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잘사는 것일까?(딤후1:9-14)
2024.5.12 스승의 주일, 김상수목사(안흥교회)
얼마 전 어느 신앙서적을 읽는 중에 일본에서 있었던 실화하나를 접했다. 젊은 나이에 일본의 유명한 금융회사에서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고 높은 자리에 올랐던 엘리트 청년이 있었다. 어느 날 그는 큰 교통사고를 만나서 8개월 동안이나 입원했다.
그런데 퇴원하는 날 아침에 그는 병원 옥상에 올라가서 투신자살을 하고 말았다. 그가 남긴 유서에 의하면, “내가 없어도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잘 돌아가는 회사를 보면서, 나 자신의 존재 의미를 발견할 수 없기에 자살을 택한다”라고 적혀 있었다. 그는 왜 이렇게 생각을 했을까? 그것은 그가 직업인으로서 인정받고, 빠른 나이에 성공했다는 소리를 듣는 것이 ‘잘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았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잘 산다’라고 말할 때, 직업인으로서 잘산다는 것과 인간으로서 잘산다는 것은 다르다. 아무리 직업인(학생, 군인, 직장인, 사업가, 모든 직업)으로서 행복하다 할지라도, 인간으로서 행복한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면, 그는 진짜 행복한 사람이 아니다. 그가 느끼는 행복은 단지 “신기루 행복”일 뿐이다. 며칠 전에도 수능시험에서 만점 맞았던 명문대 의대생이 여자 친구를 살인한 뉴스를 접했다. 직업이나 높은 신분 또는 재산의 액수에 의한 행복을 잘사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앞에서 언급한 일본인처럼, 그것이 사라지는 순간(부도, 은퇴, 질병, 실패 등),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을 수 없게 된다.
우리의 목숨은 하나 밖에 없다. 그렇기에 한 번 사는 인생, 잘 살아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사는 것이 인간으로서 잘사는 것일까? 그것은 인간의 존재 목적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나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시고, 나에게 재능이나 직분이나 소유물들을 주신 목적에 따라 사는 것이 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마치 출항은 했으되,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다니는 배와도 같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호화롭게 꾸몄지만, 파도에 따라 여기저기 떠다니는 크고 작은 배들로 가득하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고 말씀한다(사43:7,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방법과 수단으로 각 사람에게 재능과 직업과 직분들을 주셨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위해 나를 부르신 것(Calling)을 소명이라고 하고, 나에게 명령하고 맡겨주신 일(임무, 과제, 직업, Task, Mission)을 사명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시고, 그 목적이 이끄는 대로 사는 사람이 잘 사는 사람이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사도 바울은 이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을 또 다른 표현으로 “이 복음을 위하여”라고 했다. 다 같이 오늘 본문인 디모데후서 1장 11절 말씀을 읽어 보자.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For this gospel)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딤후 1:11)
사도 바울은 자신이 부여받은 사명을 선포자, 사도, 교사라고 표현했다. 이것을 오늘 우리들 각자에게 적용하면, 교회 안팎에서 나에게 맡겨주신 각종 직분이나 직업들 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마침 오늘이 교회적으로는 스승의 주일이고, 사회적으로는 금주 수요일(5/15)이 스승의 날이기도 하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처럼 우리(나)를 세워주신 목적이다. 하나님이 나를 거룩한 소명으로 불러주신 이유는 오직 “복음을 위하여(For this gospel)”이다(11절). 다시 말하면 나에게 맡겨주신 각종 직분들과 재능과 내가 가진 모든 것들을 통해서 “십자가 복음을 전하는 것”이 곧 복음을 위한 삶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며, 내 인생의 목적이고 그것이 곧 잘 사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지금 우리사회는 “핵(核) 가족” 시대를 넘어서 “핵(核) 개인” 시대로 빠르게 가고 있다. 공통체성이 무너지고 있다. 심지어 사람보다는 반려동물을 더 가족처럼 여기고, 심지어 AI와 로봇도 가족으로 여기는 시대에 진입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시대가 되면 행복할 것 같았지만, 전혀 그렇지 않고 있다. 편한 것과 잘사는 것은 다르다. 오히려 더 흉악한 범죄와 외로움은 급속도하게 증가하고 있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인간의 본성은 변하지 않는다. 오히려 종말의 끝을 향해 갈수록 더 악해진다.
그렇다면 이 시대 이러한 종말적 현상들에 대한 해답은 무엇일까? 십자가 복음이다. 인간 내면의 죄성과 마귀 사탄의 머리를 박살내고 승리하는 삶의 비결은 오직 십자가의 복음뿐이다. 모든 성도들과 교회학교 교사를 포함한 교회 안의 직분자들은 바로 이러한 복음을 위하여 가르치고 전도하는 사람으로 세움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래서 이러한 인간 본성과 그에 대한 해답을 알았기에 초대교회는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상관없이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않았다(행5:42).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행 5:42)
초대교회 성도들의 이러한 모습이 곧 오늘 우리들과 우리교회가 존재하는 목적과 방향이다. 그렇기에 “다시 십자가! 오직 십자가!”로 돌아가야 한다. 만약 지금까지 이것을 몰랐다면, 지금부터 이러한 방향으로 복음을 향해 삶의 방향을 설정해야 한다. 만약 성도들 가운데 이런 저런 삶의 분주함으로 인해서 이러한 목적을 잊고 살았다면, 즉시 다시 마음의 영점조정을 해야 한다.
얼마 전에 [한국성결신문, 1405호]에 실린 신촌교회 원로인 이정익 목사님이 실천신학대학원 총장 퇴임 인터뷰 기사가 있었다. 그 내용 중에 인상적인 부분을 잠시 소개한다.
“(기자의 질문) 다시 목회한다면, 어떻게 하고 싶습니까?
(이정익 목사의 대답) 전도를 강조하고 싶어요. 사실 담임목사가 전도하라고 설교한다 해서, 전도하지 않아요. 목사가 교육시켜서 직접 데리고 나가야 합니다. 목사가 시범을 보이면, 그때 성도들도 따라옵니다..... 100명을 전도했는데 1명이라도 회심했다면, 100명을 만나느라 수고한 건 다 잊어버립니다. 한 명을 얻었을 때, 전도자도 영적 성숙이 일어납니다.... 설교도 달리 하고 싶습니다. 사람들에게 듣기 좋고 재미있는 것보다, 근본적인 내용을 전하고 싶습니다. 모인 사람들이 회심에 이룰 수 있는 설교 말입니다. 목회할 적에는 교회 부흥을 시켜야 하니 즐겁고 재미있게 해주느라 거기서 많이 이탈했어요. 성도들의 그런 허전함을 채우느라 자꾸 프로그램이 가미되는 거죠.”
특히 마지막에 “교회 부흥을 시켜야 하니 즐겁고 재미있게 해주느라 거기서 많이 이탈했어요. 성도들의 그런 허전함을 채우느라 자꾸 프로그램이 가미되는 거죠.”라는 대답이 본 설교자에게는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전도를 더 강조하고, 근본적인 내용을 설교하고 싶으시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십자가의 복음이 아닌가?. 이정익 목사님은 목사님이니까, 나와는 상관없는 내용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우리들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복음을 위한 삶은 누구나에게 동일하게 해당되기 때문이다.
신약성경에 보면, 사도 바울도 이미 자신에게 자랑할 것들이 많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십자가만 자랑하고(갈:14), 십자가만 알기로 작정하였다고 고백한 바들이 있다(고전2:2).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갈 6:14)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본 설교자는 우리들 모두가 정말 지혜 있고, 인간답고, 부름 받은 사람답게 살기를 원한다고 확신한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나 수십 년 목회를 하고 강의하셨던 분들의 권면들을 허투로 들으면 안 된다. 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 지금 우리가 살아갈 길이 보인다. 물론 복음을 위해 살려할 때에는 고난이 따른다. 포기해야 할 것도 많다. 심지어 억울한 일이나 가슴이 벌렁거리는 황당한 오해들을 받기도 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결론적으로 오늘 본문인 디모데후서 1장 13-14절에서 이렇게 권면했다.
“13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14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딤후1:13-14)
우리들이 어떻게 복음을 위한 사명을 지켜내야 하는가 하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그리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이다. 그냥 단순한 나의 신념이나 인간적인 바람이나 애틋한 정(情) 정도가 아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이어야 한다. 이러한 믿음과 사랑에는 성령님의 도우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아무리 목적이 좋아도 내 힘만으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지역 주민들이여, 그러므로 정말 우리들이 한 평생을 살아가는 동안 잘살기 원한다면, 단순한 직업인으로서의 성공이나 소유물의 유무에 성공의 기준을 두지 말자. 오직 복음을 위해, “다시 십자가, 오직 십자가”로 우리 인생의 방향을 ‘영점조정’하자.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길이고, 우리들 자신에게는 참된 행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