에서 왔다. …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요한 8,23)
“내가 나”(요한 8,24)라고 말씀하시지만 사람들은 알아듣지 못합니다.
의심과 회의로 가득 차 있는 사람들의 닫힌 마음은 열릴 줄을 모릅니다.
그들 안에 고정된 하느님 상 때문에 예수님께서 들어설 자리가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말씀과 사람을 살리는 행동 모두를 그들은
걸림돌로 생각합니다. 이들의 깊은 ‘거부의 병’은 예수님을 죽음으로까지
몰고 갑니다. 잠시 우리 신앙 공동체를 바라봅니다.
너도나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며 열심한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러나 각자 자기 입맛에 맞는 예수님 상을 가지고 살아가는 모습 또한
적지 않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기도하고 봉사를 많이 해도 과거의 내 습관에서
벗어나 ‘새 사람’으로 내가 변화되지 않는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우리가 자신의 말과 행동과 내면의 객관적인 모습을 들여다볼 시간을 마련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병든 신앙인이 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누구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누구신지도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인지 잘 아셨기에 죽음에 이르기까지
사랑의 길을 걸으시며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사명을 완수할 수 있으셨습니다.
우리는 하느님 말씀의 상대자인 신들 /김찬선신부님
"성경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은 신이라고 하였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
저의 외할머니는 산속에서 홀로 몇 십 년을 도인처럼 사셨습니다.
개를 키울 때면 개에게 말씀을 하십니다.
옆에서 보면 그저 개가 아니고 영락없이 사람입니다.
당신 대화의 상대자입니다.
인격화하시는 것입니다.
개를 인간 대화의 상대로 높이시는 것입니다.
개뿐이 아닙니다.
밭에 풀을 매실 때도 풀들에게도 말씀을 하십니다.
그저 풀이 아니고 말이 건네지고
말을 들어주는 대화의 상대자입니다.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당신 말씀의 상대자로 삼으십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신이 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건네시는 순간
당신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건네시고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순간
하느님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어
우리는 신이 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당신 대화의 상대자로 삼으시고 말씀을 건네시는 한
우리가 그 말씀을 개똥처럼 여기고 받아들이지 않지 않는 한
우리는 신이 되고
하느님이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가 하느님 안에 있게 됩니다.
아버지의 일 /진병섭 신부님
대한민국에 민주화 물결이 일기까지 수많은 민주열사의 희생이 있었습니다.
그 과정에 의로운 사제들의 몫도 있었음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 시절에 많은 사람이 교회로 몰려왔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표징을 보고 예수님을 믿었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처럼, 그들도
사제를 통해 세상에 살아 계신 예수님을 보았고, 그 예수님을 믿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요즘도 나라에 어려움이 닥쳐오면 의로운 사제들은 예언자적 소명을 가지고
시대의 징표를 읽고 하느님의 뜻을 찾아 교우들과 세상 사람들과 함께하고자 노력합니다.
손가락질하고 욕하며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제가 보기에 사제들은
세상 사람들이 하기 어려운 일을 고뇌하며 그 누구도 질 수 없는 십자가이기에
우리를 대신해 져주시는 분들입니다. 저는 그분들이 오늘 말씀처럼
아버지의 일을 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박수로 응원을 보냅니다.
사제로 살다 보면 교만에 빠질 때가 많습니다.
모든 것이 내가 잘해서 된 것처럼 착각 속에 살아갑니다.
“신부님 덕에 일이 잘 됐습니다”, “신부님 기도로 된 것 같습니다”, “신부님 강론으로 힘을 얻었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겠지만 기분 좋으라고 한 소리건만 그것이 진짜인 줄 알고 착각하고,
때로는 그 우쭐거림으로 일을 그르칠 때도 생깁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일을 하느님을 위한 일로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제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그분의 일이고 그분이 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도구일 뿐입니다.
어느새 사순 시기가 끝나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걸으신 길! 그분 자신을 내세운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 길을 바라보며 그분의 자기 낮춤, 자기 비움, 자기 포기를 배웠으면 합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육화의 신비 /유경촌 신부님
“아버지께서는 나에게 거룩한 일을 맡겨 세상에 보내주셨다.” (요한10,36)
예수님이 하느님 행세를 하며 신성모독을 했다고 유다인들은 또 돌을 집어
들었습니다. 당시 상황에서 그렇게 행동할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하느님은 하느님이고 인간은 인간입니다. 하느님과 인간은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인간이 아무리 훌륭해도 하느님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안에서는 하느님이 인간이 되셨습니다. 육화의 신비입니다.
우리는 당시 사람들보다도 예수님에 관해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정말 예수님의 요구를 알아듣고, 그분이 나에게 바라시는 바를
행하고 있습니까? 예수께서 하느님이시고 그분이 놀라운 업적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나에게는 아직 부족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다른 사람들 앞에서 그
믿음을 행실로 증거 하는 것입니다.
* 나의 실천
든든한 바위 위에 집을 지으라고 오늘도 저를 초대하시는 주님, 그 초대에
기꺼이 응할 수 있도록 함께하여 축복해 주십시오.
성주간을 기다리며 /이요한 신부님
오늘 우리는 성주간 전 마지막 금요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사순절이 끝나가고 있습니다. 오늘 하루 금육제를 지키면서
주님의 수난을 생각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우리가 금육제를 지키는 이유를 생각해봅시다. 단지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왜 고기를 먹지 않는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주님의
수난을 기억하는 날, 흥청망청 고기를 먹으며 주님의 수난을 기억하지 않는
것을 금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주님을 수난을 기억하며 어려운 이웃을 위해
자신을 조금 희생하는 의미 있는 날이 되었으면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에게 배척받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유다인이 예수님을 배척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당신이 하느님과 하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시라고, 하느님과 한 분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신자들입니다. 그러나 과연
나에게 예수님은 정말 어떤 분으로 다가오고 있습니까?
주님을 살아계신 한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 늘 함께 있는 특은을 입었습니다.
성주간을 기다리며 잠시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사건을 다시 생각해봅시다. 왜, 주님께서는 창조주께서는 모잘 것 없는
인간이 되셔서 이 땅에 오셨습니까? 이 질문의 우리 신앙의 핵심과 통해 있는
질문입니다. 왜 하느님은 인간이 되셨습니까? 우리에게 무엇을 주시기 위해서 입니까?
주님께서 주시는 구원은 무엇입니까? 죄로부터의 해방, 그 이상의 무엇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어진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다르다는 것은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내가 너희를 신이라 불렀다’하신
기록이 있지 않느냐? 이렇게 성서에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모두 신이라고 불렀다. 성경 말씀은 영원히 참되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신이라고 불러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200년경의 성 이레네오로부터 동서방
교부들로부터 대대로 내려온 대답은 바로 이것입니다.
“Deus homo factus est ut homo fieret Deus." 이를 번역하면
“신이 인간이 되신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신이 되게 하기 위해서다.” 입니다.
이 짧은 문장에 과장이 있다고 생각되십니까?
그것은 아직 신앙의 핵심에 도달하지 못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에게 한 가지 도전을 줍니다.
“신이 되려고 했던 것이 바로 원죄가 아닌가?” 그러나 원죄는 무엇입니까?
자기 스스로, 자기 힘으로 신적 존재가 되려고 했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고 하셨던 선물은 단지 천국에서 아무런 걱정근심
없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에덴동산의 태초의
모습으로 회복시키는 정도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높고 더 거룩한 존재,
하느님의 아들, 하느님의 딸이 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왜 하느님께서 굳이 인간이 되셨겠습니까. 그것도 단지 인간이 되신 것이
아니라, 몸소 고난과 죽음을 받아 들이셨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잠시 인간의 가죽을 빌려 입고 우리 가운데 잠시
유람하시다, 하늘로 올라가셔서, 우리가 그리스도교 덕을 실천하면 상을 주고,
죄 속에서 살기를 더 좋아하면 벌을 주시기 위해서 우리가 하는 행동들을
지켜보고 계신다고 말한다면, 그것이 그리스 신화나 단군 신화와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하느님의 수난과 죽음, 여기에 하느님의 진정한 마음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인간을 창조하신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초대 받은 것입니다. 하느님처럼
거룩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하느님의 사랑받는 존재라는, 모든 존재들 보다
더욱 소중한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찌 감사드리지 않을
것입니까. 우리가 어찌 찬미드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다. 오늘은 정말 행복한
날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당신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아멘.
불신앙 /김훈일 신부님
같은 하느님을 믿으면서도 그 신앙의 여정은 제각각입니다. 신앙생활의 내용을
살펴보면 네 가지 모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 성당을 다니고 있지만
불신앙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어려움에 닥치면 하느님께
의지하기보다 무당들을 찾아 점을 보거나 부적을 씁니다. 두 번째로 명목상의
신앙인들입니다. 기본적인 의무만 다할 뿐 세상에서의 삶과 성당에서의 모습이
전혀 다른 사람들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변화되지 못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세 번째는 기적을 찾는 신앙인들입니다. 늘 큰 기적이
일어났다고 하는 곳이나 좋은 피정만을 찾아서 자극을 받으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느님을 체험한 신앙인들입니다. 하느님을 만난
그리스도인은 많은 신앙 경험을 통해 더 이상 보지 않고도 전적으로 하느님께
의탁하는 사람들입니다. 아프리카의 어느 원주민들은 물살이 센 강을 건널 때
어깨에 큰 돌을 메고 건넌다고 합니다. 그 무거운 돌이 무게중심이 되어
물살에 떠내려가지 않고 무사히 건널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삶이 때로는 우리에게 부담이 되고 무겁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구세주라는 사실을 의심 없이 믿고 내 삶의
무게중심으로 살아간다면 험한 세상살이에 휩싸이지 않고
바르게 인생길을 걸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늘 냄새 /김찬진 신부님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모두 신이라고 불렀다.”
하늘 냄새
“사람이/ 하늘처럼/ 맑아보일 때가 있다
그때 나는/ 그 사람에게서/ 하늘 냄새를 맡는다”(박희준, ‘하늘 냄새’).
하늘처럼 맑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에게는 맑은 도랑물 소리가 들리고
별이 쏟아져내리고 가벼운 바람이 지나갑니다. 명상에 잠깁니다.
“얘야, 하늘처럼 맑고 투명한 이가 곧 예수였다. 나는 예수 안에 있는 것처럼
네 안에도 있다. 네가 나를 막지 않는다면 창조하는 능력과 사랑은
너를 통해서 환하게 빛날 것이다. 나는 마음을 온전히 연 투명한 사람
안에서 빛나고 전달된다. 투명함이 없으면 나에게 응답할 수 없고
나에게 매달려서 또 다른 예수가 될 수 없다. 잊지 말아라.
사람들이 가는 길을 걷지 말고 복음의 길을 가거라.
유명함이 아니라 이름 없음을, 지식이 아니라 어린아이의 단순함을,
말이 아니라 내 현존이 되려고 하고, 많은 사람을 떠나
외로운 침묵 가운데 머물러라.
논리보다는 느낌과 감성에 머물고 가득 채움보다는 비워내는 일에 마음을 두거라.
내 말을 받은 너는 사람들에게 신으로 보여져야 한다.”
하늘 냄새가 나는 사람이 그립습니다. *
믿음, 사랑의 응답 /허찬란 신부님
사순절이 깊어질수록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사랑 앞에 나의 믿음이
너무도 약하다는 사실을 고백하게 됩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의 고통에
동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짐을 더 무겁게 만들고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 옛날 돌을 들던 유다인들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되는 결정적 죄목은 하느님 모독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예수님이 하느님을 자처하고 있다고 판단하여 그분에게
돌을 던지고 잡으려 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믿지 못하더라도 하는 일을
보아서라도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문제는 그분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입니다. 요한 복음에서의 믿음은 명사로 끝나지 않고 행위를
수반하는 동사로 등장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따르는 것으로 귀결이 되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고,
예수님이 하시는 표징들도 거부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결국 예수님을
하느님을 모독한 자로 고발하게 되고 죽이려는 음모를 가시화합니다.
무조건적인 거부의 끝은 하느님이 가장 사랑하시는 외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 얼마 남지 않은 사순절 동안 생각으로가 아니라
믿음의 실천으로 그분의 사랑에 응답하며 살고 싶습니다.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을 믿어라.”
주님, 항복입니다 /양승국 신부님
판공시즌을 맞아 고백소에 들어앉아 있노라면
간접적으로나마 세상살이의 고초를 체험합니다.
너무도 거센 인생의 풍랑을 만나 하루하루 힘겹게 견뎌나가는 분들
앞에서 때로 위로의 말조차 찾기 힘듭니다.
너무도 높은 벽 앞에 할 말을 잃고 주저앉아 그저 울고만 계시는 분들,
꼬이고 꼬인 인생의 실타래를 도저히 풀길 없어 난감해하시는 분들,
도무지 용서가 않되 괴로워 미칠 것만 같은 분들, 탈출구가 전혀 보이지 않는 분들...
해결방법을 찾아 백방으로 뛰어다니지만, 그럴수록 상처만 쌓여갑니다.
결국 우리 인간의 근본적인 속성인 무력함,
나약함을 솔직히 인정할 수밖에 없더군요.
때로 인간의 힘으로 안 되는 것이 많다는 것을 자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위로부터의 도움이 절실히 요청된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해야만 합니다.
이토록 꼬이고 꼬인 삶의 실타래를 속 시원하게
풀어주실 분은 주님뿐입니다.
결국 주님, 항복입니다.
더 이상 제 힘으로는 되는 것이 하나도 없군요.
이제 모든 것 당신 판단에, 당신의 자비에 맡겨드립니다, 라는
겸손한 고백이 필요합니다.
그분께 맡긴다는 것은 다름 아니라
세월이 필요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이 아니라, 하느님의 때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무조건 인내하는 것입니다.
요즘 꽤 넓은 텃밭을 구해 농사를 시작했습니다.
웃기는 일은 아직 이랑도 제대로 만들지 않았는데,
다들 벌써부터 신선한 야채샐러드 먹는 꿈을 꾸고 있습니다.
아직 씨도 뿌리지 않았는데, 그리고 다들 초보농사꾼들이면서
벌써부터 다들 씨알이 굵은 감자나 고구마의 수확을 꿈꾸고 있습니다.
농사를 전문적으로 지으시는 분들 보시기에
한심스럽기 짝이 없을 것입니다.
세상만사에는 다 단계가 필요합니다.
만사에 시간에 필요하지요.
상처의 치유도 마음먹는다고 절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치유를 위한 시간뿐만 아니라 단계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용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용서하겠다고 결심한다고 해서,
고백성사를 본다고 해서 용서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용서에도 기나긴, 그리고 꽤 복잡한 과정이 요구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때가 이르러야 가능합니다.
그 모든 과정과 시간 안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주님의 힘입니다. 주님의 도움입니다.
제가 이토록 부족하고 그릇이 작으니 당신께서
도와주셔야겠다고 청하는 겸손한 자세가 중요합니다.
우리의 노력으로는 세상이 바뀐다할지라도
‘그 인간’ 용서하지 못하겠지만,
주님께서 함께 하신다면 용서가 가능합니다.
인간의 힘만으로는 그 아리고 깊은 상처 죽었다 깨어나도 치유하기
힘들겠지만, 주님의 도움에 힘입어 치유가 가능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향해 돌을
던지려는 적대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건네십니다.
“나는 아버지의 분부에 따라 너희에게 좋은 일을 많이 보여주었다.
그 가운데에서 어떤 일로 나에게 돌을 던지려고 하느냐?”
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기회를 주기 위해서
예수님 당신께 대한 신뢰심을 가지라고
신신당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을 믿어라.”
만사형통할 때야 얼마든지
그분을 향한 온전한 신뢰를 드릴 수 있습니다.
고통이 없을 때, 실패의 쓴맛을 전혀 맛보지 못했을 때,
얼마든지 그분께 감사드리고, 충실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가 다가올 때는 어떻습니까?
특히 끝이 보이지 않는 고통이 우리 삶을 엄습할 때
우리는 너무도 쉽게 이런 하소연을 던집니다.
“도대체 하느님이 계시기나 하는 건가?
하느님이 계시다면 어찌 나를 이렇게까지
바닥으로 떨어트리시는 건가?”
그러나 반드시 기억하셔야 합니다.
하느님의 때는 반드시 있습니다.
때로 바로 응답하시지 않아서 답답하겠지만,
때로 하느님이 너무 더디 오시기에 기다리느라 지루하겠지만,
반드시 그분께서는 오십니다.
참고 기다리다보면 언젠가 반드시
그분께서 힘차게 활동하실 순간이 올 것입니다.
그날, 우리는 이 부담스런 ‘나 자신’이란
크나큰 속박에서 해방되어
한 마리 새처럼 자유롭게 날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순간 우리는 하느님 자비로우신 하느님께
제대로 된 찬양과 영광을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2011.4.15 사순 제5주간 금요일
예레20,10-13 요한10,31-42
영원한 정주 처(定住 處) /이수철 신부님
정처 없는 삶은 아닌지요?
머물 곳에 없어 떠돌아다니는 삶이 바로 정처 없는 삶입니다.
죽어도 돌아갈 곳이 없을 때 참 난감할 것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이 돌아 가 머물
영원한 정주 처는 하느님입니다.
오늘 우리 분도 수도승의 첫째 서원인 ‘정주’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주님은 좋으시다. 영원하신 그 사랑, 당신의 진실하심 세세에 미치리라.”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들아, 주님 안에서 구원과 영예를 누리리라.”
장소적인 정주보다 더 본질적인 정주가
언제 어디서나 ‘주님 안에서’ 정주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늘 ‘그리스도 안에서’ 정주했고,
사도 요한은 늘 ‘주님 사랑 안에서’ 정주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돌아가 머물
우리의 본향과도 같은 정주처가 주님입니다.
노후대비를 위해 정주영성의 심화는 중요합니다.
땅 속 깊이 뿌리 내린 아름드리 나무들 진정 정주의 스승입니다.
주님 안에 정주의 뿌리 깊이 내릴 때
안정과 평화이지만,
정주의 뿌리 없이 방황할 때
점증하는 불안과 두려움입니다.
시련과 위기 중에도,
나이 들어 외롭고 쓸쓸한 중에도,
죽음을 직면해서도
주님 안에 정주의 뿌리 튼튼할 때
의연하고 품위 있는 삶입니다.
결코 어떤 시련과 위기 중에도
안에서 무너지지는 일은 없습니다.
예언자들이나 성인들의 공통점은
평생 시련이요 휴식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역경 중에도 무너지지 않고
늘 푸르게 살았던 비결은
바로 주님 안에 정주임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독서의 예레미야나 복음의 예수님은
사면초가의 고립무원의 상태에 있습니다만
주님 안에 굳건히
정주의 뿌리 내리고 있는 모습니다.
예레미야의 별명인 ‘마르고 비싸빕(사방에서 공포가!)’을 통해
그의 삶이 얼마나 고단하고 위태했는지 감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힘센 용사처럼 제 곁에 계시니,
저를 박해하는 자들이 비틀 거리고 우세하지 못하리이다.”
힘센 용사 주님 안에 정주한 예레미야이기에
숱한 역경 중에도 안팎의 적에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의로운 이를 시험하시고, 마음과 속을 꿰뚫어 보시는 만군의 주님,
당신께 제 송사를 맡겨 드렸으니, 당신께서 저들에게 복수하는 것을 보게 하소서.”
안팎의 온갖 적을 대적하면서
그 짐(스트레스)을 나 혼자 감당하기로 하면
제풀에 무너질 것입니다.
예레미야처럼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께
이 모든 근심 걱정과 불안과 두려움,
억울함의 짐을 맡기는 것이 바로 믿음이요
이래야 정주생활에 항구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 노래 불러라! 주님을 찬양 하여라!
그분께서 가난한 이들의 목숨을, 악인들의 손에서 건지셨다.”
주님께 의탁함과 더불어
즉시 터져 나오는 예레미야의 하느님 찬양입니다.
끊임없는 하느님 찬미와 감사의 기도생활 없으면
정주생활은 불가능합니다.
매일 평생 시간마다 규칙적으로 바치는
우리의 하느님 찬미와 감사의 성무일도와
미사의 공동전례은총이 ‘주님 안에서’
항구한 정주생활을 가능하게 합니다.
복음의 예수님 역시 사면초가의 위기이지만
‘아버지 안’에 깊이 뿌리 내린 정주의 삶 있어
이 위기를 잘 돌파하고 있음을 봅니다.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시어 이 세상에 보내신 분’답게
늘 아버지 안에 정주한 예수님의 삶이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그러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을 것이다.”
예수님의 일들을 통해 그대로 드러나는
그분의 정주의 영성입니다.
아버지 안에 정주하시고 아버지 또한
예수님 안에 정주하셨으니
정주의 절정이자 완성입니다.
우리 역시 주님 안에 정주가 깊어지면서
주님 또한 우리 안에 정주함으로 주님과의 일치입니다.
정주의 여정은 바로 주님과의 일치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주님 안에 깊이 정주의 뿌리를 내리게 하십니다.
“저의 힘이신 주님, 당신을 사랑하나이다.
주님은 저의 반석, 저의 산성, 저의 구원자시옵니다.”(시편18,2-3ㄱ). 아멘.
하느님의 꽃 /강영구신부님
사랑하는 예수님, 당신은 꽃입니다.
아름답고 거룩한 꽃입니다.
당신에게서 하느님의 향기가 납니다.
당신에게서 큰 사랑의 향기가 납니다.
당신에게서 대자대비의 향기가 납니다.
꽃 같은 당신으로 온 세상은 밝고 아름답고 향기롭습니다.
불고 싶은 데로 부는 바람처럼(요한3,8)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당신의 향기는 묶인 사람들을 풀어주고
눈먼 사람을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에게 자유를 줍니다.(루가4,18-19)
당신은 진흙탕 같은 세상 한가운데
아름답게 핀 한 송이 연꽃입니다.
흙탕물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 같은 당신 안에서
하느님의 향기가 납니다.
당신에게서 하늘같이 텅 빈 무(無)의 아름다움을 봅니다.
"나"를 버려 아버지로 충만한 빈자리 예수님,
그 빈자리에서 삶에 찌들리고 가슴에 상처받은 가난한 사람들이
하느님의 향기를 맡습니다.
들끓는 욕망으로 몸부림치고 허물과 나약함으로 번뇌하는 인생들이
빈자리 당신 안에서 아버지 하느님의 따뜻한 손길을 만나
용서와 위로와 치유를 받습니다.
예수님, 당신은 하느님의 꽃입니다.
당신 안에서 하느님의 아름다움과 향기로움과 자비로움이 꽃 피고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저도 당신을 닮아서 하느님의 꽃이 되고 싶습니다.
♪ Agnus Dei XI, 하느님의 어린양(11번 미사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