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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천하를 손아귀에 쥔 것이나 다름없던 1391년에 이성계는 금강산에 올랐습니다. 유교국가인 조선을 세운 그였지만 독실한 불교신자였던 터라 그날은 특별한 행사를 갖기로 했습니다. 월출봉에는 이미 만여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모두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과 그의 성공을 빌어줄 승려들이었습니다.
도자기에 소원을 넣은 뒤 돌로 만든 상자에 넣고 봉안하는 이 의식에는 아주 특별한 것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민족의 미래를 바꿔놓은 이 의식에 쓰인 도자기는 바로 '백자'입니다.
그것은 백자가 앞으로 가지게 될 운명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백자는 '왕과 지배자'의 도자기였던 것이지요. 이 상징적인 의식이 있은 지 일 년도 못되어 이성계는 왕위에 올라 조선 제 1대 임금인 태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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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백자의 시대로
중국에서 백자는 원나라시대에 이미 세계를 주름잡고 있었습니다. 원나라는 몽골족이 세운 나라로 징키스 칸과 쿠빌라이 칸은 세계에서 가장 큰 제국을 세웠습니다. 유럽과 아시아를 가로막던 사막도 바다도 그들에 의해 무너졌습니다.
이 정복전쟁은 도자기의 역사도 뒤흔들었습니다. 아라비아, 아프리카는 물론 유럽까지도 중국 도자기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바로 '청화백자'입니다. 청화백자는 '푸른색으로 그림을 그린 백자'란 뜻입니다.
청자는 청동기나 옥처럼 비취빛이 하늘이 내린 선물이라고 여기는 동양에서는 더없이 사랑받았습니다. 녹색차를 담는 그릇으로 청자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에 차와 함께 동양 귀족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면서 인기는 식을 줄 몰랐습니다.
그러나 유목민족인 몽골족에겐 이런 전통이 없습니다. 그들은 청동기로 솥을 만들어 백성을 먹여 살리는 일이 그렇게 굉장할 까닭이 없었습니다. 농업국가였던 중국,일본,베트남이나 우리나라와는 달랐지요.
몽골족은 아직도 하얀색 게르에서 살고 하얀 우유로 만든 차를 마십니다. 그들에게 녹차란 낯설기만 합니다. 그러니 청자에서 정신적 가치를 느낄 턱이 없었지요. 원나라의 황실과 귀족은 우유 빛이 감도는 투명한 백자에서 '신의 빛'을 보았습니다.
경덕진(징더전)이라는 마을은 커다란 가마를 만들기 좋은 언덕이 넓게 펼쳐져 있습니다. 좋은 흙이 나고 숲이 많아 땔감 걱정도 없었습니다. 이곳에서 만든 백자가 원나라 황실의 눈에 들었습니다. 경덕진 최고의 도자기는 '청화백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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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화백자는 원나라의 지배를 받았던 외국에서 더욱 환영을 받았습니다. 그들도 푸른 빛 청동기에 대한 전통이 없었고, 우유를 마셨습니다. 그러니 백자를 보면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끌렸습니다.
아라비아를 비롯한 이슬람왕국에선 종교계율에 따라 도자기에 사람이나 동물을 그려 넣지 않습니다.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코란의 가르침 때문에 그들은 페르시아 양탄자처럼 아무 의미 없는 문양이 반복되는 그림을 원했습니다. 이슬람왕국의 귀족들은 포도덩쿨무늬인 당초무늬를 화려하게 수놓은 백자를 주문했습니다. 그들은 이 도자기를 자랑하기 위해 손님을 기다란 탁자에 초대하여 접대하는 코스요리를 개발하였다고 합니다. 그들 때문에 아라비아 상인들은 쉴 새 없이 중국에 백자를 사러 드나들었습니다.
유럽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유럽의 귀족도 백자를 사기 위해 재산을 쏟아 부었습니다.그것은 원나라가 멸망하고 명나라가 만들어졌을 때에도 계속되었습니다. 명나라의 '청화백자'는 전 세계 귀족과 왕족들의 필수품이었으며 무역은 중국 황실의 주머니를 두둑하게 해주었습니다. 경덕진은 보호 아래 발전하며 수많은 청화백자를 쏟아내었습니다.
(어떤 학자는 유럽에서 청자가 동양에서만큼 인기를 끌지 못한 까닭을 청동기문명을 갖지 못한 데서 찾기도 합니다. 유럽문명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그리스문명은 철기문명을 가진 정복자에 의해 신석기시대에서 철기시대로 건너뛰었습니다. 철기문명은 대륙을 끝없는 정복전쟁의 시대로 끌고 들어갔고, 또한 해상문명의 시대를 열기도 했습니다. 철기문명 최대의 발명품은 무기가 아니라 '쇠도끼'였기 때문입니다. 아마, 금도끼, 은도끼, 쇠도끼에 관한 나무꾼의 선택에 관한 전설은 이때 시작되었을 거라고 여겨지는데요, 그것은 금과 은은 단지 그 무게에 상응하는 가치만 있을 뿐이지만, 쇠도끼 한 자루만 있으면 그것은 세상을 다 가질 수 있었던 시대인 철기시대였기 때문입니다.)
조선초에 청화백자가 나타나지 않은 사연
우리나라도 그 바람을 피해갈 수는 없었습니다. 사신으로 중국에 갔다가 몰래 청화백자를 사들였다 붙들려 곤욕을 치르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돈깨나 있고 힘깨나 있는 사람들은 청화백자를 탐내었습니다.
그런데도 어찌하여 청화백자는 나타나지 않았을까요? 태조부터 태종을 거쳐 세종시대에 이르러 나라가 안정이 되자 부자들이 생겼는데도 말입니다. 도자기의 세계화라는 흐름에 뒤쳐진 것일까요?
그런데 세종시대 도자기 산업은 꽤 번성했습니다. 임금은 분청사기 기술개발을 위해 노력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도 청화백자가 나타나지 않았던 것은 그럴만한 까닭이 있었던 것이지요. 세종은 청화백자가 가진 의미를 너무도 잘 알았습니다.
청화백자는 서민이 쓰기엔 너무 고급스러운 도자기였습니다. 아무데나 널린 분청사기 흙과 달리 백자에 쓰는 흙은 귀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흙이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왕실에서 그런 흙을 구하지 못할 리는 없었던 것이지요. 그런데도 청화백자를 만들지 않은 것은 꼭 필요한 재료가 수입품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나라에 조금도 보탬이 되지 않는 물건이었죠. 바로 '코발트'입니다.
코발트
청화백자가 인기를 끌었던 것은 그곳에 무늬를 넣는 기술을 개발했기 때문입니다. 너무도 눈부시게 하얀 백자에 무늬를 만드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물감은 굽는 동안 증발해버릴 것이며 상감기법은 백자의 멋을 살리기 어렵습니다. 어설픈 색은 번져서 오히려 칠하지 않은 것만 못했습니다.
코발트는 평소에는 보라색이지만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구우면 푸른색이 나는 광물입니다. 광물이기 때문에 1300도 넘는 온도까지 견딥니다. 푸른빛이 감도는 새하얀 백자에 짙푸른 코발트로 그림을 그리면 강렬한 느낌이 납니다. 백자의 하얀색을 살리는 데는 그 이상의 방법은 없습니다.
코발트는 유화물감과 같아서 오동기름을 섞으면 붓이 쉽게 잘 나가며 그림을 그릴 수 있습니다. 초벌구이한 자기에 붓으로 그림을 그린 뒤 유약을 발라 구우면 그림은 작은 붓 자국까지 전부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그래서 도자기가 가진 조형의 아름다움과 더불어 그림도 훌륭한 감상품이 되는 것입니다. 이 기법이 가능한 것이 코발트의 장점입니다. 이 백자를 청화백자라고 합니다.
안타깝게도 코발트는 우리나라에선 전부 중국에서 수입해 와야 합니다. 중국도 아라비아 상인을 통해서 수입해오긴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더욱 귀할 수밖에 없었지요. 어렵게 구한다고 해도 그 값이 어마어마할 수밖에 없어서 청화백자 하나는 아무나 가질 수 없는 자기였습니다. 그런 청화백자를 개발해야 할 이유를 세종임금은 찾지 못한 것입니다.
중국에서 코발트를 수입하기보다 책을 사왔고 장영실과 같은 능력 있는 젊은이들을 유학시켜 견문을 높이는데 돈을 썼습니다. 그것이 전 세계 유일한 도자기였던 분청사기가 만들어진 힘입니다.
우리 흙으로 그릇을 빚되 질을 높이면 된다는 믿음. 그것이 세종임금의 도자기 철학이었고 그래서 분청사기를 세종임금의 도자기라고 부르는데 주저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입니다.
상감백자의 등장
분청사기가 독창적이었던 데는 탄생 당시 국제 정치 상황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고려의 공민왕이 중국의 원나라와 그 원나라에 반기를 들고 세워진 명나라 그 어느 쪽에도 가까이 하지 않는 정책을 쓴데다가 무역마저 끊겼기 때문입니다.
조선이 세워진 뒤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조선의 외교전술은 '사대교린'입니다. 중국에 대해서는 큰 나라로 섬기는 것이고 여진이나 일본에 대해서는 대등한 입장에서 사귀어 전쟁의 빌미를 주지 않겠다는 정책입니다.
이 정책은 조선의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에까지 못 박아 놓았습니다. 그래서 명나라에는 철마다 사신을 보내며 공물도 함께 실어 보내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우리가 손해 보는 것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얻는 것도 많았습니다.
중국에서 벌어지는 잔치에 우리나라가 선물을 보내는 이 사절단에는 상인이 꼭 끼었습니다. 나라와 나라사이의 무역은 물론이고 상인들 간의 무역도 이 참에 이루어집니다. 우리나라로서는 선진문물을 배우고 들여올 수 있는 길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조선의 상류사회에서는 이틈을 타고 슬그머니 청화백자를 찾는 사람들이 늘게 되었습니다. 도자기에도 중국풍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백자는 거침없이 우리나라 도자기속으로 파고들었습니다.
태조 이성계가 백자사발에 소원을 적었던 것처럼 조선을 건국한 사람들은 백자에서 미래를 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류층들은 중국과 무역길이 트이기 전부터 백자를 만들어 썼습니다. 그것이 분청사기와 구분이 거의 안가는 '상감백자'였습니다.
분청사기에는 중국풍이 없습니다만 이 상감백자에 슬슬 중국도자기를 복사한 모양이나 그림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백자가 가지는 숙명이었던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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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백자는 과학의 산물
백자가 청자보다 기술적으로 어려운 것은 온도 때문입니다. 1300도 안팎에서 구울 수 있는 청자에 비해 백자는 1350도까지 온도를 올릴 수 있어야 합니다. 백자를 만드는 흙은 이 온도가 되어야 익습니다.
백자를 만들 때 도공들을 괴롭혔던 것은 유약이 익는 온도와 백토가 익는 온도차 때문입니다. 유약에 맞추자니 온도가 낮아 흙이 다 익지 않고 온도를 높이면 덧입힌 유약이 더 쪼그라들어 금이 쫘악 하고 갈라져버립니다. 물론 잔금을 잔뜩 만들어 한껏 멋을 부린 백자도 좋겠습니다만 조선백자가 이름을 얻은 것은 '깨끗함' 때문입니다.
도공들은 고민에 빠졌지만 높은 온도에서 익는 유약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유약 속에 들어 있는 '칼슘' 성분을 줄여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광택이 나고 매끄럽게 만드는 칼슘은 유약이 익는 온도를 낮추는 일도 했습니다. 청자 유약일 때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백자가 구워지는 온도는 50도 이상 더 높은 온도가 필요했습니다.
'칼슘' 성분이 들어있는 석회석을 줄여 유약을 더 높은 온도에서 녹게 했습니다. 그러자 유약과 흙과의 온도차이가 사라졌고 더 이상 갈라지거나 금이 가는 일이 없었습니다.
또한 조선 도공들은 흙의 성분도 조절해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 결과 우리나라 백자는 중국이나 일본의 백자보다 더 단단해졌습니다.
사실 우리나라 백자의 흙은 중국이나 일본보다 축복받은 것이 아닙니다. 질 좋은 백토가 펑펑 쏟아져 나오는 것이 아니다보니 구할 수 있는 흙으로 최고의 도자기를 만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나라 도자기가 더 단단할 수 있었던 것은 모자란 흙으로 더 나은 백자를 만들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연구했기 때문입니다. 연구결과 백자에 들어가는 규석의 양을 줄이면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석영처럼 투명한 돌에 들어 있는 것이 규석입니다. 조선백자는 과학의 산물입니다.
훈구파의 도자기, 청화백자
어쩔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었을까요? 마침내 우리민족도 청화백자를 만들어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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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들었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훌륭하고 고급스럽습니다. 이 도자기에는 그 비싼 코발트를 안료로 써서 그림을 그렸습니다. 여기에 그림을 그린 사람들은 도화서 최고의 화가입니다. 도화서는 왕실과 사대부들을 위한 그림을 그려주는 화가들이 속한 관청으로 최고의 화가들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니 자기도 일품이지만 그림도 최고입니다.
새로운 도자기는 늘 언제나 새로운 지배자의 출현을 의미해왔듯이 이 청화자기도 누군가가 나타난 것을 보여주는 것일까요? 신기하게도 그렇습니다.
고급도자기는 비용이 많이 듭니다. 질 좋은 백토를 구해오고 땔감을 대고 최고의 도공들이 있어도 몇 년이고 실패를 거듭합니다. 게다가 청화백자에는 비싼 코발트까지 필요합니다. 하나의 청화백자를 위해 이것을 감당해야 했던 것은 그만큼 대단한 세력이 나타났다는 걸 의미합니다. 그들이 바로 '훈구파'입니다.
세조는 세종의 아들로 형 문종의 아들이자 자신의 조카인 단종을 끌어내리고 왕위에 올랐습니다. 조카를 죽이면서까지 왕위에 오른 것은 어린 임금이 다스리면 왕권이 약해진다고 나름대로 여겼겠지요. 그래서 그가 가장 힘주어 한일은 왕실의 권위를 높이는 일입니다. 그 일중의 하나로 도자기를 바꾸는 일을 시작합니다. 왕실에서 쓰는 도자기는 신하나 백성들이 꿈도 꾸지 못할 새로운 기술로 만든 신제품이어야 했겠지요. 그래서 그가 선택한 방법은 왕실도자기만을 만드는 관요를 설치하는 것입니다.
분원, 분원의 전문가들
궁궐에는 음식을 담당하는 사옹원이라는 관청이 있습니다. 사옹원 관리가 직접 관요에 내려가 감독하며 도자기를 굽게 했습니다. 그 가마를 사옹원의 '분원'이라고 합니다. 그곳의 도공은 다른 곳의 가마와는 비교도 안 되는 조건에서 백자를 만들었습니다.
분원에는 전국에서 뽑힌 수준급 도공 380명이 일을 했습니다. 그들은 각자 맡은 일이 달랐습니다. 그리고 그 분야에서는 최고가 되었습니다. 불만 때는 사람은 죽을 때까지 불만 때면서 불에 관한한 당대 최고가 됩니다. 구워진 도자기의 품질을 한눈에 구별할 줄 아는 사람, 물레를 돌리는 사람, 흙을 고르고 다지는 사람까지 분야별 최고 전문가가 배출됩니다.
이렇게 해서 우유빛 광택이 나는 청화백자를 만들 수 있게 된 것은 성종때입니다. 우연일까요? 성종은 완성한 임금이란 이름답게 나라를 다스리는 기틀이 다 만들어집니다. 그 결과가 <경국대전>입니다.
(경국대전은 나라를 다스리는 기본 원리를 담은 법전입니다. 조선을 건국한 사람들은 유교원리에 따라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 <경제육전>을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간략하기 때문에 터져 나오는 문제들을 해결할 때마다 하나씩 덧붙여 일종의 부록을 만들어 썼습니다. 이렇게 문제마다 법전을 만들어 가면 신하와 임금, 신하와 신하사이에 의견이 분분해져서 자칫 혼란에 빠질 것이라 여긴 세조는 아예 모든 문제를 다 아우르는 법전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왕권이 흔들리지 않는 길이기도 했지요. 그렇게 해서 만든 것이 경국대전입니다.)
청화백자의 시대가 시작되다
역사는 되풀이 되는 것일까요? 고려시대에 왕실도자기는 광종-경종-성종시대에 완성되었습니다. 광종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호족들을 죽였습니다. 그런 바탕위에 성종은 중앙집권화를 이루었습니다.
조선시대에도 데칼코마니처럼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세조-예종-성종시대가 그것이죠. 신하와 조카를 죽이고 왕권강화를 이루고 난 세조는 왕실의 자기를 만들기 위해 분원을 설치했습니다. 그에 의해 시작된 경국대전이 완성된 것은 성종 때이며 그때 조선왕실의 도자기인 청화백자가 만들어 집니다.
훈구파의 집에서는 매일 잔치가 열렸고 잔치 상은 '중국 도자기'로 차렸습니다. 한개 사들이기도 백성들로서는 손이 떨리고 뒤로 자빠질 가격인 청화백자가 그들의 집에서는 그냥 접시이며 술잔이며 꽃병이었지요.
청화백자의 수입은 사치품을 극도로 경계했던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선 용납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명나라에서도 이때는 청화백자가 금수품이었습니다. 명나라도 코발트 수입길이 막히면서 황실과 소수 지배자들의 용도로 충당하기 급급한 처지였거든요.
훈구파는 그들이 가진 권력을 뽐내고 싶었습니다. 상감백자로는 도무지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청화백자를 수입할 수 없다면 만들어야 했습니다. 그들의 바람대로 우리나라 도공의 손에서 빼어난 청화백자가 만들어졌습니다. 그들은 청화백자와 함께 절정기 권력의 달콤함을 맛보며 15세기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곧 다가올 16세기도 그렇게 달콤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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