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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안녕하세요? 밸런타인 데이와 저의 생일과 어머니의 생일, 그리고 설날 연휴가 있는 2월입니다.
뭐, 코로나19 때문에 어지간한 이벤트는 죄다 잿빛 우울이겠지만요.
새삼 느끼지만 슬기로운 집콕 생활의 요령은 독서가 아닐까 합니다. 책 읽기 번거롭고 활자만 봐도 졸리시다면, 제 책 추천 서평 및 감상을 이용하세요.
요약본이라 책을 읽은 것 같은 효과를 자랑하거든요. 물론 편법입니다. 왕도는 작품을 정식으로 독서하는 거죠.
하지만 그냥 덮어두고 읽지 않는 것보다는 이 서평이라도 참고하는 게 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도서명: 숲과 별이 만날 때
저자: 글렌디 벤더라
* 이 책은 시각장애인 재활사이트 아이프리 도서관 문학에 판타지 소설 코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 소개글 서평
제목이 예술이었다. 《숲과 별이 만날 때》라는 작품을 보고, 거칠게 말해 “닥치고 읽자!”를 실행한 건 순전히 제목 때문이었다. 푸른 남빛 하늘, 별이 흩뿌리듯 빛을 밝혀 묘하게 진주 광택이 도는 그런 밤하늘 아래, 나무로 가득한 숲이 있다. 그러나 야생의 거친 느낌이 드는 원시림은 아니고, 요정이나 각종 전설 같은 것이 떠도는 숲도 아니다. 그저 숲이다. 바람에 나뭇잎이 서로 부스대고, 미풍이 가지에 걸려 연하게 너울대는, 신발을 벗고 맨발로 걸어도 보드라운 흙에 발이 다치지 않을 것 같은 평화로운 숲, 하늘을 올려다보면 가지 틈으로 보석처럼 반짝이는 별이 가득할 것 같은 숲 말이다. 뜨문뜨문 주황색 불빛이 나무들 사이에서 비치고 아마 산장이나 캠핑 중인 모닥불이 아닐까 싶은 온기가 별과 숲과 온화한 밤을 배경으로 어우러진다. 실제 책의 표지가 어떤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숲과 별이 만날 때》라는 제목을 곱씹자 수채화 물감으로 잔잔하게 그린 듯한 그림이 뇌리를 채웠다. 입안에 꿀을 탄 캐모마일 허브티를 머금은 듯하고, 하프의 선율이 별빛으로 화해 귓가를 적시는 것 같기도 했다. 어깨에 포근한 담요를 두른 채 마당에 소리없이 쌓이는 눈을 바라보는 듯한 정취가 있었다. 그리고 《숲과 별이 만날 때》는 정말 그런 이야기였다.
별에서 온 외계인 소녀, 숲에서 사랑을 싹트게 하다!
“난 지구에 집이 없어. 저기서 왔거든. 얼사 메이저. 바람개비 은하에서 왔어. 꼬리쯤에 있는 거야.”
소설 《숲과 별이 만날 때》의 시작은 <어린 왕자>와 비슷했다. 꽤 많이 읽었다는 느낌이 들 때까지도 <어린 왕자>가 생각이 났다. 교수의 산장에서 조류생태학 및 보존 연구를 하는 대학원생 조(조애나)의 앞에 금발에 갈색 눈, 몸 곳곳이 새파란 여자아이가 나타난다. 마치 ‘요정이 버리고 간 아이’처럼 잠옷 차림에 신발을 신고 있지 않아 맨발이었다. 학대를 당하는 아이인가, 복잡한 가정사를 가진 소녀인가, 실종된 아이일까, 경찰에 신고해야 하나, 온갖 고민을 하는데, 소녀는 자신이 외계인이고 바람개비 은하의 큰곰자리 별에서 왔으며, 이 몸은 잠시 빌린 것일 뿐이라고 말한다. 여자아이의 본명은 모르지만, 임시적으로 ‘얼사’라고 부르기로 한다. 소녀는 다섯 번의 기적을 볼 때까지 지구를 떠나지 않겠다며 들개 ‘작은곰’과 계속 주변을 맴도는데…….
사실 소녀가 바람개비 은하를 운운했을 때 이 작품의 여주인공 조처럼 그저 꼬마가 지어냈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려운 현실을 도피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데 알고 봤더니 실제로 존재하는 은하더라. 지구가 있는 은하 외에 아는 은하라고는 안드로메다 은하밖에 없는 얕고도 짧은 나의 지식 수준을 탓할 뿐이다.
좌우간 이 요정이 버린 아이 같은 소녀에 대한 미스터리는 소설 시작부터 거의 끝에 다다를 때까지 풀리지 않는다. 여느 또래의 아이보다 똑똑하고 영리하며, <햄릿>이나 <리어왕>, <로미오와 줄리엣> 등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무슨 동화책 보듯이 읽고 이해한다. 수수께끼의 소녀 얼사는 정말로 외계인일까?
“사회 불안, 우울증, 경미한 광장 공포증이 있는 사람한테 필요한 치료요. 정신질환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잖아요.”
소설의 여주인공 조는 이 외계인 아이를 대체 어째야 할까 고민하다가 인근 주민들을 상대로 계란을 파는 달걀 장수에게 도움을 청한다. 하지만 노상 매대를 운영하는 게이브(개브리엘)도 얼사에 관해서는 고개를 저을 뿐이다. 말씨나 행동을 볼 때 근처 아이가 아닌 것 같고, 도심지에서 자란 아이 같고, 차라리 경찰에 신고하라는 조언이 전부였을 따름이다. 그런 한편 게이브, 그에게도 묘한 구석이 있다. 동물을 사랑하고 농장 일에 도가 튼 솜씨를 자랑하지만 말하는 어투나 태도, 분위기 같은 것이 시골에서 달걀이나 팔 것처럼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
얼사 문제로 조와 대화를 나누고 얽히고, 친분을 쌓는 과정에서 외계인 소녀가 부리는 ‘얼사의 마법’에 의해 그는 자기 내면의 상처를 조금씩 털어놓는다. 나이 차이 많이 나는 누나 레이시에게 받은 상처, 어머니 캐서린의 외도 현장을 목격해 받은 상처, 하필 그 상대가 아버지의 친구 키니 교수인 데서 받은 상처까지.
솔직히 말해 나 역시 캐서린과 아서 부부, 키니 교수와 린 부부의 묘한 관계가 제법 불편했다. 내 연애 가치관은 꽤 고전적이다. 배우자가 충실하지 못한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결혼 전에 친구 연인에게 끌린 것도 모자라, 그럼 혼인을 물리고 새로운 교제를 시작할 것이지, 예정대로 결혼을 진행하고, 결혼을 했음에도 상대와 불륜을 저지른 것 자체가 웬 막장인가 싶은 설정이었다. 왜 개브리엘이 정신적 고통을 호소했는지 이해가 가고도 남았다. 남에게 받은 상처도 물론 아프지만, ‘가족이라는 이름의 상처’는 그보다 몇 곱절은 더 깊게 남는 법. 일단 나부터도 아빠의 무신경한 행동거지라든가, 동생이 얕은 생각으로 구는 태도, 엄마가 대수롭지 않게 던진 말에 가끔 마음이 상하곤 하니까. 막말로 직장 상사가 별반 생각없이 사려 깊지 못하게 쪼는 건 ‘어릴 때 정서가 불안했나벼’ 혹은 ‘사회화가 덜 된 탓이지’ 내지는 ‘언어 습관이 참 저렴해서 세상 살기 힘들겠어’ 등 뭐 이런 식으로 속으로라도 비꼬고 일기에 심화를 기록하는 것으로 깔끔하게 털고 넘어갈 수 있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왜냐면, 그들은 내게 비중이 없는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이쪽 사정을 안 봐주는 인물에게 감정적으로 관심을 끄는 편이다. 그래서 깊게 정을 주지 않았고, 업무적으로만 얽혔을 뿐이라, 틱틱대거나 쪼아대는 게 빈정 상할 따름이다. 마음이 다치지는 않는다는 거다.
하지만 가족은 다른 차원이다. 남에게 받는 것과 가족에게서 받는 상처는 그 데미지의 강도가 다를 수밖에 없다. 하물며 게이브처럼 어릴 때 받은 배신감은 오죽했을까. 엄마의 부정을 누구한테 털어놓지도 못하고, 좋아한 옆집 아저씨는 알고 보니 배신자인데, 나이 차이가 많은 누나는 동생을 미워하기까지 했다. 그가 사랑에 시니컬한 것도 당연하다.
그런데 이런 게이브의 가정사를 들은 조는 그가 생각해보지 않았던 또 다른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비록 내가 그녀의 관점에 동의하는 한편, 일부분은 수긍할 수 없긴 하지만, 그래도 자신의 상처에 메몰당하지 않게끔 이끌어준다는 감상은 들었다. 그 일이 마냥 불행만은 아니라는, 새로운 시선 제시랄까.
“정신 차려! 난 이 모습 그대로 행복하고, 너도 그걸 기뻐해 주면 되는 거야. 알아들었어? 나를 온전한 사람으로 봐주는 게 가능하기는 한 거니?”
물론 조에게도 상흔은 있었다. 그녀는 암 생존자, 그것도 유방암이었다. 병은 떨쳤으나, 가슴과 난소를 절제해야 했고, 그 바람에 남자친구 태너와도 헤어졌다. 심지어 그녀의 엄마를 같은 병으로 잃기까지 했다. 그렇지만 조를 더욱 못 견디게 하는 건 회복 후 그녀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였다. 조가 고기만 구으려 해도 넌 그냥 쉬고 있으라 하고, 그녀의 기분을 예민하게 신경 쓰며, 수술에 대해 과하게 의식한다. 심지어 ‘여자’라는 성별이 가슴과 난소로 대변되는 것도 아닐진대, 그 두 기관이 없다고 그녀의 인생에 무수한 애로 사항이 꽃피는 것처럼 군다. 수술은 조의 선택에 의한 것이고 그녀는 자신이 내린 결정에 일말의 후회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조의 행동의 동기를 유방 및 난소 절제와 결부시켜 생각하는 게, 아무리 사고의 방향이 그런 쪽으로 튀기 쉽다지만, 참 씁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기자 인터뷰 취재할 때 부득이 넣는 질문 “자신의 장애를 자각하게 된 동기나 계기, 혹은 사건이 있다면?” 또는 “자신의 장애가 현재 가진 꿈이나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어떤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하나요?” 하는 문항이 떠올라서 말이다. 실은 고백하자면 개인적으로는 딱히 하고 싶지 않은 질문 문항이다. 장애인으로 살면서 내 장애를 크게 의식하는 적은 그렇게 많지 않기 때문이다. 장애로 인한 불편을 의식한 적은 많아도, 장애 그 자체에 연연하지는 않았다. 정안인들과 비교하며 상처를 받는 일도 없었다. 사고나 병으로 인해 후천적으로 장애를 갖게 된 경우에는 다를 수 있지만, 또 선천적이라도 사람 따라 다를 수 있겠으나, 최소한 나와 내 주변 애들은 자신의 시각장애에 크게 개의치 않는다.
하지만 주위 사람들이나 사회의 통념은 우리들의 인식과는 별개였다. 어쩌면 특수학교에서 생활하는 장애학생이 갖는 이 사회에 관한 막연한 꺼림 내지는 불편함 같은 것은 ‘장애 때문에 어려운 무언가’가 아닌, ‘장애를 가진 나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일 수도 있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을 상대가 자꾸 되새기면 나 또한 의식하게 되니까.
서로가 서로의 둥지가 되는 시간, 《숲과 별이 만날 때》
“해냈다! 해냈다! 해냈어! 아저씨랑 언니가 사랑에 빠지게 만든 거. 내 쿼크 덕분이야. 난 알고 있었어! 알고 있었다고!”
이 작품 《숲과 별이 만날 때》는 판타지와 미스터리, 살인사건을 다루는, 마치 SF 탐정 소설의 길을 모두 거치지만 끝에서는 마음을 다독이며 감동을 주는 드라마로 마침표를 찍었다. 소설의 주요 환경인 ‘숲’은 단순히 장소만을 의미하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각자의 자리에서 긴 세월을 버틴 나무들이 모여 숲을 이루듯, 각각의 삶에서 얻은 인생의 괴로움을 나이테처럼 몸에 두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은유한 것이 아닐까? 작품의 주인공 조와 게이브처럼 말이다. 둘은 각각 상처를 가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일상에 충실하다.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가는 것 자체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굳이 해설하지 않고 문장으로 밝혀 구구절절 적지 않음에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상처와 고통이 절절히 전달될 수 없다는 것까지도 소설은 아주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그러나 그 묘사가 괴롭거나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오히려 담담하다. 그리고 남녀 주인공의 감정 흐름은 물이 위에서 아래로 쏟아지듯 별반 어색하지 않았다. ‘불완전한 여자와 마음이 병든 남자’가 외계인 얼사를 매개로 만났다. 서로 함께하는 시간이 쌓일수록 공감과 이해가 이루어지고, 그 사이에서 묘한 감정선이 싹을 틔웠다. 그것은 ‘아기 새의 탄생’인 첫 번째 기적과 ‘새끼 고양이를 만난’ 두 번째 기적, ‘자유분방한 멋진 언니 태비와 친해진’ 세 번째 기적에 이은, 네 번째 기적이었다. 이 또한 모종의 상징성이 느껴진다. 《숲과 별이 만날 때》라는 제목에 왜 ‘별’이 들어갔겠는가. 조와 게이브를 이어준 건 별을 좋아하는, 별의 이름을 가진 외계인 소녀 얼사가 아니던가.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 별과 같은 희망이 되고, 마침내 기적이 된다는 메시지가 아닐까 싶다.
그러나 사실 그러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어려운 시간을 겪어냈다면 이미 경험한 것이겠지만, 조금 눈을 돌려 자기와 똑같이 우뚝 선 사람들을 보기란 선뜻 해내기 어려운 일이다. 그들도 각자의 고충이 있고, 괴로움이 있다는 것을 인식한다는 건 더욱 그렇다. 그러나 책의 주인공인 게이브와 조는 그런 것들을 보려 했고, 보고자 했다. 자신의 아픔에만 매몰되어 불행과 허무를 온통 감싸고 남들에게 날을 세우지 않는, 나와 상관없는 완벽한 타인에게도 마음의 문을 열고 기꺼이 도움을 주려는 용기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둘을 관찰자적 시점에서 지켜보고 있다 보면, 그들의 선택에 응원의 박수를 보내게 된다. 경찰이 실종된 아이는 언제나 있고, 잠옷 바지를 입은 것은 패션일 수 있다고 심드렁하게 말하는 세상, 아이를 위한다면서 아이의 의견은 고려하지 않는 아동복지국 직원도 있지만, 그래도 세상은 아직 기댈 나무가 있고, 바라볼 수 있는 별이 있고, 그리하여 그 둘이 만날 때 기적처럼 내 편이 되어줄 ‘둥지’가 생긴다는 위로를 들은 것 같다.
작가 글렌디 벤더라가 조류학자라고 하던데, 그래서인지 작품 속에서도 ‘둥지’가 주요한 암시 키워드로 등장하는 것 같다. 좌우간 책의 끝에 가서 긴장감은 최고조에 달하고, 위기의 순간 얼사의 비밀도 드러난다. 그리하여 마침내 ‘숲과 별이 만날 때’ 다섯 번째 기적이 일어난다. 그것은 바로…, ‘사랑’이었다.
물론 얼사의 비밀은 왜 소녀가 외계인 운운하며 자신을 감춰야만 했는지 아주 명확하게 드러낸다. 그만큼 어린애가 감당하기에 참담한 사건이었다. 그럼에도 시선을 조금만 돌려보면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고 부드럽게 어필하는 작품의 서사 때문에 책을 덮고 감상을 적는 지금 마음에 남은 것은 SF나 판타지, 스릴러와 추리도 아닌, 그저 ‘온기’뿐이었다.
한가지 아쉬운 건 소설의 전체적인 느낌이 <어린 왕자>를 너무 많이 연상시킨다는 점이다. 어떻게 보면 <어린 왕자>의 아성에 기댄, 혹은 오마주했다고 보일 만큼 말이다.
PS. 작품 속에서 등장하는 동화책 <도망쟁이 아기 토끼>, 우리에게는 <엄마 난 도망갈 거야>로 번역 출간된 책을 읽고 싶어졌다. 불리불안증이 있는 아이에게 독서치료 교재로 쓰면 효과적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원고를 타이핑해서 소장하기 위해 아빠한테 부탁해 도서관에서 책을 대여해야겠다. 기왕 대출 부탁하는 김에 <내 귀는 레몬빛>, <세 바퀴로 걷는 염소 조이>, <짧은 귀 토끼>, <세모 별 디디>도 빌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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