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군 고려산(高麗山)을 다녀와서!
2017년4월16일 예수부활대축일인 일요일 인터넷 카페 "아름다5060아름다운세상"
산행동호회에서 원정산행지로 정한 인천광역시 강화군에 있는 고려산 진달래축제
장을 가려고 아침 05:00시에 기상하여 나그네가 길떠날 때의 차림인 여장(旅裝)을
하고서 06:00에 집을 나서서 버스로 전철로 서울종로3가에 도착하니 07:15분 차도
사람도 먼저 와있어서 거의 달포만에 만난 산우들과 재회(再會)하는 맘으로 반갑
게 인사를 나누니 그리워서 보고싶던 님들과 함께 행복의 문을 여는 것 같았습니다.
친지(親知)같은 다람쥐님의 선진고속관광버스로 사당역을 경유 강화도에 근접하면서
부터는 고려산 진달래축제장으로 가는 붐비는 차들이 보행자 걸음으로 가노라니
예정시간보다 120여분이나 늦게 고려조의 치욕의 역사와 조선조의 귀향지이면서
강화도령이니하는 철종 이원범의 이야기 등 얘깃꺼리가 무궁무진한 강화도에 도착
진달래축제장에 올랐다가 오후 세시에 하산하여 김포로 이동 뒷풀이를 마치고
집에돌아오니 밤 여덟시 반이었습니다.
아래 이야기는 강화도에서 이뤄지는 간략한 고려의 역사입니다.
1차 침입 : 몽고군 파죽지세로 개경 근처까지 진격하여 막대한 공물 요구
-1231년 8월에 몽고의 살례탑은 압록강을 건너 고려를 침입하기 시작하였다
. 몽고군은 파죽지세로 함신진과 철주, 안북부를 점령하였으나 박서가 지키는
귀주성과 최춘명이 지키는 자의성은 쉽게 몽고군에게 함락되지 않고 있었다.
2차 침입 : 개경 환도 촉구
-1232년 6월에 수도를 강화도로 옮긴 가운데 살례탑을 주장으로 하는 몽고군의
2차 침입이 9월에 재개되었다. 살례탑은 즉시 강화도에 특사를 보내 '개경 환도
'를 촉구하였고 살례탑은 개경 환도의 전략으로 수전을 치뤄야 하는 강화도
공격을 피해 본토 초토화 작전에 나섰다.
3차 침입 : 황룡사탑 몽고군이 불태움
-1235년 7월에 몽고 장군 당고가 역적 홍복원을 앞세워 고려를 다시 침입하였다.
몽고군은 지난 번과 같이 화의 교섭을 시도하지 않고 전국토를 유린하자 강화도의
정부는 각지의 백성들로 하여금 섬과 산성으로 피신하도록 지시하고 각 산성에
방호별감을 파견하여 산성을 견고히 수축하고 지키도록 하였다.
4차 침입 : 몽고 황제 정종의 죽음으로 철군
-1247년 7월에 몽고의 장수 아모간이 군사를 거느리고 염주에 와서 주둔하면서
4차 침입이 시작되었다. 이에 앞서 지난해 말 몽고인 4백여 명이 북변의 수안현에
침입하여 수달을 잡는다는 구실로 각지를 염탐했으며, 백성들을 납치. 약탈했었다.
5차 침입 : 최항 출륙 거부 - 대부분 지역 몽고군에 항복
-1253년 4월 정부가 계속 몽고 황제의 출륙 환도와 국왕 친조 요구를 거부하고
있는 가운데, 몽고는 이를 구실로 아모간과 야굴, 홍복원을
파견하여 고려를 침입했다
6차 침입 : 출륙 환도와 태자 입조 요구 수락
-1254년 7월에 몽고는 국왕이 출륙했으나 최항 등 다수의 관리가 아직 출륙하지
않았음과 우리 조정에서 몽고에 항복한 관리들을 처벌한 것을 구실로 다시 침입했다.
강화도령(江華道令)의 유래
이원범은 사도세자의 서자였던 은언군의 후손으로, 모반 사건에 휘말려
강화도에서 유배생활을 했으며 순조의 양자로 입적하여 헌종에 이어 철종
으로 등극하였다. 한성의 반가에서는 그를 비꼬아서 강화도령이라고 불렀다.
강화도령(江華道令)의 본명은 이원범(李元範)이며, 1831년 음력 6월 17일에 출생
하였다. 그의 증조부는 사도세자(장조)이며 부친은 사도세자의 서자로 출생한 은언군
(恩彦君) 이인(李裀)이다. 이인은 정조의 이복동생이 된다. 은언군 이인은 첫째부인
송씨(宋氏, 1753-1801) 사이에서 4명의 아들과 1명의 딸을 두었고, 둘째부인인 이씨
(李氏, 1764-1819) 사이에서 아들 이광(李壙)을 두었다. 이광(李壙)은 부인 최씨 사이
에서 이원경(회평군)을 두었고 서자 이경응(영평군)을 낳았다. 후처 용담 염씨(廉氏)
사이에서 강화도령으로 불린 이원범을 낳았으며 이원범은 순조를 이어 철종으로
등극하였다. 부친 이광은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이 되었다.
사도세자의 서자 였던 은언군 이인은 사도세자가 사망하자 출궁되어 살았는데, 시전
상인들에게 많은 빚을 지고도 갚지 않아 문제가 되자 영조에 의해 동생 은신군(恩信君)
과 함께 제주도에 유배되었다. 동생 은신군은 제주도에서 사망하고 은언군은 살아남아
복권되어 한성으로 돌아왔다. 이후 정조(正祖)가 아들이 없자 홍국영(洪國榮)의 권유를
받고 장남인 상계군 이담(常溪君 李湛, 1769~1786)을 정조의 양자로 삼아 세자로 책봉
하려는 계획에 동의하였다. 하지만 홍국영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자 은언군도 정치적
위기에 몰렸다. 아들 이담은 자결하였고 이인은 정조의 배려로 목숨을
건진 후 강화도에 유배되어 살게 되었다.
1800년 정조가 사망하고 어린 순조(純祖)가 등극하자 영조비 정순왕후(貞純王后)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고, 은언군의 가족은 또다시 역모의 혐의를 받고 목숨이 위태
로운 지경에 이르렀다. 한때 강화도를 탈출하려다 체포되어 위리안치 되기도 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그의 처와 며느리가 천주교를 신봉하여 청나라에서
건너온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를 받은 사실이 발각되어 처형되고 말았다. 이에 은언군
도 가족이 천주교에 빠지도록 방치하였다는 혐의를 받고 탄핵되었으며 마침내 사약을
받고 사사되고 말았다. 부모와 장형, 누이가 잇달아 사망하는 불우한 가족사를 겪은
이광(李壙)은 유배지 강화도에서 곤궁한 생활을 보내다 1841년 사망하였다. 1844년
큰아들 이원경은 민진용(閔晉鏞)에 의해 왕위에 추대하려는 모반 사건에 휘말려 사사
되었고 일가는 모두 교동도로 유배되었다가 강화도로 이배되어 살게되었다. 3남 이원범은
산에서 나무를 해다가 행상을 하거나 농부으로 살면서 겨우 목숨을 부지했다.
1830년 순조의 아들이자 세자인 효명세자(孝明世子:翼宗)가 22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1834년 아들 헌종이 8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헌종이 1849년에 후사없이 사망하자
이원범이 순조의 양자로 입적되어 등극하게 되었다. 이에 한성의 반가에서는 이원범을
비꼬아 강화도령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강화도에 사는 동안 혼인을 약속한 양순(또는
분이)이라는 처녀가 있었으며 이원범은 강화도에 두고온 양순을 항상 그리워했다고
전한다. 신분의 차이로 양순과 혼인을 할 수 없게 되자 철종은 방탕한 생활을 보내게
되었으며 그 영향으로 병을 얻어 사망에 이르게 되었다고 회자된다.
고려산(高麗山)
인천 강화 강화읍과 내가면, 하점면, 송해면에 걸쳐있는 산
높이는 436m로 강화읍내에서 5㎞쯤 떨어져 있는 산이다.
고구려의 연개소문이 태어났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옛 명칭은
오련산(五蓮山)이다. 416년(고구려 장수왕 4)에 중국 동진의 천축
조사가 이 산에 올라 다섯 색상의 연꽃이 피어 있는 오련지를 발견
하였는데, 이 연꽃들을 하늘에 날려 이들이 떨어진 곳에 적련사
(적석사)와 백련사·청련사·황련사·흑련사를 각각 세웠다고 한다.
이 산에서 인근 낙조봉(343m)으로 가는 능선에는 억새밭이 넓게
펼쳐져 있다. 산행은 적석사 입구에서 시작한다. 적석사로 오를
때에는 적석사 축대 밑에서 왼쪽으로 올라야 낙조대를 거쳐 낙조봉
으로 오를 수 있다. 적석사에서 15분 정도 오르면 낙조봉이다. 서쪽
능선에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36호로 지정된 3기의 고인돌이 있으며,
낙조대에는 작은 해수관음보살상이 있다. 이곳에
바라보는 석양은 강화팔경 중
강화 고려산 진달래축제 [江華高麗山─祝祭]
인천광역시 강화군에서 해마다 4월 중순에 열리는 지역문화축제.
고려산의 오련지·오련사·연개소문과 집터, 1,100m의 고려시대 산성,
강화 고천리 고인돌군 등과 진달래 군락지, 낙조 등 수려한 자연풍광
을 관광자원으로 개발하여 강화군을 대외에 홍보하고 농특산물을 널리
알려 지역경제를 돕고자 2003년부터 고려산진달래축제위원회가 주관
하고, 강화군이 후원하여 열리고 있다. 식전행사로 길놀이 풍물과 타종식
, 연개소문 가장행렬이 있고, 개회식 뒤에 진달래노래자랑, 고인돌 문화해설,
굿거리, 고전무용, 트로트공연, 고등학생 락 공연, 초등학생 고적대 연주,
모듬북 공연, 용두레질노래 정기공연, 열두가락놀이공연, 칠선녀 성무, 화전
만들기 경연대회, 서해 낙조 조망 등의 행사가 치러진다. 행사 가운데 진달래
노래자랑, 천축조사와 오련지·오련사의 역사 재연, 연개소문 가장행렬, 고인돌
바로알기, 화전놀이, 어린이 진달래 그리기 사생대회
등에는 관광객이 직접 참여할 수 있다.
강화 고인돌문화축제(江華─文化祝祭)
Ganghwa Dolmen Culture Festival
강화군이 자랑하는 고대문화를 주제로 한 이색관광축제로 1998년
처음 열렸다. 구석기시대의 유물인 쌍날찍개, 청동기시대 족장의
무덤인 고인돌 등 고대 유적과 유물이 많은 고장의 역사적 특성을
널리 알리는 다양한 행사가 펼쳐진다.
축제기간 동안 관광객들이 참여해 고인돌 축조, 석기 및 토기 만들기,
원시 불피우기, 움집 만들기, 돌도끼 던지기, 원시 사냥대회 등 다양한
원시생활을 체험한다. 섬 하나하나가 자연·역사박물관인 강화의 지역적
특성을 살려 자연탐험과 역사기행을 할 수 있는 관광 이벤트도 마련하여
강화에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과 자연을 체험할 수 있다.
강화도령(江華道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