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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여류작가 요시모토 바나나의 소설 <하치의 마지막 연인>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남자란 결국엔 마릴린 먼로같은 여자를 좋아하기 마련이다..."
절대 그렇지 않을 것 같은 특이한 남자 하치와, 마릴린 먼로와는 사뭇 다른 이미지를 지닌
하치의 현재이자 마지막 연인인 주인공 마오짱의 이야기를 읽다가 마주치는 이 통속적인 말은
자유분방하고 특이하고 파격적인 주인공들의 삶을 일상에서 한층 동떨어지게 만드는 느낌이다.
어쨌든 그럴 수 없어 보이는 남자 조차도 결국엔 먼로와 같은 여자를 좋아할 수밖에 없다는
이 말은 서양병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일본인들에게는 여러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왠지 여기서는 관능적이고 이국적인 아름다움을 가진 금발여자의 부드럽고
섹스어필한 '애교'를 말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마오짱이 그런 것과는 거리가 먼 여자로 느껴지기 때문에 더 그런 느낌이 든다.
남자들은 말할 것도 없이 관능적이고 섹시한 여자를 -신부감으로는 어떨지 모르지만- 좋아한다.
그렇다면 세상의 모든 남자들은 영화속의 마릴린 먼로와 같이 애교있고 섹시하고 부드럽게
착착 감기는 여자를 정말 좋아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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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교란 일단 다분히 개인적인 표현이고 당하는(?) 사람 입장에서도 그 느낌이 천차만별로
다가오는 아주 사적이고 주관적인 정서이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도 애교있는 여자는 엄연히 존재한다. 애교가 있지만 겉으로 표현을
자제하는 여자들도 있고, 애교를 일부러 만들어서 표현의 한 수단으로 삼는 여자들도 있다.
또한 남자 뺨치게 무뚝뚝해서 애교라는 말과는 애초에 거리가 먼 여자들도 있고,
자신의 애교가 매력적인 부분이라는 걸 너무 잘 알고 적극 활용하는 여자들도 있다.
남자들의 취향은 대개 이렇다.
자연스런 애교를 싫어하는 남자는 아마 거의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처음부터 애교있는 여자를
안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남자들은 대개 여성의 모성애를 갈구하거나, 좀 어른스럽고
성숙한 스타일의 여자를 찾는 사람들이다.
이런 남자들은 여자한테 치대고 사랑받는 걸 좋아하는데, 애교있는 여자들이란 대개
코맹맹이 소릴 하면서 뭔가 자꾸 요구하고 자기만 쳐다볼 것을 원하기 때문에 안 맞는 것이다.
사실 남자가 하늘의 별을 따다 준다든가 연약한 여자를 위해 불속에라도 뛰어들 것으로
생각되는 경우가 많지만 솔직히 들여다 보면 남자는 여자보다 연약한 존재일 수가 있다.
단지 풍습과 문화에 의해 남자는 여자보다 위대하고 강해야 할 것처럼 교육받고 듣고 보고
했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하는 것일 뿐, 남자에게도 여자를 의지하는 연약한 성향이 무척 많다.
<남자는 여자를 귀찮게 해>라는 노래가사처럼, 처음엔 제법 씩씩하다가
본색을 드러낸 이후로는 매일 밥달라, 안아달라 하는 남자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 남자는 상대적으로 애교가 많고 칭얼대는 의존적인 여자를 별로 안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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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남자의 취향은 나이가 먹는 것에 따라, 또는 다양한 경험에 따라 조금씩 바뀐다.
예를 들어, 젊을 때는 성숙하고 당당한 여자를 좋아하던 사람도 나이가 들면 여자답고
아기자기하고 좀 친근한 여자를 좋아하게 될 수가 있다는 이야기다.
내가 예전에 다니던 직장에 송과장(가명)이란 상사가 있었는데, 그녀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그리 인기있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인기가 좀 없는 편이었는데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었지만 가장 큰 원인은 그녀의 약간 부담스러운 말투와 웃음소리,
그리고 억지스런 애교 때문이었다.
그런데 사장님은 그녀를 거래처 사장들과의 회의나 회식때 자주 동행하게 하곤 했다.
처음엔 이유를 몰랐는데, 알고보니 그 나이 지긋한 거래처의 사장들은 송과장의 그 격의없고
다소 닭살스런 행동들에 사족을 못쓴다는 후문이었다.
"어머머... 김사장님, 안녕하세요? 출판 A부의 송애교예요... 사장님, 잘 부탁 드릴게요..."
어깨를 으쓱거리거나 눈을 찡긋거리는 행위, 오버로 꾸민듯한 웃음소리와 코맹맹이 소리가
젊은이들에게는 부담스럽고 표정관리에 애를 먹게 만드는 난처한 매너였지만,
나이 지긋한 그 분들한테는 근래에 구경 못해본 깜찍하고 귀여운 몸짓으로 비쳐졌던 모양.
그녀보다 한참 어린 나로서는 정말 납득하기 어려운 그들만의 정서였겠지만 말이다.
덕분에 송과장이 참석한 거래처 회식은 늘 화기애애했고, 그에 따르는 많은 영업이득을
얻을 수 있었다 하니 이럴 때 여자의 애교란 실로 생존의 가장 큰 무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외침이 많을 수밖에 없고 다양한 문화가 섞이는 섬나라 일본에서는 애교를 여성의 미덕으로
여긴다는데, 이 역시 역사가 만들어낸 생존의 한 수단으로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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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다양한 조건에 따라 바뀌는 것이 남자라지만 대체적으로 남자들이 여자의 애교를
바라보는 일반적인 시선이라는 것은 분명히 존재한다.
애교있는 여자를 당연히 귀여워 하지만 그것이 자연스러울 때 가장 큰 매력을 느낀다.
일부러 애교있게 행동하려 하지는 않는데도 귀여운 여자가 최고겠지만, 그 다음으로는
애교가 있으면서 그게 어울리는 여자도 좋다.
하지만 안 어울리는 애교를 떨거나 너무 심하게 그러는 경우는 불편해하고 부담스러워 한다.
표준 FM의 어느 방송에서는 일주일에 한번씩 성대모사로 하는 코믹 라디오 드라마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여자주인공인 가수 노사연이 극중에서 쓰는 비장의 무기가 있다.
뭔가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할 때, 몸을 비비 꼬면서 코맹맹이 소리로 "아아잉~"하며 조르는 것.
그럴 때면 모든 출연자가 괴성을 지르며 괴로워하고 탤런트 오지명의 목소리 흉내를 내는
상대연기자는 바로 항복하며 외친다.
"알었어, 알었어. 너 그거 하지마. 다 들어 줄 테니까 '아아잉' 그것만 하지마. 무지하게 짜증나."
이런 걸 보면 남자들이 억지 애교를 얼마나 닭살스러워 하는지 알 수가 있다.
남자들 중에도 남 보기엔 영 안 어울리는데 노란 염색을 하거나 멋진 매너를 흉내내려는
사람이 있지만 역시 여자들로부터 환영받지 못하는 것처럼, 사람은 역시 있는 그대로 꾸밈없이
행동하는 것이 가장 매력적이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저 나름대로의 매력과 애교가 있고
객관적으로 어떤 것이 더 낫다고 할 수는 없을 테니까 말이다.
진정한 애교란 꾸미지 않아도 들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람의 좋은 장점은 자기 안에서 충분히 만들어지면 자연스럽게 흘러넘치는 것이기 때문에
드러내려 하지 않아도 남들이 알게 된다.
그렇다 해도 사랑은 -신기하게도- 이 모든 것들에 우선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일단 사랑하고 나면 그녀의 모든 것이 예쁘게만 보이고,
남들 보기엔 부담스러운 그녀의 애교도 귀엽고 사랑스럽기만 하다니, 이거야말로 '마법'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