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列國誌]
3부 일통 천하 (183)
제13권 천하는 하나 되고
제 20장 호부(虎符)를 훔친 신릉군 (7)
신릉군이 조나라에 머물러 살면서의 뒷 이야기 셋.
신릉군(信陵君)은 조나라에서 10년간 머물며 위(魏)나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런데 진(秦)나라는 그사이 신릉군이 없는 위나라를 조나라 대신 매년 공격했다.
시달림에 견디지 못한 위안리왕(魏安釐王)은 자신을 속인 신릉군을 용서하고 사신을 보내 그에게 돌아올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신릉군(信陵君)은 어떤 보복을 당할지 몰랐기 때문에 위안리왕의 요청을 매번 거절했다.
뿐만 아니라 자기 문객들에게 엄한 영을 내렸다.
- 위(魏)나라 사신을 내게 안내하는 자는 가차없이 목을 베리라!
이 때문에 위나라의 위기를 알면서도 감히 돌아가자고 권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것을 본 도박꾼 모공(毛公)과 술꾼 설공(薛公)이 신릉군에게 간했다.
"조(趙)나라가 공자를 중히 여기고, 세상 사람들이 공자를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다름이 아닙니다. 오직 위(魏)나라가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진(秦)나라가 연일 위나라를 공격하는데, 만일 대량성(大梁城)이 함락되고 선왕의 종묘가 부서진다면 공자께서는 장차 무슨 면목으로 천하 사람을 대하려 하십니까?
그때도 천하인들이 공자를 높이 대접할 것으로 여기십니까?“
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신릉군(信陵君)은 수레를 준비하여 위나라로 돌아갔다.
이에 위안리왕(魏安釐王)은 신릉군에게 상장군의 인수를 내리고 진군의 공격을 막게 했다.
과연 신릉군(信陵君)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승승장구하여 진나라 군대를 함곡관 안으로 쫓아보냈다.
이 일로 인해 신릉군의 위세는 더욱 천하를 진동시켰다.
신릉군의 문객들 중에 병법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신릉군(信陵君)이 싸울 때마다 그 전법을 일일이 기록했는데,
후일 세상에서는 이 책을 일러 <위공자 병법(魏公子兵法)> 이라 이름붙였다.
뒷 이야기 넷.
신릉군(信陵君)의 눈부신 활약으로 인해 함곡관 안에 갇히게 되다시피 한 진(秦)나라는 신릉군을 제거하기 위해 별의별 수단을 다 썼다.
이리하여 감행한 것이 반간지계(反間之計).
진(秦)나라는 황금 1만 근을 풀어 신릉군에게 살해당한 바 있는 위나라 장수 진비(晉鄙)의 가족과 문객들을 대거 포섭했다.
이때부터 대량성(大梁城) 안에는 다음과 같은 소문이 널리 퍼져 나갔다.
- 신릉군(信陵君)이 왕의 자리를 노리고 있으며, 다른 나라 왕들도 신릉군의 그러한 계획을 지지하고 있다.
진(秦)나라의 모략은 집요하고 치밀하여 때로는 거창한 행렬의 사절단을 신릉군에게 보내기도 했다.
- 위(魏)나라 왕이 되신 것을 축하합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자 위안리왕(魏安釐王)은 마음이 불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끝내 그는 신릉군의 상장군 인수를 거두어들이고 그의 실권을 모두 박탈했다.
신릉군(信陵君)으로서는 가슴이 터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분노가 치솟기도 했고 회한이 일기도 했다.
이때부터 그는 조정에 발길을 끊은 채 방탕한 생활로 빠져들었다.
이때의 신릉군의 행동을 <사기(史記)>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빈객들도 밤새도록 술자리를 벌여 독한 술을 마시며 많은 여자를 가까이 하였다.
밤낮으로 마시고 즐기기를 4년, 마침내 그는 술병이 들어 죽었다.
당대를 풍미한 호걸(豪傑)의 죽음치고는 쓸쓸하고 허망하기 짝이 없는 죽음이다.
이어 <사기(史記)>는 계속해서 적고 있다.
한고조(漢高祖)는 미천하고 나이 어렸을 때 여러 차례 신릉군(信陵君)이 어질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황제에 즉위한 후 대량(大梁)을 지날 때마다 항상 신릉군의 묘에 들러 제사를 지냈다.
한고조는 훗날 통일된 진(秦)나라를 멸하고 항우(項羽)와 쟁패하여 승리를 거둔 사람이다.
속명은 유방(劉邦).
사마천(司馬遷)은 한고조 유방이 신릉군을 흠모했다는 사실을 빌려 신릉군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밝히고 있음이다.
진소양왕(秦昭襄王)의 한단 공략은 끝내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애초 이 계획을 입안한 것은 진나라 승상 범수였다.
- 최초의 실패.
범수(范睢)는 책임을 통감했다.
그는 왕궁 앞으로 나가 석고대죄(席藁待罪)했다.
"벌을 내려 주십시오."
하지만 범수에 대한 진소양왕(秦昭襄王)의 신임은 변함이 없었다.
아무런 벌을 내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비호했다.
"애초 한단성(邯鄲城)을 공격하자고 한 것은 과인이다. 그대에게는 아무 죄가 없다. 앞으로 이 일에 대해서 다시 말하는 자가 있으면 참수하리라!"
비록 한단성 공략에는 실패했지만, 진소양왕(秦昭襄王)의 천하 통일에 대한 꿈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범수(范睢) 또한 자신의 죄를 만회하겠다는 듯 새로운 정책을 입안하여 진소양왕에게 아뢰었다.
"기회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입니다. 주(周)나라 왕실을 쳐 낙양을 대왕의 영토로 삼으십시오.“
이름뿐인 주왕실이었으나 그래도 천자국에 대한 예우에서 어느 나라고 낙양만큼은 공격하지 않았다.
그런데 범수(范睢)는 주왕실을 치라고 과감히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 기회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범수의 간언에 진소양왕은 감명을 받았다.
"좋은 말씀이오."
이듬해, 진소양왕(秦昭襄王)은 군대를 출격시켰다.
낙양으로 가는 길목에 한나라의 양성(陽城)이 있었다.
진군(秦軍)은 거침없이 몰아붙여 양성을 점령하고 한나라 군사 4만 명을 목베었다.
이무렵, 주나라의 왕은 주난왕(周赧王)이었다.
그는 진나라 군대가 낙양을 목표로 출병했다는 소문을 듣고 기겁했다.
비밀리에 초ㆍ조ㆍ위ㆍ한ㆍ연ㆍ제나라에 밀사를 파견하여 진군을 무찔러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어느 한나라도 군대를 보내오지 않았다.
"아아!"
절망한 주난왕(周赧王)은 낙양 일대의 지도를 가지고 함양으로 가 진소양왕에게 바쳤다.
그런데 앞서도 얘기했듯이 그 당시 주(周)나라는 이미 두 개로 갈라져 있었다.
낙양 서쪽의 서주(西周)와 동쪽의 동주(東周)가 바로 그것이었다.
이때 서주를 다스리는 제후는 서주무공(西周武公)이었고, 동주를 다스리는 제후는 동주혜공(東周惠公)이었다.
주난왕(周赧王)은 서주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므로 이때 주난왕이 바친 낙양 지도는 서주무공이 다스리는 지역뿐이었다.
성 36개, 총인구 3만 호.
진소양왕(秦昭襄王)은 낙양의 지도를 보자 흐뭇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문무백관이 나열한 가운데 주난왕에 대한 조치를 내렸다.
- 왕호를 삭탈하고 주공(周公)에 임명하노라.
이로써 주난왕(周赧王)은 천자의 신분에서 남을 섬기는 신하의 신분이 되었다.
BC 256년(진소양왕 51년)의 일이었다.
실제로 주왕실은 이 해에 멸망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역사는 그렇게 기록하고 있지 않다.
아직 낙양 동쪽의 동주(東周)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 다음에 계속.............
< 출처 - 평설열국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