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
서정주[徐廷柱,1915.5.18 ~ 2000.12.24]
덧없이 바래보든 壁 에 지치어
불과 時計를 나란이 죽이고
어제도 내일도 오늘도 아닌
여긔도 저긔도 거긔도 아닌
꺼저드는 어둠속 반딧불처럼 까물거려
靜止한 「나」의
「나」의 서름은 벙어리처럼…
이제 진달래꽃 벼랑 햇볓에 붉게 타오르는 봄날이 오면
壁차고 나가 목매어 울리라! 벙어리처럼
오 ― 壁아
1936년 『동아일보』신춘문예 당선시
서정주[徐廷柱,1915.5.18 ~ 2000.12.24] 시인
1915년 전북 고창에서 출생. 중앙고보와 중앙 불교학원에서 수학. 1936년 《동아일보》신춘문예에 〈벽〉이 당선되어 등단. 첫시집 『화사집(花蛇集)』(1941) 이후 『귀촉도(歸蜀途)』(1948),『신라초(新羅抄)』(1961),『동천(冬天)』(1969),『鶴이 울고 간 날들의 시』(1982)『산시』(1991)등 다수의 시집과 시전문 동인지『시인부락』을 간행. 조선청년문학가협회·한국문학가협회 시분과위원장 ·한국문인협회 이사장·동국대 교수를 역임. 5·16문학상·대한민국예술원상 등의 다수의 賞 수상.
작품 해설
그는 1915년 5월 18일 전라북도 고창(高敞)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달성(達城)이며 호는 미당(未堂)이다. 어린시절 서당에서 한학(漢學)을 공부하다가 부안 줄포공립보통학교를 거쳐 1929년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1930년 광주학생운동과 관련하여 구속되었다가 기소유예로 석방, 이로 인해 퇴학당했다. 1931년 고창고등보통학교에 편입했으나 곧 자퇴하고 박한영의 도움을 받아 대한불교전문강원에 입학하여 불교와 관련을 맺게 되었다.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벽〉이 당선되면서 등단해 같은 해 김광균(金光均)·김달진(金達鎭)·김동인(金東仁) 등과 동인지 《시인부락(詩人部落)》을 창간하고 주간을 역임하였다. 1941년 〈화사(花蛇)〉, 〈자화상(自畵像)〉, 〈문둥이〉등 24편의 시를 묶어 첫시집 《화사집》을 출간하였는데, 이 무렵에는 악마적이고 원색적인 시풍과 토속적 분위기가 짙게 풍기는 인간의 원죄(原罪) 의식을 주로 노래했다.
같은 해인 1941년 그는 동대문여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이를 시작으로 훗날에는 교수로서 여러 대학에서 후학들을 양성했다.
그러나, 1943년과 1944년까지 그는 생애에 가장 커다란 오점을 남기었다. 1942년 7월 《매일신보》에 다츠시로 시즈오[達城靜雄]라는 창씨 명으로 평론 〈시의 이야기-주로 국민 시가에 대하여〉를 발표하면서 친일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1944년까지 친일 문학지인 《국민문학》과 《국민시가》의 편집에 관여하면서 수필 〈징병 적령기의 아들을 둔 조선의 어머니에게〉(1943), 〈인보(隣保)의 정신〉(1943), 〈스무 살 된 벗에게〉(1943)와 일본어로 쓴 시 〈항공일에〉(1943), 단편소설 〈최체부의 군속 지망〉(1943), 시 〈헌시(獻詩)〉(1943), 〈오장 마쓰이 송가〉(1944) 등 여러 편의 친일 작품을 발표했다.
우리나라 5000년의 역사에서 가장 불행하면서도 치욕적인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서 그가 사망할 때까지 그는 분명히 친일행적의 오명을 남기었다.
그와 같이 당시 그가 보인 행보는, 같은 시기에 총독부를 등진 집에서 시래기죽으로 연명하던 만해가 영양실조로 숨을 거두고 이육사와 윤동주가 각각 베이징과 후쿠오카의 차가운 감방에서 쓸쓸하게 최후를 맞은 것과 크게 비교된다.
1945년 해방이 되자 그는 책장사로 호구를 면하다 부산에 내려가 남조선대(東亞大 전신) 전임강사로 있으면서 김좌진 장군 전기를 쓰게 된다. 1948년 시집 ‘귀촉도(歸蜀途)를 상재했다. 그리고 1955년에는 《서정주 시선》을 출간하며 자기 성찰과 달관의 세계를 동양적이고 민족적인 정조로 노래했다. 불교 사상에 입각해 인간 구원을 시도한 『신라초』(1961), 『동천』(1969), 토속적·주술적이며 원시적 샤머니즘을 노래한 『질마재 신화』(1975)와 『떠돌이의 시』(1976) 외에 『노래』(1984), 『팔할이 바람』(1988), 『산시(山詩)』(1991), 『늙은 떠돌이의 시』(1993) 등을 출간했다.
그는 작품 활동 이외에도 1948년 《동아일보》 사회부장·문화부장, 문교부 예술국장을 거쳐 1954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으로 활동했다. 또한 1960년 이후에는 조선대학교·서라벌예술대학교 교수, 동국대학교 문리대학 교수(1959~1979)를 지낸 뒤 동국대학교 대학원 종신 명예교수가 되었다. 1971년 현대시인협회 회장, 1972년 불교문학가협회 회장, 1977년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1984년 범세계 한국예술인회의 이사장, 1986년 《문학정신》 발행인 겸 편집인을 지냈고, 2000년 12월 24일 사망했다.
그는 시력(詩歷) 7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15권의 시집과 1천편에 이르는 주옥같은 시를 남겼다. 또한 그는 고은, 황동규, 박재삼 등 1백명이 넘는 쟁쟁한 시인들을 등단시켰으며 생존시에 그는 몇차례의 노벨문학상 후보로도 추천된 바가 있고, 미국 일본 등 7개국 언어로 작품이 번역되어 출간될 만큼 명실공히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으로 그 명성이 자자했다.
또한 한국적인 정서와 모국어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는 시인으로서 그가 다양하게 보여준 형성력은 20세기 한국문학의 축복이라 할수 있다. 걸출한 개성과 특유의 수사는 거칠 것이 없다. 고조선과 신라, 그리이스로 부터 미래에 까지, 그리고 고향 질마재에서 에베레스트에 까지 이르고 있다. 또 한사상과 동양고전, 불교와 기독교 사상, 오비디우스와 보들레르며 도스토예프스키와 니체에 까지 걸쳐 있다.
그의 시적 여정은 20대에 화사집을 통해 정신적 육체적 방황의 탐미적 아름다움을, 30대에는 귀촉도를 통해 전통적 정서와 가라앉은 톤으로 동양적 사유의 본령을 탐색했다. 또 40대에는 한의 강물과 그것을 초극하는 노래를, 50대의 동천(冬天) 무렵에는 영생적 개안과 불교적 은유의 세계를, 60대의 질마재 신화 무렵에는 고향의 원형적 설화를 펼쳐온 장대한 흐름이었다. 70대 이후에는 킬로만자로에서 태평양까지 세계를 여행하며 세계각국의 모습을 한국적인 정서로 녹여내었다.
그런 미당(未堂) 서정주(徐廷柱)를 표현하는 수사는 현란하다. 이밖에도 “언어의 연금술사”, “신라 향가이래 최고의 시인”, “시성(詩聖)”, “시선(詩仙)”, “살아있는 시신(詩神)”, “시인들을 신민으로 거느린 시왕국의 왕” ,“살아있는 한국 시사(詩史)” 등 이루 헤아릴수 없다.
대부분의 시인이나 평론가는 물론, 문학관련 기자들도 그를 우리나라 현대시 100년史를 대표하는 최고의 시인으로 꼽는 데는 주저하지 않는다.
서정주 시의 초기에 해당하는 『화사집』과 『귀촉도』는 연금술 작업의 세 단계에서 첫 단계인 니그레도에 해당한다. 이 니그레도 단계는 연금술의 최종 목표라고 할 수 있는 인간의 신적 변용, 즉 우주적 존재로서의 신적 인간(Gottesmensch)으로 나아가기 위한 첫 단계이자 가장 위험한 단계이며, 동시에 가장 중요한 단계이다.
이 단계는 화학적으로 합일(Coniunctio)과 분리의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심리학적으로는 자아의 퇴행(Regression)과 죽음을 의미하는 단계이다. 이때의 죽음은 前 우주론적 혼돈으로의 복귀이자 제 1의 물질(Prima materia)로의 환원, 자궁으로의 회귀를 나타내며 동시에 부활과 재생의 예비 단계로서 통과제의적 체험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여기서 제 1의 물질의 환원과 분리 혹은 죽음은 동시적으로 진행되지만, ‘합일’은 니그레도의 선행 과정에 해당한다. 중요한 사실은 이 ‘합일’이 내재적으로 4 원소의 구성적인 배치는 이루어지지 않고 단지 통합을 위하여 질료 전체가 모여 있는, 연금술의 전체 단계에서 ‘첫’ 합일에 해당한다는 점이다. 연금술에서 첫 합일로서의 대극의 합일(Coniunctio oppositorum)은 보통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과 같은 반대되는 요소의 결합이라는 비유로 나타나며 대극은 오누이 쌍, 건과 습, 온과 냉, 해와 달, 수은과 유황, 원과 사각, 물과 불, 휘발성과 무거움, 육체적인 것과 영적인 것 등의 여러 변이형을 가지고 있다. 중요한 사실은 이 합일이 연금술의 ‘천상의 결혼’과는 달리 각 원소들의 반목을 동반한 위험한 대극 긴장의 부담을 안고 있으며, 근친상간적인 성애(性愛)적 환상을 드러낸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이 첫 합일은 근친간으로 인한 죄가 있으며 부정을 남긴다. 이 합일 이후 발생하는 니그레도가 항상 어둠, 지옥, 죽음, 죄 등으로 나타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불순함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오늘 소개하는 서정주의 등단시「벽」은 그의 초기시에서 강렬하게 드러나는 주체의 니그레도적인 혼돈양상과 존재의 이행을 위한 ‘육벽의 타개’의 시도를 처음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시작품 중 하나이다.
이 시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1연의 ‘불과 時計를 나란이 죽이고’와 4연의 ‘壁차고 나가 목매어 울리라! 벙어리처럼’의 두 구절이다. 이 구절들은 ‘나’의 심리적 상태를 드러내는 부분으로 ‘나’가 처한 한계 상황과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나’의 욕구를 보여준다. 이 시에서 시적 주체의 한계 상황은 ‘벽’이라는 상관물을 통해서 표현되고 있는데, 중요한 사실은 이 한계 상황이 ‘불과 시계’로 인한 것이라는 점이다. 즉 이 시에서 ‘나’의 ‘벽차고 나가’고자 하는 욕망은 바로 ‘불과 시계’의 극복 의지이다. 여기서 ‘불과 시계’는 산술적이고 근대적인 인간의 이성과 자아의 유한성을 남김없이 드러내는 일종의 ‘빛’으로 해석되어진다.
그런 점에서 이 시에 나타난 ‘시계’라는 상징은 인간의 가치에 적대적인 하나의 상품으로서의 근대적 시간이며 영원성을 상실하고 타락한 속된 지속으로서의 시간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시계를 죽이는 시적 주체의 행위는 고대인의 속된 시간의 폐지에 해당하는 행위라고 볼 수 있다. 고대인에게 있어 파괴적이고 속된 지속으로서의 근대의 시간은 세계가 출현하고, 순수하고 강한 성스러운 시간의 흐름을 타게 되는 신화적 순간을 반복하기 위하여 폐지된다. 시 「벽」은 서정주의 영원성의 시학에서 확인할 수 있는 이러한 고대인의 시간관의 단초를 미흡하나마 드러내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이러한 고대인의 시간의 폐지는 일종의 ‘세계의 종말’을 의미하는 여러 의례들을 통하여 실현되며, 그로 인한 사회적 혼란과 성애의 자유, 오르기 등은 코스모스에서 카오스로의 되돌아감을 상징한다는 점이다. 이 시에서 ‘불과 시계를 나란이 죽이’는 살해의 행위는 바로 이러한 고대인의 ‘의례’를 표현하는 것이며, 2연의 ‘어제도 내일도 오늘도 아닌’은 그로 인한 前 우주론적 ‘혼란’을 의미한다.
‘불’을 죽이는 시적 주체의 행위 또한 마찬가지의 의미를 지닌다. 불을 끄는 것은 근대적 계몽 이성에 대한 거부인 동시에 우주론적 밤으로의 회귀를 듯하며, ‘꺼저드는 어둠속’과 같은 혼돈을 야기한다. 즉, ‘여긔도 저긔도 거긔도 아닌’ 것이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이 ‘불’이 낮의 원리, 즉 빛으로서의 자아와 의식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이 ‘불’을 죽이는 시적 주체의 행위는 자아 중심적 지배원리를 파괴하는 것이며, 동시에 자아를 ‘靜止’시키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시계’의 죽음 혹은 근대적 시간의 폐지 이후에 나타나는 혼돈의 양상은 심리학적으로 ‘무의식’의 범람이며 이 시에서의 ‘靜止한 나’의 상태인 것이다.
시 「벽」에서 나타나는 불꺼짐으로서의 ‘無明’과 ‘정지한 나’와 ‘벙어리’의 동일시는 바로 이러한 자아의 퇴행과 관련된 의미를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즉, ‘정지한 나’의 상태란 는 자아가 전적으로 내향적이 되어 집단 무의식이 활성화되는 상태이며. 자아가 자신의 주도적 역할을 거두고 무의식에 내재된 통제력에 의존하는 일종의 자아의 ‘활동 중지’ 상태이다.
이 시에서 ‘불과 時計를 나란이 죽이’는 행위는 ‘근대적 시간의 폐기’와 ‘자아 중심적 지배 원리의 파괴’라는 의미를 동시에 지니고 있으며, 이것은 곧 ‘壁차고 나가’고자 하는 존재의 이행의 전 단계라는 의미를 가진다. 이런 점에서 이 시는 서정주의 ‘육벽의 타개’의 시초라고 볼 수 있다. 이 사실은 4연의 ‘이제 진달래꽃 벼랑 햇볓에 붉게 타오르는 봄날이 오면’이라는 구절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진달래 꽃이 붉게 타오른다는 이미지는 일종의 ‘잠재력으로의 회귀’에 해당한다. 그것은 불태움의 행위를 통해서 꽃이 재나 숯과 같은 ‘씨’의 상태로 회귀하기 때문이다. 모든 생명의 재생과 부활로서의 봄은 불에 의한 고통과 죽음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시인의 인식이 바로 이 구절에 숨겨져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벙어리’의 원초적 육성인 목 매인 울음은 이러한 ‘새로운 시작’, 즉 봄의 예비 단계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연금술 식으로 말하면 최초의 질료로 흡수되어 다음의 새로운 봄을 기대하면서 휴식을 취하는 것이다.
- 우원호
[출처] 벽 - 서정주 / 1936년 『동아일보』신춘문예 당선시 (시詩사랑 숨비소리) | 작성자 휘파람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