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소련의 붕괴와 함께 양극체제의 시대는 막을 내렸고, 팍스아메리카나의 시대가 도래했다. 확고한 이성의 신뢰로 규합했던 좌파 지식인들은 갈 길을 헤매게 됐다. 일부는 ‘감각의 제국’으로 방향을 선회했고 일부는 ‘오리엔탈리즘’에 경도됐다.
그 대표적인 이가 바로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Bernardo Bertolucci)이다.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는 1960년대부터 모더니즘과 맑시즘·정신분석 등 사상을 기반으로 지적인 영화작업을 전개해 온 거장이다. 특히 그는 1964년 〈혁명전야〉·1970년 〈순응자〉·〈거미의 계략〉 등 작품으로 좌파진영 시네아스트의 선봉장으로 평가받았다.
그런 그가 1972년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를 발표해 포르노그라피의 논란을 낳았다. 이어 그가 관심을 돌린 것은 오리엔탈리즘이다. 그는 1987년 〈마지막 황제〉· 1990년 〈마지막 사랑〉· 1994년 〈리틀 붓다〉 오리엔탈리즘 3부작을 완성했다. ‘오리엔탈리즘’이라는 단어에는 신비주의의 의미가 내재돼 있는데 그의 오리엔탈리즘 3부작도 예외는 아니다. 때문에 그의 오리엔탈리즘 3부작은 평가가 극단을 달렸다. 인생유전의 깊은 사유를 담았다고 박수를 보내는 평자가 있는 반면 동양에 대한 지나친 환상과 편견을 담았고 혹평을 퍼붓는 평자도 있었다.
〈리틀 붓다(Little Buddha)〉는 오리엔탈리즘 3부작의 종지부를 찍은 작품으로 1993년 제작됐다.
〈리틀 붓다〉는 환생한 스승인 도제라마를 찾는 이야기 속에 부처님의 일대기를 삽입한 일종의 액자형식을 취하고 있다. 영화는 승려과 염소의 우화로 시작된다. 승려가 염소를 죽이려하자 염소가 웃다가 다시 운다. 염소가 웃다가 운 이유는 무엇일까? 웃는 이유는 4백99번이나 염소로 태어났기 때문에 다시 죽으면 사람으로 태어날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는 까닭은 승려의 내세가 걱정되기 때문이다.
서두에 우화를 장식한 까닭은 윤회를 말하고 싶어서 일 것이다.
노부라마는 환생한 도제라마를 찾는 임무를 맡는다. 환생한 도제라마라고 여겨지는 이는 시애틀에 사는 9살의 소년 ‘제시’다. 제시의 아버지는 딘이고, 어머니는 리자이다. 노부라마는 딘과 리자에게 “도제라마는 달라이 라마의 스승으로 서방에도 불법을 전하기 위해 시애틀에 환생했는데, 그 환생한 아이가 제시일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딘과 리사는 인간이 환생한다는 말을 믿지 않으면서도 승려들에게 호감을 느낀다. 그러던 중 딘의 절친한 친구가 파산하고 죽는 사고가 발생하자 딘은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 제시를 데리고 부탄으로 간다.
도제라마 환생 통해 윤회사상 설파
부탄에 도착한 제시는 다른 환생 후보자인 라주와 지타를 만나게 된다. 확인결과 세 아이가 모두 환생한 도제라마인 것으로 밝혀졌다. 노부라마는 도제라마의 육신과 영혼·말씀이 세 아이들을 통해 각각 현신했다며 세 아이에게 엎드려 절한다. 세 아이는 도제라마의 생전 설법을 들으며 ‘공의 진리’를 깨닫게 된다. 딘도 죽음 앞에 초연한 스님들의 모습을 보고서 친구가 죽은 슬픔에서 어느 정도 헤어난다.
이 영화의 백미는 동화적인 색감으로 그린 부처님의 일대기이다. 부처님 일대기는 책 《시다르타 왕자의 이야기》와 노부라마의 말을 통해 생생하게 재현된다. 특히 부처님이 중도의 깨달음을 얻는 장면은 매우 인상적이다.
“실을 너무 당기면 끊어지고, 너무 느슨하게 해도 연주가 되지 않는다.”
부처님은 이 말을 듣고 깨달음은 고행을 통해 얻어지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보리수 밑에서 악귀의 유혹도 이겨내고 부처님은 마침내 깨달음을 얻어서 번뇌의 속박을 끊는다.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것으로 전해져 신비감을 더하고 있다.
이 작품이 처음 모양새를 갖추고 기획에 들어간 것은 1992년이지만, 베르톨루치는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를 찍기 전부터 〈리틀 붓다〉를 마음 속에 품고 있었다고 한다. 촬영은 주로 네팔의 저지대 카트만두에서 이루어졌는데, 이곳은 관광객 수를 1년에 2천명으로 제한하고 있어 촬영이 까다로운 지역이다.
미국에서 벌어지는 장면을 촬영하기 위해서는 시애틀에 세트를 따로 만들었다. 작품의 완벽성을 위해 수십 명으로 구성한 의상팀을 배치하기도 했다. 티베트 불교의 지도자 달라이 라마는 촬영 당시 베르톨루치 감독과 제작자 제레미 토마스를 친히 초청해 이들을 격려했다.
유응오 기자 arche@jubul.co.kr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는?
맑시즘-오리엔탈리즘 전환
“불교는 내게 한 영화를 끝낼 때마다 ‘어떻게 죽고’, 새로운 작품을 시작할 때 ‘어떻게 다시 에 태어나는가’에 대한 가르침을 줬다.”
-1996년 제37회 테살로니키 국제 영화제 기자회견에서
1941년 이탈리아 에밀리아 로마냐 파르마에서 출생했으며 로마대학교에서 근대신학을 전공했다. 20대 초반부터 완숙한 영화 형식의 수작을 찍어 일찌감치 거장의 반열에 올랐다.
〈파업전야〉·〈거미의 계략〉등의 영화를 통해 베르톨루치는 오손 웰즈·조셉 폰 스턴버그·페데리코 펠리니의 스타일을 떠올리게 하는 장중하고도 화려한 스타일로 1960년대 유럽 예술영화의 뛰어난 수사학을 증명했다.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는 외설시비를 일으키면서 당시까지 그의 영화 가운데 최고인 6천1백만 달러의 수익을 올렸다.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는 체제의 혁명 대신 개인의 혁명, 계급과 성을 불문한 채 순수한 나눔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이어 그는 4시간 10분짜리 대작 〈1900년〉을 만들었다.
1900년 같은 해에 태어난 계급이 다른 두 사람의 삶을 통해 이탈리아 현대사를 얘기했다. 1982년 〈어리석은 남자〉를 끝으로 그는 이탈리를 떠났다. 자신이 몸담고 있었던 이탈리아를 비롯한 서구 사회의 파시즘의 잔재에 모멸감을 갖고 있었던 그는 오리엔탈리즘 3부작 (〈마지막 황제〉·〈마지막 사랑〉·〈리틀 붓다〉)을 완성했다.
마르크스· 프로이트·동양을 거쳐온 베르톨루치의 영화들은 복잡한 인생의 현실을 영화로 담기 위해, 그리고 현실의 대세에 끌려가기보다는 그 대세와 싸우기 위해 갖은 미학적 통로를 발견하려 애쓴, 위대한 영화세대의 유산으로 남아 있다.
수상경력
1989년 BAFTA Awards 작품상 〈마지막 황제〉
1988년 아카데미영화제 감독상, 각색상 〈마지막 황제〉
1988년 골든글로브 감독상, 각본상 〈마지막 황제〉
1962년 프레미오 비아레지오 문학상 〈시집 미스터리를 찾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