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2. 25. 성탄절예배설교
누가복음 2장 8~14절
그리스도는 평화
■ 얼마 전 어느 강의실에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전쟁에 대한 의견을 나눈 적이 있었습니다. 의견을 나누는 중에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우리는 누구 편을 드는 것이 성경적일까요?” 이 질문에 한 학생이 손을 버쩍 들고는 당당하게 외쳤습니다. “이스라엘입니다!” 이유를 묻자, “우리 기독교와 같은 편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나라 아닙니까?”라고 자신 있게 대답했습니다.
혹시 이 대답을 들은 저의 얼굴 표정이 그려지십니까? 여러분은 무엇이 성경적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같은 편이기 때문에 성경적인가요, 성경적이기 때문에 성경적인가요? 후자입니다. 어떤 행위든, 어떤 말이든, 성경적이라는 형용사를 붙이려면, 성경적 행위여야 하고, 성경적 말이어야 합니다. 너무 당연한 말이어서 말장난 같다고요? 그렇게 느끼실 수도 있겠군요.
그러나 제 설명은 너무도 당연한데 너무도 오용되는 현실입니다. 성경적이지 않은 것들이 성경적으로 둔갑하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모든 판단의 절대 기준이 되는 성경적 개념을 나누려고 합니다. 특별히 오늘은 성탄절이고 하니 이에 적합한 성경적 개념을 나누겠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는 평화>라는 개념입니다.
■ <평화>는 ‘평온하고 화목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조용하고 평온하며, 서로 뜻이 맞고 온화한 상태가 평화입니다. 참으로 살만한 상태이자, 살고 싶은 상태입니다.
하지만 평화는 좀처럼 오지 않을뿐더러 오더라도 길지가 않습니다. 평화를 얻기 위해서는 긴 시간의 수고가 소용되는 데 비해, 평화가 유지되는 시간은 허무할 정도로 짧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대부분이 평화를 원하나,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욕심과 욕망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평화는 이상이고, 현실은 폭력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현실은 최근에 나타난 현상이 아닙니다. 인간의 타락 시점부터 나타난 현상입니다. 이유가 분명합니다. 인간의 타락이 드러낸 것이 죄인데, 죄는 분열의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죄의 속성은 분열입니다. 갈라지게 하고, 조각을 내고, 상대를 없애는 것이 분열입니다.
이러한 분열을 당연시하는 현실이니, 평화는 이상으로 밀려나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그렇기에 평화는 인류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가치이고 진리입니다. 죄 이전의 상태가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 천사가 전한 메시지가 <평화>였습니다. 14절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천사의 메시지가 의미하는 바는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탄생을 통해 죄 이전의 상태인 평화로의 회복을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소원은 분명합니다. 어느 누구도 해하지 않고, 어느 상대에게도 경쟁을 느끼지 않고, 어느 것에도 욕심을 갖지 않는 그런 세상의 평화입니다. 누구도 무섭지 않고, 무슨 행동이든 다 선한 행동이고, 모두가 서로를 존경하는 그런 세상의 평화입니다.
참으로 인간이 죄짓기 이전만 해도 세상은 이런 평화였습니다. 그런데 이 복된 평화가 깨지고 세상은 엔샬롬, 부정의의 세상이 되었습니다. 부정의란, 강자와 약자, 있는 자와 없는 자, 빼앗는 자와 빼앗긴 자로 사람을 구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당연히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계급을 나누고, 지배와 복종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 부정의의 전형입니다.
결국 이러한 엔샬롬, 부정의의 총합이 크고 작은 ‘전쟁’이고, 다양한 ‘식민 지배’입니다. 그렇습니다. 전쟁과 식민 지배가 하나님이 만드신 이 땅을 훼파(毁破)하고 훼방(毁謗)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막아야 하나님이 천사를 통해 소원하신 평화-샬롬의 세상이 오는 것입니다.
■ 그렇다면 이 과제를 어떻게 풀 수 있을까요? 혹시 가만히 있으면 하나님이 알아서 이런 세상을 만드실 것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이런 경우에 쓰라고 만든 말이 ‘오 마이 갓!’입니다. 하나님은 평화가 가치이고 진리라는 사실을 선언하시고, 그 선언을 이행하고 만드는 이로 우리를 택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비전을 이행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므로 평화-샬롬의 세상을 만드는 과제는 우리에게 부여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이 평화를 위해 사람이 되신 것은 맞지만, 예수님은 평화이시지 평화를 만드는 것은 우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평화를 어떻게 만드는지 정리해 가야 합니다. 이것이 성경적인 태도입니다.
그렇다면 평화를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요? 반드시 예수님을 모범으로 삼아야 합니다. 당연한 말이죠? 그런데 한국교회는 이데올로기를 따르고 있습니다. 특히 폭력의 이데올로기입니다. 힘의 정의를 신앙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래서 큰 것, 많은 것에 부흥의 의미를 부여합니다. 그러니 평화도 전쟁을 통한 평화를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얼마나 비성경적인지는 단 하나의 사실로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폭력을 반대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잡으러 온 병사 중 한 명의 귀를 칼로 잘랐을 때,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라며 호되게 야단치셨습니다. 그리고 칼에 베인 귀를 다시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삶에서 약자를 괴롭히시거나 무시하시는 행동이나 말, 권력에 아부하시거나 칭찬하시는 행동이나 말을 결코 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부정의의 상황에 분노하심만을 볼 수 있습니다. 권력의 폭력과 권력의 식민 지배에 분노하심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힘의 논리, 힘에 의한 정의, 힘에 의한 평화는 틀렸습니다. 평화는 평화로만 평화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평화의 모범은 비폭력적 평화입니다. 혹시 성전에서 채찍을 휘두르신 사건을 두고 폭력을 사용하셨다고 생각하시나요? 혹시 바리새인들을 두고 “독사의 자식”이니 “회칠한 무덤 같은 놈들”이라고 야단치신 것을 두고 언어폭력을 사용하신 것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예수님은 신체를 향해 채찍을 휘두르지 않으셨습니다. 물건을 진열한 매대를 내리치시고 장사치들을 내쫓으신 것입니다. 욕을 하신 것이 아니라 거룩한 분노를 표출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평화는 세상이 추구하는 평화와 등치시켜서는 안 됩니다. 힘으로 상대를 잠잠하게 하는 평화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평화는 무정부적 평화입니다. 권력을 인정하지 않는 평화입니다. 하나님 외에는 그 어떤 힘도 용인하지 않는 무권력적 평화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의 평화는 ‘평화로만 평화’입니다.
■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 편을 드는 것이 성경적일까요?” 이스라엘인가요, 팔레스타인인가요? 우리는 폭력을 사용하는 한 누구의 편도 들어서는 안 됩니다. 폭력을 사용하는 한, 이스라엘도, 팔레스타인도 인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강한 힘으로 힘없는 이들을 괴롭히는 것에 대해서는 인정할 수 없습니다. 소위 우리 편이라도 용납해서는 안 됩니다.
이스라엘이 그동안 팔레스타인에 보인 태도는 비인간적 폭력이었습니다. 팔레스타인에 담장을 쳐 외부와 고립시킨 상태에서, 물과 전기와 기름 공급을 이스라엘을 통해서만 공급했습니다. 이를 식민 통치의 수단으로 사용했습니다. 말을 잘 들으면 잘 공급해 주고, 말을 안 들으면 공급을 끊고 하는 식으로 식민 통치를 하였습니다. 과연 이것이 성경적일까요? 과연 이런 이스라엘이 우리 편이 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은 누구든 존중받아야 합니다. 이는 요한복음 3장 16절을 통해 명확히 하신 바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는 이 말씀 하나로 모든 폭력의 논리를 종식시켜야 합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은 누구라도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함부로 대하는 것은 폭력입니다. 평화는 평화로만 평화입니다.
■ 성탄절인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그리스도는 평화’입니다. 그리스도의 평화는 모든 사람, 모든 생명이 존중받는 평화입니다. 힘/폭력을 결코 용인하지 않는 평화입니다. 힘/폭력을 쓰는 자는 누구든, 심지어 우리 편이어도 용인하지 않는 평화입니다.
그리스도의 평화는 평화로만 평화입니다. 바라기는 이 메시지를 온 몸으로 살겠다고 결심하는 성탄절이길 소망합니다. 이 메시지를 들은 목자들처럼 온 세상에 이 메시지를 실천하는 우리의 삶이길 소망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