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들이 기억해야 할 한국교회 위인들 [22]
이재명(李在明, 1888?-1910)④
이재명의 칼을 맞은 매국노 이완용은 죽을 수 있을 정도로 심각한 장기 손상을 입었지만 점차 회복되었고, 새해를 맞이하면서 일본의 황태자로부터 위로 전문도 받았습니다. 황족과 대신들의 병문안도 계속 이어졌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관찰사들과 군수들이 이완용에게 위문 전보와 위로금을 보냈고, 일본 수상을 대신한 비서관도 병문안을 했으며, 벨기에 황제도 위로 전문을 보낼 정도였습니다. 심지어 순종과 고종도 위로금을 보냈습니다. 오히려 매국노 이완용은 죽지 않고 살아난 덕분에 많은 인사들로부터 위로와 위로금을 받았지만, 이완용을 처단하지 못한 이재명은 고문과 심문으로 고통을 당했고, 기소를 기다리는 동안 억울하고 분해서 절규의 눈물을 흘려야 했습니다. 김구 선생은 사건 이후 신문 기사를 읽고 그가 만났던 젊은 청년 이재명이 이완용을 처단하려다 실패로 끝난 일을 알게 되었습니다. 김구 선생이 청년 이재명을 만났을 때 그로부터 단총을 받아서 보관하겠다고 한 것은 열정만 앞서서 일을 그르칠 수 있는 청년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는데, 이재명이 총이 아닌 칼로 이완용을 처단하려고 했다는 사실을 알고 크게 한탄하고 후회했습니다. 그 정도로 이완용은 민족의 반역자로 처단 대상이었던 것입니다. 감옥에 갇힌 상태에서 이재명은 절망감에 고통스러워했습니다. 이완용은 빠르게 회복 중이었고 7주가 지나서 퇴원한 후 일상생활을 할 정도가 되었지만, 이재명은 1910년 4월 13일 경성재판소에서 열린 첫 번째 공판에 참석해야 했습니다. 당시 도주 중이었던 세 명의 동지 외에 다른 동지 열 명이 앉아있었고, 방청석에는 아내와 지인들 20여 명이 앉아있었으며, 취재를 위해 온 신문기자들도 많이 참석해있었습니다.
<참고도서: 박상우 장편소설 『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