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김수한 전 국회의장
나는 그들의 요구를 뿌리치고 혈서(血書)를 써 국군에 지원했다. 전쟁이 터진 지 사흘만인 6월28일이었다. 그날 육군 제3사단 정훈부로 찾아가 입대를 지원했다. “조국이 누란의 위기에 빠졌는데 피끓는 정열이 방관을 용서치 않는다. 종군해서 싸우게 해 달라”고 했다. 그 자리에서 손가락을 깨물어 ‘멸공’이라는 혈서를 썼다.
그날 저녁 식구들과 밥을 먹는데 라디오에서 내가 혈서로 지원했다는 소식이 나왔다. 가족과 상의조차 하지 않은 터라 부모님이 화들짝 놀랐다. “참말로 그랬나?”고 물으셨던 아버지는 내 얘기를 듣고 “참 대견하다”고 하신 반면 어머니는 “왜 죽으려 하느냐, 큰일 난다”고 울면서 말리셨다.
이튿날 제3사단에서 선무(宣撫) 활동을 해달라는 연락이 왔다. 경북대 사범대 학생회장이었던 유재봉(경희대 명예교수), 경북대 의대생 3~4명과 함께 선무단을 만들었다. “백만 학도여 나가 싸우자” “펜을 총으로 바꿔 쥐고 통일역군이 되자”고 궐기를 호소했다.
- ▲ 학도병들은 단기훈련만 받고 참전해 대부분 전사했다. 1950년대 당시 학도병의 행진모습.
동부초등학교에서 합숙하면서 군사훈련을 받았다. 훈련은 변변치 않았다. 무기가 없어 M1소총 앞에 5명이 붙어서 ‘구경’하는 정도였다.
전황은 계속 악화되고 있었다. 인민군에 패해 부대를 잃은 군인들로 대구 시내는 엉망이었다. 육군본부가 내려와 대구중앙초등학교에 캠프를 차렸다. 대전과 김천이 적의 수중에 넘어가고 이제 낙동강이 최후의 보루가 됐다. 팔공산 쪽에서 대구 시내로 포탄이 마구 날아왔다.
입대 후 1주일쯤 지나, 비상이 걸려 전원이 집합했다. 대위 한 사람이 나와 “포항 근처 안강·기계 쪽의 전황이 급해 결사대 50명이 필요하다”며 “지원자는 나오라”고 했다. 뛰어가서 줄을 섰지만 이미 인원이 차서 끼지 못했다. 동작이 빠른 중학생들을 주로 앞에 세우고 전선에 투입된 그들은 거의 살아서 돌아오지 못했다.
7월28일, 또 한번 비상이 걸렸다. 장교가 학도병 20명을 골라냈다. 이번엔 친구 이상발, 선무단 활동을 함께한 유재봉, 그리고 나도 끼었다. 나머지 200여명은 장교가 인솔해 전선으로 간 뒤 살아서 돌아오지 못했다.
남은 우리 20명은 바주카포(대전차 로켓포) 훈련을 받기 시작했다. 닷새간 포탄 장전, 분해 등을 배운 뒤 정일권 참모총장과 고급 장교들 앞에서 실탄 사격을 했다. 이튿날 나와 유재봉 등 3명만 남고 모두 전선으로 나갔다. 17명의 동료는 낙동강 전선에 투입된 지 며칠만에 거의 전사했다.
남은 셋은 바주카포 훈련조교가 됐다. 결과적으로 훈련조교가 된 것이 내가 살아남은 이유다. 이것을 기적이라고 보기 때문에, 먼저 간 영령들에겐 미안하고 감사할 뿐이다. 학도병 산하 3개 중대 중에서 나는 2중대장을 맡았다.
1979년 전두환 대통령이 보안사령관이 됐을 무렵, 나를 초청해 처음 만났다. 10대 국회의원 시절로 기억한다. 전 사령관이 내게 “저를 모르시겠지만 저는 의원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고 했다. 대구공고에 다니던 전두환과 경북고 재학 중이던 노태우 두 친구가 나이를 올려 학병으로 지원했고, 내 휘하 2중대원이었다는 것이다. 한때나마 두 대통령을 부하로 거느렸던 셈이다. 두 사람은 나중 포병학교가 있던 경북고녀(현 경북여고)로 가서 훈련을 받고, 이어 육군사관학교에 지원해 11기생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