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Ⅰ.緖言 Ⅲ.보완관계 1.虛實相生 Ⅱ.유사관계 2.情景融合 1.構成 Ⅳ.結語 2.立體的 描寫 3.勸百諷一 <參考文獻> 4.奇麗 <中文提要> |
Ⅰ. 緖言
중국문학사상 宋玉은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는 작가이다. 屈原의 楚辭가 후대에 길이 계승될 수 있었던 것도 송옥의 역할이 컸고, 초사에서 漢賦로 발전된 문학 양식의 전환도 송옥의 이름 아래 전해지는 작품이 없이는 설명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문학사에서 송옥이란 인물의 실존 여부도 의심받고 있고, 그의 이름으로 전해지는 작품의 진위도 불분명하다. 그 때문에 연구자들은 송옥에 관한 테마는 인물이든 작품이든 회피하는 경향이 있는 게 사실이다. 송옥에 대한 고증 문제는 자료가 부족하여 더 이상 확증할 길이 없지만 그렇다고 그의 이름 아래 전해지는 작품 연구를 피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송옥의 실존 여부나 작품의 진위 여부와 관계없이 작품은 그 자체로 문학성과 문학적 지위가 있기 때문이다.
송옥의 이름으로 전해지는 작품은 後漢 王逸의 ≪楚辭章句≫에 <九辯>ㆍ<招魂>, 梁나라 蕭統의 ≪文選≫에 <風賦>ㆍ<高唐賦>ㆍ<神女賦>ㆍ<登徒子好色賦>ㆍ<對楚王問>, ≪古文苑≫에 <笛賦>ㆍ<大言賦>ㆍ<小言賦>ㆍ<諷賦>ㆍ<釣賦>ㆍ<舞賦>, 嚴可均의 ≪全上古文≫에 <高唐對> 등 14편이 있으나 학자들 사이에 작품의 진위 여부에 대하여 논란이 많다. 이 가운데 그래도 송옥의 작품으로 믿을 수 있는 것은 <九辯>ㆍ<高唐賦>ㆍ<神女賦>ㆍ<風賦> 등이다. 이들은 여타의 작품에 비해 문학성도 뛰어나다. 본고에서 다루려고 하는 <고당부>와 <신녀부>는 자체로 문학성이 높을 뿐만 아니라 초사와 한부를 연결해 주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문학사에 차지하는 위치도 크다. 그럼에도 두 작품 역시 송옥의 이름으로 전해지는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작품 자체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거나 기피되고 있는 실정이다. 두 작품은 실제로 한 작품이니 자매편이니 하는 말이 있는데, 양자는 독립된 편명 아래 독립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한 작품으로 간주할 수 없고, 또 단순히 자매편이란 말로 치부하고 넘어갈 수 있는 간단한 작품도 아니다. 그래서 두 작품은 양자 사이의 관계부터 구체적으로 밝히는 것이 급선무이다.
<고당부>와 <신녀부>는 모두 ≪文選≫권19에 송옥의 이름 아래 독립된 편명으로 나란히 실려 있다. 그러나 실제로 내용을 살펴보면, <고당부>는 巫山의 아름다움, <신녀부>는 무산 神女의 아름다움을 서술하고 있지만 제재는 모두 무산에 뿌리를 두고 있고 고사의 출발점도 같다. 이렇게 하나하나 검토해 나간다면 양자 사이는 유사한 점과 다른 점을 밝힐 수 있을 것이고, 그 사실로부터 양자 사이의 관계를 정립하면서 두 작품의 문학 예술성과 문학적 가치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Ⅱ. 유사관계
1.構成
두 작품은 모두 序文과 本文으로 양분되어 있고 序文은 문답체, 本文은 운문체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전자는 서문 285字, 본문 803字 총 1088字, 후자는 서문 297字, 본문 471字 총 768字로 편폭도 비슷하다. 서문과 본문으로 구성된 점이나 서문이 송옥과 왕의 문답식으로 구성된 점도 일치한다. 또 서문이 꿈 이야기로 시작되어 꿈에 대해 묻고 대답하고, 끝에 왕이 자신을 위하여 부를 지어 달라고 하자 송옥이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하면서 본문이 이어지는 구성방식도 같다. 본문에서 <고당부>는 무산의 장관을 묘사하고 <신녀부>는 신녀의 아름다움을 묘사하고 있으나 나열식으로 鋪陳하는 방법은 비슷하다. 또 句法에 있어서도 <고당부>는 ‘兮’字를 운용한 離騷式句가 30구, 4字句가 127구, 3字句가 19구이며, <신녀부>는 ‘兮’字를 운용한 離騷式句가 42구, 4字句가 44구, 3字句가 6구로써 3가지 句型을 중심으로 구성된 점도 매우 흡사하다. 또한 두 작품에 ‘忽兮改容’, ‘須臾之間’, ‘試爲寡人賦之’, ‘唯唯’, ‘不可殫形’ 등 완전히 동일한 어구의 사용도 보이며, <고당부>의 “高矣, 顯矣, 臨望遠矣; 廣矣, 普矣, 萬物祖矣.”와 <신녀부>의 “茂矣, 美矣, 諸好備矣; 盛矣, 麗矣, 難測究矣.”에서처럼 ‘矣’字를 운용한 독특한 구법도 구성상의 유사성을 보여준다.
2.立體的 描寫
여기서 입체적 묘사란 평면적, 상대적, 靜的, 動的 묘사 등 다양한 방향으로 접근함으로써 대상을 매우 생동적으로 재현하는 묘사 방법을 말한다. 어떤 대상의 성질ㆍ형상ㆍ규모ㆍ모양ㆍ색깔ㆍ소리 등을 묘사하는데 있어, 대상 그 자체를 단순히 횡적으로 묘사하는 방법에 의존하는 것이 평면적 묘사라면 대상의 상대적 관계를 설정하여 묘사하는 것은 상대적 묘사라고 할 수 있다. 대상 자체를 단순 서술하는 방법이나 비유ㆍ과장 등을 운용하는 방법이 평면적 묘사라면 비교ㆍ대비ㆍ대조를 운용한 방법은 상대적 묘사라고 할 수 있다.
……큰 물결이 솟구치고 서로 부딪쳐, 모양은 구름이 일어나는 듯하고 소리는 우르르 진동하네. 맹수는 놀라서 날뛰고, 미친 듯 치달리며 도망간다. 호랑이ㆍ표범ㆍ승냥이ㆍ외뿔소 등은 정신 잃고 두려워 숨을 죽이고, 독수리ㆍ물수리ㆍ매ㆍ새매 등은 높이 날아 도망가거나 숨어들며, 벌벌 떨며 숨을 죽이니 어찌 함부로 잡으려고 하겠는가? 이때 물속의 고기는 놀라 모두 수면에 나와서 물가 양지쪽으로 올라가며, 자라ㆍ악어ㆍ철갑상어ㆍ다랑어 등이 이리저리 서로 겹쳐져 있고, 비늘을 세우고 지느러미를 흔들며 꿈틀꿈틀 거리네.(……奔揚踊而相擊兮, 雲興聲之霈霈. 猛獸驚而跳駭兮, 妄奔走而馳邁. 虎豹豺兕, 失氣恐喙, 鵰鶚鷹鷂, 飛揚伏竄, 股戰脅息, 安敢妄摯? 於是水蟲盡暴, 乘渚之陽, 黿鼉鱣鮪, 交積縱橫. 振鱗奮翼, 蜲蜲蜿蜿.)<高唐賦>
무산 아래 물 기운을 묘사한 부분이다. 인용문 앞쪽은 물의 흐름ㆍ기세ㆍ모양ㆍ소리, 물 주위의 환경 등을 평면적으로 묘사하는 부분으로 鋪裝을 능사로 하는 다른 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묘사방법이다. 인용 부분의 특이한 점은 물을 대면하는 짐승ㆍ새ㆍ고기의 반응이다. 짐승들이 정신 잃고 숨을 죽이고, 새와 고기들이 놀라 도망가거나 숨을 죽인다고 묘사함으로써 그만큼 물 기운이 세차다는 것을 상대적으로 드러내어 묘사의 입체감을 더해준다. 또 산은 정적인 대상이지만 정적인 대상에 동적인 물의 흐름과 동물의 움직임을 묘사함으로써 情態美와 動態美를 동시에 느끼게 해 준다.
녹색 잎, 자줏빛 꽃, 붉은 줄기, 흰 꽃술에 미풍이 불어 가느다란 가지가 구슬픈 소리를 내니 그 소리가 마치 피리소리 같네. 맑은 음과 탁한 음이 서로 조화하여 오음이 변화하고 사방의 소리와 서로 어울리네. 사람의 마음과 귀를 감동시키고 애간장이 타고 기운이 빠지네. 고아와 과부는 마음이 심란하여 눈물을 흘리려 하고, 높은 관원은 관직을 버리고 현사도 뜻을 잃으며, 시름을 그치지 못하고 탄식하며 눈물을 흘리도다.(綠葉紫裹, 丹莖白蔕, 纖條悲鳴, 聲似竽籟. 淸濁相和, 五變四會. 感心動耳, 廻腸傷氣. 孤子寡婦, 寒心酸鼻. 長吏隳官, 賢士失志. 愁思無已, 歎息垂淚.)<高唐賦>
산 중턱의 경관을 묘사하면서 각종 초목들이 장관을 이루는 모습을 그리고 있는데, 초목들이 만드는 소리의 조화를 집중적으로 묘사하였다. 여기서 그러한 소리의 조화에 대한 인간의 다양한 반응이 묘사의 입체감을 더해준다. 소리가 단순히 아름답다는 묘사는 아무리 장황하게 서술하더라도 평면적 묘사에 지나지 않아 지루한 느낌만 주고 그다지 생동적인 묘사가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고아ㆍ과부ㆍ관원ㆍ현사가 그 소리에 감동하는 반응을 묘사함으로써 그 소리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상대적으로 설명하여 묘사의 생동감을 높여준다. 그리고 초목 자체는 정적 대상이지만 초목이 소리를 내고 그 소리에 인간이 반응하는 구도를 설정함으로써 동적 이미지를 갖게 했다.
신녀는 얼마나 아름다운지 천하의 아름다운 기질을 다 갖추었도다. 화려한 복식을 걸치니 마치 비취새가 날개를 쭉 펴는 것 같네. 그 모습은 견줄 데 없고 아름다움은 다함이 없네. 毛嬙도 소매를 가리고 견주지 못하고 西施도 얼굴을 가리고 창피해진다.(夫何神女之姣麗兮, 含陰陽之渥飾. 被華藻之可好兮, 若翡翠之奮翼. 其象無雙, 其美無極. 毛嬙鄣袂, 不足程式; 西施掩面, 比之無色.)<神女賦>
신녀의 아름다움을 감탄하고 화려한 복식을 비취새 날개에 비유한 것이 평면적 묘사라면, 모장과 서시에 견준 것은 상대적 묘사이다. 모장과 서시는 고대의 뛰어난 미녀로 알려져 있어 미녀의 대명사이다. 신녀가 이들보다 아름답다면 그 아름다움이 어느 정도인지 단적으로 가늠된다. 신녀의 아름다움을 아무리 감탄ㆍ과장ㆍ비유한다하더라도 일방적 평면 묘사가 되어서 입체감과 생동감을 주는 데는 한계가 있다. 여기에 적절히 상대적 묘사를 덧붙여 전면적인 묘사가 되도록 하였다. 서문에 “그런 미색은 옛날에도 없었고 지금 세상에서도 보지 못했다.”라는 구절도 이런 류의 상대적 묘사이다.
이때 신녀는 장식을 흔들고 옥방울을 울리며 의복을 가다듬고 얼굴을 매만지더니 여선생을 부르고 태사를 부르네. 즐거운 마음이 미흡하여 장차 떠나려 하는데, 몸을 빼어 물러나려 하니 가까이 할 수 없고 떠날 듯 가지 않을 때 잠시 서로 바라보네. 눈으로 살짝 바라보니 서로 마음이 통하며 온갖 뜻과 자태를 펼쳐 보이는데 이루 다 말할 수 없네. 나는 차마 떠나지 못하고 마음이 두렵고도 뒤집혀 예를 돌아보지 못하고 말을 가리지 못하네. 잠시 머물러 주기를 청하나 신녀는 급히 가야한다고 하네. 그래서 나는 애간장이 타고 기운이 빠지며 낙담하여 정신이 아찔하네. 눈앞이 캄캄하더니 홀연 그녀가 간 곳을 알 수 없네. 마음속으로 혼자 그리워하나 누구한테 하소연할 수 있으리? 슬퍼서 눈물을 흘리며 아침까지 생각하네.(於是搖珮飾, 鳴玉鸞, 整衣服, 斂容顔, 顧女師, 命大傅. 歡情未接, 將辭而去, 遷延引身, 不可親附, 似逝未行, 中若相首. 目略微眄, 精彩相授, 志態橫出, 不可勝記. 意離未絶, 神心怖覆, 禮不遑訖, 辭不及究. 願假須臾, 神女稱遽. 徊腸傷氣, 顚倒失據. 闇然而冥, 忽不知處. 情獨私懷, 誰者可語. 惆悵垂涕, 求之至曙.)<神女賦>
신녀가 잠시 왕과 만난 뒤에 떠나는 장면을 묘사한 <신녀부> 본문의 마지막 부분이다. <신녀부>는 신녀의 피부ㆍ눈ㆍ입술ㆍ자태ㆍ복장ㆍ장식ㆍ향기 등 신녀의 아름다움에 대한 평면적 묘사가 상당 부분 차지하지만 신녀의 아름다움에 더욱 생동감을 주는 것은 상대적 묘사에 힘입은 바 크다. 즉 신녀를 묘사하다가 자주 왕을 등장시켜 신녀에 대한 왕의 심정과 태도 및 신녀를 마주하는 왕의 반응을 묘사하는 부분이 바로 그것이다. 왕이 줄곧 신녀와 한번 만나기를 간절히 바라고, 좀처럼 만날 수 없음에 안달하고, 짧은 만남에 못내 아쉬워하는 심정과 태도를 묘사했다. 인용문에도 신녀가 왕과 잠시 만나고 떠나버린다. 그래서 왕은 “애간장이 타고 기운이 빠지며 낙담하여 정신이 아찔하고(徊腸傷氣, 顚倒失據)”, 아쉬움에 “슬퍼서 눈물을 흘리며 아침까지 생각한다(惆悵垂涕, 求之至曙)”. 이러한 묘사로부터 신녀라는 객관적인 대상이 인간의 내면에 정감화되는 효과를 거둔다. 평면적 서술이 신녀를 우리의 눈앞에 세워서 보이게 했다면 상대적 묘사는 우리의 마음 속에 느끼도록 했다. 그러므로 <신녀부>의 상대적 묘사는 평면적 묘사와 더불어 신녀의 생동감을 더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3.勸百諷一
勸百諷一이란 말은 諷一勸百이란 말로 사용되기도 하는데, 본래 뜻은 옳지 못한 일을 바로 잡고자 시도되었으나 결과는 반대로 좋지 못한 것을 권장해버리는 꼴이 되어버린 경우를 말한다. 漢代 司馬相如ㆍ揚雄ㆍ東方朔ㆍ王褒 등의 賦와 같은 大賦는 본래 왕의 淫荒과 奢侈를 경계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창작되었고 거기에 창작의의를 두고 있으나 실제 작품은 鋪陳誇張을 능사로 서술하다 보니 오히려 그러한 행위를 권장하는 역효과를 낳았다. 그래서 후에 창작의도와 실제 효과에서 주객이 전도된 大賦를 일컫는 말로 사용되었다. <고당부>와 <신녀부>도 이미 이러한 경향이 농후함을 발견할 수 있다. 두 작품의 본래 창작의도는 楚나라 襄王의 好色ㆍ淫蕩ㆍ奢侈ㆍ過飾을 경계하고 왕이 治國의 바른 길로 나아가도록 諷諭하고자 하였고, 후인들이 두 작품의 의의를 거기에 두고자 하였으나 실제 작품은 호색ㆍ음탕ㆍ사치ㆍ過飾이 주를 이루어 諷諫의 의의를 압도하고 말았다.
고당의 큰 규모는 굉장하여 필적할 만한 물건이 없도다. 무산은 성대하여 비교할 데가 없고, 길은 구불구불 첩첩이 위로 이어지네. 깎아지른 듯한 바위에 올라 아래로 내려다보니 큰 산비탈에 모여있는 물이 보이네. 때마침 비온 뒤 맑아져서 온갖 골짜기의 물이 무산에 모이는 광경이 보이도다. 폭포가 철철 떨어져도 그 소리는 들리지 않고, 물이 질펀히 넘치고 함께 흘러 들어가네. 물은 가득히 사방으로 흘러가고, 모여서 깊은 물이 되어 그치지 아니하네. 큰 바람이 불자 파도가 일어나는데 마치 산에 우뚝 붙어있는 밭두렁 같네. 물결이 언덕에 이르러 서로 부딪치고, 좁은 곳에서 교차되어 소용돌이치네. 두 물결이 가운데서 만나니 성난 듯 우뚝 솟구쳐, 마치 바다에 떠 있는 선돌을 보는 것 같네.(惟高唐之大體兮, 殊無物類之可儀比. 巫山赫其無疇兮, 道互折而曾累. 登巉巖而下望兮, 臨大阺之稸水; 遇天雨之新霽兮, 觀百谷之俱集. 濞洶洶其無聲兮, 潰淡淡而並入. 滂洋洋而四施兮, 蓊湛湛而弗止. 長風至而波起兮, 若麗山之孤畝. 勢薄岸而相擊兮, 隘交引而卻會. 崒中怒而特高兮, 若浮海而望碣石.)<高唐賦>本文
<고당부>는 무산의 물, 초목, 돌, 鳥獸, 사냥장면 등을 묘사하고 있는데, 인용문은 본문의 첫 부분으로써 무산의 水勢를 묘사하는 장면이다. 위와 같이 <고당부>의 본문은 한결같이 고당의 장관, 巫山의 절경, 산수의 아름다움, 산세의 험준함, 花草樹木의 무성함, 鳥獸魚類의 다양함과 풍부함, 사냥의 신속함 등을 묘사하였을 뿐이며 이들을 경계하거나 治國의 道를 함축하지 않는다. 다만 끝 부분에 “천하를 생각하고 나라의 해를 걱정하며 성현을 등용하여 자신의 부족함을 보충한다. 아홉 구멍이 잘 통하고 정신이 맑게 되며 명을 이어 더욱 수를 더하시어 천 만년을 누리시도다.(思萬方, 憂國害, 開賢聖, 輔不逮. 九竅通鬱, 精神察滯, 延年益壽千萬歲.)”라고 함으로써 풍간의 의미를 담으려는 노력을 보여 주었지만 그나마 본문의 대의와 전혀 부합되지 않는다. 어떻든 이 부분을 제외하면 <고당부>는 모두 고당과 무산의 장관을 노래하고 있다. 이렇게 단순히 양적으로 보아도 諷諫 또는 諷諭가 하나 정도라면 무산에 가서 노닐기를 권장함은 백 정도는 될 것이다. <고당부>의 창작의도가 풍간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실제 작품에서는 무산의 절경을 찬탄하고 그러한 절경에 노니는 왕의 위엄을 찬양함으로써 왕의 기호와 비위를 맞추는 작가의 영합성이 짙게 드러난다.
그 모습은 풍만하고 장엄하고도 아름다우며 피부는 윤택하고 옥같은 얼굴을 가졌네. 눈동자는 초롱초롱 맑아서 얼마나 아름다운지. 눈썹은 늘어서 마치 나방이 모양을 하고 있고, 입술은 붉고 선명하여 마치 주단과 같네. 몸매는 요염하고 풍만하며, 자태는 여유롭고 한가하네. 홀연 선경(仙境)에서 너울대더니 또 인간세상에서도 춤을 추네. 마땅히 높은 궁전에서 뜻을 마음껏 펼쳐 마치 새가 날개를 쭉 펴고 노니는 것 같이 해야하리. 안개같은 비단옷을 나부껴 천천히 걷노라면 옷이 계단에 부딪치는 소리가 스르르 나네. 그녀는 나의 수레 장막을 향해 목을 빼어 쳐다보는데, 두 눈에 마치 파도가 일렁이는 것 같네. 긴 옷소매를 들어 옷깃을 여미며 우두커니 서서 배회하며 안절부절못하네.(貌豐盈以莊姝兮, 苞溫潤之玉顔. 眸子炯其精朗兮, 瞭多美而可觀. 眉聯娟以蛾揚兮, 朱脣的其若丹. 素質幹之醲實兮, 志解泰而體閑. 旣姽嫿於幽靜兮, 又婆娑乎人間. 宜高殿以廣意兮, 翼放縱而綽寬. 動霧縠以徐步兮, 拂墀聲之珊珊. 望余帷而延視兮, 若流波之將瀾. 奮長袖以正衽兮, 立躑躅而不安.)<神女賦>本文
인용문은 신녀의 눈과 눈썹, 입술, 몸매와 자태 등을 묘사한 부분인데, 위와 같이 <신녀부>는 무산 신녀의 아름다운 자태를 구체적으로 묘사했을 뿐이며 풍간의 의의는 찾아보기 힘들다. 설령 창작의도가 천하절색의 여색을 묘사함으로써 아름다운 여색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거나 아름다운 여인을 예로써 맞이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함축하려고 했다하더라도 실제 작품에는 그러한 메시지를 찾아볼 수 없고 오히려 신녀의 아름다움을 찬미하고 그러한 신녀와 노닐기를 권유하는 메시지만 드러난다. 즉 창작의도가 여색을 경계하고 왕의 호색을 풍유하고자 하였으나 실제 작품은 여색과 호색을 권장하는 결과를 초래하여 작가의 창작의도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賦는 옛 시의 한 유파이고,” 본래 賦는 시에서 나왔으므로 시의 言志 특성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부 자체의 體物 특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문체이다. 그래서 ≪文心雕龍ㆍ詮賦≫에 “부는 펼친다는 뜻으로 문채를 펼쳐내어 사물의 형상을 체현하고 작가의 뜻을 서술하는 것이다.”라고 부의 성격을 정의하였다. 이렇듯 본래 부는 言志와 體物의 특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후대에 언지는 줄어들고 체물의 방향으로만 발전하게 되어 부의 분파가 생기게 되었다. 揚雄은 언지와 체물이 공존하는 부를 ‘詩人之賦’, 언지가 사라지고 체물의 방향으로만 발전한 부를 ‘辭人之賦’로 구별하고 “시인의 부는 아름다우면서도 법칙이 있으나 사인의 부는 아름다우면서 지나치다”라고 설명한 바 있다. ‘아름답다(麗)’는 것은 체물의 결과이며, ‘법칙이 있다(則)’는 것은 언지의 작용 때문이며, ‘지나치다(淫)’는 것은 언지의 작용은 없고 오직 체물을 추구한 나머지 일어난 결과이다. 屈原의 賦(屈賦)는 언지와 체물이 잘 조화된 ‘시인지부’라고 할 수 있다. ‘시인지부’가 굴원 이후 ‘사인지부’로 변형시킨 사람은 송옥이다. 물론 그의 <九辯>은 언지와 체물을 잘 조화시키고 있지만 <고당부>와 <신녀부>는 언지의 작용이 거의 드러나지 않고 체물을 지나치게 추구한 작품이다. 그 결과 지극히 아름답기는 하나 풍간이나 풍유의 의의를 상실한 채 작가적 정신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또한 작가의 身世之感이나 불우한 자신의 처지를 토로하는 항변이 보이지 않는다. 이런 점에도 두 작품은 궤를 같이 한다.
4.奇麗
두 작품은 모두 體物을 위주로 아름다움을 체현하려 하였다. 즉 <고당부>는 무산의 아름다움, <신녀부>는 신녀의 아름다움을 구체적으로 묘사하려 하였다. 아름다운 객체를 가능한 아름답게 묘사하여 그 아름다움을 여실히 구현하려 한 것이다. 그런데 아름다움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고, 그것을 묘사하는 방법에도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두 작품은 ‘기이한 아름다움(奇麗)’을 기이한 형상을 동원하여 표현하였다. 이 점에서도 두 작품은 기본적으로 일치한다. 두 작품에 ‘奇’字를 각각 2번씩 사용하고 있고 ‘奇’字 계열의 어휘인 ‘異’ㆍ‘奇異’ㆍ‘珍怪’ㆍ‘譎怪’ㆍ‘異物’ 등을 많이 사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險字인 ‘巉’ㆍ‘蓊’ㆍ‘湛湛’ㆍ‘礫磥磥’ㆍ‘巆’ㆍ‘瀺灂’ㆍ‘霈霈’ㆍ‘蜲蜲’ㆍ‘蜿蜿’(이상 <고당부>), ‘峩峩’ㆍ‘縠’ㆍ‘珊珊’ㆍ‘躑躅’ㆍ‘惓惓’ㆍ‘焭焭’(이상 <신녀부>) 등을 사용하여 시각적으로도 奇險한 효과를 거두고자 하였다.
더 높은 곳에 올라 멀리 바라보면 사람의 마음을 근심스럽게 하네. 굽이진 절벽은 뾰족뾰족 우뚝우뚝 가지런히 늘어서 있고, 반석은 위태롭게 떨어질 듯 걸쳐져 있으며, 큰 바위는 울퉁불퉁 종횡으로 이어져 서로 쫓는 것 같네. 산기슭엔 돌이 가로놓여 길을 막고 산등성이엔 동굴이 우뚝하여 길을 막네. 돌이 이리저리 쌓여서 겹겹이 중첩되어 그 모양이 마치 중류지주(中流砥柱)가 무산의 아래에 와 있는 것 같네. 산꼭대기를 쳐다보니 산색이 어찌나 푸르고 무지개처럼 찬란하네. 굽어서 깊은 산골짜기를 내려다보니 아득히 깊고 심원하여 그 바닥이 보이지 않고 다만 솔바람 소리만 들릴 뿐이다. 경사진 절벽으로 물이 철철 흐르는데 그 위에 서 있으면 곰이 나무에 매달리듯 아슬아슬하네. 오래도록 나아가지 못하고 발에 온통 땀이 나며 아찔하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멍하니 정신을 잃게 되며 사람의 마음을 놀라게 하며 까닭없이 두려워진다. 孟賁과 夏育과 같은 용사도 그 용맹을 발휘할 수 없다. 홀연히 기이한 물건에 놀라며 그것이 어디서 나온 것인지 알지 못하겠고, 수많은 괴상한 암석은 마치 귀신의 손에서 생긴 듯하고 신의 손에서 나온 듯하구나. 그 모습은 달리는 짐승 같기도 하고 어떤 것은 나는 새 같기도 한데 괴상하고 기이하여 이루 다 표현할 수 없노라.(登高遠望, 使人心瘁. 盤岸巑岏, 裖陳磑磑. 磐石險峻, 傾崎崖隤. 巖嶇參差, 縱橫相追. 陬互橫牾, 背穴偃蹠. 交加累積, 重疊增益, 狀若砥柱, 在巫山之下. 仰視山巓, 肅何千千, 炫燿虹蜺. 俯視崝嶸, 窐寥窈冥, 不見其底, 虛聞松聲. 傾岸洋洋, 立而熊經. 久而不去, 足盡汗出, 悠悠忽忽, 怊悵自失, 使人心動, 無故自恐. 賁育之斷, 不能爲勇. 卒愕異物, 不知所出, 縰縰莘莘, 若生於鬼, 若出於神. 狀似走獸, 或象飛禽, 譎詭奇偉, 不可究陳.)<高唐賦>
산 중턱을 지나 정상으로 올라가기 전에 기험한 산세의 아름다움을 묘사한 부분이다. ‘巑岏(산세가 높고 뾰족한 모양)’, ‘磑磑(돌이 높은 모양)’, ‘傾崎崖隤(돌이 떨어질 듯 걸쳐져 있는 모양)’, ‘參差(울퉁불퉁한 모양)’, ‘千千(산색이 푸른 모양)’ 등을 사용하여 산세가 높고 험준하고 위태로운 모습을 묘사하면서 “괴상하고 기이하다(譎詭奇偉)”라는 말로 마무리하였다. 결국 奇異, 奇妙, 神妙함으로 이루어지는 아름다움을 창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造句面에서는 정련한 4字句와 여러 개의 疊字를 운용하고 用韻까지 고려하여 시각적ㆍ청각적인 아름다움도 추구하고 있다.
풍만하고 아름답고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죄다 갖추고 있었으며, 얼마나 풍만하고 아름다운지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 그런 미색은 옛날에도 없었고 지금 세상에서도 보지 못했다. 그 아름다운 자태를 일일이 다 열거할 수도 없다. 그녀가 처음 나타날 때 찬란하기가 마치 아침에 해가 떠서 대들보를 비추는 것 같았고, 조금 다가가자 마치 보름달이 비추는 것 같이 밝았다. 잠깐 사이에 아름다운 자태가 모두 드러나서 꽃처럼 빛나고 옥처럼 반짝였다. 오색찬란하여 그 모습을 말로 이루 다 형언할 수 없고 자세히 살펴보면 눈이 부실 지경이다. 그녀의 화려한 복식으로 말하자면 몸에 온통 비단을 걸쳐서 성대한 문채를 이루고 화려한 옷과 기묘한 문채가 온 사방을 비춘다. 수놓은 옷을 걸치고 치마를 입었는데 품이 크지도 작지도 않으며 길이가 길지도 짧지도 않다. 사뿐사뿐 걸으니 그 광채가 온 집안을 비추고, 홀연히 모습이 바뀌면서 아리따운 자태가 마치 용이 구름을 타고 비상하는 것 같다. 몸엔 아름다운 옷을 걸치고 엷은 장식을 하고 머리엔 기름을 발라 향기롭다. 성격이 온화하여 시중들기에 적합하고 부드럽고 온순하여 사람의 비위를 잘 맞춘다.(茂矣, 美矣, 諸好備矣; 盛矣, 麗矣, 難測究矣. 上古旣無, 世所未見. 瓌姿瑋態, 不可勝讚. 其始來也, 耀乎若白日初出照屋梁; 其少進也, 皎若明月舒其光. 須臾之間, 美貌橫生, 熚兮如花, 溫乎如瑩. 五色並馳, 不可殫形, 詳而視之, 奪人目精. 其盛飾也, 則羅織綺繢盛文章, 極服妙綵照萬方. 振繡衣, 被袿裳, 穠不短, 纖不長, 步裔裔兮曜殿堂. 忽兮改容, 婉若游龍乘雲翔. 嫷被服, 侻薄裝,沐蘭澤, 含若芳, 性和適, 宜侍旁, 順序卑, 調心腸.)<神女賦>
초나라 襄王이 꿈에 신녀를 만났다고 하자 송옥이 그 모습을 묻는 질문에 왕이 대답한 부분으로 序文의 일부이다. 왕이 본 여성은 인격화된 신녀일 뿐 인간세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여인이 아니다. 그래서 초인적인 미색을 묘사하였다. “말로 표현하기 힘들고(難測究矣, 不可勝讚, 不可殫形)”, “눈이 부실 지경이며(奪人目精)”, “옛날에도 없었고 지금 세상에서도 보지 못했으며(上古旣無, 世所未見),” “홀연히 모습이 바뀌면서 아리따운 자태가 마치 용이 구름을 타고 비상하는 것 같은(忽兮改容, 婉若游龍乘雲翔)” 초인적 아름다움을 열거하였다. <신녀부>의 본문은 서문에서 왕이 말한 신녀의 모습을 토대로 초인적 아름다움을 묘사하고자 하였다. <신녀부> 본문에 “홀연 仙境에서 너울대더니 또 인간세상에서도 춤을 추네(旣姽嫿於幽靜兮, 又婆娑乎人間)”라는 말은 인격화된 신녀의 모습을 가장 집약적으로 묘사한 구절이다. 신녀의 얼굴, 자태, 장식, 표정 등은 인간적인 모습을 하면서도 인간세상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신비하고 기이한 아름다움을 구성하고 있다.
신녀가 사는 환경이 奇麗하고 거기에 사는 신녀도 奇麗하다. 그래서 작가는 두 작품에서 기이함을 바탕으로 아름다움을 구성하고 있다. 따라서 독자는 두 작품에서 奇麗美 또는 奇麗한 풍격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劉熙載는 ≪藝槪≫에서 “부는 아름다움을 요구하지만 아름다움은 기이하지 않으면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부는 기이함을 싫증내지 않는다.”라고 하였는데, 奇麗가 漢賦의 특성이라면 그러한 특성은 이미 송옥의 부에서 출발하였다고 해야 할 것이다.
Ⅲ. 보완관계
1.虛實相生
<고당부>는 현실에 기초를 두고 <신녀부>는 허구에 의존한다. <고당부>의 무산이 오늘날 湖北省 경계에 있는 무산인지 고증할 길이 없으나 <고당부>에 묘사된 고당과 무산은 당시 실존했고, <고당부>는 이것을 기초로 鋪裝 서술한 것이다. 서문은 초나라 양왕이 송옥과 함께 운몽의 누대에 노닐다가 고당을 보게 된 일, 왕이 朝雲을 목격하고 조운에 대해 왕과 송옥이 문답한 일, 왕이 꿈에 무산의 여자를 만난 이야기로 이어지는데 기본적으로 모두 현실에 기초하고 있다. 이러한 일들이 당시 실제 있었는지는 별개의 문제이며 적어도 터무니없는 초현실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에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점에서 현실에 바탕을 두었다고 할 수 있다. ≪文選≫ 江淹의 <雜體詩> 李善注에는 ≪宋玉集≫을 인용하여 고당과 조운의 내력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고당부>의 서문과 약간 차이가 있으나 스토리의 윤곽은 대체로 일치한다.
초나라 양왕이 송옥과 함께 운몽의 들판에서 노닐다가 조운의 누각을 바라보았는데 무슨 기운이 있어 잠깐 사이에 변화가 무궁하였다. 왕이 “이것은 무슨 기운인가?”라고 묻자 송옥이 대답하기를, “옛날 선왕께서 고당에서 노닐다가 피곤하여 낮잠을 잤는데 꿈에 한 여인을 보았습니다. 그 여인이 말하기를, ‘저는 천제의 막내딸로 이름을 요희라고 하옵는데 시집가기 전에 죽어서 무산의 누대에 묻혔습니다. 왕께서 여기 와서 노신다는 소식을 듣고 잠자리를 모시고자 합니다.’라고 하므로 왕이 이에 그녀와 동침하였습니다. 그녀가 떠나면서 말하기를, ‘저는 무산의 남쪽 높은 언덕 험지에 있사온데 아침에는 조운이 되고 저녁에는 비가 되어 매일 아침 저녁으로 남쪽 누대 아래에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아침이 되어 보니 과연 그 말처럼 되어 그녀를 위하여 누각을 세우고 이름을 조운이라 하게 되었습니다.(楚襄王與宋玉遊於雲夢之野, 望朝雲之館, 有氣焉, 須臾之間, 變化無窮. 王問: “此是何氣也?” 玉對曰: “昔先王遊於高唐, 怠而晝寢, 夢見一婦人, 自云: ‘我帝之季女, 名曰瑤姬, 未行而亡, 封於巫山之臺. 聞王來遊, 願薦枕席.’ 王因幸之. 去乃言: ‘妾在巫山之陽, 高丘之阻, 旦爲朝雲, 暮爲行雨, 朝朝暮暮, 陽臺之下.’ 旦而視之, 果如其言, 爲之立館, 名曰朝雲.”)
위에서 ‘朝雲之館’과 ‘瑤姬’를 제외하면 <고당부>의 서문과 대체로 일치한다. ≪文選≫ 李善注에서 ≪宋玉集≫을 인용한 것을 보면 ≪宋玉集≫이 唐나라 때까지 유전되고 있었고 고당과 조운의 내력이 세상에 널리 유행되고 있었던 것 같다. ≪文選ㆍ高唐賦≫注에도 <襄陽耆舊傳>을 인용하여 이 일에 대해 기록하였는데 역시 윤곽이나 맥락이 <고당부>의 서문과 대체로 일치하고, 北魏 酈道元의 ≪水經注ㆍ江水二≫에도 이와 같은 기록이 보인다. 그러므로 고당과 조운의 이야기는 송옥의 이전이나 당시 및 이후에도 사실로써 일반에 널리 유행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고당부>의 본문에 묘사된 무산은 송옥이 직접 볼 수 있는 대상들이다. 본문에 묘사된 물ㆍ고기ㆍ짐승ㆍ새ㆍ돌ㆍ바위ㆍ초목 등은 모두 무산에 있는 산물을 기초로 재구성한 것이다. 물론 이들이 상당 부분 과장되고 허구의 요소가 가미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무산의 현실에 바탕을 두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에 비하면, <신녀부>는 대부분 허구에 의존한다. 우선 <신녀부>의 서문은 꿈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서문은 초나라 양왕이 꿈에 무산의 신녀를 만난 일에서 시작하여 송옥에게 꿈에 본 신녀의 모습을 설명해 주고 신녀의 아름다움에 대해 부를 지어 보라고 한다. 잠을 잔다는 것은 현실이지만 꿈속의 이야기는 현실이 아니다. 꿈은 인간에게 있어 현실과 실재하지 않는 가상을 가장 잘 연결해 주는 모티브 역할을 한다. 그래서 문학 작품에서 꿈 이야기는 대개 사실을 빙자한 허구이다. 신녀는 무산의 여신으로 실재하지 않는 가상의 존재이다. 다시 말하면, 신녀는 송옥 훨씬 이전부터 무산의 전설로 전해져 내려오는 허구적 존재일 뿐이다. 그것이 <신녀부>에서 꿈이라는 편리한 모티브를 통해 재구성된 것이다. 신녀의 존재가 가상이면 구체적 모습도 가상에 지나지 않는다. 본문에 묘사된 신녀의 용모ㆍ자태ㆍ복장ㆍ장식 등이 가상이며, ‘여선생(女師)’과 ‘태부(大傅)’도 허구적 인물이며, 왕이 신녀를 만나기를 원하고 잠깐 만났다가 헤어지는 스토리도 허구이다.
<고당부>가 현실에 기초를 두었으므로 ‘實’이라면 <신녀부>는 허구에 의존하므로 ‘虛’이다. 예술 작품은 허실이 잘 조화되어야 훌륭한 境界를 창조할 수 있다. 중국 書畵에서 검은 글씨 또는 그림 부분이 실이라면 흰 여백은 허이다. 양자는 자체로는 상반된 가치이지만 한 공간에 조화를 이루어 훌륭한 서화가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고당부>와 <신녀부>는 무산과 신녀라는 허실의 상반된 대상을 묘사하고 있지만 양자가 결합되었을 때 서로 조화를 이루어 생명력을 갖는다. 무산이 없는 신녀나 신녀가 없는 무산은 공허하다. 마찬가지로 두 작품이 하나로 융합되었을 때, 무산은 아름다운 신녀가 살기 때문에 더욱 신령스럽고 의미있는 산으로 다가오고, 신녀는 기험하고 신묘한 무산을 배경으로 하기 때문에 더욱 奇麗한 아름다움을 발휘할 수 있다. 무산은 영험한 산이지만 신녀의 낭만적 고사가 없다면 사람을 움직이는 매력이 떨어질 것이고, 신녀는 무산이라는 환경이 없다면 그녀가 활동하는 무대를 잃게 되어 문학적 현실성을 갖출 수 없을 것이다.
2.情景融合
<고당부>에 묘사된 대상은 주로 무산이고 <신녀부>에 묘사된 대상은 무산의 신녀이다. 전자가 무산의 경물 묘사에 치우쳐져 정감이 결여되어 있다면 후자는 전자에 없는 정감을 보충한다. <고당부>의 본문은 무산의 경물을 집중 묘사함으로써 무산의 奇麗한 아름다움을 재현하고자 했다. 무산 아래의 폭포ㆍ물ㆍ자라ㆍ악어, 무산에 사는 짐승과 새인 호랑이ㆍ승냥이ㆍ외뿔소ㆍ독수리ㆍ물수리ㆍ매ㆍ왕물수리ㆍ기러기, 무산의 초목인 의나무ㆍ밤나무ㆍ추란ㆍ구리때ㆍ혜초, 절벽ㆍ산골짜기ㆍ암석ㆍ구름ㆍ하늘까지 객관적인 경물 묘사 일색이며 작가의 정감은 찾아볼 수 없다.
산 중턱에 서서 멀리 바라보니 절벽에 걸려있는 나무는 겨울인데도 여전히 꽃이 피어있네. 꽃은 휘황찬란하게 빛나 사람의 눈을 눈부시게 하며, 뭇 별처럼 빛나 그 모습을 말로 다 형용할 수 없구나. 밤나무 숲이 울창하고 밤꽃들이 서로 뒤덮여 있고, 의나무 열매는 주렁주렁 달려있고 휘어진 가지들이 서로 뒤엉켜 있네. 바람이 불어 가지들이 물위에서 흔들거리는데 그 그림자가 물결을 따라 어른거리며, 사방으로 난 가지는 새의 날개처럼 뻗어서 부드럽고 가늘게 드리워져 있네.(中阪遙望, 玄木冬榮. 煌煌熒熒, 奪人目精, 爛兮若列星, 曾不可殫形. 榛林鬱盛, 葩華覆蓋, 雙椅垂房, 糾枝還會. 徙靡澹淡, 隨波闇藹, 東西施翼, 猗狔豐沛.)<高唐賦>
이처럼 <고당부>는 작가의 주관적인 정감을 배제하고 다만 외물만 비추려고 하였다. 이것은 처음부터 외물에 감흥을 일으켜 지은 자발적 창작이 아니라 왕의 명령에 의해 지은 일종의 應制이기 때문에 작가의 강렬한 개성을 불어넣기 힘든 작품이었다. <고당부>의 본문을 보면 일견 한편의 산수문학을 보는 듯하다. 문학사에서 謝靈運이 산수문학의 鼻祖라고 말하지만 <고당부>의 본문을 보면 송옥을 최초의 산수문학가로 불러도 무방할 듯 싶다. 다만 후대의 산수시는 體物과 言志가 함께 용해되어 있으나 <고당부>는 체물에 경도되어 언지가 결여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후대의 산수시에는 시인의 주관적인 정감이 어느 정도 내포되어 있으나 <고당부>의 본문은 외물에 대한 작가의 정감이 용해되어 있지 않은 것은 분명 다른 점이다. 이는 王國維의 ≪人間詞話≫에서 말하는 ‘有我之境’도 아니고 그렇다고 ‘無我之境’은 더욱 아니다. 아예 처음부터 ‘我’가 없고 외물만 있는 경지라고 해야 할 것이다. 후대 漢賦의 문학성이 낮게 평가되는 주요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 宋代 范晞文의 <對床夜語>에서 일찍이 “경은 정이 없으면 나타나지 않고, 정은 경이 없으면 생기지 않으며”, “정과 경이 서로 융화되어 나눌 수 없다”라고 말한 것처럼 문학 예술에서 정과 경은 함께 융합되어야 한다. 정은 경이 없으면 예술이 되지 못하고 정도 경을 떠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고당부> 자체로는 정이 없는 반쪽 문학이며 별다른 감동을 주지 못하는 불완전한 문학 예술이라 할 것이다.
<고당부>의 속작이라 할 수 있는 <신녀부>는 이런 결함을 보완하여 하나의 완전한 문학 예술이 되게 했다. 작가는 <신녀부>에서 다정다감한 미녀를 창조했다. 신녀는 본래 신화와 전설 속에 존재하는 神이지만 작가는 거기에 人性을 부여하여 인격화된 여인으로 묘사하였다. 그녀의 자태ㆍ용모ㆍ장식 등 외형적 모습은 지극한 아름다움을 소유하고 있다. 그러나 그녀는 얼굴만 아름다운 게 아니라 내면적인 아름다움도 소유하였다. 그녀의 “성격은 온화하여 시중들기에 적합하고 부드럽고 온순하여 사람의 비위를 잘 맞춘다”. 뿐만 아니라 예절 바르고 몸가짐이 단정하며 정조도 곧다. 본문은 왕이 이러한 신녀를 추구하는 구도로 묘사되어 있다.
그녀는 조용하고 평온하며 침착하고 서두르지 않네. 때때로 조용히 움직이지만 그 마음 헤아릴 길 없어라. 마음이 가까워진 듯하나 멀리 있고 오는 것 같으면서도 다시 멀리 떨어지네. 내 침상의 휘장을 걷고 납시기를 청하여 간절한 마음 다 바치려 하네. 그러나 그녀는 곧은 정조를 지키고 끝내 나와 함께 하기 어렵네. 나의 청에 대해 좋은 말로 대답하는데 입가엔 난초같은 향기가 가득하네. 다만 정신적으로 사귀면서 마음은 편안하고 기쁘네. 다만 정신적 사귐만 있고 실제적 결합은 없으니 이 영혼 외롭기 그지없어라. 속으론 허락하면서도 태도를 분명히 하지 않으니 이 마음 애타고 슬퍼지네. 그녀는 성낸 듯 노한 듯 위엄을 지키니 감히 범할 수 없네.(澹淸靜其愔嫕兮, 性沈詳而不煩. 時容與以微動兮, 志未可乎得原. 意似近而旣遠兮, 若將來而復旋. 褰余幬而請御兮, 願盡心之惓惓. 懷貞亮之絜淸兮, 卒與我乎相難. 陳嘉辭而云對兮, 吐芬芬其若蘭. 精交接以來往兮, 心凱康以樂歡. 神獨亨而未結兮, 魂焭焭以無端.含然諾其不分兮, 喟揚音而哀歎. 頩薄怒以自持兮, 曾不可乎犯干.)<神女賦>
이 얼마나 아름다운 애정연애시인가? 아리따운 한 아가씨가 마음에 품은 남자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살짝 비춰주다가 부끄러워 금새 시침을 떼고, 왔다갔다하는 아가씨의 태도에 마음을 애태우는 순진한 남자의 모습이 연상된다. 다가가고 싶으나 선뜻 다가갈 수 없는 여성의 심리나 조그만 접근에 만족하지 않는 성급한 남자의 심리도 읽을 수 있다. 남녀 사이의 보편적인 정감도 느낄 수 있다. 여기의 신녀는 무슨 고원한 仙境에 사는 선녀가 아니라 인간이 사랑할 수 있고 다가갈 수 있는 여인이다. 인간은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초현실세계의 대상에게 감정을 느낄 수 없다. 마찬가지로 선경에 사는 선녀에게 무슨 감정을 느끼기 힘들다. 하지만 <신녀부>는 작가가 다양한 방법으로 신녀에게 강한 정감을 불어넣어 다정다감한 인격체로 묘사함으로써 풍부한 정감을 느끼도록 하였다. 이렇게 창조된 신녀의 형상은 <고당부>에 묘사된 무산과 조화를 이룬다. <고당부>는 경은 충만하나 정이 부족하고 <신녀부>는 정은 충만하나 경이 허전하다. 두 작품이 하나로 융합될 때 무산은 신녀가 사는 환경이 되고 신녀는 무산의 낭만이 되어 비로소 완전한 문학 예술이 되는 것이다.
Ⅳ. 結語
<고당부>와 <신녀부>는 편폭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구성상 대체로 유사하다. 묘사방법에서도 양자는 평면적, 상대적, 동적, 정적 묘사를 동원하였는데, 특히 상대적 묘사를 적절히 가미한 것이 서술의 평면성을 극복하고 대상을 생동적으로 재현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勸百諷一은 창작의도와 실제 효과가 전도된 漢賦에 흔한 현상이지만 두 작품에서도 똑같이 이 말이 적용된다. 또한 두 작품은 각각 무산과 신녀라는 다른 대상을 묘사하면서도 미학상 다같이 奇麗美를 추구한 점도 일치한다. 이런 여러 가지 유사성은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엔 너무 용의주도하고 模擬의 흔적이라고 하기엔 너무 일관성이 있다. 따라서 두 작품은 동일인의 손에서 나왔다고 해야 할 것이다. 또 두 작품의 유사성은 작가의 균형잡힌 창작태도를 말해준다. 두 작품은 창작동기나 고사의 출발점이 유사하기 때문에 묘사 대상을 동일 선상에 놓고 서술할 수밖에 없다. 거기에 구성이나 묘사방법을 서로 다르게 한다거나 서로 다른 미학 가치를 추구한다면 작품의 동질성을 획득하기 힘들게 된다. 그러므로 작가는 두 작품의 동질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대상을 유사한 스토리에 넣어 유사한 방법으로 서술한 것이다. 마치 볼트와 너트를 잘 끼워지도록 만들기 위하여 동일한 금속재료로 주물한 것이라고 할까.
반면 서로 다른 점도 발견되었다. <고당부>는 무산이라는 실존적 대상을 묘사한 것이라면 <신녀부>는 신화와 전설로 전해지는 허구적 대상을 묘사했고, 전자는 경물 묘사에 치중하고 정감이 배제되었다면 후자는 인물의 정감 묘사가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두 가지 다른 점은 서로 배타적이지 않고 양자가 허실상생과 정경융합의 보완되는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중국 고전미학에서 허와 실, 정과 경은 상반된 가치를 지니면서 서로 조화ㆍ통일될 것을 요구하는데, 두 작품에서 이런 미학적 원리를 잘 체현하고 있다. 서로 다르면서 맞는 것이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 평면과 평면의 결합, 오목과 볼록의 결합 가운데 어느 것이 더 강하고 아름다운가? 전자는 단순하고 평범하고 지루하며 타성에 젖기 쉽지만 후자는 특이하고 역동적이고 긴장되며 하모니를 이룬다. 양은 음이 있으므로 강하고 음은 양이 있으므로 아름답다. 음양은 각각 상반된 가치를 지니면서 서로 조화를 이룬다. <고당부>가 양이라면 <신녀부>는 음이다. 양자는 각각 독립된 가치를 가지면서도 상생과 융합의 조화를 이룬다. 마치 길쭉한 볼트와 동그란 너트가 잘 끼워지는 것처럼.
<參考文獻>
李善注, ≪文選≫
五臣注, ≪文選≫
姜書閣, ≪漢賦通義≫(濟南: 齊魯書社), 1989.10.
陳宏天 等 譯注, ≪昭明文選譯注≫第2冊(長春: 吉林文史出版社), 1994.11.
鮑洪亮ㆍ田杰, ≪歷代名賦譯釋≫(哈爾濱: 黑龍江人民出版社), 1995.6.
遲文浚ㆍ許志剛ㆍ宋緖連, ≪歷代賦辭典≫(沈陽: 遼寧人民出版社), 1995.4.
金學主, <宋玉 作品의 檢討>, ≪閒堂車柱環博士頌壽論文集≫, 1981.
朴雲錫, <宋玉의 高唐賦 考釋>, ≪中國語文學≫제8집, 1984.11.
鐘來因, <高唐賦的源流與影響>, ≪文學評論≫, 1985.4
<中文提要>
宋玉是繼屈原之後的又一位重要楚辭作家, 其創作對後來漢賦的發展有很大影響. 其作品據≪漢書ㆍ藝文志≫載有十六篇, 其中十四篇流傳至今. 然而 這現存的十四篇却多可疑, 足信者只有<九辯>、<高唐賦>、<神女賦>及<風賦>四篇而已. 其中<高唐賦>、<神女賦>兩篇對後來漢大賦發展有很大影響, 對這兩篇甚至有文意相關的姉妹篇的評價. 不過, 對兩篇的關係以及藝術成就的硏究尙不够系統. 本文正是根據這種觀點, 將兩篇作品的關係作如下兩種分析硏究.
從這兩篇作品中, 我們可以找到幾種類似點; 構成ㆍ描寫方法ㆍ創作態度以及美學觀點. 從構成看, 這兩篇都分爲序與本文兩大部分, 文章均用問答體展開, 無論是篇幅長短還是句法結句都甚爲相似. 在描寫方法上, 兩者運用平面的ㆍ相對的ㆍ亦動亦靜描寫創造了巫山美或者神女美, 其中相對的描寫方法則是克服平面性, 逼眞表現對象的手段. 創作態度方面, 兩篇捨本而逐末, 思想內容貧乏, 而文章靡密巧麗, 可以說是‘勸百諷一’的先導. 最後, 兩篇作品追求奇麗美的美學原則也是相通的.
此外, 兩篇之間仍有些相異點. <高唐賦>描繪了實在的對象‘巫山’, 而<神女賦>則描繪了神話與傳說的虛構對象‘神女’; 前者着重景物描寫, 而後者則着重人物情感. 然而, 這些相異點體現的不是兩篇的相對關係, 而是體現出一種虛實相生與情景融合的相補關係. 中國古典美學强調的是調和統一虛與實, 情與景, 因此我們可以說宋玉的這兩篇作品體現了中國古典美學的原則.
주요어 : 입체적 묘사, 권백풍일, 기려, 허실상생, 정경융합, 균형, 조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