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27:35~53)
십자가 형벌은 가장 잔혹한 처형 방법이다.
예전에 일본에서 바늘 구멍 뚫기(?)로 기억되는
가장 잔혹한 형벌을 시행한 적이 있는데
잔혹한 형벌의 특징은
오랜 시간 서서히 죽어가고
자신의 몸에서 피와 같은 생명 유지에 필수적인 것이
조금씩 소모되어 지는 것을 느끼면서
심리적으로도 온갖 고통을 다 느끼게 한다는 점이다.
십자가 형벌은 못 박힌 채 십자가에 매달려
장기가 서서히 손상되는 고통을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느끼며 육체적, 징신적 고문을 당하게 한다.
그 십자가의 형벌은
예수가 아니라 바로 우리들 하나, 하나가
당했어야 하는 것이었다.
온갖 죄를 짓고 사는 우리가
죄의 대가로 처절한 죽음을 당했어야 했다.
그것을 긍휼히 여기신, 사랑 그 자체이신
하나님께서 외아들 예수를 대신 형벌 받게 하심으로
모든 책임을 스스로 감당하시는
위대한 사랑을 베푸셨다.
그런데 예수가 우리를 위해 못 박힌 그 자리에서
벌어지는 상황과 모습은 가히 가관이 아닐 수 없다.
어그러지고 왜곡되고, 비뚤어지고,
착각하고, 경고망동하고... 너무 악하다.
아수라장, 아비규환의 틀어진 세상을 그대로 보여준다.
1. 물질 추구
자신들의 죄를 위해 대신 처절한 죽음을 감당하시는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사람들은 단지 예수의 옷에만 관심을 기울인다.
어찌되었든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유명한 예수의 옷이
그들에게 소장하거나 매매할 만한 가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독히 물질적 추구에 혈안이 되어 있다.
2. 프레임으로 죄인화 하기
'유대 사람의 왕 예수"
예수님의 죄목이다.
그의 뜻에는 무지한 채
무조건 그를 죽이기 위해 그들의 논리에 합당한
제목을 붙여서 정당성을 얻는다.
사람의 이성적 재능이 죄를 위해 사용될 때
역사적으로도 너무 많은 사람을
마녀사냥하여 죽였다.
지금도 주로 힘이 있는 세력이
자신의 가진 것을 수단으로
자신의 뜻에 맞지 않는 이들을
진실과 먼 어떤 타이틀, 프레임으로 갇히게 하여
생명력을 끊어 놓는다.
최근의 4.3사건에 대한 해석의 차이 등이
이런 계략에서 나오는 진통들이다.
3. 조롱, 하나님 대적
사람들이
메시야면 '내려오라!"고 외친다.
비아냥과 조롱이다.
십자가로부터 시작되는
구원과 복음의 영적인 것은
지금 여기에 단어 한 마디도 어울리지 않는다.
십자가의 죽음의 의미를 모른 채
오히려 그 반대로 행하는
적 그리스도적, 반 하나님적 행태임을 그들은 모른다.
4. 종교 지도자
대제사장, 율법학자, 장로들 중에
예수를 예수로 아는 이들이 적어도 본문 중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사람들의 조롱과 하나님 대적을
주도한 것으로 추론되어진다.
세상적으로는 종교 지도자라고 감히 명명하였지만
오히려 더 위험한 존재들이다.
그들이 회심하지 않는다면 더 큰 대가를 받아야 함은 당연하다.
5. 신앙과 관련된 것들의 위험
예수님의 기도를 보며 엘리야가 와서 그를 구해주나 보다 등의
말을 한다. 성경적 지식이 오히려 왜곡과 조롱의 수단으로 전락한 것이다.
교회, 성경, 은사, 헌금, 기도 등 등
어떤 신앙과 관계된 것이라도 '사랑'이 없으면
오히려 더 위험한 죄의 수단이 될 수 있다.
주님! 용서하소서. 도와주소서.
주님만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