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의 자취 서린 고을
임병식 rbs1144@daum.net
사람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내몰릴 때 고통을 받은 일도 잊지 못하지만, 살길을 찾아 다시 일어서는 용기와 계기가 된 곳도 결코 잊지 못한다. 충무공 이순신장군을 생각할 때, 그러한 고장이 바로 보성이 아닐까.
명량대첩을 거두는데 결정적인 보급기지가 되어주었을 뿐 아니라 수군사수의 결단을 내리게 한 곳도 역시 보성이기 때문이다. 어명은 얼마나 지엄한가. 더구나 전시에 임금의 명에 토를 다는 것은 곧바로 죽는 일이다. 그렇잖아도 장군은 부산으로 상륙하는 가토를 치라는 어명을 어겼다는 이유로 의금부로 끌려와 고신을 당한 끝에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왔다.
그리했는데도 장군은 선전관 박천봉이 가지고온 교서를 받고서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 그날이 1597년 8월 15일. 내용인즉슨 수군을 폐하고 육군의 권율장군 휘하로 들어가 싸우라는 것이었다. 이에 장군은 결연히 장계를 올린다.
“今臣戰船 尙有十二, 出死力拒戰則 猶可爲也”
즉, '신에게는 12척이 있으나, 사력을 다해 싸워야만 오히려 막을 수 있습니다.' 라는 것이었다. 이 장계는 열선루(列仙樓)에서 작성되었다. 당시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그곳에서 ‘한산도가’를 읊었다는 말도 있지만, 그게 어디서 지어졌건 중요할까. 답답한 심회를 담아 결의를 표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런 뜻에서 열선루는 나중 명량대첩이 있게 한 결의 다짐의 장소로서 의미를 갖는다.
장군은 모함을 받고 한양으로 압송된 후 정탁대감의 간곡한 신구차(伸救箚)로 풀려났다. 그렇지만 무죄방면은 아니었다. 죄인의 신분으로 겨우 목숨만 살았을 뿐 백의종군의 명이 내려졌다.
그런 까닭으로 중도에 모친상을 당하고도 겨우 시신만 살펴보았을 뿐, 손수 장례도 치르지 못하였다. 그런 상황에서 그나마 여수 본영에서 관을 보내오고 부인이 아산에 머물고 있어서 걱정을 덜었다.
죄인 된 몸으로 관아에도 들를 수 없었고, 시중을 들 부하도 없었다. 장군은 합천 초계에 내려와 도원수 권율장군을 만났다. 그러고 나서 현황파악을 위해 지역을 순회 중 7월 18일, 원균이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충청수사 최호와 함께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장군은 눈이 헤질 정도로 통곡했다. 어떻게 만들어진 수군이며 어떻게 조련한 군대인가. 장군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나라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이며 백성들의 안위는 어떻게 살필 것인가. 대부분의 병력과 전선을 소실당해 암담할 뿐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8월 3일, 장군은 진주의 손경례 집에서 선전관 양호가 전하는 교지를 받는다. 3도수군통제사로 다시 임명하는 직첩이었다.
이를 받아들고 장군은 단 몇 분도 머뭇거릴 겨를이 없었다. 수소문해보니 천만다행으로 경상우수사 배설이 빼돌린 12척의 전선이 있었다. 장군은 곧바로 전라도 곡성을 거쳐 구례로 들어왔다. 등뒤에서는 왜군이 밀물 듯이 쳐들어오고 있어서 잠시도 지체할 수가 없었다.
곳곳은 불이 질러지고 백성들은 혼이 나간 상태에서 피란길에 오르고 있었다. 순천에 진입할 무렵, 수하의 군관인 임중형을 비롯한 수 명을 만났다. 다행히 순천은 청야(淸野)를 하지 않는 상태였다. 전라병마절도사 이복남이 남원성을 지키기 위해 순천을 떠나면서(8월 6일) 병장기를 그대로 두고 있었다.
여기서 정전(長箭)과 편전, 활과 화약 등을 수습하는 한편, 병력도 15명 보충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어림도 없는 숫자였다. 한데 보성으로 들어서면서 희망의 빛줄기가 비추기 시작했다. 조양창에 이르니 군량미 300섬이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었던 것이다.
장군은 봉인을 해두고 보성읍내로 향했다. 직전에는 득량에서 최대성 장군을 만났다. 이분은 득량 군두 전투에서 이듬해 삼대가 함께 전사한 분이다.
장군은 득량에서 천군만마와 같은 병력을 보충했다. 바로 굴암(지금의 칼바위)에서 피란 나온 청장년 300명을 보충한 것이었다. 이어서 관아의 병기고에서 잘 보존하고 있던 무기를 다수 확보했다. 그것은 말 네 필에 내눠 실려졌다.
그러니까 보성에서만 군량미와 병력, 무기를 넉넉하게 확보를 한 것이었다. 장군은 이런 성과를 거두고서 얼마나 안도 했을까. 아니, 그보다는 얼마나 깊은 감회에 젖었을까.
보성은 우선 장군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연고가 닿아있는 고을이다. 바로 장인인 방진(方震)군수가 이 고을에서 봉직했으며 처 방씨 부인도 어려서 이곳에 살았던 것이다. 그 내력은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속에도 깃들어 있다.
어느 날 화적이 집에 침입을 했는데, 12살 먹은 딸(수진)이 베틀에 쓰는 대 다발을 마루에 던지면서 “아버지 여기 화살 있어요”하고 외치는 바람에 화적들이 화들짝 놀라서 도망을 쳤다는 것이다.
또 한사람으로는 득량 호음동 출신의 선거이(宣巨怡) 장군이 있다. 그는 장군과 같이 1545년생으로 무과도 같은 해에 급제하고, 녹둔도에서 여진족도 함께 물리쳤다. 그리고 같은 해인 1598에 각각 다른 곳에서 순절했다.
그러니 각별함이 더하지 않았겠는가. 장군은 명량해전을 준비하며 9박10일간 보성에 머물었다. 그리고는 병력을 정비한 후 봇재를 통해 군영구미(지금의 군항)에 이르렀다. 여기서 잠시 군마를 쉬게 했다고 전해진다.
장군은 미리 득량 선소를 통해서 조양창의 군량미를 전라우수영으로 보내고 배설이 감춰놓은 12척에다 병선 한척을 더 보태어 최후의 일전을 준비했다. 장군은 이때 제주에서 보내온 소 네 마리를 도축하여 부하수군들을 배불리 먹였다. 건곤일척의 전투를 앞두고 사기를 드높이기 위해서였다.
그러는 사이 백성들은 들이닥친 왜군들을 피해 산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그 정황은 강항선생의 행적에서 여실히 나타난다. 그는 남원에서 전투를 돕고 있었는데 1만 여명이 몰살을 당하자 고향인 영광으로 내려왔다. 그러나 몸을 피할 곳이 없었다. 그때 붙들려 일본까지 끌려갔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자식은 바다에 내던져지고 애절한 아픔은 ‘간양록’에 오롯이 새겨졌다.
명량대첩은 그야말로 천행이요 기적이었다. 불과 13척의 배로 적선 133척을 깨 부스고 물리쳤으니 어찌 놀라운 일이 아닌가. 거기에는 앞서서 보성의 장정들, 그리고 군량미와 무기가 뒷받침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장군의 ‘아직도 12척이 배가 있다’는 결연한 의지가 보태졌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울돌목에서 장군이 명량대첩을 거두지 않았다면 나라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임진년에도 왜군이 한양으로 밀고 올라가자 임금은 도성을 버리고 여차하면 내부를 하려고 했는데, 그보다 엄청난 준비를 하여 재침한 정유재란 시는 여기서 막아내지 못했다면 그대로 나라가 먹히지 않았을까. 그것을 생각하면 모골이 송연해진다.
그런 면에서 흔히 보성을 일러 삼보향의 고장, 의병활동의 면면이 도도한 고장으로 알려졌지만, 알고 보면 이렇듯 그 전에도 고비마다 나라를 구출한 원동력이 되어준 고을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보성은 지명 그대로 보배로운 고을이면서 실로 구국의 고장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2022)
첫댓글 충무공과 보성의 인연을 새겨보는 시간이었습니다 그야말로 맨주먹 백의종군에 비겁하게 도망쳤던 배설의 전선12척이 명량해전의 주력이 되었으니 새옹지마의 위복이었는데 보성의 군량과 무기 그라고 600여 장정이 명량해전 승리에 크게 기여했으니 실로 보성의 자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가끔 寶城이라는 지명을 생각해보곤 했는데 무언가 통하는 바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순신장군과 보성의 인연이 많이 알려지지 않았는데, 나라도 나서서 제대로된 글 한편 써야겠다는
생각으로 올렸습니다. 한고장에서 600섬의 군량미와 군량미와 600명의 청장년, 그리고 말 네필에 나눠실은
얄의 무기를 구했다는 것은 크나큰 공헌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순신공부를 했지만 보성에관한 이야기를
들은기억이 별로없습니다.
역사적으로 중차대한 사건에 중심역활을 했는데 이를 널리 알려 고장의 위상을 높이는데
노력해야겠습니다.
귀한자료 감사합니다.
<약무호남 시무국가>라는 충무공의 편지글도 있지만, 정유재란시 만약에 보성에서
군량미와 병력충원, 무기 확보가 없었으면 나라는 적에게 먹히고 말았을 것입니다.
보성에서 전쟁에 필요한 3대요건을 갖추었기에 명량해전을 구상할수 있었고,
울돌목에서 대승을 거둘수 있었습니다.
그때는 왜군이 이미 호남육지와 충청도까지 밀고 들어왔는데 해군까지 합세했다면
한양은 순식간에 점령되고 말았을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성은 나라를 지켜내게 한 구국의 고을이 아닌가 합니다,
푸른솔문학 2022. 겨울호 발표
2022 충무공자취서린 고을 -보성문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