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현의 ●삼국지 인물열전(17)
촉나라의 인물들, 당양벌
장판파 전투의 영웅 "조운"
북방의 두 강자 원소와 공손찬이 불꽃 튀는 접전을 펼치고 있을 때, 원소 진영의 맹장 문추에게 쫓기던 공손찬이 정신없이 도망가다가 어느 산비탈에서 말 아래로 꼬꾸라졌다. 뒤따라오던 문추가 창을 꼬나 잡고 돌진해왔다.
문추가 그를 내리찍으려고 창을 번쩍 드는 순간, 나무덤불 속에서 한 청년이 뛰쳐나와 그 창을 막아내고 공손찬을 구해주었다. 그리고, 신기의 창술을 펼치며 문추를 쫓아냈다. 훤칠한 체격에 눈썹이 짙은, 아직 스무 살도 안 되어 보이는 동안의 미장부(美丈夫)였다. 공손찬이 물었다.
“정말 고맙소이다. 젊은이는 뉘시오?”
“저는 상산 사람으로 이름은 조운(趙雲), 자는 자룡(子龍)이라고 합니다.”
후일, 유비 진영에서 관우와 장비에 못지않은 활약을 하는 조운이 처음 삼국지에 등장하는 모습이다. 조운은 본래 원소 진영의 장수였으나, 원소가 요란한 명성만큼 주민들을 아끼고 살피는 마음이 없는 것을 보고 실망하여 북방의 또 다른 영웅 공손찬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그러나, 공손찬은 자신을 위기에서 구해준 이 젊은 장수를 요직에 기용하지 않고 후진에 배치한다. 너무 젊은데다 아직 속 마음을 알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영웅은 영웅을 알아보는 법, 그 무렵 공손찬을 도우러 왔던 유비는 조운을 한번 보고, 마치 천생배필을 만난 청춘남녀처럼 첫눈에 반했다. 조운도 유비를 한번 보고 "이 사람이야말로 내가 평생 따르고 섬겨야 할 주군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후일 공손찬이 원소에게 패망하자, 조운은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다가 다시 유비를 만나게 되고, 그때부터 유비를 그림자처럼 호위하며 끝없는 충절과 눈부신 무용을 떨치게 되는 것이다.
‘조운’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뭐니뭐니 해도 당양벌의 장판파 전투이다. 원소를 격파한 조조가 대군을 이끌고 형주로 쳐들어오자, 유비는 그를 따르는 피난민들과 함께 조조의 군마에 짓밟히며 유표의 큰 아들 유기가 있는 강하로 쫓겨가고 있었다.
그 때, 유비의 처자가 적진 속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조운은 단기(單騎)로 조조의 대군 속에 뛰어든다. 그리고 온몸이 피투성이인 채 창날이 너덜너덜해지도록 적병을 베어 넘기며 유비의 아들 ‘아두’를 구해온다. 이 때 그가 죽인 조조군의 장수만도 십여 명이었다.
언덕 위에서 이 장면을 지켜보던 조조까지도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때부터 ‘상산 조자룡’하면 장판파에서 조조의 대군 사이를 무인지경으로 휘젓고 달리던 그 눈부신 무용을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그로 인해 조자룡이라는 빛나는 이름을 후세에 알리게 되었다.
또, 유비와 정략결혼한 손권의 여동생 손 부인이 오로 돌아갈 때 몰래 아두를 데리고 떠나자, 조운은 오의 계략을 간파하고 재빨리 뒤따라가서 아두를 빼앗다시피 다시 찾아온다. 그는 후일 촉의 후주(後主)가 되는 아두를 두 번이나 위기에서 구한 것이다.
조운은 노장군 황충과 함께 조조로부터 한중을 빼앗는데도 선봉을 맡아 큰 공을 세웠다. 유비가 죽고, 제갈량이 촉주 유선에게 저 유명한 출사표를 바치고 위나라 정벌에 나섰을 때, 조운의 나이는 이미 칠십에 가까웠다. 그 때문에 제갈량은 정벌군의 진용에서 조운을 제외했는데, 이를 알게 된 조운은 불같이 노하며 군막에서 뛰어나와 따지듯 외쳤다.
“내가 비록 늙었다 하나 선제 이래 선봉을 맡지 않은 적이 없소이다. 대장부가 싸움터에서 죽는다면 그보다 더한 복이 없을 터인데, 어찌 나를 뺀단 말이오. 나를 선봉으로 써주지 않는다면 이 주춧돌에 머리를 짓찧어 죽어버리겠소!”
끝없는 노익장이요, 한없는 충절이었다. 결국 제갈량은 그에게 선봉을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때 위군에서는 조조의 부마인 하후무가 총대장이었고, 서량대장군 한덕이 용맹무쌍한 네 아들과 함께 선봉을 맡고 있었다.
조운과 맞붙은 선봉대장 한덕은 네 아들을 차례로 보냈으나, 모두 조운의 창에 찔려 죽고 마침내 그 자신마저도 조운의 창에 모가지가 떨어지고 말았다. 서전에서 적의 선봉장 5부자를 차례로 물리친 조운의 승전보에 힘을 얻은 촉군은 사기충천하여 마침내 위군을 무찌르고 총대장 하후무까지 사로잡는 개가를 올렸다.
그는 한평생 무장으로서 패배를 몰랐고, 신하로서도 진심어린 충절을 다하며 살다가 칠십이 넘어서 병사했다. 조운의 죽음을 전해들은 촉주 유선은 지난날 두 번이나 자신을 구해준 은혜를 생각하며 목놓아 울었고, 제갈량은 쓰러져 흐느끼며 이렇게 탄식했다.
“이제 촉은 기둥 하나를 잃었고, 나는 팔 하나를 잃었다.”
제갈량에게 조운은 남다른 장수였다. 관우와 장비는 초창기부터 유비와 의형제를 맺은 사이인데다, 둘 다 개성이 너무 강하여 제갈량이 다루기에는 좀 버거운 점이 있었다. 그러나, 조운과는 늦게 유비 진영에 합류했다는 공통점도 있었고, 또 조운의 성격도 무장치고는 다소 온유한 편이어서 제갈량과는 호흡이 아주 잘 맞았던 것이다. 그런 조운이 그의 곁을 떠나고 말았으니…
우리 속담의 "조자룡이 창 들고 서있는 듯하다"는 말은 "감히 접근할 수 없을 정도로 빈틈이 없다"는, 즉 완벽한 경호를 뜻하는 말로 쓰이고 있다. 조운이 중국사를 통틀어 몇 손 안에 꼽히는 창술의 대가이기 때문에 만들어진 속담이리라.
또, "조자룡 헌 칼(창) 쓰듯" 이라는 말도 자주 쓰이고 있는데, 이것은 조운이 장판파의 싸움에서 창날이 너덜너덜하도록 창을 쓰고나서, 다시 적군에게서 뺏은 칼을 휘두르며 적병을 닥치는 대로 베어 넘기던 눈부신 무용에서 나온 말이다. "아주 익숙하게 사용한다"는 뜻과 함께 "마구잡이로 휘두른다"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혼자 적진에 뛰어들어 주군의 아들을 구해올 만큼 투철한 충성심과 걸출한 무용을 갖춘 조운 자룡, 천수를 다한 후 온전한 몸으로 성도의 금병산에 묻혔다. 동료인 관우와 장비는 둘 다 참수되어 목 없는 귀신이 되고 말았지 않았는가?
생각하건대, 삼국지에 등장하는 무수한 장수들 중에서 무용, 충절 최후 등에서 조운 만큼 모든 것을 골고루 갖춘 장수는 찾아보기가 힘들다. 그는 참으로 복받은 장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