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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시도
“더 이상 미룰 수 없습니다.”
박무영의 강직한 목소리가 바르르 떨렸다. 기수 입을 꾹 다문 채 주변의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 박무영은 좀 더 기다리며 기회를 보자는 구국단원들과 정면으로 부딪쳤다.
“동지들이 서둘지 않겠다면 나는 혼자서라도 옹주마마를 구출할 것이오.”
늘 차분하고 냉정하던 박무영이 요즘 부쩍 날카로워졌다. 그는 하루라도 빨리 행동을 개시하자며 동료들을 독려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동안 몇 번의 실패를 경험한 대원들은 좀 더 기다려보자는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다. 모두들 의욕을 상실하고 지쳐 있었다. 박무영은 그런 분위기에 이성을 잃은 사람처럼 화를 냈다. 결국 제 기분을 못 이기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누군가가 빈정거렸다.
“박 대원이 왜 저러나? 혹시 옹주마마를 연모하고 있는 건 아닌가, 허허.”
기수는 곧바로 박무영을 따라나섰다. 저만치 앞서서 뛰는 박무영을 보며 기수도 뛰었다.
‘오늘은 반드시 내막을 알아보리라.’
기수는 천천히 술집 안으로 들어갔다. 박무영이 구석진 자리에 앉아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맞은편 의자에 앉은 기수를 보고서도 그는 술 마시는 일에만 몰두했다. 벌컥벌컥, 물을 들이켜듯 술을 부어댔다. 기수는 말없이 박무영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갈증을 해소하듯 술을 마시던 박무영이 불쑥 술잔을 기수에게 내밀었다.
“자네가 나와 함께 하지 않겠는가?”
박무영이 기수를 향해 말을 던졌다.
“그리하지요. 그동안 쭉 제 친형님처럼 의지하고 있었어요.”
그 말에 박무영의 얼굴에 잠깐 화색이 돌았다.
“그런데…… 형님은 나를 믿지 못하는 것 같아요.”
“무슨 소린가?”
“형님이 하자면 무슨 일이든 목숨을 바쳐 할 각오가 돼 있습니다. 하지만 우선 형님의 사연을 알아야겠어요.”
그 소리에 박무영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끝내 말씀을 안 하시면 져도 형님의 뜻을 따를 수 없습니다. 죽어도 무엇을 위해 죽는지 알고나 죽어야지요.”
“…….”
박무영의 표정이 곤혹스러워졌다. 한참을 고민하던 박무영이 기수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모든 걸 이야기하지.”
“듣고 있겠습니다.”
기수도 박무영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내 이름은 박무영이 아닐세. 김장한일세.”
“예에?”
“내가 그 김장한일세. 고종의 시종이었던 김항진의 조카이자 그의 양아들. 옹주마마의 내정된 약혼자였네.”
“……!”
기수의 표정이 더없이 복잡해졌다.
“죄송합니다. 어리석은 호기심 때문에 형님의 아픈 곳을 건드리고 말았군요.”
“아픈 곳이지. 오래전 우리가 옹주마마를 구출하려다 실패했을 때 기억하나? 그때 자네가 했던 말을 나는 아직도 기억하네. 나라를 구하는 것은 곧 옹주를 구하는 것 아니겠냐고. 자네는 나와 옹주의 관계를 몰랐지만 내가 어떤 마음가짐이어야 하는지를 정확하게 일러주었네. 사실 나는 줄곧 혼란스러웠네. 옹주를 구하지 못했는데 독립이 무슨 소용이냐. 나라가 무슨 소용이냐, 이런 심정이었네. 자네는 내가 잊고 있었던 것들을 일깨워주었네. 말은 못했지만 지금도 그 점에 대해 고맙게 생각한다네. ……그러나 현실은 여전히 답답하지. 결국 독립을 일궈냈음에도 불구하고 옹주마마를 구하지 못하고 있으니, 나는 혼자서라도 그 일을 성사시키겠네. 형이 백방으로 마마의 처지를 알리고 있으니, 일단 마마를 병원에서만 모시고 나오면 그 후의 일은 수월해질 걸세. 조선으로 가는 방편과 그곳에서의 거처 등은 형이 준비 중이네.”
무영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기수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영의 일에 목숨을 걸고 동참할 준비가 된 것이다.
“그럼 우선 복순 씨하고 연락을 해보겠습니다. 우리는 마마 근처에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까요.”
“고맙네, 내 뜻을 따르겠다는 동지도 몇 명 있다네. 어쩜 소수 인원으로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지도 모르지.”
“네.”
“옹주마마가 이혼까지 당하셨네. 이 어지러운 상황에 그런 일까지 당하셨으니 그 마음이 오죽할까. 영친왕 전하께서도 말할 수 없는 형편이라 들었네. 조선의 황족들이 유령처럼 떠돌고 있네. 마땅히 설 자리가 없어. 조국이 독립되었다고 그것으로 끝난 게 아니야. 우리가 잊고 있었던 사람들을 조국으로 데리고 돌아가야 하네. 낯선 땅에서 핍박받으며 견뎠던 그 모든 사람들을 데리고 가야 해. 그들이 이 땅에서 흘렸던 피눈물까지 모두 거두어가야 하네. 그걸 이루어내지 못하면 독립도 아무런 의미가 없네. 우리 동지들이 목숨을 걸고 지켰던 신념이 무언가? 자랑스럽고 떳떳한 내 나라를 세워 우리 민족을 모두 데리고 돌아가는 것 아니었나? 옹주마마는 그 시작에 불과하네.”
박무영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렸다.
덕혜는 이혼을 했기 때문에 호적상으로 양덕혜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일본 남자와 결혼해서 일본 국적을 얻은 탓에, 이혼한 후에도 재일 한국인의 신분으로 복원될 수 없었다. 소 덕혜도, 이 덕혜도 아닌, 양덕혜. 얼마나 쓸쓸한 존재인가. 영친왕 부부도 왕족으로서의 권한이 없어지고 재일 한국인으로 등록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 마당에 웅주의 성씨가 바뀌는 것에 대해 특별히 관심을 갖는 사람은 없었다. 이혼한 후 덕혜가 쓰던 대부분의 물품도 영친왕에게 전해졌으나 그도 덕혜의 물품을 보관하기 어려워서 이곳저곳에 기증하거나 나누어 보관했다고 했다. 그중에 몇 가지는 버려지기도 했을 것이다. 그녀가 세상으로부터 버려졌듯이
박무영은 가슴을 치며 한숨을 쏟았다. 그때 기수가 불쑥 말했다.
“다케유키가 재혼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알고 있네. 그나마 마마에 대한 이야기는 한마디도 입 밖으로 내뱉는 일이 없다 하니 다행이네.”
오랜만에 복순을 찾아온 요코는 가방에서 시집 한 권을 꺼내 내밀었다. ‘해향’이라는 제목의 시집이었다. 겉표지에 소 다케유키라는 이름이 또렷하게 적혀있었다.
“이 사람 맞지요? 조선 황녀의 남편이었다는 사람. 나는 다 보았으니 복순 상이 봐요.”
“고마워요. 요코.”
“출판회도 열었다는데 그 딸이 와서 축하를 했다나봐요. 그런데 왜 그녀는 한 번도 엄마를 찾지 않는 거죠?”
“글쎄요…….”
복순은 그쯤에서 얼버무리며 입을 닫았다. 예전에 모르는 척 담당 간호사에게 넌지시 건넸던 질문이 생각났다.
“저분한테 찾아오는 자식은 없나요?”
간호사가 고개를 저었다.
“그게 참 이상해요. 다케유키 외에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찾아온 사람은 없어요. 자식이나 친척은 없나봐요.”
“아, 그렇군요.……”
“혹시 주변에서 뭐 들은 거라도 있나요?”
그녀가 오히려 복순에게 되물었다.
복순은 저녁 시간에 시집을 읽었다. 덕혜에게는 보여주지 않을 작정이었다. 보여주는 것이 오히려 상처가 될 것 같았다. 시집 『해향』에는 『한회(寒灰)』라는 시가 실려 있었다. 한가한 날의 그리움이라는 뜻이다.
바람 불지 않는 계수나무 가지에
파도치지 않는 선창의 바깥
구름은 바닷속을 파고들고
물살도 급히 흘러가는데
사랑스러운 아내여, 울려요
수많은 새들이 날갯짓을 하는구려
(중략)
사랑스러운 아내여
떠나지 말아줘요
사랑하는 자식들을 우리가 품어야 되리
그 사랑스러운 아내는 다름 아닌 덕혜일 터였다. 시집 속에는 아내를 향한 사랑이 절절한데 정작 현실의 그는 아내를 떠났다. 건너들은 얘기로는 다케유키와 덕혜가 이혼하던 해, 정혜도 스즈끼라는 사람과 결혼했다고 한다. 다케유키의 재혼을 앞두고 서둘러 한 티가 났다. 물론 덕혜는 그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1년 후 정혜가 일본이 험준한 산 고마카다케 산에서 자살하겠다는 유서를 쓴 후 종적을 감췄다는 것 또한 알지 못했다.
정혜에 대한 이야기는 몇날 며칠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정혜는 덕혜가 병원에 입원한 후로도 안정을 찾지 못했다고 했다. 다케유키는 서둘러 딸의 배우자를 수소문했고, 결국 어렵사리 사윗감을 하나 찾아낼 수 있었는데, 지극히 평범한 사내였다. 그래서 가능했는지도 모른다고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다케유키 가문의 후광을 업고 행세해보려는 사내가 아니었다면 누가 쉽게 조선인의 피를 물려받은 정혜와 결혼할 생각을 하겠는가. 다케유키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으나 정혜는 정혼한 이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울었다고 했다. 결혼한 뒤로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결혼한 뒤 부쩍 어머니를 찾았다고 했다. 유서를 남기고 자취를 감춘 것은 어쩌면 정해진 수순이었을지도 모른다. 국적 없는 영혼이 돌아갈 곳은 어디에도 없었던 것이다.
복순은 덕혜마저 그리될까 봐 두려웠다. 정혜의 행방불명을 알게 되면 상태가 더욱 나빠질까 봐 그녀는 그 사실을 숨겼다.
그즈음 덕혜를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조선의 황녀로서도, 다케유키의 아내로서도, 정혜의 어머니로서도, 그녀는 그 무엇으로도 남지 못했다. 하지만 복순은 그 끈을 놓지 않았다. 덕혜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애썼다. 과거를 일깨우기 위해 여러 가지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다 알고 있다. 그러나 조용히 하여라.”
아주 가끔씩 덕혜는 이렇게 대꾸했다. 그때마다 복순은 기뻤고, 슬펐고 고통스러웠다.
불쑥 종이비행기를 접어 보여주기도 했다. 과자 봉지로 만든 아주 작은 종이비행기였다. 덕혜는 그것을 창문을 향해 날렸다. 종이비행기가 창틀에 부딪쳐 힘없이 떨어졌다.
‘아, 마마…….’
복순은 덕혜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혹 나를 알아보시지나 않을까. 그러나 종이비행기를 날릴 때 잠깐 화색이 돌던 얼굴은 곧바로 무표정하게 변했다. 하지만 그 후로도 곧잘 종이비행기를 접어 날리곤 했다. 그때마다 보일 듯 말 듯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사끼코 상이 온 후로 도쿠에히메가 많이 좋아진 것 같아요.”
어느 날, 간호사가 창문 너머로 아는 척 했다. 복순은 얼른 그 간호사 뒤를 따르며 심중에 있는 말을 꺼냈다. “저분, 잠시 바깥 구경을 시켜드리면 안 될까요?”
그날따라 상태가 좋은 덕혜를 보면서 간호사는 잠시 고민했다. 그러더니 곧 한쪽 눈을 찡긋하면서 묵인해주겠다는 신호를 보냈다. 복순은 떨리는 마음을 안고 서둘러 병실로 돌아왔다.
“아아…… 마…… 아니, 오늘은 바깥 구경을 시켜드릴 수 있게 됐어요.”
복순은 목젖까지 차오르는 ‘마마’라는 말을 삼킨 채 덕혜를 휠체어에 태워 밖으로 나갔다. 그동안 간호사들에게 쏟은 정성이 이즈음에야 효과를 발휘하고 있었다. 감시의 눈길도 많이 느슨해졌다.
비가 스치고 지나간 뒤라 모든 거리가 깨끗했다. 덕혜는 오랜만에 보는 바깥 풍경에 만족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복순은 휠체어를 끌고 연못이 있는 곳까지 갔다. 큰 나무 그늘 아래서 커다란 물고기들이 천천히 유영하고 있었다. 복순은 산책을 핑계 삼아 길 건너의 풍경까지 덕혜에게 보여주었다.
“이번엔 틀림없이 마마를 구출할 것입니다.”
복순은 덕혜의 귀에 대고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그러자 덕혜가 천천히 대답했다.
“다 알고 있어.”
복순은 덕혜의 손을 꼭 쥐었다.
”마마, 다 알고 계십니까? 진정 다 알고 계십니까?“
흥분한 복순은 덕혜 쪽으로 얼굴을 들이밀자 그녀가 인상을 찌푸리며 두 손으로 밀어냈다. 그러곤 언제 그런 말을 했냐는 듯 고개를 들어 또다시 허공을 좇았다. 하지만 복순은 행복했다. 암요, 암요. 마마께서는 다 알고 계신 겁니다. 제가 복순이라는 것도 다 알고 계신 겁니다. 알지만 모르는 척하고 계신 겁니다.
“비가 올 것 같아…….”
덕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네, 비가 올 것 같아요. 마마를 쫓아 빗속을 뛰다가 하천으로 굴러떨어진 일이 생각나네요. 그땐 정말 마마를 잃어버리는 줄 알고 겁이 났었습니다.”
덕혜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암요, 마마, 마마께서는 모르는 척하시는 겁니다. 그렇지요. 마마? 그렇지요, 마마…….
“내일부터 큰비가 내린답니다. 장마가 온대요.”
“비가 온다…….”
복순의 말에 덕혜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이튿날부터 정말 비가 오기 시작했다. 하늘이 구멍이라도 난 듯 며칠간 정신없이 퍼부었다. 잠시 햇살이 보이는가 싶다가도 금방 다시 어둑해졌다. 장마가 시작되고 있었다. 그 기간 동안 정신병원 맞은편에 위치한 파출소는 빈집처럼 고요했다. 빗속에서 모든 사물의 경계가 허물어졌다. 기다리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며칠 전 기수는 비장한 얼굴로 복순을 찾았다. 결의에 찬 눈빛이었다.
“복순 씨도 꼭 같이 가야 하오.”
기수의 말에 복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지요 마마를 제가 모셔야지요. 가다가 죽더라도 마마를 지켜야지요.”
“방해 공작이 있을지 모르니 옹주마마와 똑같은 옷을 입고-”
“무슨 말인지 압니다. 염려 마세요.”
장마는 한동안 계속될 것이라 했다. 거리엔 빗물이 넘쳤다. 사람들은 자취를 감췄다. 도시 전체가 텅 비어버린 것만 같았다.
“사흘 후 자정이오.”
기수가 복순의 집을 빠져나가면서 마지막으로 의미심장하게 되뇌었다.
[ 에필로그 ]
모두의 기억에서 사라졌다 해도
나는 조선의 마지막 황녀였다.
탕!
복순은 쓰러졌다. 그녀는 빗물이 내가 되어 흐르는 길바닥에 쓰러진 채 팔을 뻗어 손사래를 쳤다. 무영과 기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복순은 중얼거렸다.
“마마, 부디 몸 성히…….”
그녀의 머릿속으로 지난날이 영화처럼 펼쳐졌다.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집을 떠난 아버지가 보였다. 아버지 대신 가장 역할을 맡아야 했던 어머니의 까칠하고 핼쑥한 얼굴도 떠올랐다. 아버지를 찾아 경성 시내를 헤매는 어린 자신도 보였다. 일본인 순사 앞에 당당하게 서 있던 어릴 적 모습은 방금 본 것처럼 생생했다. 덕분에 목숨을 보전했던 순간, 옹주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올 때 보았던 현해탄의 검푸른 파도……. 그녀는 돌아가지 못해도 한스럽지 않았다. 다만, 옹주를 끝까지 모시지 못한 게 한스러울 따름이었다.
“몸 성히 돌아가셔서 꿈에도 그리던 낙선재에서 편안히 여생을 보내소서.……”
복순은 눈을 감았다. 그 목소리가 덕혜에게 들렸던 걸까. 덕혜는 한사코 사내들의 손에서 벗어나려 했다. 흐느끼며 복순 쪽으로 돌아가려 했다. 기수와 무영은 그런 덕혜를 억지로 차에 태우고 그곳을 빠져나갔다. 차는 빗속을 헤집고 달렸다. 뒤따르는 차는 없었다.
“마마, 이제는 창덕궁에 가실 수 있게 됐습니다.”
박무영이 감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하지만 우리 복순이가, 복순이가…….”
덕혜는 제정신을 차린 것처럼 말을 이었다. 복순도 알아보고 지금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덕혜의 말에 박무영이 깊이 고개를 숙였다. 기수가 손으로 눈가를 훔쳤다.
“복순씨는 다시 가서 무사히 데리고 오겠습니다. 아무 걱정 마십시오. 꼭 마마 곁으로 돌려보내겠나이다.”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박무영이 깊이 눌러쓴 모자를 처음으로 벗었다. 덕혜의 눈을 마주 보며 마지막 인사처럼 읊조렸다.
“마마 부디 강건하소서.”
무영은 덕혜가 무슨 말이든 하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덕혜는 그를 알아보지 못하는 듯했다. 그녀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무영은 서글프지 않았다. 그처럼 옛 인연들을 의식에서 몰아내지 않았다면 옹주는 여태 살아있지도 못했으리라. 옹주가 갈구하는 것들은 침묵 속에서만 지킬 수 있는 것들이었다. 소리 내지 않고, 밝히지 않아야 하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종내는 자신이 무엇을 갈구했는지조차 잊어야 하는 것들이었다. 그래야만 하는 것들이었다. 무영 자신도 그렇지 않았던가. 옹주를 잊을 수 있을 때에만 옹주를 위한 완벽한 탈출 계획을 세울 수 있었다. 사랑한다면 잊어야 한다. 그러나 잊는다 해도 온전히 잊히지는 않는 법이다. 가슴속에 살아있으면 언젠가 다시 불러들일 수 있다.
무영은 덕혜가 비행기에 오르기 전 뒤돌아보는 걸 발견했다. 비로소 그를 기억해낸 것일까. 힘없이 흔드는 모습이 아프게 다가왔다. 무영은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김장한, 꽃 같은 소년이었던 그대여, 어쩌다 이제야 다시 만나게 된 것인가.’
덕혜의 눈빛이 그렇게 묻는 듯했다. 그 눈빛을 읽고도 무영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을 기억해낸 것만으로도 기뻤다.
‘마마, 가슴속에 갈무리했던 것들을 이제 하나씩 하나씩 끄집어내십시오. 이제 그러셔도 됩니다. 한 맺힌 세월의 엉킨 실타래를 풀어 그 실로 아름답고 고운 의복을 지으소서. 마마를 따뜻하고 포근하게 감싸줄 의복을 지으시고도 남는 게 있다면 그때 저를 위해 수수한 저고리 한 벌만 지어주소서. 저는…… 그것으로 족합니다.’
무영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덕혜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영의 눈에서 수십 년 동안 참았던 눈물이 쏟아졌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덕혜의 눈빛이 그렇게 얘기하는 듯했다. 두 사람은 오래도록 서로를 바라보았다.
‘마마! ……사랑했습니다. 그 사랑 변치 않고 여태 지켜왔습니다. 이 김장한은 잊지 말아주소서, 마마!’
결코 입 밖으로는 내뱉을 수 없는 말이었다. 가슴속에서만 비밀로 간직할 말이었다.
‘잊지 않았습니다. 한순간도 잊지 않았어요. 내 나라 조선을, 그리고 그대.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지던 날, 아바마마의 시종무관을 따라가던 소년, 어쩌면 내 지아비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그대,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도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면 나도 그대를 사랑했었던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
무영은 그렇게 말하는 덕혜의 목소리를 들은 듯싶었다. 혼자만의 상상이라 여겨도 그것은 참으로 행복했다.
‘황공하옵니다. 마마, 세월이 한스러울 뿐입니다.’
덕혜가 비행기 안으로 들어갔다. 무영의 귓가에 덕혜의 소리 없는 작별 인사가 언제까지 맴돌았다. 무영은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모를 얼굴로 비행기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이 비행기 뒤를 하염없이 좇았다.
덕혜를 실은 비행기가 도착한 곳은 꿈에도 그리던 조선이었다. 조선의 바람, 조선의 꽃들, 조선의 초목.
“마마, 소인을 죽여주시옵소서.”
덕혜가 비행기 트랩을 내려오자 머리가 하얗게 센 늙은 여인이 땅바닥에 엎드려 통곡했다. 유모 변복동이었다. 덕혜는 숨을 들이켰다. 조선의 공기가 그녀의 폐부를 가득 채웠다. 이것만으로도 다시 태어난 기분이었다.
“마마, 이제 조선에 오셨나이다. 이제는 아무 걱정 마시옵소서.”
유모가 다가와 떨리는 손으로 덕혜를 부축했다. 그러자 젊은 상궁들이 고개를 숙인 채 그 뒤를 따랐다. 여기저기에서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아, 마마. 어찌 이리 쇠약해지셨나이까.”
유모가 한탄을 쏟으며 젊은 상궁을 불렀다.
“어서 마마를 편히 모셔라.”
상궁은 얼른 덕혜를 업었다.
‘여기는 조선 땅이다. 나는 조선의 마지막 옹주다. 나는 드디어 창덕궁으로 돌아왔다. 이것이 꿈은 아닌가.’
그녀는 기적처럼 조선을 알아봤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돌아왔는지.
참으로 무심케 꽃이 피고 잎이 짙어졌다가 낙엽이 지고 눈이 내렸다. 세월은 그렇게 되풀이됐다. 덕혜는 자라지 않는 아이처럼 여전히 자신의 세계에 갇혀 지냈지만, 불행해 보이지는 않았다. 의식이 또렷한 날에는 글씨도 썼다.
‘나는 낙선재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 전하, 비전하 보고 싶습니다. 대한민국 우리나라.’
유모는 그것을 보며 옹주의 마음을 읽었다. 가슴 깊은 곳에 자리한, 그리운 것들에 대한 열망을…….
그날, 옹주는 문득 잊고 있었던 일이 생각난 듯 이렇게 말했다.
“학교를 세워야겠어.”
“예, 그래지요. 마마.”
덕혜의 빛나는 눈을 들여다보고 있던 유모가 한참 만에 대답했다.
“어디다 학교를 세우지?”
“…….”
유모는 열망에 들뜬 덕혜를 보며 입을 다물었다.
“그래그래, 바쁠 것 없어. 하지만 학교는 꼭 세워야 해.”
유모가 안쓰러운 눈길로 덕혜를 바라보았다.
“마마, 너무 신경을 많이 쓰면 피곤하십니다. 이제 그만 쉬셔야지요. 한숨 주무시고 나서 다시 생각하시지요.”
유모는 덕혜를 이끌어 침실로 안내했다.
‘준비 하셔야 될 것 같습니다.’
낮에 다녀갔던 전의의 말이 자꾸만 생각났다. 유모의 눈길이 붉어졌다.
깨끗하게 정돈된 방 안에 단정하게 놓인 비단 이부자리. 덕혜는 순한 아이처럼 방으로 들어섰다. 따뜻하고 평안한 잠자리. 덕혜는 코를 킁킁거리며 옛날을 떠올렸다. 어머니, 아바마마, 순종황제, 영친왕과 영비의 얼굴이 차례로 스쳤다. 영원히 어울릴 수 없었던 남자 다케유키, 정혜, 그리고 자신에게 온 삶을 바쳤던 박무영…….
불쑥 덕혜가 물었다.
“유모, 내 아버지는 어찌 되셨느냐?”
“돌아가셨나이다.”
유모가 울음을 참으며 대답했다. 덕혜가 슬픈 얼굴로 또다시 물었다.
“어머니는 어찌 되셨느냐?”
“돌아가셨나이다, 마마. 그리운 이들은 모두 사라졌나이다.”
대답하는 목소리에 물기가 묻어났다.
“모든 일이 봄날의 꿈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구나. 모든 것은 사라짐으로써 덧없나니.”
덕혜가 마른 입술을 축이며 소동파(蘇東坡)의 문장을 소리 내어 중얼거렸다 목소리에서 서서히 힘이 빠지고 있었다.
“마마, 편히 주무시옵소서…….”
유모가 자장가를 부르듯 읊조렸다. 덕혜의 두 눈이 힘없이 감겼다. 마지막 안간힘을 다해서 그녀가 중얼거렸다.
“공주의 덕을 아느냐, 온순하고 공경하고 너그러워 편협함이 없으며 미움을 스스로 품어 더럽거나 좁아지지 않을 것이며…… 본 것은 본 대로 두어두고, 들은 것은 들은 것에 놓아두며, 마음을 어지럽히지 않을 것이며…… 늘 주위를 조화시켜 착함을 이룰지니라…….”
유모는 옹주의 마지막 음성을 귀에 담았다. 눈물이 소리 없이 흘러내렸다.
“내가 조선의 옹주로서 부족함이 있었더냐.”
“아니옵니다.”
“옹주의 위엄을 잃은 적이 있었더냐.”
“그렇지 않았나이다, 마마…….”
유모의 목소리가 젖어들었다.
“나의 마지막 소망은 오로지 자유롭고 싶었을 뿐이었느니라…….”
덕혜는 조용히 숨을 골랐다. 그 숨이 천천히 잦아들었다가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꿈길이 꽃길이나.
눈이 부시도록 푸른 날이었다. 덕혜의 입가에 생애 처음으로 평안한 미소가 고였다. 조선의 마지막 황녀로 태어났지만 한 번도 황녀로 살지 못했던 여인, 누구보다 귀한 존재였지만 모두가 외면했던 그 여인은 그날 영원한 자유를 향해 먼 길을 떠났다.
[ 작가의 말 ]
태화강(太和江-경남 울산시 고헌산에서 발원 울산만으로 흘러드는 강) 산책길에 꽃이 가득합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코스모스와 억새를 보고 있노라니 아, 가을인가 싶습니다. 세월이 참 빠릅니다. 2009년 가을, 잉크 냄새가 채 마르지도 않은 『덕혜옹주』를 안고 가슴 벅찼던 일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2015년 가을…….
6년 가까운 세월이 훌쩍 지나갔습니다.
한 사람을 깊이 들여다보는 일은 지극히 관심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사람을 가슴에 들여놓고, 그를 들여다보고, 그를 알아가는 일은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인지도 모릅니다. 그 행복한 시간에 꽃이 핀다면 더 말할 필요도 없이 복된 일입니다. 그러나 인생에 어찌 복된 일만 이어지겠습니까.
그동안 저는 『덕혜옹주』로 인해 참 많은 일들을 경험했습니다. 홀로 걷는 지난한 문학의 길에서 꽃을 보았고, 빛을 보았고 노래를 들었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독자들의 뜨거운 반응과 강연 요청에 바쁜 시간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저는 열심히 독자들을 만났습니다. 제가 진정 원했던 것은, 그늘진 역사의 한 귀퉁이에서 잊힐 뻔했던 덕혜옹주를 일깨우는 일이었습니다. 하여, 왜곡되고 굴전된 그 시절의 오해로부터 그녀와 그 시대의 아픔을 조금이나마 건져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독자들을 만났고, 독자들도 제 이야기에 호응을 해주었습니다. 많은 시간을 헤맸고, 많은 시간을 고민하며 소설을 쓴 것이 보람으로 드러나는 순간들이었습니다. 소설 쓰는 일이 저의 운명과 무관하지 않다는, 고독하고 즐거운 예감한 것도 그즈음이었습니다.
그 이후 저에게는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어디선가 소곤소곤, 저를 향해 이야기를 걸어오는 목소리들이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나를 좀 꺼내줘, 숨이 막혀, 나를 누르고 있는 이 무거운 짐들을 치워줘, 억울한 내 이야기를 좀 들어줘…….
억울하고 답답한 영혼들이 어디 한둘이겠습니까. 어찌 굴절되고 왜곡된 시절의 이야기뿐이겠습니까. 자신의 의지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역사의 소용돌이 앞에서, 속절없는 세월의 무심함 앞에서, 억울하고 외롭고 슬펐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얼마나 많겠습니까. 제 귀를 간질이는 그 목소리들은 그들의 목소리가 아니라, 제가 그들에게 갖는 관심 때문에 들리는 건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사람에 대한 애정에서 출발합니다. 존재만으로도 더없이 귀하고 소중한 목숨에 대해, 그들이 살아낸 그 많은 이야기에 대해, 저는 앞으로도 관심을 가질 것입니다.
이즈음의 반가운 소식이 있습니다. 『덕혜옹주』가 영화화된다는 사실입니다. 2016년 개봉 예정이라 합니다. 이미 촬영이 시작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저를 아는 많은 사람들이 벌써부터 기대에 차서 ‘영화가 나오면 같이 보러 가자’ 합니다. 물론 그럴 것입니다. 영화도 성공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지난 시대의 아픔을 돌아보고 암울한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는 계기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소설 『덕혜옹주』가 나온 후, 2013년에는 일본에서도 『덕혜옹주』가 번역되어 출간되었습니다. 다른 나라에 수출된 것보다 특별한 의미가 있는 일이었습니다. 또 뮤지컬과 무용극도 나왔습니다. 소설과는 시각이 다르지만, 뮤지컬 『덕혜옹주』는 몇 년째 공연 중입니다. 이런 사실들은 『덕혜옹주』가 문화콘텐츠로서 가능성도 충분하다는 반증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오늘의 『덕혜옹주』가 있기까지 고마움을 전해야 할 분들이 많습니다. (이하 생략)
2015년 10월
권비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