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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7. 20 답사기-잃어버린 포구 강경에서.....
새날이 밝기도 전에 친구들의 알람이 귓등을 꼬집는다.
어제 교수님한테 강짜를 부려 겨우 출발을 7시로 늦추어 놓았는데 4명이 세수하고 머리 감고 화장하려면 30분은 더 걸릴거다. 슬슬 일어나서 준비를 해야 하는데 몸이 말을 안듣는다.
어젯밤 아니 정확하게 새벽 1시 38분 마징가가 핸드폰을 잘못 밟아 전화하는 통에 잠이 깼는데 그 담부터는 깊이 잠들지 못하고 헤롱거렸다.
마징가 그 시간까지 안자고 뭐하고 있었을까? 좀 의심스럽다 그자?
일단 아침은 대천해수욕장에서 달리기 한판하고 먹기로 합의했다.
대천 해수욕장은 지금 머드 축제가 열리는 기간이라 온갖 매스컴에 소개되고 있어 한번 가보고 싶었다.
보령 시내를 벗어나려고 골목을 이리저리 도는데 갑자기 담쟁이덩굴이 우거진 망루가 하나 나온다.
아하! 저거 보령경찰서 망루로구나.
이건 답사 여행책에서 읽은 기억이 나는데 일제 시대부터 있었고 6.25 당시 빨치산을 감시하기 위한 망루로 쓰였다는 기록이 있다.
일단 근엄하게 폼 잡고 있는 경찰 아저씨가 두려워서(이 나이에도 경찰은 참 무섭더라) 올려다만 보고 있으니 역시 용감한 교수님 터벅터벅 가서는 뭐라고 한참 이야기한다. 경찰아저씨가 망루로 올라가도 좋다고 허락하고 친절하게 손전등까지 빌려주었다.
경찰은 우리를 아주 신기해하며 계속 흘끔거리고 본다. 하기는 보통 관광객들은 여기 올라가 보겠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망루 입구는 너무 좁아서 내가 허리를 있는대로 다 꺾고도 겨우 들어갈 수 있었다. 안은 깜깜하고 물까지 저벅거리는 게 꼭 거미나 박쥐같은 게 나올 것 같다. 위로 올라가니 조금 밝아졌는데 난간이나 계단은 다 요즘 보수한 것이라 생생하고 밖으로 뚫린 총구가 퍽이나 작고 또 덩굴로 가려져 있는 3층 높이의 이 망루가 과연 효과적인 감찰 시설이었을까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보령시를 벗어나니 외곽도로는 온통 머드 축제를 알리는 깃발과 현수막이 날리며 축제 기분을 내고 있다. 20년 전에 와본 대천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남포동 한복판 같은 시가지와 상가들, 줄지어 서 있는 횟집들 여관들....북새통이 따로 없구만. 역시 뭔 축제니 하는 곳은 별로 재미없다.
새벽이라 아직 바닷가에는 사람이 적다. 운동화 벗고 모래사장으로 내려서니 감촉이 짜르르하다. 역시 해운대 모래나 다대포보다는 못하구만. 갯벌이라 하지만 진흙이 아주 고운 건 아니고 사각거리는 모래도 아니고 기대에는 못미쳐도 썰물 때라 넓은 갯벌은 실컷 볼 수 있게 해준다. 쪼그리고 앉아 조개나 참게나 한 마리 잡아볼 양으로 파고 또 파도 조개 꼬랑지 하나 안보인다. 저 건너 줄지어 서 있는 조개구이집 조개는 다 어디서 오는 것일까? 알고 먹어야 한다는 데 한표다.
교수님이 웬일로 한끼 쏘신단다. 이런 일은 별로 없으니 성은이 망극하다하고 빨리 얻어먹는 게 좋겠다. 바닷가에 왔으니 얼큰한 매운탕 한번 먹어보자고 횟집으로 들어갔는데 아침 첫손님이라 주인이 극진하게 한다. 문제는 매운탕 한 냄비가 4만원이란다. 윽!!! 우리 동네에서는 회 4만원 어치 먹으면 푸짐하게 주는 게 매운탕인데 매운탕만 4만원이라니.......교수님은 나가려고 하셨으나 첫손님이라고 우리가 말렸다. 그나저나 2냄비에 공기밥까지 오늘 교수님 된통 바가지 쓰시는구만....
주인은 이런 맘을 아는지 수조에서 큰 우럭을 몇 마리 꺼내었다. 드디어 상다리가 휘어지게 밑반찬이 나오고 매운탕도 왔다. 첫술을 뜨는 순간 우리는 매운탕 - 입 - 매운탕 - 입으로만 수저를 돌리며 소리없이 먹었다.
정말 말할 틈이 없었다. 둘이 먹다 둘이 죽어도 모를끼다. 맵지도 짜지도 싱겁지도 들큰하지도 않고 너무 싱싱해서 살살 녹는 매운탕! 40만원이라 해도 아깝지 않다. 최후의 국물 한방울까지 싹싹 긁어 냄비 바닥을 보이고 우리는 마주보고 웃었다. 말이 필요 있나? 다 같은 마음일텐데....
배 두드리고 '만리포 내사랑'을 불러제끼며 남포 방조제를 달린다. 아침 안개가 아직 걷히지 않아 서해 바다는 보이지 않아도 길 가 코스모스는 앙증맞게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자, 이번엔 최치원 유적지 병풍바위다
어제 성주사에서도 최치원 비문(국보임)을 보았는데 여기도 그가 남겼다는 유적지가 한 곳 있다. 하기는 전국 각지에 좋다는 곳은 다 그가 다녀갔음이 확인되고 있으니, 도대체 1000 년이나 전에 차도 없고 줄지어 서 있는 모텔도 없고, 전화도 없는 그 시절에 꽃피는 팔도강산을 얼마나 헤매었단 말인가?
문학적 재능을 다 놓아두고도 가이없는 국토사랑의 정열에 존경을 표할 다름이다. 또한 아름다움을 보는 미학적 안목에도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이제는 육지의 언덕이 되었지만 예전에는 이 곳 병풍바위까지 바닷물이 차서 배를 타고 돌아보았다고 한다. 지금도 이리 위용당당한 모습이니 그 때는 얼마나 더 아름다운 절벽이었을까?
바위틈에 핀 원추리들이 너무 화사해 꺾고 싶었으나 지금 내게는 헌화가를 부르며 꽃 꺾어줄 마징가가 없다.
길을 돌려 강경으로 가기로 했다. 강경은 젓갈로 유명한 포구다. 포구란 당연히 바닷쪽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지도를 보니 강경은 상당히 내륙 쪽에 있다. 금강을 끼고 한참이나 내륙으로 들어간 곳...부여나 논산이 가까운 그 곳에 왜 포구가 발달했을까?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하다. 해산물과 농산물 임산물이 다 모이기 가장 좋은 길목이기 때문이란다.
논산평야를 끼고 있는 금강포구 강경은 젓갈이 한데 모여 떠들썩한 시장을 이루는데 온 김에 새우젓도 조금 사가려고 마음먹었다.
새우젓보다 좀 더 기대했던 건 강경 포구의 모습이었다. 물론 옛날처럼 황포돛배도 없고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가 오가는 주막도 없겠지만 왠지 강경 포구는 옛 이름대로 남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내 기대가 너무 컸을까? 포구의 모습은 전혀 남아 있지 않고 나루가 있었다는 곳에는 레져 센터가 떡 하니 새로 지어져 옛 정취는 조금도 맛볼 수 없었다. 참 안타까운 일이다.
구포다리가 태풍으로 내려앉아 무너뜨린다고 할 때도 난 우매한 부산시청을 싸잡아 욕했다. 옛날 다리는 그냥 보수해서 인도교로만 사용하든지 자전거 도로로 사용하든지 그것도 아니라면 그냥 걸어만 두어도 낙동강의 역사가 절로 보일텐데 돈 들여 부수어 버리겠다는 발상이 실로 가슴아팠다.
우리는 왜 새 역사를 창조하자는 구호만 깊이 기억하고 지나간 역사를 소중히 하는 일에는 이리 인색한 지 모르겠다. 포구도 사람도 모두 이제는 옛날 일이 되었고 더운 날씨에 괜시리 짜증이 난다.
새우젓, 어리굴젓, 명란젓, 깻잎 무침까지 모두 자기 입에 맞는 젓갈을 사서 차에 싣고는 강경 미내다리와 원목다리를 보러 떠났다.
미내다리와 원목다리는 둘 다 홍교다. 홍교는 무지개 모양의 다리로서 주로 성문이나 궐문 등을 만들 때 쓰는 기법이다. 보통 시골에는 흙과 나무를 이어 다리를 놓는 것이 일반적인데 돌다리가 2개나 있다는 것은 강경이 경제적 기반이 탄탄한 부유한 고장이었다는 뜻이다. 미내다리는 물 속에 많이 잠겨 있어 모습을 다 보기는 어렵다고 판단되어 원목 다리를 보기로 했다. 두 다리는 비슷한 시기에 세워 졌으며 기법 또한 같지만 미내다리쪽의 돌이 장대석으로 더 크고 다리도 더 길다고 한다.
원목다리는 큰길에서 한참 떨어져 있었다. 거의 철길과 붙어 있다고나 할까? 비포장 길에서 만난 할머니는 우리가 그 다리를 보러 부산에서 왔다고 하자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어이고 그 멀리서 뭘 보라고~~를 연발하신다. 하기는 30도가 넘는 불볕에 그늘 한 조각 없는 들판을 딸라 쭉 걸어가야 한다고 할 때 기운이 빠지기는 했다. 그래도 볼 거는 봐야지. 챙만 있는 모자가 싫어진다. 뜨거워진 머리며 열 받은 발바닥이 화닥거리고 두 팔에 쏟아져 내리는 땡볕이 무서워 다리고 뭐고 차에 타고 싶은 마음 간절하였다. 그래도 다리에 다다랗을 때 사진 찍을 기운은 있었다. 벌교홍교가 생각나는 순간이다.
뛰어서 가자. 이 더운 들판을 어서 벗어나자. 차가 서 있는 마을 어귀까지 거의 1000 미터를 오래 달리기 하듯 뛰었다. 햇볕이 무서워서.....작년 여름 사막보다 오늘이 더 더운 것 같다.
이제 어디로 가나?
다음 목적지는 논산 쪽에 있는 윤증고택이다. 윤증을 조선후기 학자로 대쪽같은 곧은 성품으로 존경 받는 학자이고 그가 지었던 집이 아직도 남아 마을이 이루어져 있었다. 우암 송시열의 문하였던 그는 스승 우암을 존경하였지만 정치적인 면에서 반기를 들었고 그것을 이유로 출사하지 않고 후학 양성에만 힘쓴 말하자면 재야 인사였다.
윤증고택은 강릉의 선교장과 많이 닮았다. 집 앞의 연못은 활래정을 떠올리게 했고 집 뒤의 소나무 숲이 또 그러했다. 선교장은 긴 행랑채가 특징이었는데 윤증고택은 날아갈 듯 올라앉은 사랑채가 인상적이었다.
사랑채는 겉으로 보기에 정면 3칸 정도의 아담한 기와집이다. 그런데 왠걸........살짝 트여 놓은 쪽마루 창문으로 보이는 뒷 담장과 굴뚝이 한 폭의 그림이다. 방문을 살그머니 열어보니 아직도 사람이 기거하는 흔적이 있다. 신문이랑 책 몇 권......이 집에는 후손이나 관리인이 살고 있는가보다 하고 나오려는데 맞은편에 방문이 또 하나 있다.
주인 있는 집에 말도 없이 들어가는 건 가택 침입죄(?)라서 포기하려다가 궁금한 마음 포기할 수 없어 방문을 열었더니 또 방이 있다. 그 맞은 편을 여니 또 방이 있고 또 방이 있고......미로처럼 꺾여 6칸이나 되는 방이 높이도 모두 다르게 숨어 있었다.
지금까지 여러 고택들을 둘러보았지만 이 집처럼 특이한 사랑채는 처음이다. 우선 겉보기와는 다르게 담장 뒤로 숨어있는 방의 개수가 너무 많고 그 방들이 모두 겹집의 형태로 연결되어 있으며 방 높이도 다르다는 사실이다. 교수님도 자못 흥미로운 시선을 거두지 못하고 계신다.
도대체 왜 이 집 사랑채는 이렇게 여러 개의 방이 필요했을까? 그 해답은 집주인 윤증에게 있었다. 윤증은 후학을 양성하고자 했고 자기집 사랑채가 곧 학당이고 기숙사였던 것이다. 그 방들의 높이가 다른 이유는 후학들의 등급이었나?
사랑채를 돌아 안채로 가니 사람 사는 냄새(?)가 확실히 난다. 대청 마루에 떡 버티고 서 있는 대형 냉장고가 그렇고 수돗가에 올망졸망 퐁퐁이니 플라스틱 바가지, 비누갑, 대야들......우리 삶이 바로 거기에 있지만 이 집과 어울리지 않는 이 불편한 시선을 우짜리오. 우리 집 목욕탕에도 똑같은 분홍 플라스틱 바가지와 비누갑이 있지만 그 바가지가 이렇게 내 눈을 피곤하게 할 줄 몰랐다. 바가지는 이 고택과는 어울리지 않는 이물감이 들어 바라보는 것도 인내가 필요할 지경이다.
역시 집과 주인, 여러 가구나 집기들은 서로 어울려야 멋이 난다는 또 하나의 깨달음이다. 쭉쭉빵빵 안젤리나 졸리가 한복을 입어 봤자 우리 외할머니 맵시에도 따라오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지.
여기서 우리는 또 하나의 과제를 안고 간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고택들은 어떻게 보존 관리할 것인가? 고택의 운치를 살리기 위해 깨끗이 원형을 보존하고 비우라고 해도 사람이 살지 않은 집은 이미 생명력이 없다. 거칠게 바랜 툇마루도 하루가 다르게 윤기를 잃을 것이고 주련이 내걸렸던 기둥도 거미들만 소풍하는 곳이 될테니까.....하지만 고택의 원형 보존이라는 미명 아래 불편한 채로 옛 방식을 고수하며 집에 어울리게 살아라 하는 것도 이기적인 주문일 테니 참 에렵다. 제일 좋은 방법은 고택 옆에 새로 집을 짓고 후손이나 국가에서 책임지고 관리해 준다면 참으로 좋겠지만 이 나라가 지금은 그럴 여력이 없을 것이다. 결국은 또 경제논리가 나오는구만.....
날은 더워 숨이 턱하니 막히는데 원기는 전화를 해대며 집 뒤 언덕에 공자 사당이 있다고 빨리 오라는 성화를 한다. 이 동네의 이름이 대성동인데 이는 공자가 살았다는 마을 이름에서 땄다고 한다. 결국 윤증은 자기 스스로를 작은 공자 정도로 생각하고 집을 짓고 마을을 만들고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후학을 양성한 모양이다. 당파에 이리저리 휘말리지 않고 절개를 지켰다는 의로운 평가도 있으나 내가 보기엔 결국 자기 사랑이 매우 강한 나르시즘의 거두인 것 같다.
우리는 대강 정리하고 차에 탔다. 시원한 아이스크림이 정말 딱 하나 먹고 싶었다. 처음 만난 슈퍼 앞에 차를 세우고 일행 9명이 한꺼번에 동시 합창으로 아이스크림을 제안했다. 막내 원기씨.....박사면 뭐하고 대학 강사면 뭐하나? 이 모임에 오면 항상 뒷치닥거리는 그의 몫이다. 나는 한해 위 선배라는 사실만으로 목에 힘주고 기다리고 앉아 돌아와서 내밀 시원한 아이스크림만 생각하면 된다.
드디어 원기가 왔다. 더위사냥이다. 난 평소에 아이스크림 안 먹는데 꼭 먹어야 한다면 더위사냥을 먹는다. 반으로 뚝 잘라 오랫동안 먹을 수도 있고 넘에게 인심 쓸 수도 있으며, 또 커피향이 나고 덜 달아서 좋다.
우리는 서로 권할 틈도 없이 마구 먹어대었다. 오늘 날씨가 우리를 아주 원형적 인간으로 만들기에 충분하다. 역시 인간은 힘든 상황에 처하면 약간의 예의나 교양 같은 건 엷어지는가 보다.
정말 덥다. 9인승 카니발2에 어른 9명이 빽빽하게 앉아 게다가 짐도 배낭 한 개씩은 넘는데.......특히 앞자리 서교수님과 이교수님 주석 선배, 뒷자리 산도깨비 3자매는 거의 죽을 맛이었을 게다.
난 역시 어딜가나 복이 많아 양쪽에 앉은 남자들(원기와 종길아저씨)은 겁나게 날씬하고 또 내게 몸이 닿을까 잔뜩 긴장하여 둘 다 창가쪽으로 당겨 앉아서 가운데 앉은 나는 여유롭게 어깨도 펴고 팔도 움직일 수 있었다.
아이스크림을 다 먹어 갈 즈음 앞자리를 보고는 나는 입안에 파편이 튀어나오도록 웃었다. 두 교수님은 아이스크림을 절반도 못 드셨는데 이유인즉슨 아이스크림 종이를 까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종이를 까다니? 찬찬히 보니 아이스크림 먹는 방법을 몰라 종이 까느라고 시간보내는 사이 아이스크림은 줄줄 녹아 내리고 있었다.
세 살짜리도 다 아는 밀어 올려 먹는 법을 교수님 두 분을 몰라서 쩔쩔 매고 계셨다. 정말 우습다. 두분 다 학계에서 권위 있는 분이지만 실생활에서는 헛점(?)이 많은 것도 사실인데 지금처럼 아이스크림 먹기가 바로 그 예다. 방법을 가르쳐 드리니 이렇게 쉬운 방법이 있었냐고 신기해하신다. 두고두고 못 잊을 일이다. 까서 먹는 더위사냥!
자, 이제 은진미륵을 보러 관촉사로 가자.
관촉사는 은진마륵이 있는 걸로 유명해서 누구나 여행 엽서에서 그 미륵 부처를 보았을 것이다. 주차장에서 500 미터쯤 걸어 들어가니 아담한 관촉사가 모양을 드러낸다. 멀리서도 은진미륵은 잘보였지만 가까이서 보니 정말 큰 돌부처이다. 특히 미륵전은 법당 뒷벽이 아예 유리로 되어 있고 모셔진 부처가 없다. 유리 너머로 은진미륵불이 보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미륵전을 앉힌 자리는 누가 정했는지 몰라도 잘 골랐다. 유리 너머로 보이는 부처가 좋아서가 아니고 은진미륵의 키가 커서 각도상 무릎 꿇고 앉지 않으면 부처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으로 하여금 또 다시 부처 앞에서 겸허해지라는 무언의 암시다.
앙코르와트의 사원 계단도 그러하다고 들었다. 인간이 신을 배알하러 오는 길에 뻣뻣하게 서서 올 수 없도록 아예 경사를 70도 정도로 만들고 두팔과 두발을 동시에 써서 사원까지 기어오르도록 만들었다고.........여기 은진마륵도 미륵전 바깥에서 대강 봐서는 몸통만 보일 뿐이고 유리벽 앞에 꿇어앉아야 부처님 미소를 볼 수 있으니 같은 이치라고 하겠다.
해도 지고 부산까지 갈 일이 아득한데 교수님은 마지막으로 하나 더 보자고 하신다. 견훤의 묘를 한번 더 보고 싶다고 하셨다. 저 고집을 꺾을 사람은 여기 아무도 없다. 교수님들은 한번 말을 하면 끝까지 우기는 경향이 있는데 좋게 말하면 우직함이고.......
지금처럼 몸이 더위와 피곤에 쩔어 있을 땐 제발 참으라고 말씀드리고 싶지만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까? 다들 지치고 기운이 빠져 길도 헤매고 지도를 보는 집중력도 떨어져 겨우 겨우 견훤 묘를 찾아갔다.
경주에서 많이 보았던 그 큰 무덤은 새롭지는 않지만 견훤이라는 인물이 실제로 존재했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하여 주고 한쪽으로 치우쳐 있던 역사에 대한 견해를 약간은 수정해 준다. 우리는 항상 승리자의 역사를 기억한다. 삼국 중에서는 통일을 이루었다는 신라에 대한 많은 연구와 집중적 조명이 바로 그러하다. 백제의 문화는 사실 다른 나라의 학자들이 더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는 말고 있을 정도니까....
견훤의 묘 앞에서 1박 2일의 대 장정을 정말 빠듯하고 알차게 그리고 무사히 끝나게 된 것을 서로 자축하며 아까 산 막걸리로 목을 축였다. 어딜 가나 술 한잔 못하는 나는 생수만 벌컥벌컥 들이키고 붉은 석양을 보았다. 내일도 참 덥겠다.
서교수님은 바로 여기서 서울로 가시고 우리는 부산까지 열나흘 달을 보며 또 달린다.
주석선배 정말 대단하다. 가만 타고 있어도 덥고 짜증나고 피곤한데 1박 2일 개인시간 하나 없는 이 빡빡한 일정동안 계속 운전하고 메모하고 사진찍고......정말 뭐라고 할 말이 없다. 하기는 작년 실크로드 때는 2박 3일 안자고 사진 찍고 비디오 찍고 그러더라. 참........
자, 이제 교수님과 주석 선배는 중국으로 한 달간 날아갈 끼고 남아있는 산도깨비는 무엇을 하며 이 여름을 알차게 보낼지 구상해야겠구만. 항상 느끼지만 여행은 떠나기 전, 준비하고 기대하며 조사하는 활동이 가장 핵심이란 걸 이번 답사의 가르침으로 채워 넣는다.
첫댓글 정말대~단한 정성이다 미미 화이팅!!
노력한 만큼 만끽할 자격이 충분하고 수고하셨구만. 뭘 찾는 여행인지는 잘 몰라도 결국은 너 자신을 찾는 거겠지???
암튼 존경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