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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대칼럼 >
[이매창 에세이]
“부안 기생 매창의 삶과 시”
지은이 | 유지현
< 이매창(李梅窓)을 기리며 >
월명암 깊은 그늘
그대 가난한 배고픔이런가
목숨은 본디 서러운 것
아직 파릇한 그대 무덤에 봄볕 내리고
우리들 예 와 마음으로 고개 숙였으니
이제 그만 눈물 그치시게
오, 4월 거문고 가락 되어
남도에 흩날리는
시린, 시린 매화 꽃보라여
이매창(1573-1610) : 황진이, 허난설헌과 더불어 조선시대
3대 여성시인. 거의 고아처럼 밥 얻어먹으며 자라나 관기(官
妓)가 될 수밖에 없었던 ‘부안 기생 매창’은 홀로 거문고를
뜯으며 외롭게 시를 쓰다 시름시름 병들어 38살에 세상을 떠
났다. 이 시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여성의 이름을 딴, 전북
부안 ‘매창 공원’에서 매창의 묘 앞에 고개 숙이며 쓰게 됐다.
누가 말했나. 신이 자기 모습을 드러내고 싶지 않을 때 ‘우연’이라는 방법을 쓴다고.
내가 ‘매창’을 만난 건 우연이었다.
<여성문화유산연구회>의 ‘너울길 답사’ 소식을 우연히 접하고 바람이나 쐴 겸 별 생각 없이 따라갔다 조선시대 대표적 여성시인 ‘이매창(李梅窓 1573-1610)’을 만난 것이다.
그 시대 여성이 외출할 때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머리 전체에 길게 뒤집어썼던 ‘너울’은 여성억압인 동시에 바깥세상을 향한 자유에의 갈망이기도 하다. ‘역사 속 그녀들을 찾아서’ 라는 부제 아래 버스 한 대로 여자들이 여행을 간 것인데 나는 혼자 조용히 파묻혀 갔다.
처음 도착한 곳은 전북 부안에 있는 ‘매창 공원’,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여성의 이름을 딴 공원이다. 매창의 성품처럼 단아하고 품위 있게 조성돼 있었다. 봄바람이 매섭게 불었지만 햇살은 투명하고 맑게 빛났다. 매창의 묘 앞에 서서 우리들 40여 명의 여자들은 잠시 묵념했다. 숙연했다. 그녀의 무덤위로 환한 빛이 영원처럼 쏟아져 내렸다.
살아생전 검은 그림자처럼 헐벗고, 평생 오지 않는 임을 기다리며 슬피 울고, 홀로 거문고 뜯으며 외롭게 시를 토해내다 시름시름 아프고 병들어 38살에 갔는데, 죽어서라도 이렇듯 좋은 집(멋진 공원)에서 따사로이 햇볕 받으며 누워 있구나, 생각하니 쓰라린 내 마음도 다소 위안이 되는 듯했다. 공원 안 이곳저곳 커다란 돌들엔 그녀의 대표 詩들이 정갈한 글씨로 새겨져 있었다.
매창은 황진이, 허난설헌과 더불어 조선시대 3대 여성 시인으로 알려져 있는데, 관아에 속해 있던 ‘관기’였다. 그 당시 기생은 평생 자기 지역을 벗어날 수 없었기에 ‘평양기생 황진이’처럼 시를 잘 짓는 ‘부안기생 매창’으로 유명했다.
매창은 1573년 부안현의 아전인 아버지 이탕종의 딸로 태어났는데, 계해 년에 태어난 딸이라서 ‘계생(癸生)’이라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 아전인 아버지의 신분이 기생첩을 두어 계생을 낳은 것으로 추측하며, 아버지가 일찍 죽어 계생은 16살 어린 나이에 관기가 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계랑’이라는 애칭으로도 불린 계생은 매화가 핀 창가라는 뜻의 ‘매창(梅窓)’이라는 호를 직접 지어 평생 사용했다.
계생은 관기가 된 뒤 ‘시를 능히 짓고’ 노래를 잘 불렀다.
또 거문고 연주 실력이 뛰어나 그 재주가 다른 지역까지 소문이 났다. 그러던 어느 날, 한양에서 이미 유명한 문인이었던 촌은 유희경(1545-1636)이 부안에 와 매창을 만나게 된다.
그때 그녀 나이 20세, 유희경 48세였다. 유희경도 천민 출신으로 어렵사리 공부해 ‘관혼상제’를 주관하는 직업을 갖게 되었는데, 매창 만났을 당시 이미 유부남이었다. 두 사람은 28년의 나이 차를 뛰어넘어 서로 시를 주고받으며 깊은 사랑을 나누게 된다. 투철한 유교사상에 입각해 오로지 한길로 반듯하게 살아온 유희경은 매창을 만나 평생 처음으로 ‘파계’를 했다고 한다. 유희경은 떠났고 관기인 그녀는 부안에 남았다. 두 사람은 서로 애틋이 사랑했다. 유희경은 훗날 자신의 문집에서 단 한 번도 그녀를 기녀 이름인 ‘매창’으로 부르지 않고, ‘계랑’이라는 애칭으로 부르며 계랑의 이름이 들어간 시만 여러 편 지으며 고희가 넘도록 매창을 사모하고 그리는 심정을 시로 남겼다. 유희경은 ‘계랑’을 진정 정인(情人)으로 여겼다. 매창 역시 그가 떠나고 날마다 유희경을 그리워하며 이런 절창을 남겼다.
이화우(梨花雨)
梨花雨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秋風落葉)에 저도 날 생각는가
천 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라
하얀 배꽃이 하늘에서 비처럼 마구 쏟아져 내리는 봄날에 임과 이별했는데, 매일 그 임을 그리워하며 기다리고 있는데, 이제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는 스산한 가을날이 돼 버렸는데, 아직도 그 사람은 날 생각할까? 여기 전라도에서 저 먼 한양까지 ‘천리 길’을 사이에 두고 임 향한 나의 외로운 꿈만 왔다 갔다 하는 구나,... 하는 매창의 심정이 담긴 시조다.
두 사람은 이별한 지 15년 만에 재회했으나 잠깐 만난 것으로 끝났다고 한다. 그러나 유희경은 매창의 첫 사랑이자 그녀가 가슴 깊이 사랑했던 남자임은 분명하다. 보통 사람들은 ‘한 여자’에게 ‘한 남자만’ 평생 사랑하길 바라는, 일부종사를 강요하는 듯한 순애보를 기대하지만 사실 인생은 역동적이고 기생은 여러 남자를 만나는 직업이었으므로 그것만이 순애보는 아닐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매창에겐 평생 3명의 남자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부안 옆 마을 김제군수로 부임해 매창을 만나 사랑에 빠진 묵재 이귀(1557-1632)도 있었다.
이율곡의 제자로 일찍이 문명(文名)을 떨쳤던 이귀를 만날 당시 매창은 20대 후반으로 사랑과 인생에 대해 아마 정점에 오른 시기가 아닐까 싶다. 이귀와 깊은 사이였을 때 ‘홍길동’을 쓴 교산 허균(1569-1618)이 매창을 만난다. 허균은 훗날 자신의 문집에서 ‘이귀의 정인(애인) 계생이 거문고를 가지고 와서 시를 읊었다’고 쓰고 있다. 아울러 ‘비록 얼굴이 아름답진 않았으나 재주가 넘쳐서 함께 인생이야기를 나눌만하다’고 했다. 매창과 허균은 여남을 뛰어넘어 정신적인 우정을 나누었다. 두 사람은 온종일 같이 술을 마시며 문학을 이야기하다 밤이 깊어지자 매창은 스스로 물러나와 다른 여자를 허균의 방으로 들여보냈다고 한다. 육체적인 선을 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까닭인지 매창과 허균은 그 후로도 10년 이상 시와 참선, 신선사상을 나누며 친구처럼 우정을 이어 갔고, 어느 날 매창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 허균은 매우 슬퍼하며 직접 시 두 편을 짓기도 했다. 허균은 허난설헌의 동생으로, 시집간 누나가 어린 아들딸 다 잃고 27살에 27편의 시를 남기고 죽자 ‘시 쓰는 여자’에 대한 남다른 연민이 있었을 것이다. 매창공원엔 매창의 죽음을 애도하는 허균의 시비 또한 세워져 있다.
매창공원
< 매창의 죽음을 슬퍼하며 >
아름다운 글귀는 비단을 펴는 듯하고
맑은 노래는 구름도 멈추게 하네
복숭아를 훔쳐서 인간세계로 내려오더니
불사약을 훔쳐서 인간무리를 두고 떠났네
부용꽃 수놓은 휘장엔 등불이 어둡기만 하고
비취색 치마엔 향내가 아직 남아 있는데
이듬해 작은 복사꽃 필 때쯤이면
그 누구가 설도의 무덤 곁을 찾아오려나.
(‘설도’는 당나라의 유명한 기생으로 시에 뛰어나서 백낙천, 원진 같은 유명한 시인들과 어울려 시를 주고받았던 여인인데, 이 시에선 ‘매창’을 의미한다.)
답사 일행은 관기였던 매창이 부안의 관아 뒤편에 있는 성소산에 자주 올라 혼자 거문고를 즐겨 탔던 장소인 ‘금대’라는 바위를 찾아가 보았다. 시인은 갔으나 그 바위 주변에 그녀의 숨결이 어려 있는 듯싶었다. 또 변산 깊숙이 위치한 암자인 ‘월명암’도 먼발치에서 구경했는데, 얼마나 깊고 높은지 진짜 하늘이 맞닿을 듯 보였다. 그녀는 ‘월명암에 올라서’라는 시를 쓰기도 했다.
내소사
채석강
그리고 시에는 나오지 않지만 부안에서 평생 살았던 매창이 가보았을 법한 ‘내소사’, ‘적벽강’, ‘채석강’ 등을 둘러봤다. 수만 권 책을 쌓아놓은 것 같은 형상의 채석강은 그 푸른 물결과 절경이 기가 막혔고, 변산의 해안도로가 보이는 적벽강 위로 올라가 ‘수성당’도 가봤다. 서해바다를 다스리는 여자 해신인 개양(수성)할미를 모신 제당이 ‘수성당’인데, 개양할미는 마고할미처럼 굉장히 큰 거신으로 서해바다가 할머니 발목까지밖에 안 온다고 한다. 개양할미는 서해바다 곳곳을 보살피며 길 잃은 고깃배들을 안전하게 인도하고 물길이 깊은 곳은 흙으로 메워주며 풍어를 관장한다고 한다.
‘수성당’은 바위 절벽 가에 세워진 작은 한옥 방 같았는데, 그 앞에 서니 진짜 서해바다가 내 품에 들어오는 듯했다. 평소엔 문을 잠가두는데 그날 마침 수성할미께 제사지내는 날이라 여러 무당들이 시루떡, 과일, 돼지머리 등 생생한 음식들을 푸짐히 제상에 올려놓고 제사를 지내고 있어 좋은 구경을 했다.
그런데 제사에 임하는 무당들의 모습이 너무도 지극정성 경건해서 그저 흥미로운 눈길로 쳐다보던 나까지도 어쩐지 몸가짐을 함부로 할 수가 없었다. 솔직히 많이 배운 것 같지도 않고, 경제적으로 여유 있게 느껴지지도 않았는데, 저토록 기름진 음식을 넉넉히 준비한 걸로 봐서 얼마나 끔찍이 개양할미를 모시는지 알 것 같았다.
38살로 매창이 죽자 당시 아전들이 공동묘지가 있던 부안 봉덕리에 거문고와 함께 그녀를 묻어 주었다. 차마 무덤이라고 말 못 하고 ‘매창 뜸’이라고 했다고 한다. 무덤을 돌봐줄 자식이 없는 일개 기생의 묘가 4백여 년 가까이 잘 보존돼 왔다는 건 그만큼 부안 사람들이 그녀를 아끼고 존중했다는 방증이다. 근처 나무꾼들이 매창의 무덤을 자발적으로 관리해 주었다고 하며 사후 45년이 지난 1655년에 무덤 앞에 비석이 세워졌다.
매창은 생전에 수백 편의 시를 지었으나 그 당시 인쇄기술도 변변치 않아 그저 마을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어 돌아다녔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그녀가 죽고 무려 58년이 지난 1668년 12월 ‘개암사’라는 절에서 목판본으로 <매창집>이라는 유일한 시집이 발간된다. 주위 사람들이 외우던 그녀의 절창 57편을 모아 만든 것이다. 조선시대 문인들의 문집은 보통 가족이나 제자들이 돈을 모아 펴냈는데, 피붙이 하나 남기지 않고 떠난 기생의 시집을 사후 58년 뒤 고을사람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시가 사라지기 전에 기록으로 남겼다는 것은 부안사람들이 얼마나 매창의 시를 사랑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매창집>을 찾아 절의 살림살이가 어려울 정도였다고 한다.
일정 끝나고 서울로 오는 버스 안에서 여러 선물이 걸린 간단한 장기자랑 대회를 했는데 1등에겐 단 한권뿐인 ‘매창시집’을 준다고 했다. 난 귀가 번쩍 뜨였다. 어디가든 조용히 있는 편인데, 오로지 시집 얻고자 손을 번쩍 들고 앞쪽 무대로 나아갔다. 겨우 매창 시 한 편 읽고서 “저, 매창시집 주시면 안 돼요? 꼭 갖고 싶어요!”하며 아주 공개적으로 요청하니 주최 측에선 할 수 없이 그냥 나에게 주었다. 그날 밤, 잠들기 전 매창의 시들을 보았다. 가슴이 쓰렸다. 시를 읽다 울며 잠들었다. 다음날 아침, 식구들 다 나가고 혼자 다시 시집 펼쳤다. 또렷한 정신으로 한 구절 한 구절 시를 읽으니 뚝뚝 눈물이 떨어졌다. 굽이굽이 외롭고 가난하고, 서럽고 춥고, 배고픈 기록들뿐이었다.
< 내 신세를 한탄하며 >
봄날이 차서 엷은 옷을 꿰매는데
창가에 햇빛이 비치고 있네.
머리 숙여 손길 가는 대로 맡긴 채
구슬 같은 눈물이 실과 바늘 적시누나
< 규중에서 서러워하네 >
배꽃 눈부시게 피고 두견새도 우는 밤
뜰에 가득 달빛 어려 더욱 서럽구나.
꿈에나 만나려도 잠마저 오지 않고
일어나 매화 핀 창가에 기대니 새벽닭이 울더라.
< 병들고 시름겨워 >
독수공방 외로워 병에 지친 몸이 남아서
굶고 떨며 사십 년 길기도 해라.
인생을 살아야 얼마나 산다고
가슴 속에 시름 맺혀 옷 적시지 않은 날 없네.
< 기박한 나의 운명 >
세상 사람들은 낚시질을 좋아한다지만
나는 거문고를 타네.
세상 길 가기 어려움을
오늘에야 비로소 알겠노라.
발 잘리고 세 번이나 부끄러움 당하고도
끝내 임자를 만나지 못해,
아직도 옥덩이를 붙안고
형산에서 우노라
< 시름겨워서 >
떠돌며 밥 얻어먹기를
평생 부끄럽게 여기고
차가운 매화 가지에 비치는 달을
홀로 사랑하노라
고요히 살려는 나의 뜻
세상 사람들은 알지 못하고
제멋대로 손가락질하며
잘못 알고 있어라
옷 부족해 바느질하며 눈물 흘리는 그녀, 깊은 밤 잠 못 이루고 서러워하는 그녀, 달빛 아래 홀로 거문고 뜯으며 우는 그녀, 굶고 떨며 외로이 병든 육신으로 시름에 잠긴 그녀, 아버지가 일찍 죽고 거의 고아처럼 밥 얻어먹으며 자라나 기생이 될 수밖에 없었던 그녀, 하지만 그 누구보다 고결하고 예술을 사랑했건만 세상 사람들에게 천한 ‘기생’이라는 이유로 손가락질 당했던 그녀... 얼마나 이 누더기 같은 남루한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었으면, 저 훨훨 나는 천상의 아름다움을 꿈꾸는 ‘신선세계에 올라’ 같은 도교적 이상세계를 그린 시들도 남겼을까?...
그녀의 시 읽으며 하나 둘 떨어지던 눈물은 줄줄 흘러내렸고, 어느새 어깨 들썩이며 울게 됐고, 점점 더 흐느끼며 통곡으로 변해갔다. 매창이 너무 불쌍해 내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 같았다. 어쩐지 내 눈엔 다 보이는 듯 했다. 그녀의 얼굴, 눈빛, 표정, 몸짓, 걸음걸이... 모든 게 다 영화처럼 보이는 것 같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가 걸었던 유채꽃밭, 그녀가 먹었던 허름한 음식, 거문고 뜯는 모습, 홀로 잠든 작은 이부자리, 심연 같은 외로움... 그 모든 게 생생히 내 눈에 다 보였다. 손에 잡힐 듯 구체적이어서 귀신에 씌웠나, 내가 미쳤나?, ... 그런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그냥 다 저절로 알 것 같았다. 그래서 끝도 없이 울었다. 울고 또 울고 도무지 눈물이 그치질 않았다. 너무 울어 눈이 따끔거리고 쓰라렸다. 저기, 가녀린 몸집에 검고 마른 매창이, 4백년 내내 울고 있는 여자가 슬픈 얼굴로 나를 돌아보고 서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와 내 눈동자가 딱 마주쳤다. 꼭 시를 쓰려고 한 건 아닌데,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슬픔에 생각나는 대로 아무 말이나 막 위로하듯 써 내려갔는데 종이가 30장도 넘었다. 그 애처로움과 비참한 삶 목도하며 무슨 말이라도 해줘야지, 그렇지 않고선 슬픔을 참을 수가 없었다. 수백 년째 무덤에서 울고 있는 저 스산한 얼굴에게 그만 울라고, 나는 너를 이해한다고, 나는 다 안다고...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빈집에서 끝도 없이 울었더니 어지럽고 일어설 기운조차 없었다. 배가 몹시 고팠다. 그래서 찬밥에 물 말아 먹으며 흑흑 거렸고, 한술 뜨고 계속해서 펑펑 더 울었다. 한 3시간쯤 울었을까? 흐느끼며 30장쯤 뭐라고 뭐라고 막 쓰고 나니 다소 진정이 됐다. 이 말 저 말 마구 써놓은 걸 겨울나무처럼 본질만 남는 뼈대로 냉정히 쳐내고 또 쳐내 딱 남긴 게 바로 이 졸시 ‘이매창을 기리며’다. 같이 답사했던 분에게 보냈더니 내 허락(?)도 얻지 않고 모임 카페에 공개했는데, 과분하게도 이런 덧글이 달렸다.
* 이매창을 향한 깊은 연민과 이해가 드러나는 시인의 감성에 탄성이 절로 납니다.
* 시를 보니 부안이 곧 매창이 되었네요... 매창의 삶에 부안이 들어온 듯한 느낌...
내소사나 채석강은 자료에서 이매창과의 관련을 찾지 못했어요. 단지 매창이 갖고 있는 부안에 대한 긍정성으로 보았을때, 그녀도 분명 이곳에 왔을 것이고, 그런 이야기만 답사자들에게 할 수밖에 없었는데 어떻게 이렇게 정리가 되는지, 감탄스럽네요. 시인과 일반인의 차이...
시는 내가 썼지만, 완성의 절반은 ‘여성문화유산연구회’ 김소원 선생님의 덕분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다. 영민한 김 선생님은 내려가는 차안에서 매창의 일생을 아주 구체적이고 흥미진진하게 이야기해줬는데 나는 그 강의 들으며 매창의 삶과 일상에 대해 자유롭게 상상할 수 있었다.
내소사 나오는 길 길가에서 ‘뽕나무 술’ 한 병 5천 원씩 팔아 무심히 두 병 사 헤어질 때 김소원 선생님께 한 병 드렸다.
한 병은 집에 와 내가 마셨는데, 기가 막히게 맛있었다. 겨우 5천원밖에 안 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10병쯤 사올 걸... 후회됐다. 다시 돌아갈 수 없기에,... 추억이, 인생이 애틋하고 소중하겠지?...
매창 만나고 다시 나를 돌아보니 난 복이 터진 여자다. 시시한 시들 써놓고 뻔뻔하게 시집까지 출간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詩人’ 소리까지 듣고, 게다가 어쨌든 혼인도 했고, 자식도 둘이나 있으며 최소한 밥 안 굶으니 이만하면 감사 땡큐해야지, 무슨 불평을 하겠는가. 긍정적으로 살자.
노래하자, 춤추자, 유쾌히 살자.
뜨거운 사랑으로, 맑은 영혼으로 힘차게 살자, 다시금 결심했다!
... 이래서 역사 공부 꼭 해야 한다! *^^*
시인 유지현(yy890@naver.com)은 시집 < 달의 역사 >를 출간했고,
뉴욕 맨해튼에서 4년 살고 귀국, 현재는 한국의 서울
마포에서 살고 있다.
그동안 < 미주현대불교 >에 ‘보길도 동백과 상처 없는 영혼’,
‘뉴욕에서의 첫 산행’, ‘사랑하는 임제’, ‘그 새벽의 금강경’,
‘침묵예찬’ 등 다수의 에세이를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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