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성경이 말하는 고통의 이유 6가지
1. 고통은 사단의 도전 때문에 온다!
구약 성경에 나오는 욥은 사단의 도전 때문에 고통을 당하게 된 대표적인 경우이다. 욥기 1장에는 사단이 하늘 총회에 참석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회의에서 사단은 자신이 이 지구를 두루 다녀 보았는데,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하는 사람들을 이 세상에서 찾을 수 없었다고 주장한다.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단도 그들 가운데 왔는지라.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단이 대답하여 가로되 땅에 두루 돌아 여기저기 다녀 왔나이다.” (욥 1:6,7). 이 때 하나님께서는 사단에게 욥에 대해서 아느냐고 물으시면서, 욥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셨다.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욥 1:8)
그러나 사단은 욥이 하나님을 섬기는 이유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에게 많은 재물을 축복하셨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다시 말해서 욥이 하나님을 섬기는 이유는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섬긴다는 것이 사단의 고소였다. “주께서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 소유물로 땅에 널리게 하셨음이니라”(욥 1:10). 순수한 동기와 양심적인 확신에 의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욥을 번영케 하셨으므로, 욥이 그에 대한 답례로서 하나님을 섬기고 경외하는 것이라고 사단은 주장하였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축복을 욥에게서 거두시면, 그 즉시로 욥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게 될 것이라는 것이 욥에 대한 사단의 고소 내용이었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 (욥 1:11).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명예를 걸고서 사단의 이러한 도전을 받아들이셨다. 하나님께서는 사단에게 욥의 몸을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욥을 시험하도록 허락하셨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욥 1:12). 그리하여 즉시로 사단은 욥을 시험하기 위해서 욥에게로 내려갔다.
재난이 연속적으로 욥에게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갑자기 외적들이 쳐들어 와서 소와 나귀를 다 빼앗고 종들을 죽이는 사건이 일어났으며,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서 양과 종들을 불살라 버렸다는 종들의 말이 마치기도 전에, “또 한사람이 와서 고하되 주인의 자녀들이 그 맏형의 집에서 식물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시더니 거친 들에서 대풍이 불어와서 집 네 모퉁이를 치매 그 소년들 위에 무너지므로 그들이 죽었나이다 나만 홀로 피한고로 주인께 고하러 왔나이다”(욥 1:18,19). 엄청난 재난의 소식을 연속적으로 전달하는 종들의 말을 듣고 서있는 욥의 심정이 어떠했겠는가?
사단은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했다. 그는 욥의 재산뿐만 아니라 자녀들을 빼앗아 갔다. 사단은 욥의 입에서 하나님께 대한 저주가 나오길 기대하였다. 그러나 욥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욥은 “일어나서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욥 1:20~22). 사단은 완전히 실패했으며, 욥에 대한 하나님의 신뢰는 증명되었으며, 욥을 의인이라고 선언하셨던 하나님의 명예는 옹호되었다. 욥은 하나님께로부터 무엇을 받기 위해서, 또는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욥의 신앙은 순결한 것이었다.
그러나 사단은 포기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욥이 순결한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사단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나를 격동하여 까닭없이 그를 치게 하였어도 그가 오히려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켰느니라” (욥 2:3).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사단은 욥이 하나님을 저주하지 않은 이유는 하나님께서 욥의 몸을 건드리지 못하도록 제한하셨기 때문이라고 대꾸하였다.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오니 사람이 이 모든 소유물로 자기의 생명을 바꾸올지라 이제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 (욥 2:4,5). 하나님께서는 다시 한번 사단의 이러한 도전을 받아 들이셨다. “내가 그를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지니라” (욥 2:6). 다시 한번 사단은 욥의 몸에 온갖 고통을 주기 위해서 지구로 달려 내려갔다. 인간은 이기적 목적을 위하여 하나님을 경배한다는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는 것이 사단의 목적이었다.
사단은 욥에게 고문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사단이 이에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서 욥을 쳐서 그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악창이 나게 한지라” (욥 2:7). 욥이 “재 가운데에 앉아서 기와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던 욥의 아내는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저주하였다(욥 2:9). 친구들도 욥을 찾아와서 욥에게 절망적인 말을 남기고 떠나갔다.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내가 보건대 악을 밭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 (욥 4:7,8). 친구들이 욥에게 던졌던 조롱과 비웃음은 그를 정말 참기 어려운 고통 속으로 몰아갔다.
욥의 고결한 성품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부인에게 다음과 같은 말로 부인에게 권면하였다.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치 아니하니라” (욥 2:10). 욥의 입에서 나온 이 한마디의 말에 의해서, 사단은 완전히 패배하였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사단은 더 이상 욥기에 등장하지 않는다. 사단은 하나님께 죄를 범하기 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택했던 욥을 이길 수가 없었다. “그가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를 신뢰하리라... 나의 구속자가 살아계시고 훗날 그가 땅에 서실 것임을 내가 앎이라” (욥 13:15; 19:25 - 영어 킹제임스 성경역).
욥은 하늘에서 사단이 하나님께 도전했던 사실을 몰랐다. 그는 시련과 고통을 대하는 자신의 태도 여하에 따라서 하나님 또는 사단이 승리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또한 하늘에서 하나님과 사단 사이에 오고 간 대화를 들은 모든 천사들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던 사실도 몰랐다. 그가 알았던 것은 아무런 이유없이 재난이 자신에게 닥쳤다는 사실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양심에 비추어서 최선이라고 생각되는 태도를 나타내었다. 그의 주변에서 일어난 상황이 전혀 이해되지 않았지만,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의 빛에 따라서 행동하였다.
고통을 당하고 있는 형제자매들이여, 욥의 모본을 따르라. 욥은 자신에게 어떤 죄가 있길래 이러한 재난이 이르러 왔는지를 깊이 생각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당한 재난의 이유와 원인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대 역시 고통의 이유가 그대 자신의 죄나 부족함에 있는지를 깊이 살피라. 만일 어떤 특별한 이유없이 고통이나 재난이 닥쳐왔다고 생각되면, 그대도 욥처럼 “그가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를 신뢰하리라”고 말함으로써, 그대를 향한 사단의 도전을 물리치라.
2. 고통은 회개하지 않기 때문에 온다!
고통이나 심판이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임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예수님께서 빌라도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던 갈릴리 사람들에 대해서 말씀하셨던 것을 상기해 보자. “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고하고” (눅 13:1).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을 보면, 그 당시 빌라도가 수많은 사람들을 성전에서 살해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던 도중에 성전에서 죽임을 당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런 일이 그들에게 일어난 것을 보면, 그들은 틀림없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악한 죄인일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말씀하시길, “가라사대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받음으로써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같이 망하리라” (눅 13:2,3). 계속되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 보라.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하는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눅 13:4,5). 갈릴리 사람들의 죽음과 실로암 망대에 치어 죽은 사람들은 죄를 범했기 때문에 형벌을 받았다기 보다는,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형벌을 받고 죽었다는 것이 그들의 죽음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설명이다.
우리는 어떤 죄로 인하여 갈릴리 사람들이 형벌을 받았는지 모른다. 이 이야기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치 않는 자들은 모두 그와 같이 멸망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말씀은 갈릴리 사람들이 회개치 아니하여 멸망당한 것을 지적하시면서, 만일 우리도 회개치 않으면 그들처럼 멸망당할 것을 경고하시기 위하여 주신 것이다. 그들은 우리보다 더 악한 죄인들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은 형벌을 받았다. 만일 우리가 회개치 아니하면 똑같은 일이 우리에게도 임할 수 있다. 형벌이 우리의 생애 동안에 임하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가 그들보다 선하다고 착각하지 말라. 최후의 심판날에는 반드시 회개하지 않은 죄에 대하여 보응받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이다.
동일한 교훈이 실로암 망대에 치어 죽은 사람들의 이야기에도 적용된다. 성전에서 종교적인 행위인 제사를 드리고 있었던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 별다른 차이가 없어 보인다. 종교를 가지고 있던, 가지고 있지 않던 간에 회개치 않는 자들은 모두 이와 같이 멸망당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그대에게 시련과 고통이 있는가? 혹시 회개하지 않은 죄가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라. 그대가 그리스도인이든지 아니든지를 막론하고 회개치 않는 죄에 대해서 그대는 언젠가 그 대가를 지불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3. 고통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온다!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의 이야기는 고통의 이유에 대한 또 다른 면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이 일화가 주는 교훈은 죄의 문제나 회개가 아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에 의해서 고통이 올 수 있으며, 고통을 당하고 있는 당사자는 믿음을 통하여 그 고통에서 해방되고 치유될 수 있다는 놀라운 교훈이 담겨져 있다.
제자들은 그 사람이 소경이 된 이유를 죄의 문제와 결부시켰다.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그 사람은 자신이나 부모의 죄로 인하여 소경이 된 것이 아니었다. 예수께서는 “이 사람이나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고 대답하셨다(요 9:3).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병든 자에게 어떤 치유의 기적을 베풀 수 있는지를 보여주기시 위해서 소경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에 대하여 영광을 돌리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봉사사업을 시작하실 때, 그 소경이 믿음을 가지고 예수께 나오기를 기다리고 계셨다. 드디어 그 사람은 믿음을 가지고 예수께 나왔으며, 치유함을 받았다. 하나님의 영광을 이 땅에서 드러내기 위하여 소경이나 앉은뱅이가 되는 특권(고통)을 받은 불구자들이나 환자는 믿음을 가지고 주님께 나올 때 즉시로 치유받을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소경이나 절름발이, 그리고 앉은뱅이들에게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되면, 치유함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당신이 치유함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어떤 사람이 불구자로 평생을 살다가 죽었다고 해서 “그는 믿음이 없는 사람이다” 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들이 불구자가 된 진정한 이유를 모르며, 왜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에 응답해 주시지 않은지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시간이 이르기 전에 서두르지 말아야 한다. 잘못된 희망을 가지고 서두르면, 실망하게 될 것이다. 조용히, 그리고 신뢰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섭리를 기다리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께 대한 가장 강력한 믿음의 행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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