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9,1-6; 티토 2,11-14; 루카 2,1-14
+ 찬미 예수님
메리 크리스마스~ 성탄 축하드립니다.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입니다. 온 세상이 난리입니다. 우리가 기뻐하는 건 이해하겠는데, 왜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그리고 쉬고 계신 교우들도 오늘을 특별하게 지내고 있는 것일까요? 오늘 복음에 그 해답이 나와 있는데, 천사가 목자들에게 나타나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즉 ‘너희들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이 아니라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입니다.
사실 저에게 성탄은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는 시간인데요, 오늘이 저희 아버지 2주기가 되는 기일이기 때문입니다. 재작년 12월 21일, 아침에 아무리 깨워도 일어나지 않으시는 아버지를 119 구급차에 모시고 병원으로 갔습니다. 그로부터 4일간, 아버지는 잠만 주무시다가 하느님 품으로 가셨습니다.
24일, 아버지 면회를 하러 오라는 병원의 전화를 받고 신학교에서 성모병원까지 운전해서 가는데, 다시 전화가 오더니 ‘빨리 오라’고 얘기를 해서, 가속 페달을 있는 힘껏 밟았습니다. 사실 제가 병원까지 어떻게 갔는지 기억은 없습니다. 또다시 전화가 오길래 주저하다가 받았더니 돌아가셨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병원에 도착하니, 아직 소식을 모르신 채 면회를 기다리고 계시던 어머니는, 제가 밥도 못 먹었다며 편의점에서 사신 데운 베지밀을 내미셨습니다. 저는 받아서 주머니에 넣고, 어머니가 쓰러지지 않게 끌어안고 말씀드렸습니다. “아버지 돌아가셨대요.”
그것이 12월 24일에 대한 저의 기억입니다. 그로부터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저는 이곳 노은동 성당으로 발령을 받아 여러분과 함께 지내면서, 아버지께서 다만 몇 달이라도 더 사셔서, 제가 유학 가 있고 신학교에 있는 내내 고대하시던, ‘제가 드리는 미사에 참례’하셨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제가 미사를 드릴 때 3층 어딘가에 아버지께서 앉아 계신 느낌이 들었고, 저는 최선을 다해 미사를 드렸습니다. 지난 주일, 어떤 일 때문에 너무나 분심이 들어 미사를 드리지 못할 것 같은 느낌이 들기에, 교우석에 아버지께서 앉아 계시다는 생각을 하며 미사를 드렸습니다.
작년 1주기에도 많이 힘들었는데요, 2주기가 다가오니 또 힘이 들고 몸도 아팠습니다. '해마다 성탄이 너무 슬프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도 되었는데, 얼마 전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하느님께로부터 받게 되는 여러 가지 부르심, 그중 가장 큰, 마지막 부르심을 아버지가 잘 받으셨구나 하는 깨달음입니다.
사실 저는 봉성체를 해 드릴 때 아버지가 “걱정하지 말라”는 하느님의 음성을 분명히, 또렷이 들었다면서 우시는 모습을 보며 하느님께서 아버지의 수명을 연장해 주실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얼마 뒤 떠나시는 모습을 보며 하느님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무척 곤혹스러웠습니다.
하지만 지금 차차 드는 생각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영원히 당신 사람으로 삼으시기 위해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커다란 위로를, 당신 품으로 오는 것을 겁내지 말라는 위안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많은 분들이 주님께로 가는 순간을 편안히 받아들이시고, 순교자들께서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으셨나 하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오늘 하느님께서 인간의 몸을 취하시어 이 세상에 태어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이유는, 우리를 당신처럼 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당신께서 영원한 존재이신 것처럼, 우리도 당신 품 안에서 영원한 존재로 삼아 주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에 오심으로 인해 부활은 그저 머나먼 희망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안에 구체적으로 들어왔습니다. 제대 앞의 구유를 유심히 보시면, 예수님께서 누워 계신 구유가 부활을 상징하는 빈 무덤의 형상으로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성모님과 성요셉은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칙령에 따라 호적 등록을 하러 나자렛을 떠나 베들레헴으로 가십니다. 그런데 여관에는 그분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손님이나 여행자로 오시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의 일부가 되기 위해, 우리 중 하나가 되기 위해 오셨기에, 여행자가 머무는 여관에서 태어나지 않으십니다.
성모님과 성 요셉은 아기 예수님을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누입니다. 이는 이사야서 1장 3절의 말씀이 이루어지기 위함입니다. “소도 제 임자를 알고 나귀도 제 주인이 놓아 준 구유를 알건만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구나.”라는 말씀입니다. 성탄 구유에 항상 소와 나귀가 놓여있는 이유는, 이 짐승들도 주인을 알아보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 주인이신 예수님을 알아보라는 의미입니다.
한편, 키릴로스 교부는 이 구절을 예수님께서 ‘짐승처럼 행동하는 사람들의 여물처럼 구유에 담기셨다’고 해석합니다.
베들레헴에는 들에 살면서 밤에도 양 떼를 지키는 목자들이 있었습니다. 천사가 그들에게 나타나 말합니다.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
기원전 9년,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생일을 맞아 제작된 비문에는 ‘신께서 탄생하신 날이 세상을 향해 선포된 기쁜 소식의 시작이었다’라고 새겨져 있었습니다. 황제를 신이라 부른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아우구스투스가 호적 등록을 시켰다고 하면서 그 이름을 일부러 언급합니다.
아우구스투스는 기원전 27년부터 기원후 14년까지 강력한 군사력으로 로마 제국을 다스린 황제였습니다. 그가 죽은 후 원로원은 그를 신으로 선포하였고, 그의 생일인 9월 23일을 새해 첫날로 채택하고 그를 ‘온 세상의 구원자’라 부르는 지역도 있었습니다. 영어로 8월을 ‘어거스트’라고 하는데요, 이는 그의 이름을 따서 8월을 아우구스투스라고 부른 라틴어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천사가 목자에게 한 말은, 세상이 말한 칭송이 거짓이었다는 폭로였습니다. 황제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구원자이시고, 황제가 신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주님이시고, 황제의 탄생이 기쁜 소식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탄생이 기쁜 소식이라는 것입니다.
천사는 이 소식을, 밤에 양 떼를 지키는 목자들에게 선포합니다. 그들은 캄캄한 밤에 누군가를 지키던 이들입니다. 승냥이나 늑대와 같은 짐승들이 밤에 작당하여 양 떼를 습격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깨어 짐승들로부터 연약한 존재를 보호하던 이들입니다. 그들이 기쁜 소식을 가장 처음 듣습니다.
기쁜 소식은 권력자들에게, 총칼로 무장한 이들에게, 힘으로 백성들을 누르던 이들이나 법을 곡해하던 율법 학자들에게, 권력자들에게 빌붙어 거짓 평화에 취해있던 이들에게 선포된 것이 아니라, 들에 살면서 양 떼를 지키는 가난한 목자들에게 처음으로 선포됩니다. 내가 누군가를 보호하고 있다면, 내가 누군가를 지키려 하고 있다면 나 역시 이 목자들 중 하나가 될 것입니다.
천사가 기쁜 소식을 전하자 갑자기 수많은 하늘의 군대가 나타나 이렇게 찬미합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이 세상에 참 평화를 가져다 주는 이는 황제가 아니라 그리스도이심을, 그리고 그 평화가 하느님 마음에 드는 이들에게 울려 퍼질 것임을 하늘의 군대가 나타나서 노래합니다.
지난 12월 3일 계엄령 선포 이후 나라가 매우 혼란스럽습니다. 그날 죽음의 공포를 경험하신 분들도 많고 트라우마로 고통을 겪고 계신 분들도 많습니다. 그 무서운 시간을 견디어 내도록 평화를 이룩한 분들은 누구일까요? 그 밤에 국회로 달려간 시민들의 힘이 큽니다.
그런데 저는 그 안에서 보이지 않는 힘을 느낍니다. 구역 미사를 가거나, 레지오 2차 주회를 가거나, 교우분들과 함께 모여 있을 때, 밤 9시만 되면 여기저기서 알람이 울리고 일제히 한반도 평화를 위해 기도를 시작하였습니다.
저는 그 기도가, 그리고 그 기도를 듣고 우리를 위해 전구해 주신 성모님의 기도가, 우리를 구해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양 떼를 지키고 있던 목자들처럼 깨어서 평화를 위해 기도하던 수많은 교우들의 기도가 우리에게 평화를 가져다준다고 생각합니다.
평화를 위해 기도하는, 평화를 갈망하는 여러분이 바로 그 목자이고, 천사이며 하늘의 군대입니다.
그 목자의 심정을 노래한 “첫번째 성탄”이라는 성가의 가사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저 들밖에 한밤중에 양 틈에 잠자던 목동들
한 천사가 전하여 준 주 나신 소식 들었네.
노엘, 노엘, 노엘, 노엘
온 세상의 왕이 나셨네.
2024년 주님 성탄 대축일 밤미사 노은동 성당 성가대 특송
2024년 노은동 성당 성탄 구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