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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심리학자 엘리자베스 뉴턴이라는 분이 재미있는 실험을 했습니다. 실험참가자를 A그룹과 B그룹, 두 그룹으로 나누었습니다. 먼저 A 그룹 사람들에게는 누구나 쉽게 알 만한 아주 간단하고 유명한 노래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리고, 이 노래의 리듬을 따라 막대기로 테이블을 두드려서 소리를 내면 상대방이 그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노래 제목을 알아내는, 일종의 게임입니다. 목소리가 아니라 그 리듬만 듣고 노래 제목을 알아내는 것이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실험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노래를 듣고 박자를 두드리는 A그룹에게 상대방이 과연 이 노래를 알아맞출 수 있을지 물었습니다. 당연히 알아낼 것이라고 응답한 사람이 50%였습니다. 그런데 막상 테이블을 두드리는 그 리듬 소리를 듣고 노래 제목을 알아낸 사람은 실제로는 2.5%에 불과하였습니다.
A그룹 사람들은 박자를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무슨 노래인지 맞춰야 하는 상대방을 답답해 합니다. “이렇게 쉽고, 유명한 노래인데, 어떻게 이 노래를 못 맞추지?” 하지만, 입장을 바꿔 생각해 봅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이 노래를 미리 듣지 못한 사람이 리듬 소리만 듣고서 이 노래를 알아내기란 너무나도 어렵다는 사실입니다. 박자를 두드리는 소리만 듣고 2.5%만이 그 노래를 알아냈다고 하니, 불가능은 아니지만 정말 힘든 일입니다. 그런데, 미리 노래를 들어서 알고 있는 상태에서 그 노래를 박자대로 두드려서 전달하는 사람들은, 적어도 50%가 이 노래를 알아낼 수 있다고 기대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은 어느 분야에서 오래 일하면서 많은 경험을 쌓아온 사람에게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어떤 분야에서 잔뼈가 굵은 직장 상사가 신입 직원에게 직무를 설명하면서 자신의 설명을 부하직원이 잘 알아듣지 못하면, 그것도 모르느냐고 답답해 합니다. 어떤 작업을 지시했는데 그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다고,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기도 합니다. 왜 못알아 듣지? 그것도 이해를 못해? 자신은 젊은 시절에 이미 경험한 일입니다. 실수도 하고 실패도 했습니다. 그러한 경험들이 쌓여서 오늘의 직위에 오르고 지식도 쌓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자신의 젊은 시절과 똑같이, 경험이나 지식이 적어서 미숙하고 긴장 속에서 일을 하는 부하 직원의 입장을 헤아리지 못하고 답답해하고, 무시하고, 비난한다면, 그런 상사는 동료들이나 부하 직원들 사이에서 고립되고, 그가 이끄는 조직은 활력을 잃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을 일러서 ‘지식의 저주’라고 말합입니다. 똑똑하고 유능한 사람이, 자신이 알고 있는 그 전문적인 지식 때문에 오히려 구성원들로부터 자신이 소외를 당하기도 하고, 조직원들이 서로 소통하지 못하고 관계가 깨어지기도 합니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지식이나 경험에 매몰되지 않고,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보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생각하고 말하는 능력입니다.
오늘 본문은 고리도 교회에 보내는 바울의 편지입니다. 바울은 말씀합니다.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 주시느니라”(고전 8:1-3).
오늘 바울이 언급하는 고린도 교회의 문제는 우상의 제물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교회 안에 우상의 제물에 대해 먹을 수 있다는 입장과, 먹어서는 안된다는 입장이 갈등을 빚고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고린도 시장에서 유통되는 대부분의 고기는 신전에 바쳐졌던 동물의 고기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 우상에게 바쳐졌던 동물의 고기를 먹는다면 그것은 우상에 바치는 제사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교우들이 많았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 반때되는 입장도 있습니다.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라 할지라도 그 고기를 먹는데 아무 거리낌이 없다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우상 자체가 아무 의미가 없는데, 우상에게 바쳤던 고기라 해서 무엇이 달라졌느냐는 것입니다. 그저 고기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그 지식에 대해서 바울은 동의합니다. 맞다는 것입니다.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상은 세상에서 아무것도 아니며, 오직 참 신은 하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하늘에나 땅에는 사람들이 신이라고 섬기는 우상들이 많이 있지만,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오직 한 분, 하나님 아버지가 계실 뿐입니다. 그분은 우주 만물의 창조주이고 섭리자이십니다. 우상이라고 하는 것은 이사야 40장의 말씀대로 장인이 부어 만들었고 장색이 그 우상에 금을 입혔고 또 은 사슬을 만들어 감아준 것입니다. 그런 우상들이 무슨 의미가 있고, 능력이 있습니까? 그러니까, 우상에게 바쳐진 동물의 고기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일반 고기와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저 맛있는 고기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바울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틀린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 문제를 다른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관심은 그 제물을 먹는 것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그 제물을 먹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 신앙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먼저 1인칭 ‘우리’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 지식을 가지고 있는 줄 안다.’ 자신을 포함해서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자유롭게 먹는 사람들이 소유한 지식입니다. 그런데 이 지식을 적용함에 있어서 고린도의 지식있는 사람들은 그 관심을 자기 자신에게만 두고 있습니다. ‘나는 안다. 나는 자유롭다. 나는 정당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어쩌면 한편으로는 그러한 지식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을 대함에 있어서, 그들을 무시하거나 상대적인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사람들에 관하여 바울은 말씀합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지만 사랑은 덕을 세운다는 것입니다. ‘세운다’는 말은 다른 신자들과의 관계 속에서 서로를 성장하게 하고 공동체를 유익하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지식은 중요합니다. 호세아는 ‘이 백성이 지식이 없어서 망한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고 말씀하였습니다. 에베소서 4장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시고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는데, 그들을 세우신 목적은,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말씀하기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좋은데 지식이 없으면 맹종이 되고 맙니다.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온전한 사람이 되어서,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경지에까지 다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세상 풍조 속에서 흔들리지 않고 성숙한 신앙과 인격을 갖춘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는 것만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공동체 안에서 더 중요한 것은 어떻게 지식이 없는 다른 사람들과 건강한 관계 맺고 함께 성장하며 덕을 세워갈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합니다.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 주시느니라”
사람들은 무엇을 좀 안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아직 알지 못하는 것이라고 바울은 말씀합니다. 인간은 ‘무엇을 좀 안다’라고 생각하는 순간 교만해집니다. 지식에 교만이 따라오면 다른 사람에 대해서 그것도 모르느냐고 살짝 무시하고 함부로 판단하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 고린도교회가 갈등을 겪고 있는 우상 앞에 놓았던 제물 문제로 다시 돌아가 보면, 세상의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고, 하느님은 오직 한 분밖에 안 계십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은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며 우리는 그분을 위해서 존재합니다. 또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 계실 뿐이고 그분을 통해서 만물이 존재하고 우리도 그분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고 오늘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이런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교우들은 아직까지도 우상을 섬기던 관습에 젖어 있어서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을 먹을 때는 그 고기가 우상에게 바쳐졌기 때문에 우상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양심이 약하기 때문에 그 음식을 먹으면 그 음식으로 말미암아 자신들이 더럽혀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음식은 음식일 뿐입니다. 그것을 안 먹는다고 해서 영적으로 더 미숙한 것도 아니고, 자유롭게 먹는다고 해서 더 믿음이 좋은 것도 아닙니다. 이것이 지식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지식을 가지고 지식이 없는 사람을 무시해서도, 비난해서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지식 없는 그 사람이 나로 인하여 상처를 받거나 실족하는 일이 없도록 사랑으로 배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지식있는 사람들의 자유로운 행동이 믿음이 약한 사람을 넘어지게 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지식이 있는 사람들’이 먼저 지식의 저주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의 지식이 내가 다른 사람을 무시하거나 상대적 우월감에 교만해 지고, 그래서 지식 없는 사람들을 실족하게 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지금 바울의 관심은 믿음이 연약한 다른 사람에게 있습니다. 나의 지식과 나의 자유함으로 인하여, 지식이 없거나 믿음이 연약한 다른 사람이 상처받는 것을 하나님은 원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죄로부터의 자유, 무지로부터의 자유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을 가지고 우리는 자유함을 누리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 자유함을 누림에 있어서 한 가지를 더해야 합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물론 사랑만이 능사는 아닙니다. 지식 없는 사랑도 문제입니다. 지식 없는 그 사랑이 어린 사람이나 다른 사람을 망치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랑 없는 지식도 마찬가지여서, 믿음이 연약하고 지식이 없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그 영혼의 성장을 가로막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지식이 없는 사람들을 위하여 스스로의 자유도 절제할 줄 알고, 다른 사람의 성숙을 기다려줄 줄도 아는 것이 사랑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속성입니다.
13장에서 바울은 사랑을 노래했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 그의 무지나 그의 미숙함으로 인하여 내가 힘들지만 그래도 참아주고 그가 성장하기를 기다려 주는 것입니다. 쉽게 사람을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합니다. 자신의 지식이나 자신의 은사를 함부로 자랑하지 않습니다. 섬기라고 주신 것이지, 자랑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조금만 가졌거나 조금만 아는 것이 있으면 가만히 있지 못하고 드러내고 자랑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러나 나의 자랑으로 인하여 상처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랑은 자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만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교만 가운데 여러 가지 교만이 있습니다. 권력을 가지면 교만해집니다. 권력의 교만입니다. 힘 없는 사람들을 가볍게 여기고 자신의 힘을 믿고 제멋대로 굴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도덕적인 교만도 있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에 비하여 좀 더 의롭고 도덕적으로 살고 있다고 하는 자기 의에 도취되어, 다른 사람을 쉽게 판단하고 경멸하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지적인 교만이 있습니다. 내가 조금 아는 것을 가지고 다 아는 것처럼 우쭐댑니다. 내가 좀 더 아는 것이 있다고 다른 사람을 무시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왜 선악과를 따 먹었습니까? ‘이것을 먹어도 절대로 죽지 않는다.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처럼 된다’고 하는 뱀의 유혹에 넘어가서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 먹은 것입니다. 마치도 자기가 하나님인 것처럼, 선과 악, 모든 것을 분별하고 판단하는 지식이 있다고 착각하고, 그래서 제 멋대로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식은 교만하게 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모른다고 하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지식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세상에는 우리가 모르는 것 투성이입니다. 여러분, 나의 미래를 알 수 있습니까? 내일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알지 못하는 우리들입니다. 지식과 힘을 가지고 더 많은 이익을 얻고 더 높은 자리로 나가고자 하지만, 그리고 어느 정도 위치에 도달했고 재물을 모을 수는 있겠지만, 그래서 ‘내 영혼아 이제는 편안히 먹고 마시고 즐기자’라고 스스로에게 말하지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 내가 네 영혼을 취하리니 그러면 네가 모은 그 모든 것들은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누가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비유입니다. 인간에게는 한계가 있습니다. 모든 것을 알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모르는 것이 많다, 우리에게는 저마다의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은혜를 알아야 됩니다. 많이 배우고 똑똑한 사람들이 흔히 모르고 살아가는 것 가운데 하나가 ‘은혜’입니다. 모든 것이 내 노력과 지혜로 된 것처럼 착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나의 나 된 것은 내가 아니라, 나를 위해 희생하고 헌신한 분들의 은혜요, 우리 사회 누군가의 희생에 빚진 바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의 인생에 대한 어떤 책임감은 바로 여기서 나오는 것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겸손할 수 있고, 은혜를 베풀 줄 알며, 자신의 삶의 의미를 알고, 그 의미를 위하여 헌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아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 앞에서도 겸손하여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고, 은혜를 아는 사람이 진정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또한 다른 사람을 사랑하며 섬길 수 있습니다. 자신의 지식도,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능력과 은사도, 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선물인 것을 깨닫고, 그 은사를 주신 하나님의 뜻을 좇아서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은혜를 입은 자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려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지만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셨습니다. 오히려 자기를 비우셨습니다. 영어 성경에 보면 ‘made himself nothing’(NIV)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아무 것도 아닌 존재로 스스로를 만드시고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나님께 복종하셨습니다. 그 사랑으로 우리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 은혜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오늘을 살아갑니다. 은혜받은 자답게 살아간다는 것은 이와 같은 자기 비움, 자기 희생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지식은 중요합니다. 힘써 지식을 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안다고 하여도 그 지식에 사랑이 없다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다면 내가 가진 지식은 아무 의미도 갖지 못하고, 그저 스스로 교만해지고, 다른 사람에게 상처나 주는 헛된 것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지식이 모자라는 것보다도 더 큰 문제는 사랑의 결핍입니다.
가정이나 사회나 교회 안에서 진정한 어른, 진정한 지식인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지식의 저주에 빠지지 않고, 지식에 사랑을 더하여, 오늘 내가 살아가는 삶의 자리에서 더욱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을 증거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