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황해도 - 봉산탈춤의 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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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y9713
2024.01.01. 22:14조회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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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산탈춤의 고장
『택리지』에 “황주에서 절령을 넘어 봉산ㆍ서흥ㆍ평산ㆍ금천 네 고을을 지나 개성에 이르는데, 이것이 남북으로 통하는 직로(直路)다”라고 기록한 네 고을 중에서 가장 가까이 자리한 봉산군의 원래 이름은 휴암군(鵂岩郡)이다. 고려 초기에 봉주(鳳州)라 불렸고, 조선 태종 때 지금의 이름을 얻은 봉산군은 황해도에서 해주와 평산 다음으로 큰 고을이 되었지만, 1952년 12월 행정구역 개편으로 대부분의 지역이 은파군에, 1973년 미곡리ㆍ만금리ㆍ어수로동자구가 사리원시로 넘어가면서 자그마한 군이 되었다.
기순이 지은 「부(賦)」에 “내가 조선의 봉산을 지나는데, 영물(靈物)이 이르는 것이 있을 것처럼 생각되어 거짓으로 이름 지은 것이 아닌 것 같다. 부를 지어 포장하면 거의 적막하지 않을 것 같다. 기이하다. 상서롭다. 봉의 새 됨이여, 천지의 영수(靈秀)한 기운을 타고 조화의 정영함을 알았도다”라고 한 봉산군은 재령평야의 동부에 있다. 자비산, 가마봉, 정방산 등의 산들이 솟아 있고 남서부에 재령평야와 봉산평야가 있다.
친히 윤음(綸音, 임금의 말씀)을 받들고 해 뜨는 지역으로 내려오니
봉양 정절이 개인 시내를 비치네.
먼 지방이 조공하매 전란이 그쳤으니
일만 나라의 기쁜 노래 순 임금 거문고를 즐기네.
명나라 사신 주맹헌이 봉산군을 지나며 전쟁이 끝난 뒤의 평화로움을 노래하였고, 중종 때의 문신 김식이 “푸른 연기 낀 풀 반이나 처량하고 희미하니, 이것이 산중의 옛날 길이라네. 폭포수 뿌려서 안개를 이루고, 바위 꽃 떨어지자 밟아 진흙 되네”라고 노래한 봉산군은 그 유명한 ‘봉산탈춤’1)의 고장이다.
황해도 봉산은 속담으로도 유명한데, 봉산의 유명한 수숫대처럼 키만 멀쑥하게 큰 사람을 이르는 ‘봉산 수숫대 같다’는 속담과, 황해도 봉산의 참배에도 물이 있듯이 좋은 것에도 흠이 있기 마련인데 아무런 흠도 없음을 이르는 뜻으로 쓰는 ‘봉산 참배는 물이나 있지’라는 속담이 전해 내려온다.
봉산군에 있는 주련대(駐輦臺)는 병자호란이 끝난 다음 해인 1637년 봄 소현세자, 봉림대군, 인평대군 일행이 강화조약에 따라 청나라로 가던 중 13일을 머물고 갔던 김양의 집이다.
한편 조선 후기에 이곳 봉산장은 이 일대에서도 큰 장에 속하였다. ‘눈먼 새도 간다’는 옛말이 있을 만큼 장날만 되면 어중이떠중이 다 장으로 몰려들었는데, 황해도에서도 크기로 소문난 봉산장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1894년에 황해도 봉산시장을 돌아본 영국 왕실 소속 지리학자인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평상시 잠잠하고 답답했던 마을들은 장날에 일변한다. 떠들썩해지고 울긋불긋해지고 사람들의 물결로 뒤덮인다. 이른 아침부터 공식적으로 지정된 장터로 가는 길은 농부들이 팔거나 교환할 물건들로 가득 찬다. 이들은 주로 닭, 돼지, 짚신 그리고 모자나 나무주걱과 같은 자기들이 생산한 물건을 시장에서 팔거나 다른 물품과 교환하기 위해 장으로 가는 것이다.
동시에 커다란 길에서는 보부상들이 무거운 짐을 스스로 지고 가거나 또는 짐꾼이나 황소 잔등에 짐을 싣고 길을 메운다. 보부상들은 정기적으로 일정 지역에 서는 모든 시장을 두루 돌아다니는 것이다. 이들 중 소수의 사람만이 차양을 치고 주로 여러 가지 품질의 종이 그리고 견포, 견사, 허리띠로 사용되는 끈, 호박, 금은 견사, 담배쌈지, 남자용 빗, 바지 끈, 작은 거울 등을 판매한다. 그러나 많은 양의 필수품과 사치품들은 대부분 낮은 탁자나 땅 위에 놓인 돗자리 위에 진열되는데, 상인은 시설물을 설치하기 전에 집주인에게 얼마간의 돈을 치른다. 책상 위에 놓여 있는 물건은 다음과 같다.
주먹 크기만 한 알사탕(이것들 중 어떤 것은 그 안에 참깨가 들어 있다), 대량으로 판매되는 감미 식품, 여러 가지 직물, 즉 영국이나 일본산 모직물, 마포, 대마포, 적색 면직물, 한국산 희귀 견직물, 주로 정기 시장에서 대량으로 팔리는 아닐린 염료 그리고 사프란, 인디고와 형광 염료다. 바로 그 걸상에는 또한 긴 담뱃대, 청소년층에 널리 보급되어 있는 일본제 궐련초, 가죽 가방, 일본제 성냥, 나무빗, 끝에 금ㆍ은실이 달려 있는 머리핀과 은전을 넣는 돈지갑 등이 진열되어 있다.
한국의 공산품 중 최고인 종이는 전라도에서 최상의 제품이 생산되었고, 노점 진열대에서 가장 인기가 좋았다. 모든 종류의 종이를 시장에서 살 수가 있는데, 모두가 최상의 품질을 자랑하고 있다. 그 모양과 질긴 면에서 쇠가죽과 거의 비슷하여 중상류 계층의 집안에서 장판으로 사용되는 아름답고 반투명하며 담황색인 기름종이와 벽지로 쓰이는 단단한 종이에서부터 글씨를 쓰는 데 사용되는 얇고 강한 종이와 무거운 짐을 싸는 데 사용되는 조잡한 섬유질 종이, 섬세한 천을 싸기 위한 짜임새가 화려하고 천박한 종이 그리고 뽕나무로 만들어지는 끈처럼 여러 가지 용도에 사용되는 중간 등급의 종이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땅에 깔려 있는 좌판 위에는 짚으로 만든 돗자리, 짚신과 노끈으로 만든 신, 규석, 조잡하고 거친 한국산 견직물, 수요가 많은 말고삐용 줄, 빗자루, 나막신, 흑색유포 그리고 짚ㆍ갈대ㆍ대나무로 만든 여러 가지 형태의 갓이 진열되어 있다. 또 거기에는 한국산 철제 제품으로서 음식을 만드는 데 사용하는 단지, 제철, 삽, 문고리 못, 망치, 조선산 초근 등이 있고 과일로는 크고 딱딱한 배, 밤 그리고 땅콩, 생강 등이 놓여 있었다. 거기에는 닭장 속에 갇힌 닭과 매에 잡혀온 꿩, 호화로운 새들도 있어 1원에 6마리씩 팔려 나갔으며, 토막 난 쇠고기도 볼 수 있었다.
비숍이 본 바에 따르면 그 당시 한국에는 두 종류의 상인이 있었다. 하나는 작은 읍과 마을을 찾아다니며 쌀, 곡물 등을 사서 항구로 보내어 일본으로 실어 나르는 일본 상인들이며, 다른 하나는 한국의 독특한 상인인 ‘보부상’이라는 잘 조직된 상인 단체였다.
봉산의 남서쪽에 있는 은파군은 1952년에 봉산군, 재령군, 신원군의 일부를 분리해서 신설한 군이다. 은파군 동쪽에 위치한 인산군은 평산군과 서흥군의 일부를 분리해서 1952년에 신설한 군으로, 동쪽에 멸악산과 감악산 그리고 남쪽에는 주지봉 등의 산이 솟아 있으며, 재령강과 예성강의 지류들이 흐르고 있다. 본래 황해도 평산군에 속했던 멸악산은 운달산ㆍ장수산으로 이어지며, 산세가 험한 편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봉산탈춤의 고장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6 : 북한, 2012. 10. 5., 신정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