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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명-우리 역사를 움직인 33가지 철학
저자-황훈영
출판사-푸른숲 97.7.5.329쪽
독정-2020. 2. 4. 화
·참을성과 순박함을 지닌 곰이 이기는 것은 한국인의 마음이다 인간의 역사를 정복하는 힘으로 끌던 서양인 마음과 대조다.
<하늘에서 내린 오곡의 씨앗> 무속 이야기‘인간의 행복은 하늘에 달렸다는 사고다.
자식이 없던 김진국과 조곡진 부부가 불공을 들여 자청비라는 딸을 얻었다. 자청비는 하늘의 문도령을 만나 부부가 되었으니 문도령이 죽자 남장을 하고 서천ㄱ에 가서 환생꽃을 얻어와 남편을 되살린다. 그러면서 문도령에게 서천국 막내딸을 돌보고 오라한다 문도령은 아무리 기다려도 소식이 없자 옥황상제에게 사연을 알리자 그제야 돌아왔다. 두 사람은 하늘의 분쟁을 해결한 공을 세웠고 문선왕은 땅을 주겠다 했지만 그들은 땅 대신 씨앗을 받아 세상으로 내려왔다. 오곡 씨앗 가운데 한 가지를 잊고 온 것을 안 자청비가 하늘에 가서 다시 가져왔지만 이미 씨 뿌릴 시기가 지나서 혹시나 하고 뿌렸더니 가을에 다른 곡식과 함께 거두었다. 이것이 메밀이다 두 사람은 훗날 농신이 되고 자청비의 하인 정수남은 축산신이 된다.
·하루는 하늘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니 사람들이 수풀에 의지하고 살며 추위에 떨고 여름이면 더워 고행하였다. 성조신은 처음으로 집 짓는 법을 가르쳐주고 먹고 살 복도 주었다. 그 후로 사람들은 성조신을 가장 높은 신으로 받들었다.
<태교시 몸가짐 조심>
양쪽으로 가라진 무를 먹으면 다리 병신을 낳고 불구경하면 액살이 끼고 상여를 보면 수명이 짧아진다. 제사 음식과 남의 돌 음식도 먹지 않는다. 산모가 진통하는 동안에는 집안의 문을 모두 열어둔다. 가축들도 자유롭게 풀어놓는다, 남편 옷을 산모 옆에 두어 산모가 심리적으로 안심하게 한다. 난산 기미가 보이면 아이르 쉽게 낳ㅇ츤 사람의 속옷을 빌려 입힌다. 해산 뒤 아들인면 고추, 딸이면 솔잎을 매달았다. 출입금지 표시다. 질병 방지.
<법령이 지켜낸 상원사종>
한암 선사는 1951년 1.4후퇴 때 오대산이 적의 수중에 들어가기 직전. 김백일 장군이 오대산 안의 모든 사찰을 불태우라는 명령을 내렸다. 사찰 대중은 모두 피난을 가버리고 예순일곱의 한암스님만이 오대산 상원사 법당에 앉아 절을 지켰다.
“절을 태워야 하니 빨리 나오시오.”
하는 장교에게 “그냥 불을 지르시오. 당신이 군인의 본분으로 상관 명령에 복종해야 하듯이 절을 지키는 것은 부처님 제자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오. 나는 내 본분을 지키며 죽을 것이오.” 스닙의 법력에 감화된 장교는 법당 문짝만 떼어서 마당에 쌓아놓고 불을 지른 다음 떠나갔다. 그 일이 있은 지 두 달쯤 지난 1951년 초순 아침, 한암 스님은 죽 한 그릇과 차 한 잔을 마시고 손가락을 꼽았다.
“오늘이 음력으로 2월 14일이지” 오전 10시. 스님은 가사와 장삼을 입고 선상에 단정히 앉아 입적하셨다.
· 원효는 처음으로 불일이 빛나다란 뜻이다. 새벽이란 말이다. 불교의 새벽을 연 그의 생에에 걸맞은 이름이다. 원효는 의상고 당으로 갈 배를 구해 폭우를 만나 흙구덩이에서 자다가 목이 말라 더듬어 바가지에 물이 담긴 것으르 마셨다. 일어나 보니 간밤의 바자기는 피고름 찌꺼기가 붙은 해골바기지였다. 깨달음을 얻어 ‘이 세상 어떤 일도 마음 안에서 일어난다. 진리 또한 밖에서 찾을 것이 안리ㅏ 자신에게서 찾아야 한다.’는며 깨닫고 유학을 포기했다. 태종무열왕의 둘째딸로 남편을 백제와 사움에서 잃은 과부 요석 공주와 사람을 삼국유사는 –원효가 미치광이처러 거리에서 노래- “자루 없는 도끼를 받아줄 그 누가 없을까. 하늘을 떠받드는 기두을 내가 찍어주련만.” 太宗무열왕이 듣고 “대사가 부인을 만나 어진 사식을 낳고 싶어한다. 니라에 어진 이가 있게 되면 이보다 유익한 일이 없다‘며 원효는 물에 빠진 옷을 적시고 그것을 말리는 핑계로 요석궁에서 밤을 모내 이두를 지은 설총을 얻는다.원효는 스스로 <무예가>를 지어 가난한 자나 무식한 자에게 불타의 이름을 알리고 귀족만의 전유물이 아니 되도록 했다. 거지와 어울리고 술집이나 기생집을 드나들고 음악을 즐기고 사람들과 어울렸다. 원효 대사는 갈등과 전쟁으 시대에 신분의 굴레로 갈등을 빚는 사람들 모두를 포용하는 화해를 택했다, 화쟁 사상을 제히했다. 족빛과 남색이 하나고 물과 얼음이 같ㄷ즛 다른 석처럼 보이는 주장도 모두 섞다의 말씀으로 해석했다. 다툼은 집착에서 생긴다. 어떤 다른 견해가 생겼을 때 있음을 고집히는 것은 비었다고 고집하는 것과 드리고 공에 집착하는 것은 있다고 고집하는 것과 다르다고 주장할 때 논쟁을 다른 것도 아니요. 같은 것도 아니라 했다. 마치 갈대구멍으로 하늘을 보고 그 갈대구멍으로 하늘을 보지 않은 살마들을 두고 모두 하늘을 보지 못한 자라 함과 같다. 산을 보지 못한 채 골짜기를 헤매거나 나무를 버리고 숲속으로 달려가ᅟᅳᆫㄴ 격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 원효가 강조했던 조화를 통해 통합의 정신을 한 단계 승화시킨 화쟁 사상을 우리 현실에서 활용해야 할 때다.
<소 치는 목동 조계종을 세운 보조국사 지눌>
대웅전 벽 소 그림 중 처음 나오는 소는 검은색 길들여지면 반은 검고 반은 흰소가 도이ᅟᅥᆻ다가 마침내 완전히 흰 소가 된다. 흰 소는 모든 욕심이 사라진 상태다. 몽주자수심결의 내용을 그림으로 그려놓은 목우자 10도를 보면 소 치는 마음으로 마음을 닦는 비결이란 뜻이다. 불교 수도 과저응ㄹ 소치느 것과 같다 하여 소치는 아이란 뜻으로 호를 목우자라 하였다. 몸이 약해 여덟살에 부처님게 출가했다. 교종에서는 부처님이 말씀한 대장경이 참된 부처님 법이라 하고 선종에서는 부처님 가르침 외에 따로 깨달음을 얻는 것은 선이라 했다. 지놀은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요.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니 부처님 말씀과 마음이 둘이 아니다.”며 한 데 묶어 한국 통합 불교를 건립하였다. 이 사상이 한국 불교에 그대로 전승되고 있다. 그가 강조했던 닦음이란 우리의 본래 모습으로 인간답게 살기 위한 과정이다. 자기 회복, 자기 형성의 직접적 메시지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부귀, 영화에 물들어 인간 존엄과 가치가 사라지는 현실에서 지눌의 사상은 삶의 가르침을 준다.
· 미륵 불상은 머문므 자리가 일정하지 않다. 깊은 산 속 바위에 새겨지기도 하고 돌무덤 속에 서 있기도 한다, 생긴 모양도 가지각색. 빼어난 미모로 부드러운 곡선을 지닌 미륵반가사유상, 도탄에 빠진 민중 모습을 닮아 찟진 얼굴, 투박하고 못생긴 얼굴을 드러내기도 한다. 왜 이렇게 다양한 모습일까? <미륵 삼부경>은 <상생경><하생경><성불경>으로 이루어져 있다 상생경은 현실에서 부지런히 덕을 닦으면 죽어서 도솔천에 태어나 미륵보살을 반난다는 상생 신앙을 담았다. 하생경과 성불경은 미래 세상에 미륵이 성불할 때 그를 좇아 염부레로 내려와 미륵불의 법회에 제일 먼저 참석하며녀 개달음을 얻는따는 하생 신앙이다. 한 마디로 미륵 사상은 어리저로운 현실 세계를 평정하고 평화의 미래 세계를 열어줄 미래 싱낭이다. 석가가 입적한 뒤 56억 7천만 년이 지나면 미륵불이 사바세계에 나타나 이상적 나라를 건설할 것이다.-수명은 8만 4천 세, 꽃과 향으로 뒤덥혀 있고 지혜와 덕을 갖추게 될 것이고 수업은 보배가 길거리레 즐비하지만 누구도 탐하지 않는 세상이다. 미륵불이 끝없이 공덕을 닦아 도솔천에 다시 태어나듯이 중생도 끊임없는 정진과 수행으로 미륵불을 만날 수 있음을 암시. 그래서 미륵은 언제나 민중의 편에 서 있다. 미륵 신앙을 ㅂ주흥시킨 진표 스님은 어린 날 개구릴 잡곻 놀다가 개구리르 줄줄이 꿰어놓은 채 깜박 잊고 집에 와 오래 뒤에 나갔다가 그 개구리들이 여태 살아 있는 것을 보고 개구리에게 그런 고통을 안겨준 자기 잘못을 뉘우치며 절에 찾아갔다. 이것이 진표 스님의 출가 동기다. 진표는 이때 느낀 참회와 자비심을 평생 간지, 가난하고 고통받는 대중을 위해 살았다. 진표 스님의 점찰 법회는 백성의 상황에 맞게 창조한 미륵 신앙 운동이 되었다. 조선시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쑥대밭인 된 부정. 부패를 뒤엎고 새 세상을 연다는 미륵불의 출현을 바라는 미륵 신앙이 민중 속에 파고 들었다. 미륵은 유교 탄압에서 벗어나 마을로 피난을 내려왔다.. 절이 불태워지고 스님들이 탄압받는 상황에서 미륵 신앙도 온전할 수 없음을 안 민중들은 마을에다 자기만의 미륵을 세웠다. 칭호가 미륵불-메륵보살-미륵님으로 변하듯 민중의 두터운 신뢰를 엿 볼 수 있다. 민중은 십시일반으로 정성 모아 하찮은 솜씨로 사라진 절터에서 업어온 부처를 미륵님으로 모시기도 하고 먹고 살기 힘든 곳에서는 돌 하나 세워놓고도 미륵이라 불렀다. 기존에 세워두었던 선돌에까지 미륵이라는 이름표를 달았다 미륵은 마을 어귀에 서있는 돌이나 짐승, 남근석 등 같이 마을의 수호신으로 토착화되었다. 제주 용화사 서자복 미륵은 하루방의 텃세에도 살아온 미륵이다. 까만 현무암에 벙거지를 쓴것까지 하루방을 닮았지만 하루방과는 존재 의미가 천지차이다. 하루방은 인간 아래에 있는 존재지만 미륵은 인간 위에 있는 천상의 존재였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에 보면 신라 눌지왕은 나라가 어려운 지경에 처했을 때만 백성에게 잡를 페불지 않고 평소에도 돌봤다. 전국 각지 무의탁 노인을 모아 군신 합동 회의소였던 남당의 뜰에서 잔치를 베풀고 노인과 함께 식사 학소 선물을 나누어 주었다. 유리오아도 늙은 홀아비와 과부, 무자ᅟᅵᆨ 생계 어려운 노인에게 음식과 생필품을 내려주었다. 세속오계의 둘째 항목인 사친이효가 그것이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가정의 화목이 이루어진다. <고려사>에 보며 노인을 위한 각종 결로잔칠르 벌였고 왕과 왕후가 행차핧 때 지방 효자, 효부 열녀를 한 자리에 모아 큰 상을 내렸다. 이들 행적을 모하 <중보문헌비고> 챇을 간행했는데 최초의 효행실록이다. 고려 시대에 부모 모시기 위한 휴가 제도가 있었다. 형 집행중이라도 조부. 부모상을 당하면 일시 중지시켜 장례를 치를 수 있게 했다. 70세 부모가 계시는 시중할 자 없으면 부모가 살아 계시는 동안은 봉양한 뒤 다시 복역하도록 했다. 고려 시대 효도 표창 제도도 많았다.효행자는 푸짐한 상품, 세금 감면, 부역 면제신분 상승, 승진, 포상도 이뤄졌다. 관리 채용할 땨 효성이 직한 자를 채용하는 “효림제”도 실시했다. 그러니 부모가 나이 들면 갖다 버린다는 이야기는 불효를 통해 다시 반성하고 효심을 되찾는다는 교훈을 주기 위한 이야기로 만들어졌다. 늙고 병든 사람을 산 채로 광 속에 두었다가 죽으면 그 자리에 매장하는 것이 고려장이다.
유교 경전 중 <효경>에서 공자는 3천 가지 죄 가운데 불효죄가 가장 크다고 했다. 공자가 가르친 불효자의 행동은
불효자는 어버이를 귀찮게 한다
불효자는 어버이를 서운하게 한다
불효자는 어버이를 뒤로 제친다
불효자는 어버이를 어른으로 모시지 않는다
불효자는 어버이 말을 듣지 않는다
불효자는 어버이를 설득시키려 든다
불효자는 어버이 은혜를 모른다
불효자는 어버이 앞에서 예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불효자는 어버이 앞에서 말을 어렵게 한다.
불효자는 어버이 앞에서 문자를 사용한다,
불효자는 어버이 앞에서 따지게 된다를
불효자는 어버이를 이기고 많다
불효자는 어버이를 슬프게 한다
불효자는 술에 빠지고 음란에 빠진다
불효자는 글을 읽지 않는다
· 화랑은 화는 여자 랑은 만자를 말한다 이름도 풍월주, 원화, 국선, 풍류 등 종합하면 ‘나라의 꽃’이라는 뜻이다.
삼국 사기의 화랑을 보면 봄에 원화를 받릉어 처음에는 임금과 신하가 인제를 알아내지 못함을 염려하여 무리를 모아 떼 지게 놀게 한 뒤 그 행동거지를 보아 인재를 천거해 쓰려 하였다. 3백 명의 여인 중 남오, 준정 두 명을 택했는데 준정이 남모를 자기 집으로 유인하여 술을 권해 취하게 한 뒤 강물에 던져 죽이자 사형시키고 다시 남자를 단장시켜 화랑이라 하여 받들었다. 노래, 음악 즐기며 산수에서 즐겁게 놀며 선량한 인물을 택하여 조정에 추천하였다.세속 오계는 국가 승인을 얻은 것이 아니라 귀산과 추항이라는 화랑의 요청으로 원광법사가 답했던 교훈이었더. 군신유의 부부유친 붕우유신. 등. 은연 중에 화랑 오계라 불려지게 되었다.
<삼국유사>에 전하는 미륵선화
신라 흥륜사의 진자 스님은 “바라옵건데 우리 대성. 미를께서 화알으로 몸을 세ㅐ상에 나나태소서. 제가 모시고 받들겠습니다”하였다. 이때, 미륵상은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었다. “웅천의 수원사에 가보아라는 꿈에 그 절을 찾아가니 한 청년이 맞았다. 들어가 수원사 스님들에게 꿈 이야기를 하니 ”남쪽 천산으로 가면 성현들이 살던 곳이라 그리고 가보시오.“했다. 천산에 다다르니 어떤 노인이 나와 묻기에 미륻선화르 뵙고자 왔다하니 저번에 수원사 문 밖에서 이미 미륵선화를 뵈었으면서 무엇하러 또 만나려고 하오하였다. 만나보니 수원사 절 앞에서 보던 키 작은 미모의 청년이었다. 그를 가마에 태워 왕에게 보내 화랑으로 받들었다. 청년은 화목과 예로 지도력이 탁월하여 세상을 빛냈다.
선비는 한 시대애 나가 도를 시행하고 후세 말씀을 내려 가르침을 베풀어야 한다.선비가 정치 담ㄴ장자로 부상하여 사람정치가 시작되는 조선 선조 때에는 선비 정신이 당쟁에 붙혀 당파가 만들어지고 주도권 장악 살육전을 일으켰다. 박지원의 <양반전>을 보면 당시 전형적 선비였던 성호 이익도 “나는 실 한 오리ㅐ, 낟알 한 알도 생상 못하니 어찌 좀벌레가 아닌가? 자책했다 다산 정약용도 ”선비는 어찌 손발을 움직이지도 않으면서 땅에서 생산되는 것을 삼키며 남의 힘으로 먹는가? 하며 무위도식을 힐난했다. 선비는 사회에서 그 사회의 양심이요. 지성이며 인격의 기준으로 인식되었다. 삼국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시대에 따라 양상은 조금씩 달랐지만 사회 ㅈ;도적 구실을 하는 지성으로 그 책임을 다하였다. 개화기 이후 선비는 시대의 이념을 수호하고 주체가 되었다. 독립투쟁기에는 의사, 열사. 산업성장기에는 경영자나 기술자가 되었다. 선비는 언제나 그 사회가 요구하는 이념적 지도자요. 지성인이었다. 현실, 감각적 요구에 매몰되지 않고 높은 가치를 향하는 의식으로 신념을 실헌하고 꺽이지 않는 용기를 발휘한다. 자신의 과오를 성찰하며 모든 계층을 통합하고 조화시키는 중심이 되어야 한다.
· 장영실이 만든 물시계(자격루)가 유명하나 남아 있지 않다. 만원짜리 지폐 앞의 물시계는 서울 덕수궁 법원 쪽 구성에 서 있는 유물을 그림으로 나타낸 것이다.
<서경덕 일화>
어릴 때 나물을 뜯어오라 했더니 빈 바구니를 들고와 “나무을 뜯으려니 종달새가 날았어요. 그제느 땅에서 한 치쯤 날더니 어제는 두 치쯤 날았고 오늘은 세 치쯤 날앙성요. 왜 이렇게 새가 나는 모양이 다른가. 왜 쉬지않고 집을 들락거릴까. 왜 저 높은 데 집을 지었을까 이런 생각을 하느라 그랬습니다.” 이런 호기심이 기 철학을 완성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재상은 특수 자질을 강조한다. 자기 자신을 바르게 하는 것. 군주를 바르게 하는 것. 인재를 가려 쓰는 것. 일을 공정하게 처리하는 것이다.
불교의 윤회는 사람이 죽으면 살았을 때 행동에 따라 짐승으로 났다가 귀신으로 났다가 나중에 불교의 가르침을 깨달아 스스로 부처가 될 때까지 계속된다고 한다. 정도전은 이를 비판했다. 사람은 자연에서 태어나 죽으면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 뿐. 마치 커다란 돌이 먼지가 되어 바람에 흩어지면 그 먼지는 있지만 돌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라 생각했다.`
율곡이 강원도 강릉 외가에 태어났다. 지금 오죽헌이 바로 그곳이다. 여기 가면 ㅁ농룡실이라는 방이 이?ㅆ는데 이곳에서 율곡 이이가 태어났다. 이 방은 사임당이 율곡을 낳을 때 꾸었다는 꿈 때문에 몽룡실이라 이름 붙여졌다. (이집트 여행 때도 이 같은 방이 있었다)
성인이 되지 못하고 악을 행하느 것은 기질에 원인이 있다. 율곡 왈 “사람에게 리와 기가 있는데 리는 비록 하나지만 기는 여러 가지로 나타난다. 말고 흐리고 두텁고 엷게 나타난다. 선하고 악한 행동을 하는 것은 기의 맑고 흐림 두텁고 엶음 때문이다. 인간은 선천적으로 선한 본성이라 그 요소만 제거하면 본성은 회복될 수 있어 교육을 통해 기질을 변화시킬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