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그 류현진이 10월 9일 광주구장에서 열린 KIA와의 준플레이오프 2차전 6회말 2사 만루에서 이현곤의 만루홈런 한방에 무너졌다. 5실점은 올해 원정 최다 실점. 2차전의 승리투수는 동갑내기인 강속구 투수 한기주였다. 그 한기주는 1차전에서 보크 실수 하나가 빌미가 돼 패전 투수가 됐다. 지난해 청소년대표 동기생인 신인들이 포스트시즌 데뷔전에서 나란히 쓴맛을 봤다.
‘신인 초대장’ 수는 적다
류현진과 한기주는 한국프로야구 마운드를 대표할 투수들이다. 패전의 기억은 날려 버려라. 신인으로 포스트시즌 무대에 서는 것 자체가 영광이다.
프로야구 24년 동안 포스트시즌에서 활약했던 신인 투수는 모두 몇 명이나 될까. ‘활약’의 기준을 ‘6이닝 이상 또는 3경기 이상 등판’으로 삼아보자. 신인왕 규정(입단 뒤 5시즌, 30이닝 이하 출전선수)을 적용하더라도 고작 53명뿐이다. ‘포스트시즌 진출 청부업자’격인 외국인선수들을 제외하면 35명으로 줄어든다.
프로야구 초창기를 대표하는 투수인 선동열, 최동원, 김시진도 신인 때에는 가을 잔치 마운드를 밟지 못했다. 1986년 신인 최다승 기록(18승)을 세운 김건우는 데뷔 뒤 11년이 지난 1997년에야 비로소 포스트시즌 마운드 위에 설 수 있었다. 1987년의 교통사고, 1989년 재기와 타자 전향, 1993년 은퇴, 1997년 선수 복귀를 거친 험난한 여정이었다. 1이닝 1안타 볼넷 2개로 1실점한 이해 한국시리즈는 지금도 MBC 청룡과 LG팬들을 가슴 저리게 할 김건우의 고별무대였다.
프로 원년인 1982년은 모두가 신인이었던 해. 포스트시즌이 신인들에게 결코 쉬운 무대가 아니었다는 점은 이듬해 바로 나타났다. 1983년 한국시리즈에서 MBC 청룡 신인으로 유일하게 활약한 선수는 인하대를 졸업한 오영일. 국가대표 출신에 정규시즌 10승을 따낸 오영일은 3경기 17이닝에서 안타 23개를 얻어맞고 녹다운됐다. 반면 우승팀 해태에서는 이해 데뷔한 투수가 혼자서 2승을 올리며 맹활약했다. 그러나 그는 일본프로야구에서 11년을 뛴 35살의 재일동포 주동식이었다. 1984년에는 신인으로 포스트시즌에서 3경기 또는 6이닝 이상 투구한 투수가 아무도 없었고, 1985년에는 삼성의 전후기 통합 우승으로 유일한 포스트시즌 경기였던 한국시리즈가 무산됐다. ‘신인투수의 활약’은 2년 동안 대가 끊겼다.
처음으로 포스트시즌 마운드를 지배한 신인 투수가 스트라이크존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는 왼손 강속구 투수였다는 점은 다소 아이러니하다. 1986년 ‘가을 까치’로 화려하게 등장한 해태의 김정수. 그때 삼성 타자들은 “강속구보다 어디로 날아올지 모르는 불안한 컨트롤이 더 무서웠다”고 했다. 김정수가 한국시리즈에서 거둔 성적은 3승무패 방어율 2.45. 덤으로 14⅔이닝에서 4사구 13개였다. 그로부터 17년 뒤인 2003년 은퇴할 무렵의 김정수는 기교파 투수로 변해 있었다.
1988년 빙그레 이글스는 창단 3년 만에 진출한 한국시리즈에서 해태에 2승4패로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김영덕 감독이 신인 한용덕에게 패전 처리보다 조금 더 가치있는 임무를 줬다면 결과는 달랐을지도 모른다. 한용덕은 3경기 5⅔이닝 동안 19타자를 맞아 안타를 하나도 내주지 않는 쾌투를 했다. 아래 <역대 신인 투수 포스트시즌 성적>표의 신인 투수 53명 가운데 피안타율 0.000은 한용덕이 유일하다.
![]() |
![]() |
가을 낙엽처럼 지다
가을이 저물면 겨울. 그리고 다시 야구가 시작되는 이듬해 봄이 온다. 가을 잔치는 화려하지만 다음 시즌에도 야구 경기는 열린다. 그래서 포스트시즌의 전설이 비극으로 끝나버린 신인 투수들의 이름은 처연함을 느끼게 한다.
포스트시즌 신인 최다승 기록은 1992년의 롯데 염종석이 갖고 있다. 그 해 정규시즌은 1위 빙그레, 2위 해태, 3위 롯데, 4위 삼성으로 끝났다. 염종석은 준플레이오프에서 한국시리즈까지 6경기에 등판해 4승 무패 1세이브를 따내는 놀라운 활약을 했다. 삼성과의 준플레이오프 1차전 9이닝 5안타 완봉승, 해태와의 플레이오프 1차전 3이닝 2안타 무실점 세이브, 4차전 9이닝 6안타 완봉승. 19살 신인 염종석은 가을 무대를 처음 밟자마자 21이닝 연속 무실점 기록을 세웠다. 야구계 안팎의 사람들은 그 해 부상으로 11경기에만 등판한 선동열보다 낫다고들 했다.
그 해는 염종석의 처음이자 마지막 전성기였다. 17승9패 방어율 2.33. 그 뒤 13시즌 동안 염종석은 한 번도 5할을 넘어서는 승률을 올리지 못했다. 두자리 승수도 이듬해가 마지막. 지금 염종석은 무심한 듯 “승패 기록에 미련을 끊은 지 오래 됐다”고 말하는 고참 선수다. 그의 대명사가 된 부상과 수술 그리고 재활이 남긴 상흔이다. 염종석은 1992년 정규시즌과 포스트시즌을 더해 무려 235⅓이닝을 던졌다. 류현진도 올해 201⅔이닝을 던졌다. 그래서 불안하다.
바로 다음해인 1993년. 염종석의 신인 포스트시즌 최다 이닝(30⅔이닝)과 타이 기록이 나왔다. 23살 대졸 신인 삼성 박충식이 주인공. 4시간 30분을 넘긴 한국시리즈 3차전 연장 15회. 박충식은 해태의 선동열과 송유석을 상대로 홀로 181구를 던졌다. 포스트시즌 1경기 최다 투구 기록이자 가을 잔치에서 다시는 나오지 말아야 할 혹사 신기록이다. 박충식은 1997년부터 어깨, 허리, 팔꿈치에 잇따라 부상을 겪으며 쇠락해 갔다.
이 3차전이 박충식이 조로한 원인이었다고 단정짓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당시 삼성 투수코치였던 권영호 영남대 감독은 “박충식은 1994년에도 잘 던졌다. 원래 체력이 약한 선수였는데 1995~1996년 방위 복무를 하며 연습량이 부족한 게 부상으로 이어졌다”고 말한다.
많은 투구수가 반드시 부상을 불러 온다는 주장에 이견을 나타내는 야구인들은 여럿이다. 그러나 당시 투수난에 시달리던 삼성이 ‘연습량이 부족했던’ 박충식에게 무리한 짐을 지웠던 것도 사실이다. 박충식은 연습 부족과 서서히 찾아 오는 이상을 겪으면서도 선발, 마무리를 가리지 않고 기용됐다. 무리한 짐의 결과는 1989년 신인왕이자 19승 투수 박정현의 예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는 포스트시즌에서 혹사당한 신인이라는 점에서는 염종석과 박충식의 선배다.
1989년 준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태평양 선발투수인 20살 박정현은 14이닝 완투승을 따냈다. 그리고 사흘 뒤인 3차전에서 다시 구원 등판해 5⅓이닝을 던졌다. 태평양은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지만 박정현의 성수 경력에서 유일했던 포스트시즌은 그 경기로 끝이었다. 박정현은 경기를 끝내지 못한 채 바로 병원으로 실려가 허리 디스크 판정을 받았다. 잠수함투수에게 허리 부상은 치명적이다. 박정현이 25~31살 사이 7년 동안 거둔 승수는 10승뿐이다.
신인은 럭비공과 같다?
가을 잔치가 우울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포스트시즌의 깜짝 활약으로 대투수로 성장한 신인들도 있었다. 1993년 LG는 준플레이오프에서 OB 베어스를 꺾은 뒤 플레이오프에서 김성래, 양준혁 쌍포가 버티는 삼성을 상대했다.
![]() |
![]() |
당시 LG의 선발 투수 서열은 정삼흠, 김태원, 김기범, 그리고 고려대를 졸업한 신인 왼손투수 이상훈 순이었다. 이광환 감독은 2패로 몰린 3차전에서 15승의 에이스 정삼흠 대신 이상훈을 기용했다. ‘컨트롤이 불안하다’는 우려 속에 등판한 이상훈은 7⅔이닝을 1안타 무실점으로 막고 승리투수가 됐다. LG는 결국 삼성에 2승3패로 졌지만 이상훈은 이듬해 18승, 1995년 20승을 따내며 LG의 황금기를 열었다.
울 라이벌 OB는 1995년 한국시리즈에서 롯데와 7차전까지 가는 접전을 벌였다. 에이스 김상진이 호투하면서도 2패하는 불운 속에 OB는 2승3패로 몰렸다. 벼랑 끝에 선 김인식감독이 6차전에서 꺼내 든 선발투수 카드는 신인 진필중. 정규시즌 선발 등판이 9번뿐이던 진필중은 9이닝 3안타 완투승으로 OB 역전 우승의 일등공신이 됐다. 진필중은 1998년부터 마무리로 변신해 2000년 전인미답의 42세이브를 기록했다.
이 시리즈에서 롯데의 김경환도 2승을 따내며 주위를 놀라게 했다. 국가대표 출신 김경환은 1993년 입단 뒤 오른쪽 어깨 부상으로 2년을 쉰 뒤에야 데뷔전을 치렀다. 김경환은 이 호투로 재기에 성공하는 듯 했지만 부상이 재발해 두 번 다시 1군 마운드에 서지 못하고 1998년 은퇴했다.
포스트시즌의 쓴 경험이 보약이 된 투수들도 있다. ‘200승 투수’ 송진우는 빙그레 신인이던 1989년 한국시리즈에서 3이닝 7안타 5실점으로 뭇매를 맞았다. 한국시리즈 상대인 해태에는 데뷔 동기 조계현이 있었다. 조계현은 태평양과의 플레이오프 2차전 4회에 구원 등판해 6이닝 1안타 무실점으로 신인답지 않게 활약했다. 김응룡 감독은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선동열을 등판시키고도 지자 2차전 선발을 조계현에게 맡겼다. 그러나 조계현은 아웃카운트 두 개만 잡은 채 7안타로 5실점해 결국 1회를 마치지도 못하고 마운드에서 쫓겨났다.
1998년 마이클 앤더슨(LG)과 호세 파라(삼성)을 시작으로 외국인선수들도 가을 잔치에 선을 보이기 시작했다. 포스트시즌 데뷔 무대에서 최고의 활약과 최악의 난조를 보인 두 투수의 이름은 흥미롭다. 연봉 서열과 성적이 거꾸로이기 때문이다.
롯데는 1999년 시즌 도중 연봉 4만 달러에 큰 기대없이 도미니카공화국 출신 에밀리아노 기론을 데려왔다. 기론은 이 해 포스트 시즌에서 1승에 그쳤지만 29⅓이닝을 방어율 0.92로 막는 마술같은 투구를 했다. 한국 데뷔 첫해 포스트시즌을 치른 외국인투수 가운데 최다이닝 및 최저 방어율 그리고 최다 탈삼진 기록(27개)을 세웠다.
2001년 해태에서 김응룡 감독을 영입한 삼성은 숙원인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룰 꿈에 부풀어 있었다. 시즌 중에 계약한 요미우리 자이언츠 에이스 출신 발비노 갈베스가 수준이 다른 투구를 선보이자 우승은 기정사실로 보였다. 발표된 연봉 액수는 한국야구위원회(KBO)가 정한 상한선인 20만 달러였지만 그 액수를 믿는 사람은 드물었다. 정작 한국시리즈 2경기에서 갈베스의 방어율은 15.00이었다. 53명 가운데 최악의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