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시나 되었을까, 희끄무레 밝아 오기 시작할 무렵, 전기장판을 켜고 온도를 올렸다. 그러곤 베개 하나에 머리를, 또 하나에는 발을 올려 놓고 다시 잠이 들었다. 습관이다. 푹 잤다. 꿀맛이다. 그대로 누워 눈을 뜨지도 않고 뻐꾸기 우는 소리를 들었다. 한 번 두 번...헤아리다가 또 설핏 잠이 들었다. 틈새로 들어온 바람이 맨살을 간지럽혔다. 머리 속이 텅 빈, 무념무상이다. 푸른 산이 주는 고즈넉함과 맑은 공기가 나이가 들수록 더 좋아진다. ^그만 일어나라^는 말을 아름다운 꽃노래로 듣는다. 계란 후라이 굽는 것도 제대로 못한다며 나무라도 한 귀로 듣고 그냥 웃고 만다. 천국이라고 매양 평화롭고 조용하기만 하겠는가.
화요산행이 있는 날이다. 꾸준한 산행이 건강보험 재정에 기여하리란 자부심으로 가득 차 있다. 애국이다. 오가는데 시간이 제법 걸려도 불평 한 마디 하지 않는다. 80대 중반이 넘어도 이렇게 산항하면 나를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우선 애들이 제일 좋아할 거다. 하지만 내려 오는 길에 시큰거리는 무릎으로 고생하신 적이 있어 늘 조심이다. 다른 사람들보다 몸무게가 많이 나가고 나이가 들어서 어쩔 수 없이 생기는 것임을 안다. 앞서서 걷는 사람들을 부러워 하긴 해도 크게 신경을 쓰진 않는다. 무디다. 스스로를 도닥이며 미안한 마음을 감추는 수밖에 없다. 아래에서 우린 다시 만나게 되는 걸 안다. 서둘러 갈 필요가 없다.
나는 운동에 재간(才幹)이 없다. 공을 가지고 하는 운동은 모두 잼뱅이다. 탁구나 테니스는 공이 작고 농구나 축구 공은 너무 크다. 아주 간혹, 월드컵 축구 열기에나 겨우 눈길이 가는 정도다. 그저께 체코에게 역전승했다고 해서 마음 편하게, 하루 지난 걸 봤다. 생방송을 보려고 잠을 설친 적은 없는 것 같다. 생긴대로, 내키는대로 좋아 하는 걸 하며 살면 되는 것 아닌가.
산행을 즐긴다. 별다른 재간이 필요없고 꾸준함만 있으면 된다. 스틱은 내 몸의 하중을 분산시켜 무릎 연골을 보호하는 가장 확실한 도구다. 하산할 때 무릎에 가해지는 충격은 체중의 3~5배에 달한다고 한다. 스틱 사용법을 익혀 건강하게 오래 산을 타는 것이 현명하다. 한 개만 쓰면 한쪽 무릎에만 하중이 쏠리므로, 꼭 양손에 하나씩 짝을 맞춰 사용한다. 가파른 내리막에선 보폭을 평소의 절반으로 줄여 엉거주춤 내려 와 볼품이 없어도 할 수 없다. 뒤에서 답답해 하는 눈치면 비켜 주는 아량이 있다. 싼 게 비지떡이라고 등산장비는 비싼 걸 골라 산다. 스틱도 배낭도 신발도 옷도 모자도 그렇다. 공자 앞에 문자 쓰고 있다.
내가 사는 이곳을 천국으로 만들겠다는 허황된 꿈은 꾸지 않는다. 늙어가는 지금, 그래도 마음만은 천국에 사는 듯 지내기로 했다. 대체로 하루 생활이 그렇다. 산행을 같이 하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산천경개를 눈요기하는 때 그렇다. 석수역에서 호암산을 타고 내려오는 길은 익숙하나 새롭다. 관악산 연주대쪽이 코앞에 보였다. 눈아래 서울 시내, 저쪽 멀리 북한산이 보였다. 수시로 물을 마셨다. 땡볕은 따가워도 총체적으론 숲그늘이었다. 팔토시를 올렸다 내렸다 했다. 그늘 적당한 곳에 둘러 앉아 가지고 온 걸 나누어 먹으면 늘 어릴 때 소풍갔던 생각이 난다. 그때보다 지금이 낫다. 이보다 더 좋은 건 내려와 코다리 안주에 막걸리로 대작하는 자리다. 천국이다. 천국에도 아파트가 있다면 로얄층이다. 허수룩한 코다리집에서 목이 말라 마신 소맥이 기가 막혔다. 말이 투박한 주인장이 우리 나이를 물어 보고 입을 딱 벌렸다. 자기 나이와 비슷할 거라 생각했는데 80대가 일고여덟, 절반이 넘는다니까, 말을 잊었다. 일금 만 오천 원의 행복을 누렸다. 소박한 여유다. 전철 안에서 단잠에 빠지는 것도 천국이다. 죽어 천국으로 가기를 소원하는 사람들은 많아도 현실에서 천국에 사는 듯이 하는 사람들은 드물다.
動則不老 (동즉불로), 움직이면 늙지 않는다.
걷고, 펴고, 움직이라. 생기를 부른다. 다 아나 행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잘 늙는 것도 실력이다.
첫댓글 역시나 글을 너무너무 잘.ㅛㅡ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