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산 여행6 - 루산박물관을 구경하고는 도로 건너편에 있는 마오쩌둥 시서원에 가다!
10월 22일 루산(여산) 의 운관소 에서 여산경구(庐山景区) 동선(东缐) 버스를 타고
한퍼커우 含鄱口(함파구) 에 내려서 산을 올라 함파정 (含鄱亭) 을 구경합니다.
함파정 에서 내려와 함파구 정류소 에서 버스로 여산박물관 庐山博物馆 에
도착해서는..... 여기 루산(여산) 을 찾아 유람한 이들을 구경 합니다.
그러고는 옆 구역으로 들어가니 庐山世界地质公园(여산세계지질공원) 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여기 루산(여산) 지역이 지질적으로 볼때 좀 특이한 곳인지라......
지구가 탄생한후 화산 활동 과 삼엽충이며 공룡과 지질 분포도와
산에서 캐낸 광물들을 전시하고 있는 것을 구경 합니다.
여산박물관 을 나와 도로를 건너서 여림호 호수 옆에
위치한 주차장을 지나서 언덕을 올라가니.....
거기 언덕에 글씨들이 적힌 비석 들이 늘어선 공원 이 보이는데 바로 이곳이
모택동 여산 시사원 毛澤東 庐山 詩詞苑 이라고 불리는 곳입니다.
붉은색 초서로 毛澤東 庐山 詩詞苑 이라 적힌 큰 바위를 지나니 정자가 나오고 그 위쪽에
인민복을 입은 마오쩌둥(모택동) 과 저우언라이(주은래) 실물 크기 동상 이 서 있습니다.
그 뒤쪽 큰 바위에 역시 붉은색 초서 글씨로 바위 가득 무언가 씌여져 있으니, 그 뒤
정자 에도 같은 내용의 글씨가 적혔는데, 누구 아부하기 좋아하는 사람이
말했는지 모르지만.... 바로 중국에서 100대 명필 에 든다는 마오쩌둥의 친필 입니다.
확실히 모택동의 글씨 는 멀리서 보아도 누구나 알아볼수 있는 특색 을 지녔으니
글씨가 활달 하고 규격에 억메이지 않으며 기상이 호방하다는 느낌이 드는데
글씨 크기가 서로 다른게 엄청 큰 글씨도 있어 파격적 이니 보는 사람이 놀랍니다.
중국의 명필 이라면 동진의 왕희지 가 고대로 부터 내려온 글씨를 완성한후 당나라에
구양순과 저수량 이 나왔으며 송나라에 소식과 황정견, 미불 그리고
원나라의 조맹부 에다가 명나라가 되면 문징명과 동기창 이 명필이라 불린다고 합니다.
시사원 詩詞苑 은 주로 모택동의 글씨 들을 모아 두었지만 그 외에 운무차 를 노래한
주더朱德(주덕) 와 여산 을 노래한 중국의 전 주석 장쩌민 江澤民(강택민) 등
여러 사람의 글씨가 있는데 물론 상부에는 호방한 모택동의 글씨 가 있으니 압권입니다.
주더 朱德(주덕) 는 군벌군에 들어가 소장까지 올랐으나 후원자가 죽고 농민의 비참한
생활을 본후 마약과 여자를 끊고는 상하이로 가서 천두슈에게 공산당 입당 을
신청했으나...... 군벌 경력 때문에 거절 당한후에 1922년 독일의 괴팅겐 으로
유학하여 역사와 철학을 공부하던 중에 주은래 소개로 공산당에 가입 했다고 합니다.
소련에서 군사학을 공부하고 1926년 귀국해 제1차 국공합작에 의해 난창의 국민당군 을
지휘했는데 1927년 장개석의 쿠데타로 국공합작이 붕괴되자 국민당 정부로 부터 난창
봉기를 진압하라는 명령을 받지만 오히려 부대를 이끌고 봉기에 가담해 국민당군에
쫓기다가 1928년 마오쩌둥의 징강산 공산당 해방구 에 1만명의 병력을 이끌고 가담합니다.
1932년 국민당의 4차에 걸친 토벌작전을 분쇄하고 해방구를 늘려 300여만명의 인구를 갖는
장시 소비에트 를 건설하였으나 1934년 제5차 토벌작전에서 국민당군의 진지전에 말려
큰 피해를 입은후 해방구를 포기하고 대장정 을 개시했는데... 1937년 시안사건으로
제2차 국공합작이 성립되자 국민혁명군 제8로군 총사령관 으로 항일작전을 지휘 했습니다.
주더 는 1947년 인민해방군 총사령관 으로 중화인민공화국 수립후 국가부주석에 오르는데
6.25 때는 인민지원군 총사령관 팽덕회를 지휘해 참전하니 유엔군이 평양에 입성하자
1950년 10월 19일 중공군 26만이 압록강을 건넜으며 1952년의 병력을 보자면 연합군은
한국군 30만에 유엔군 30만등 60만이고 공산군은 북한군 20만에 중공군 50만등 70만입니다.
1.4 후퇴로 유엔군이 평택까지 밀리자 영국과 캐나다, 호주등 영연방 국가들은 현전선
에서 휴전 하지 않으면 철수하겠다고 위협해, 미군이 중공군에게 일주일 시한부로
제의하니 모택동과 주은래는 상승세라고 판단해 제안을 거부하자 미군은 융단폭격
으로 중공군을 밀어 올리는데 하마터면 우리 국경선이 충청도와 경북선 이 될뻔 했습니다.
6.25때 오판이 3번 있었으니 첫째는 김일성은 3개월 안에 부산을 점령하면 미군의 참전은
없을 것이라 말했는데. 미군은 남한에서 철수했고 애치슨 국무장관은 남한과 대만을
미국 방위선에서 제외한다는 애치슨 라인 을 친절하게도 지도와 함께 발표 했기 때문입니다.
두번째 맥아더는 북한으로 진격해도 중공군 개입은 절대로 없을 것이라 호언장담했는데
평양을 점령하고 압록강에 이르자 중공군 포로 가 잡히는데도 정찰대라고 우겼으니
중국은 압록강에서 미군과 대치하는걸 절대로 받아들일수 없었으며.... 강대국과
완충지대 가 필요하니 임진왜란때 평양이 함락 되자 명군이 참전한 것과 같은 이유입니다.
만약에 맥아더 가 易地思之(역지사지) 를 알았더라면 대동강에서 진격을 멈추고 북한 정권
의 존속을 용인한다며 중국에 휴전을 제의 했으면, 중공군의 참전은 없었을 것이고
우리나라 국경선은 대동강에서 원산선 일 것이며.... 김일성은 우상화 전이니 전쟁
패배 책임으로 실각 했을 것이며 훗날 소련이 무느질때 흡수통일 할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임진왜란때 고니시 유키나가는 평양을 무혈점령후 더 이상 북진하지 않은 것은 동래성을
함락하고 포로로 잡은 울산군수를 조정에 화의사절로 보내는등 여러차례 사절을 보내
이덕형과 만나자고 했는데 만일 왜군이 청천강을 넘으면 선조가 중국으로 도망칠까 염려
한 것이니 상대방을 생각했듯이 평양에 들어가면 중국이 용인할수 있는 선을 넘는 것입니다.
세번째가 모택동의 오판이니 중공군이 평택까지 내려왔지만 공군과 해군이 없는데다 대포도
모자라고 보급은 사람이 운반하는 원시적 수준 임을 자각하지 못하고 진격할수 있다고
믿었으며 맥아더와 리지웨이가 융단 폭격을 퍼부울줄 모르고 휴전제의를 거절한 것입니다.
누구 여행기에 보니 모택동 여산 시사원을 방문한 분이 모택동과 주덕의 한국전 개입
이 없었다면.... 1950년에 우리나라가 통일됐을 것이라 원망하는데 옳은 말씀
입니다! 하지만 이는 상대방의 입장은 전혀 생각지 않는 일방적인 우리 생각 이지요?
북한이 붕괴되고 압록강에서 세계 최강 미군과 대치해야 하는 중국의 입장 을 생각한다면!
2차 대전을 흔히 미국과 독일 이 치뤘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는데, 군인과 민간인을
합친 사망자 숫자를 보면 미국이 29만명, 영국이 35만명, 프랑스가 56만명
인데 비해 독일 은 군인 350만 + 민간인 280만명등 630만명 이고....
소련은 군인 1,370만에 민간인 700만명등 2,070만명 이었으며 폴란드가 수백만명입니다.
동양에서는 중국은 군인 205만 + 민간인 775만 합계 980만명 이며 일본 은 소수의 조선인
을 포함하여 군인 130만명 + 민간인 70만명 합계 200만 에 달했으니....
전쟁 초반에 영국과 프랑스는 전쟁을 포기하고 철수해 독일과 소련을 싸움 붙여
재미를 보았으니 미국은 동양 에서도 소련군을 끌어들여 미군의 피해를 줄이고자 했습니다.
얄타회담에서 소련은 1945년 8월에 참전하기로 약속했는데 히로시마에 원자탄이 떨어지자
바로 참전합니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으니 동유럽이 소련의 손에 들어갔듯이
동양에서도 사할린 남부와 일본 북방 4개섬에 북한이 소련의 전리품 으로 넘어
가는데 미국이 동의한 것이니 한반도에 적대적인 두 세력이 대치하니 전쟁은 필연 이지요?
김구 임시정부에게 한반도를 넘기기 싫었다면 미국이 한반도를 다 차지 하던가? 아니면
미.소,영에 중국이 예정대로 신탁통치 를 강행하던가... 소련에 다 주기는 아까우니
반반씩 나누어 차지한 것이네요? 한반도를 다 차지하려면 소련에 참전을 요청
하지 말아야 했으니 그럼 미군의 희생 이 너무 크고(당시는 원자탄이 개발되기 전이지요)!
독일이나 오스트리아 처럼 신탁통치 를 했으면 소련이 함경도, 장개석의 중국이 평안도,
영국이 경상도 나머지는 미국 차지했다면 남북한 지도자들이 오스트리아 처럼
화의를 해서 중립국을 선언하고 4대국을 철수하게 한후 공동정부를 꾸리던가.....
동독처럼 함경도만 북한이고 나머지는 대한민국이라면 6.25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김구선생이 일본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대성통곡하자 사람들은 기뻐서 운줄 알았지만
선생은 걱정이 앞섰으니, 광복군이 일본군과 전쟁을 하지못해 한명도 사살하는 전과가
없었으니 독립을 요구할 권리가 없으니 조국이 강대국들에 의해 좌지우지 될까 걱정이라!
카이로 회담에서 연합국은 조선을“적절한 절차에 따라 적당한 시기에 독립시킨다”라고
했으니, 전후 미국은 조선은 권리도 능력도 없으니 25년 신탁통치를 주장하자 소련이
반대해 5년으로 된 것인데, 우린 우리 편할대로 아전인수식으로 해석해“적절한 절차와
적당한 시기”는 빼버리고“독립”만 보네요? 요지는 일본 세력을 줄이기 위함 이 목적인데?
태평양전쟁시 조선인이 총궐기해서 쌀과 면화등 공출과 징용에 징병 을 일체 거부하고
일본군과 싸우며 수십만명의 사람이 죽고 수백만명의 이재민 이 났다면....
해서 태평양 전선으로 갈 일본군 50만을 2년 정도만 조선에 붙잡아 두어 미군
1만명의 생명을 구했다면 우리는 당당하게 독립을 주장할 근거 가 생긴다고 믿습니다.
시서원 을 나오면서 생각하니 지금 중국은 6.25때 변변한 무기도 없이 피리 불고 괭과리를
치며 인해전술 로 밀어 붙이던 그런 나라가 아니고 이제는 대국굴기 를 넘어서서 첨단
기술에 도전하니 중국특파원 윤완준 기자는 중국의“로봇 굴기”가 심상치 않다고 말합니다.
"배드민턴 라켓으로 서브를 넣자 로봇은 재빠르게 움직여 셔틀콕 을 받아냈다.
셔틀콕은 완벽한 포물선을 그리며 네트를 넘어 왔다."
"25일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열린 세계 로봇 콘퍼런스 현장. 취재진과 배드민턴을
친 상대는 사람이 아니라 인공지능(AI) 로봇 이었다. 로봇이 이리저리
움직이며 라켓으로 셔틀콕 을 받아내자 이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환호성 을 질렀다."
직장인 자오샤오팡(趙小方·24) 씨는 “셔틀콕의 움직임을 정확히 포착해 낙하지점으로
이동하는 모습이 너무 신기하다”며 놀라워했다. 류자퉁(劉家桐·23) 씨는 “보기만
하고 같이 놀 수 없는 로봇과 달리 사람과 소통한다는 점에서 특별해 보인다”고 말했다.
이 로봇을 개발한 상하이허푸(上海荷福) 인공지능 과학기술유한공사 의 푸젠 부사장은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사람의 움직임과 사물의 궤적을 포착해 이동하는
배드민턴 로봇 기술을 활용하면 집안일을 돕는 파트너형 로봇을 개발할수 있다”말합니다.
“로봇에 부착된 동작인식 카메라는 안전사고 예방에 도움을 줄 수 있다”
라고도 말했는데 중국 정부의 관심을 반영한 듯 리커창(李克强)
중국 총리가 이 로봇과 배드민턴을 치는 장면 도 전시돼 있었다고 합니다.
"베이징시와 공업정보화부 주최로 23∼27일 열린 콘퍼런스는 전세계 150여 로봇기업과 300
AI 전문가 및 기관이 참여해 최신 기술을 선보였으니 해파리가 물속에서 헤엄치는
움직임을 재현해서 공중을 날아다니는 바이오닉(생체) 로봇은 사람들의 탄성을 자아냈다."
"농구 슛동작을 재현한 야오밍(중국의 유명 농구선수) 로봇과 피아노 치며 노래 부르는
로봇 앞에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사람이 바둑돌을 대신 놓아줘야 했던 알파고
와는 달리 직접 바둑판에 돌을 놓아 바둑을 두는 로봇 도 관심을 끌었다.
뇌파 신호와 안구 움직임을 이용해 조종하는 휠체어는 노인과 장애인을 위해 설계됐다."
박람회 기간에 청소년 로봇 경기도 열려 12개국 2,600명 이 참가했다고 중국중앙
(CC)TV 가 전했는데 창(常)모 씨는 “중국에선 아이들이
로봇을 이용해 레고를 조립하는 방법 을 배우는 학원 도 등장했다”고 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