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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야구팬이어서 가끔 선수들의 실수를 보면 안타깝고 야유를 보낼 때도 있습니다. 어느 날 현진이가 저에게 그러더군요. “형, 내가 홈런을 맞고 싶어서 맞는 거 같아?” 그때 깨달았습니다. 누구보다 타자를 삼진으로 돌려 세우고 싶고, 홈런이나 안타를 맞기 싫어하는 사람은 아주 당연히, 바로 투수라는 사실을요. 그때부터 상황에 도움이 안 되거나 잔소리 같은 이야기, 오히려 집중에 방해가 되는 말들은 통역을 하지 않았습니다. (p.57) | ||
제가 봐도 ‘외질’과 닮았더라고요
마틴 김은 스스로 류현진 선수의 그림자로 머물기를 자처해 왔다. 어떤 상황에서도 류현진 선수를 우선적으로 배려하면서, 자신이 전면에 나서는 것을 경계했다. 류현진이라는 빛이 더 밝게 빛날 수 있도록 크고 작은 희생도 기꺼이 감내했다. 한식과 고기를 좋아하는 류현진 선수의 입맛에 맞춰서 함께 식사하고, 원정 경기를 가면 가장 먼저 한국식당을 알아보는 일은 익숙해진지 오래다. 사생활은 꿈도 못 꿀 만큼, 그야말로 그림자처럼 류현진 선수의 곁을 지켰다. 오전에는 마케터로, 경기 중에는 통역사로 활약했다. 원정 경기를 갔을 때는 류현진 선수의 가족을 대신해 아침부터 저녁까지 함께했다. 하지만 때때로 그는 류현진 선수의 귀와 입이 되어주기를 거부했다. 말이 통하지 않더라도 류현진 선수가 직접 동료들이나 관계자들과 몸으로 부딪히며 인간관계를 쌓아야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빠른 시간 내에 팀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함이었다.
마틴 김이 가진 깊은 배려심과 뛰어난 커뮤니케이션 능력은 그의 성장과정에서 형성된 것이다. 그는 아르헨티나로 이민 온 부모님 사이에서 태어나 열 살이 되던 해부터 미국에서 성장했다. 집에서는 반드시 한국어를 사용하게 할 만큼 ‘한국인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한 부모님 덕분에 그는 한국과 남미, 미국의 문화를 모두 경험하며 자랐다. 덕분에 그는 미국으로 이주한 뒤에도 다양한 인종의 친구들에게 사랑받으며 학창시절을 보냈지만 이따금씩 차별당하는 동양인 친구들을 보며 ‘왜 나와 다르게 저 친구들은 저렇게 힘들어야 하나?’라는 고민을 품게 됐다. 그때부터 그는 서로 다른 인종의 친구들 사이에서 다리 역할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한 이유로 대학에 진학한 뒤에는 ‘국제 마케팅’을 전공으로 선택했다. 졸업 후에는 한국과 미국의 중간 다리 역할을 하고 싶다는 바람으로 한국 회사를 미국에, 또는 미국 회사를 한국에 알리는 일을 하기도 했다. 한국인 이민자가 많은 LA를 연고지로 하는 다저스 팀에 입사하게 된 것도 이러한 경력과 무관하지 않다. 게다가 그는 대학 입학 전까지 야구선수로 활동했을 만큼 누구보다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이렇듯 그는 자신의 마음이 이끄는 길을 따라 다저스로 향했고, 운명처럼 류현진 선수와 만났다.
야구 팬으로서 메이저리그 구단에 입사하게 된다는 건 꿈같은 일일 텐데요. 어땠나요?
처음 다저스라는 팀과 인연을 맺게 된 건 제가 LA의 한인 커뮤니티와 일을 할 때였어요. 5년 전쯤이었는데 그때 컨설팅 일을 병행하고 있었어요. 다저스 측에서 연락이 왔는데, 마이너리그에 있는 2명의 한인 선수를 위해 통역을 해줄 수 있냐고 물어보더라고요. 처음에 제의를 받았을 때 너무 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미국의 프로페셔널 스포츠라는 분야는 들어가기가 힘들기 때문에 연봉이 굉장히 적어요. 공짜로 일을 할 사람도 많으니까요. 그래서 연봉이 너무 적기도 했고, 제가 쌓아온 커리어가 퇴보하는 느낌이어서 죄송하지만 할 수 없을 것 같다고 말씀드렸죠. 그렇다고 인연이 끝난 건 아니었어요. 그 뒤에도 일을 도와주고 아이디어들을 제시하기도 하면서 계속 관계를 이어갔죠. 결국 류현진가 다저스 팀에 들어오기 2년 전에 입사하게 됐죠. 제가 너무 축복 받은 사람 같아요. 타이밍이 잘 맞아서 대한민국에서 아주 큰 스타와 같이 일을 하게 됐고, 덕분에 별명까지 생겼잖아요. 참 감사하게 생각해요.
한국의 팬들이 붙여준 별명을 알고 있나요?
외질 닮았다고 얘기하시더라고요. 제가 봤을 때도 사람들이 왜 닮았다고 하는지 알겠던데요? 눈이 처진 게 닮았잖아요. 그런데 정말 재밌는 것 같아요(웃음). 별명도 붙여주시고, 정말 감사하죠.
『빛을 그리는 그림자』 는 류현진 선수와의 인연으로 탄생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LA 다저스에 입사하게 된 계기도 이전부터 이어온 인연 때문이었고요.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 있어서 가지고 있는 철칙이나 신념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어릴 때부터 주변에 사람들이 많았어요. 고등학교 때도 백인들이 많은 동네에서 자랐는데, 저는 차별 받지 않고 사랑 받으면서 지냈어요. 그런데 어려움을 겪는 동양인 친구들을 보면서 너무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때부터 사람, 그리고 관계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갖게 됐어요. 나를 아끼고 사랑해주는 사람이 주변에 있다는 게 가장 큰 선물이라는 걸 배웠고요. 사람에게 받을 수 있는 사랑과 응원과 도움은 무엇보다 제일 강한 것 같아요.
사람을 만날 때는 그 사람을 제일 편안하게 해줄 수 있도록 노력을 많이 해요. 편할 때 진심이 나오기 마련이잖아요. 진짜로 하고 싶은 말과 행동은 편할 때 나오는 거죠. 그래서 저는 일에서도 그렇고, 직장이나 집에서도, 친구들 사이에서도, 항상 사람들을 편하게 해주고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덕분에 류현진 선수와도 친하게 지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제가 현진이와 나이 차이도 나고, 한국의 문화와 언어도 완벽하게 알지는 못하지만 정말 빠른 속도로 친해졌거든요.
항상 류현진 선수의 뒤에서 배려해주는 모습이 인상 깊었는데요. 상대방을 편안하게 해주고 싶다고 생각했던 건가요?
야구장 안에 있을 때는 일이잖아요. 저는 류현진 선수의 통역이고요. 그러면 항상 뒤에 있어야 되는 게 맞는 거죠. 그냥 일을 열심히 한 거예요. 한 번도 제가 현진이 앞에 선 적은 없어요. 왜냐하면 선수가 있기에 제가 있는 거고, 선수가 있기 때문에 우리 팀이 있는 거니까요. 초기에 그 사실을 제대로 이해한 거죠. 아무리 저보다 어려도 주인공은 류현진 선수예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그런 모습이 나온 것 같고요. 제가 특별히 노력한 건 아니에요. 또 야구장 밖에 있을 때는 현진이가 참 잘해요. 그래서 저는 진짜로 현진이를 동생처럼 보기 시작했어요. 지금까지 친하게, 편안하게 지내는 이유인 것 같아요.
류현진 선수와 윤석민 선수의 경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류현진 선수의 통역을 담당하면서, 커뮤니케이션에 대해 새롭게 생각하게 된 점이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마케팅을 전공하면서 PR 공부를 했는데요. 항상 강조하는 포인트 중 하나가 사람의 대화에서 언어가 차지하는 비중은 50% 밖에 안 된다는 사실이었어요. 그걸 알고는 있었지만 지난 1년 동안 제대로 느낀 것 같아요. 제가 혼자서 메신저가 되면 두 사람의 커뮤니케이션은 없었다고 보면 돼요. 진짜 마주보고 눈빛으로 대화해야 두 사람의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진 거잖아요. 저는 커뮤니케이션보다 커넥션(connection, 연결)이라는 말을 배운 것 같아요. 마주보고 얘기를 해야 커넥션이 생기죠. 그냥 말로만 통하면 종이에 써서 주고받는 거랑 똑같잖아요.
미국 국적을 갖고 있지만 한국에 대한 사랑이 남다른 것 같습니다. 지난 시즌에 추신수 선수와 류현진 선수의 경기가 있는 날에는 직접 코리아데이 행사 기획하셨죠? 싸이와 소녀시대도 섭외하고, 태권도 시범 무대도 마련했고요. 현재 기획 중인 또 다른 이벤트는 없나요?
저는 한국에서 살았던 적도 없고 서류상으로 한국 사람도 아니에요. 하지만 사춘기 시절에 ‘내가 누구인가’ 고민하면서 깨달은 게 있어요. 내가 미국에 살면서 아무리 노력을 해도 절대로 미국 사람은 안 된다는 사실이었어요. 저희 부모님은 항상 제 몸 속에 한국의 피가 흐른다는 이야기를 해주셨죠. 그렇게 배웠기 때문에 저는 코리아데이와 같은 이벤트를 통해서 한국 문화나 한국 사람들에게 빛을 비출 수 있는 자리들을 만들 수 있다는 게, 그런 기회가 주어졌다는 사실을 너무 감사하게 생각해요. 안 그래도 내년 시즌의 코리아데이 날짜를 정하는 문제로 지난 주에 미팅이 있었는데요, 지금도 고민 중이에요. 우선은 추신수 선수와 윤석민 선수의 계약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만약 윤석민 선수가 MLB에 진출하게 된다면, 당연히 윤석민 선수와 류현진 선수가 같은 야구장에 있을 때 코리아데이 행사를 진행하고 싶고요.
마케팅 전문가로서 한국과 관련해서 이루고 싶은 목표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일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다리 역할을 많이 하는 것 같아요. 미국에서 한국 문화를 알리거나, 아니면 미국 사람으로서 한국이라는 나라를 도와줄 수 있는 다리 역할을 많이 한 것 같은데요. 목적이 있다면 그 다리가 아주 단단하고 길고 튼튼한 다리가 됐으면 좋겠어요. 지금은 야구 시장에서 일을 하고 있지만 한 번은 조금 더 큰 물에서 활약하고 싶은 생각도 있어요. 류현진 선수만큼 큰 스타를 다시 만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요. 제가 갖고 있는 아주 큰 꿈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거예요.
한국의 야구 팬들은 다음 시즌에도 마틴 김이 류현진 선수와 함께해 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빛을 그리는 그림자』 에서는 “류현진 선수가 팀을 옮기게 된다면 함께 가겠다”고 밝히셨는데요. 내년에도 류현진 선수의 입과 귀가 되어주기로 한 건가요?
통역으로 같이 가겠다는 의미로 한 말은 아니었어요. 제가 다저스에서 일을 하면서 아주 특이한 일들을 많이 하잖아요. 한국 선수가 입단하기 전부터 한국의 문화나 업체들과 연계해서 일을 해왔어요. 만약에 류현진 선수가 다른 팀으로 간다면 어느 팀이든 제가 같이 가서 똑같은 일(마케팅)을 할 수 있다는 자신이 있어요. 그리고 누군가 현진이 옆에 있어주는 게 도움이 될 것 같아서 한 이야기였습니다. 내년 시즌 통역에 대한 부분은 말씀드리기가 아주 민감한데요. 일단 구단 측에서는 저를 통역사보다는 마케터로 데리고 있고 싶어 해요. ‘너는 프론트에서 돈을 벌어주는 게 우리한테 더 좋아’ 라고 얘기해요. 왜냐하면 제가 지난해에 자리를 비워 둠으로써 놓친 기회들이 많거든요.
마틴 김은 『빛을 그리는 그림자』 를 통해 독자들이 영감을 얻기를 소망한다고 밝혔다. 두 남자의 찬란하고도 치열했던 MLB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얻을 수 있는 영감이란 어떤 것일까. 마틴 김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만약 몇 년 전에 누군가가 저에게 이렇게 말했다면, 제가 한국이 낳은 슈퍼스타 투수의 통역을 맡아 LA 다저스 경기를 지켜본 경험에 대해 2013년 연말에 책을 쓸 것이라고 말했다면, 저는 아마 웃기는 소리라고 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인생을 살다보면 놀라운 일들과 기회가 실로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많은 사람들에게 용기를 북돋아주는 이야기입니다. (『빛을 그리는 그림자』 머리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