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군은 ‘강한 전사’. ‘강한 군대’가 되고자 쉼 없이 파이트 투나잇(Fight Tonight)을 외치고 있습니다. 오늘 밤 당장 전투가 시작되더라도 승리할 수 있는 군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변화와 혁신’이 이렇게 강함을 위해서라면 이 강함의 추구는 군의 정체성의 추구가 아니겠습니까, 이를 위해 끊임없이 훈련하고 무장하는 군이지만 국민의 무한한 지지와 신뢰가 없다면 결코 글로벌(Global) 강군 육성은 이루어 질 수 없을 것입니다."
이 글은 국방부에서 발표한 글이 아니다. 2008년 10월 5일자로 발표된 제2대 군종교구장이었던 이기헌 주교의 '제41회 군인 주일 담화문' 가운데 일부다. 이기헌 주교는 2008년 국군 창설 60주년을 맞이하면서, "최근 여러 해에 걸쳐 지속되었던 이념의 대립 속에서는 군의 위치가 많이 흔들려졌고 약해지기도 하였으며 그 결과 군의 기강이 많이 해이해진 것도 사실"이라고 말하면서, "새 정부는 '정예화된 선진 강군 육성'을 국방 비전으로 제시하는 가운데 ‘국민과 함께 하는 국민의 군대'를 지향하겠다고 강조하였으며, 군 안에서도 강한 군대가 되려는 변화의 바람이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여기서 말하는 새 정부는 물론 이명박 정부다.
십자가와 군대의 맹기가 병존할 수 없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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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종교구 홈페이지 사진 |
군종교구에서는 군인을 '정의와 평화의 수호자'라고 말하고 있으며, 이는 가톨릭교리서 2311항(비교 사목헌장 79항)의 "군생활로 조국에 대한 봉사에 헌신하는 사람들은 국민의 안전과 자유를 위해 봉사하는 사람들이다. 이 임무를 올바로 수행한다면 그들은 참으로 국가의 공동선과 평화 유지에 기여하는 것이다"(가톨릭교리서 2311항 : 사목 헌장 79항)라는 내용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러나 모든 군대가 그러한 것은 아니다. 군대는 속성상 '강한 전투력으로 기반으로 적을 상대로 승리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또한 역사적으로 또는 지금도 '제국주의' 군대는 기존권력과 기득권자의 수호자 역할을 더 많이 해온 것도 사실이다.
흔히 군종사목에 복무하는 이들은 "그리스도교 신자 군인들이 자신의 삶과 구체적인 증언을 통해 ‘군인’이면서 ‘그리스도인’일 수 있음은 물론 ‘군인’이면서 ‘성인’일 수 있다는 믿음이 필요하다"고 말해 왔다. 그리고 ‘카파르나움의 백인대장’(마태 8,5-13)과 골고타 십자가 밑에서 있었던 백인대장(마르 15,39)의 예를 들며 예수께서는 군인들을 칭찬하셨다는 전거로 삼고 있다.
그러나 초기 교회에서는 군인들에게 그리스도인이 될 자격을 주지 않았다. 십자가와 군대의 맹기가 병존할 수 없다는 것이다. 황제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는 군인이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는 로마를 섬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해로데왕의 군인들은 무고한 아기들을 학살했지만, 예수께서는 체포되기 전에 칼을 든 베드로에게 칼을 거두라고 명령하고 죽임을 당했다. 따라서 군대 자체가 신앙을 거역하는 것이다. 그래서 최근에 불거진 이야기가 종교적인 이유로 인한 '양심적 병역거부'가 아닌가. 개신교의 경우엔, 신학생들 사이에 양심적 병역거부자가 나오기도 했다.
이런 점에서 사제가 군복 안에 로만칼라를 채우는 것은 역설적이다. 사실 오래 전부터 과연 군종사제가 '군인 신분'으로 복무하는 게 옳은가, 하는 질문이 나오고 있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한국군종교구 정관>에 따르면, "군종신부란 우선 소속 교구장 또는 수도장상의 동의를 얻은 다음 이차적으로 군사훈련을 마치고 국방장관으로부터 장교로서 보임된 천주교 사제"로 되어 있다. 따라서 "군종사목에 종사하는 천주교 사제들은 교회 당국과 군 당국의 양쪽 요망사항을 충족시켜야 한다. 군종사제는 교회에 속하지만 동시에 군의 계급, 군의 제복, 봉급 수령 및 군의 근무규정 때문에 군에 속한다."
한국 군종사제, 처음엔 모두 민간인 신분이었다
분단국가인 한국사회는 징병제를 실시하므로 수많은 젊은이가 군대에 가야 하고, 우리들의 자녀이며 동료이며 형이며 오빠인 그들의 영적 생활을 돌봐야 하는 것은 교회의 당연한 의무이다. 그러나 '군종사목' 더 정확히 말하자면 '군인사목'을 수행하는 사제들이 꼭 '군인신분'이어야 하느냐는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한국의 경우에, 1951년 한국전쟁 당시에 11명의 사제가 군종활동을 시작했는데, 이들은 무보수 촉탁 문관 신분이었다. 그후 1961년에야 한국 군종신부단이 주교회의의 정식 인준을 받으면서 사제들이 군인신분을 취했고, 1989년에 교황청의 인준을 얻어 한국 군종교구가 설립되었다.
군종단 설립 이후 줄곧 교회와 국가조직에 걸쳐있다는 양면성으로 군종사제들은 갈등을 빚어왔다. 군종사제는 "한쪽 발은 하느님 나라에 있고 다른 한 발은 군화 속에 있다"는 점에서 사제 신원에 혼란을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교회는 군종사제들이 군사문화에 길들여져 '군사화'되는 것을 우려해 왔다. "군종사제는 비록 장교로서 계급을 받지만 사제 특성상 계급을 초월한다"고 가르치지만, 상명하달의 계급문화는 군종사제들의 의식구조를 계급화시켜 보편적 형제애를 살아야 할 교회 안에서 권위주의를 고착시킬 위험이 언제나 있다. 그래서 일부 사제들은 군종교구로 가면서 "끌려왔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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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6월 25일, 3사관 학교에서 열린 2010년 군종장교 임관식(사진출처/군종교구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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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승의 신념'과 '선교'의 불편한 동거
교회의 의지와 상관없이 국방부에서는 "필승의 신념과 정신전력의 극대화"를 위해 군종제도를 도입했다. 그래서 사제들에게 제복도 봉급도 준다. 교회에 성당 부지도 내어준다. 그러나 군이 요구하는 필승의 신념은 죽기까지 자신을 내어놓으셨으며, 원수마저 사랑하라던 예수의 뜻과 거리가 멀다. 그런데도 교회가 군종사목에 열을 올리는 것은 '선교경쟁'에서 우위에 서기 위함이다. 몇 년 전부터 군종교구는 '군복음화 25%'를 사목목표로 세우고 있다.
군종교구는 2008년 2만8213명의 영세자를 냈다. 전국 교구가 배출한 14만1454명의 19.9%다. 영세자 다섯 명 중 한 명이 군대에서 세례를 받은 셈이다. 이는 전국 교구 중 최다인원을 배출한 서울대교구의 3만2124명에 이어 두 번째로 큰 규모이며, 만 20~29살 청년 남성만 보면 전국 영세자 3만812명 중 88.6%인 2만7309명을 차지한다. 그래서 군종교구는 "한국교회 청년 복음화의 못자리"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훈련소에서 '선(先)영세 후(後)교리'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후속관리는 부실한 편이다.
군인들은 각박한 군대 안에서 숨쉴 공간으로 교회를 찾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그들이 진정한 신앙인으로 자리매김하기란 상당히 어렵다. 이러한 '황금어장론'에 기대어 군인사목에 치중하는 것은 양적 성장에 도움이 될 수 있더라도, 복음의 본령에는 다가서지 못한다. 이 불편한 동거 속에서 교회가 자기 정체성에 대해 질문하지 않으면서 서두르는 선교는 위험하다. 최근 그리스도교사상연구소에서 행한 복음화포럼에서 광주가톨릭대학의 김정용 신부가 "복음 없는 복음화'라는 표현을 썼는데, 지금쯤이면 군인사목이 뭔지 다시금 성찰할 필요가 있다.
권력과 계급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군종사제
농민사목이나 노동사목을 위해 사제가 반드시 농민이나 노동자가 될 필요가 없듯이, 군인사목을 위해 사제가 반드시 군인이 될 필요는 없다. 민간인 신분으로도 그들과 동반할 수 있다. 물론 프랑스의 경우에 일부 노동사제가 있고, 농사짓는 사제들도 있지만, 적어도 그들은 계급이 없다. 그러나 군종사제들은 사제경력에 따라 중위나 대위로 임관되며, 대령까지 진급이 가능하다. 이들이 사병들과 같은 눈높이에서 동반할 수 있는지 묻고 싶다. 마치 기업의 노무담당이 노동자의 입장에 서기 힘든 것과 마찬가지다. 정훈장교처럼 군종사제는 사병을 교화대상이나, 돌봄의 대상으로만 접근할 위험이 있다.
1997년에 발표된 <'군인신자의 신앙생활'에 관한 설문조사 결과>(가톨릭신앙생활연구소)에 따르면, 사병들 중에서 군종사제를 매주 만난다는 응답자는 평균 52.2%였으며, 위관은 71.4%, 영관은 86.0%, 그리고 장관, 즉 장군들은 100%로 나타났다. 결국 군종사제들은 사병들보다 장교들, 특히 장군들과 더 많이 만나 환담을 나눌 기회가 있다는 것이다. 만일 노동사목 담당 사제가 노동자들보다 기업주를 더 많이 면담하고 있다면 가당키나 한 노릇일까. 결국 군대에서 사제들은 계급에서 자유롭지 못하며, 대다수 사목대상인 사병들에 비해 생활상의 특권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의식구조 역시 사병의 눈높이가 아니라 장군의 눈높이를 가질 가능성도 높아진다.
따라서 군종사제는 권력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으며, 그 권력을 다만 선교를 위해 활용하고 있다는 의심을 받을 수 있다. 따라서 이 문제를 속시원히 해결할 수 있는 방책을 찾아보지 않고서는 군종교구의 정치적 독립성과 복음에 대한 헌신을 말하기 힘들다. 2004년 이라크 파병 반대운동이 거셀 때, 군종교구는 물론 자이툰 부대에 사제들을 파견했다. 어차피 군인들이 파견되는 상황에서 사제 파견을 탓할 수 없다. 그들도 하느님의 자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국가가 '명분없는 전쟁'을 감행하고자 할 때, 군인들의 안전과 평화를 위해 '전쟁반대'를 선언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국가에 속한 '공무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제들은, 또는 교회는 정파와 국가조직에서 자유로운 신분을 유지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는 것이다. 선교보다 복음이 먼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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