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헤르만 프레이가 부르는 슈만의 <헌정>, 맨밑에 피아노 연주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봄 가뭄을 해갈하는 봄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아름다운 봄날의 밤입니다.
저는 아침에 컴퓨터를 켤 때 화면에 쫙 펼쳐지는 아이콘들을 볼 때마다, 잠자는 시간 외에 항상 손아귀에서 스마트 폰을 만지작 거리면서, 그래서 카카어톡을 통해서 손주 사진과 동영상을 수시로 접하고, 산책할 때 클라식 음악을 항상 들을 수 있고, 또한 손끝으로 휙휙 화면을 넘기고 손가락으로 그림이나 사진을 크게 하고 작게 할 때마다 이런 제품을 우리들에게 남기고 4년 전 눈을 감은 스티브 잡스를 생각하곤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잡스 특집을 마련했습니다. 오늘 준비한 곡인 <헌정>은 슈만이 끔찍이도 사랑했던 부인 클라라에게 헌정했던 곡이지만, 황혼기 인생을 보내고 있는 저에게 새로운 각도에서 인생을 바라다보게 해 준 스티브 잡스에게 이 곡을 헌정하려고 합니다.
[ 잡스의 죽음 ]
2011년 10월 5일, 전 세계는 심한 상실감에 사로잡혔습니다. 스티브 잡스가 오래동안 앓던 췌장암으로 눈을 감았던 것입니다. 잡스는 확실히 그 자신이 생전에 경의를 표하던 위인들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가 사랑해 마지않았던 밥 딜런, 피카소, 아인슈타인, 알프레도 히치콕과 유사한 마법사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놀랄만큼 주위의 흐름을 역행했던 잡스의 방식, 검정 터틀넥 니트, 청바지는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아 있을 겁니다. 잡스는 개인주의자였지만 매우 정이 많았고, 비사교적이었지만 특이하게 매혹적인 사람이었습니다.
* 아이폰을 소개하고 있는 잡스
우리는 일상적인 사업 관행에 잡스가 담대히 “아니오”라고 말하며 개인적 신념과 예술적 취향을 굽히지 않는 인물이었기에 더더욱 그를 사랑했습니다.
애플 초창기 모험을 함께한 동료이자 컴퓨터 천재인 스티브 워즈니악, 애플의 중역 장루이 가세의 공식 추도 메시지가 전파됐고 세계적으로 추모의 물결이 멀리 멀리 퍼져나갔습니다.
버락 오바마를 필두로 세계 유수 국가들의 대통령과 과거 경쟁자였던 빌 게이츠뿐 아니라 스티븐 스필버그, 폴 매카트니, 에바 롱고리아 같은 유명 영화인과 음악가, 패션디자이너들이 잡스의 업적과 재능을 기렸습니다.
* 잡스를 애도하는 꽃다발들
이러한 추모 열기 속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은 아무래도 보통 사람들의 모습이었을 겁니다. 수많은 애플 팬들은 뉴욕, 바르셀로나, 파리의 애플 스토어를 찾아가 잡스에게 작별을 고하는 메시지를 남기거나 사과나 꽃을 놓아두었습니다.
그들은 친구의 마지막 안녕을 위해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잡스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와 훨씬 더 가까웠던 것 같습니다. 잡스는 아름다운 제품들을 통해 우리 삶을 더욱 아름답게 보도록 도와주었고 윤택하게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자신의 미학과 철학을 불어넣어주고 저 세상으로 떠난 것입니다.
* 애플의 모토, "다르게 생각하라"
[ 잡스의 상상력,철학,인문학,낭만 그리고 미학 ]
스티브 잡스의 상상력과 철학은 일반인들의 예상을 훨씬 넘어섭니다. 놀랍도록 과감하고 직접적이면서도 심오한 통찰이 함께하고 있습니다. 그에 대한 평가도 극과 극을 달립니다. 때로는 폭군으로 불리며, 심지어 ‘현실을 왜곡하는 자’로 규정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표독스러운 CEO의 모습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 아이패드를 소개하고 있는 잡스
정반대편에서는 ‘창의성의 아이콘’, ‘새로운 시대를 만든 사람’으로도 바라봅니다. 그러나 잡스의 참모습은 이런 겉모습이 아니라 잡스 내면의 정신세계가 참으로 매혹적으로 다가온다는 겁니다.
왜 그가 그런 말을 하는지, 왜 그가 그렇게 창의적일 수 있는지, 왜 그가 그렇게 직원들을 혹독하게 대하는지, 왜 그가 그토록 일에 열정을 발휘할 수 있는지에 대한 ‘근원’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 잡스가 어렸을 때 살던 집, 바로 보이는 이 집 차고에서 최초 애플 컴퓨터가 탄생되었습니다.
양부모가 살고 있었는데 양어머니는 돌아 가시고 현재는 양아버지 폴 잡스만 살고 있습니다.
잡스의 세계로 들어가는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키워드는 바로 인문학입니다. 그는 늘 자신이 기술과 인문학의 중간에 있었으며, 기술만 가지고는 많이 부족하다고 말해 왔습니다. 심지어 그는 “소크라테스와 한나절을 보낼 수 있다면 애플이 가진 모든 기술을 내놓겠다”고 까지 말했습니다.
그래서 인문학적 배경 지식이 없이 스티브 잡스의 정신세계를 탐구하는 것은 감히 불가능한 일이라고까지 할 수 있을 겁니다.
[ 잡스가 남긴 명언들 ]
“다른 사람의 삶을 사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마세요. 다른 사람들의 생각대로 살아야 한다는 도그마에 얽매이지 마세요. 타인이 내는 의견 때문에 여러분 내면의 목소리를 낮추지 마세요. 끊임없이 갈망하고, 우직하게 정진하십시오” 스탠포드 대학교 졸업식에서
“제가 가장 관심을 두는 일은, 미래에 부자들이 묻히는 묘지에 함께 묻히는 것이 아니라, 오늘 하루도 대단한 일을 했다고 제 자신을 다독이며 잠자리에 드는 일입니다.”
* 현재의 잡스 집
“애플의 DNA는 기술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인문학과 기술을 결합하고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가 결합되어야만 최종적으로 가슴을 울리는 결과물을 만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산업(IT산업)에 낭만과 혁신을 불어 넣었습니다.”
“빌 게이츠의 마이크로소프트가 안고 있는 문제는 그들이 맛이 없다는 겁니다. 그들은 절대적으로 무미건조할 뿐입니다. 도대체 그들은 그들의 제품 속에 ‘문화’라는 것을 불어 넣으려고 하질 않습니다.”
* 경쟁자이자 협조자였던 빌 게이츠와 함께...
“사회가 요구하는 시선을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한편으로는 그 시선의 틀에 당신 자신을 끼워 맞추고 안주하는 이상 ‘예술가의 창의성’은 없습니다.”
“실패의 위험을 무릅쓴다면 그는 여전히 예술가입니다. 밥 딜런과 피카소는 늘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결정과 행동은 우리의 가치관의 표출이듯이 ‘창의적인’ 결정과 행동은 ‘창의적인’ 가치관의 표출인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직감,운명,인생,카르마(業), 기타 무엇이든 그런 것들을 신뢰해야만 합니다.”
* 오바마 대통령과 집에서...앞쪽의 검정 셔츠가 잡스이고 오른쪽 흰 셔츠가 오바마
“직관적이고, 사용하기에 재미있고, 더불어 사용하기 쉬운 제품을 만들기 위해 늘 우리는 과학기술과 인문학의 교차점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우리가 아이폰이나 아이패드같은 창조적인 제품들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이 두가지 요소들의 결합덕분이었습니다.”
“만약 애플이 컴퓨터를 단순한 상품으로 취급하는 회사가 된다면, 따라서 모든 낭만이 사라져 버리고 컴퓨터가 ‘인간이 만든 가장 위대한 발명품’이라는 것을 잊어버리는 곳이 된다면 나는 애플을 잃었다고 느낄 것입니다.” 1995년 애플에 새로이 복귀했을 때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에 대해서는 누구도 대답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현재 무엇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동물적 감각으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게 제가 말할 수 있는 전부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일생을 바쳐 그 방향으로 노력하는 것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 중의 한명인 웨인 그레츠키(전설적인 아이스하키 선수)의 오래된 명언이 하나 있습니다. ‘나는 퍽이 있는 곳이 아니라, 퍽이 가야 할 곳으로 움직인다’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애플에서 언제나 그렇게 하려고 노력했지요. 아주, 아주 초창기부터 말이죠.”
* 부인 로렌과...
“만약 당신이 무엇인가를 이루었고, 그것이 상당히 좋다고 확인되었다면 거기에 너무 오래 머물러 있어서는 안됩니다. 곧바로 다른 멋진 일을 추진해 나가야하며, 다음으로 할 일을 찾아내야 합니다.”
“대부분의 성공한 예술가들이 어느 시점에서 명성을 잃어가는 것은 처음에 성공한 방식을 계속해서 고집할 뿐 더 이상 발전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속적으로 실패의 위험을 감수하는 사람만이 진정한 예술가입니다.”
“그들(마이크로소프트)은 독창적 아이디어에 관해서 생각하지 않고, 제품에 문화를 불어넣을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것 때문에 슬퍼지는 겁니다. 그들의 성공 때문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나에게 별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성공할 자격이 충분히 있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삼류제품을 만든다는 점입니다.”
* 가족들, 왼쪽부터 딸 이브, 아들 리드, 딸 애린 그리고 부인 로렌(이탈리아 여행중)
“애플을 망쳐 놓은 것은 성장과 발전이 더디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애플을 망쳐 놓은 것은 가치 기준이었습니다. 존 스컬리(잡스를 내쫓은 애플의 CEO)가 애들을 망쳐 놓았습니다. 그는 고위 간부들에게 일련의 부패한 가치들을 심어 주었으며, 그것으로 그들을 타락시켰습니다....
애플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고객들이 사용할 위대한 컴퓨터를 만드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것에 관해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위대한 컴퓨터를 만드는 방법을 알지 못했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이 신경을 쓸 바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오로지 많은 돈을 버는 데에만 관심이 있었을 뿐입니다.” 1995년 애플에 복귀했을 때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스스로 하고 있는 일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설탕물이나 팔면서 남은 인생을 보내고 싶습니까? 아니면 세상을 바꿀 기회를 붙잡고 싶습니까?” 당시 펩시콜라 사장인 존 스컬리를 애플 CEO로 영입할 때 결정적으로 써 먹은 말
* 애플 창업자 천재 스티브 워즈니악(오른쪽)과 함께...
“나는 죽음이야말로 삶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확실히 깨닫게 해주고 우선 순위를 정해주기 때문이죠.”
“나의 주문 중 하나는 집중과 단순함입니다. 단순함은 복잡함보다 더 어렵죠. 생각을 단순하고 명료하게 하려면 열심히 노력해야 합니다. 한번 그런 단계에 도달하면 산도 움직일 수 있습니다.”
“해군이 아니라 해적이 되라” 매킨토시 제작 팀원들에게
“ 우리는 우주에 흔적을 남기기 위해 여기에 있다. 그게 아니라면 왜 여기에 있겠는가” 맥킨토시 제작 팀원들에게
* 젊은날의 잡스
[ 잡스가 인류에게 남긴 업적들 ]
* 워즈니악의 회로기판을 컴퓨터광 이외의 사람들도 사용할 수 있는 최초의 PC로 전환한
애플 II
* 가정용 컴퓨터 혁명을 불러오고 그래픽 유저 인터페이스(GUI)를 보급한 맥킨토시
* 디지털 창작의 기적을 연 <토이 스토리>와 여타 픽사의 블록버스터들
* 소매점의 역할을 브랜드 정의로까지 확대한 애플 스토어
* 음악을 듣고 소비하는 방식을 변화시킨 아이팟
* 음악 산업을 재탄생시킨 아이튠스 스토어
* 휴대전화를 음악, 사진, 이메일, 웹 기기로 전환한 아이폰
* 새로운 콘텐츠 제작 산업을 만들어 낸 앱 스토어
* 태블릿 컴퓨팅의 문을 열고 디지털 신문, 잡지, 책, 동영상을 위한 플랫홈을 제공한
아이패드
* 콘텐츠를 관리하는 중신 역할을 컴퓨터에게서 빼앗고 우리가 쓰는 모든 기기가 막힘없이
동기화 되도록 만든 아이클라우드
* 잡스가 자신의 가장 위대한 창조물이라고 여기며 상상력이 너무도 창의적으로 배양되고
실행되고 지구상에서 가장 가치있는 기업이 된 애플
* 아래는 읽지 않아도 무방합니다. 그냥 참고하세요. 잡스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으시면 잡스에 대한 여러 책 중
에 월터 아이작슨의 <스티브 잡스>를 추천합니다.
[ 잡스의 일대기 ]
1955년 2월 24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나자마자 양부모 폴과 클라라에게 입양되었다. 그의 양아버지는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군인이 되었으며 캘리포니아 주 해안경비대에 들어가 경비정 기관사로 근무했었다. 전역 후 클라라와 결혼하였고 자동차정비, 할부금 수금원 등의 직업을 가졌고 아이가 없자 스티브 잡스를 입양하였다.
잡스는 어려서 자신이 입양된 사실을 알고 나중에 커서 작가로 활동하는 모나 심프슨이라는 여동생과 대화 치료사였던 어머니와 시리아 출신인 정치학 교수였던 아버지의 존재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언제나 양부모를 친부모로 여겼다.
3살 되던 해 아버지의 직장(자동차영업, 부동산중개)을 따라 사우스 샌프란시스코의 산업단지에 들어선 주택가로 이주하였고 주변 전자회사에 다니는 사람들과 어울리며 성장하였다. 이때 전자분야에 관심이 많았던 동년배 빌 페르난데스, 5살이 많았던 천재 스티븐 워즈니악을 만나 교류했으며 스티브 잡스에게는 매우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들은 학교에서는 낙제생이자 독선적인 외톨이였지만 전자적인 지식과 집념 그리고 유쾌한 성격은 비슷했다. 스티브 잡스는 당시 자신이 입양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당시 미국 히피문화에 흠뻑 젖어있었다.
홈스테드고등학교를 마친 뒤 오리건 주 포틀랜드에 있는 리드대학교에 입학하였다(1년만에 때려치운다). 그는 마약을 중단하고 새로운 이상을 찾아 동양철학에 심취한다. 하지만 1년 만에 학교를 그만두고 캘리포니아로 돌아가 아타리라는 전자게임회사에 취업하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를 그만두고 스티브 잡스는 히피차림으로 인도로 여행을 떠났다. 수개월간 인도 북부 히말라야 일대를 여행하였지만 그가 기대했던 내면의 정신적인 만족감을 얻지 못한 채 미국으로 돌아가 아타리사에 복직하였다.
그는 컴퓨터 게임을 만들었으며 이때 다시 워즈니악과 친분을 쌓았고 전자분야의 지식이 해박했던 그의 도움을 받았다. 사업적인 수완과 마케팅 감각이 뛰어난 스티브 잡스는 천부적인 전자 엔지니어였던 워즈니악의 도움이 있어야만 그의 아이디어가 실현 가능했고 각각의 장점을 합쳐 두사람은 1976년 컴퓨터(회로기판)를 제조하는 회사를 공동창업을 하였다. 당시 회사이름은 스티브 잡스가 오리건 주의 선불교 수행을 하던 장소였던 사과농장을 연상하여 애플(Apple)이라고 지었다.
회로기판만 있는 퍼스널컴퓨터 '애플Ⅰ'을 만들어 발표했으며, 당시 퍼스널컴퓨터 시장이 주목받게 되자 곧 새로운 컴퓨터 플랫폼인 애플Ⅱ를 만들어 냈다. 확장슬롯으로 기능을 향상시킬 수 있었고 획기적인 운영체계를 적용하여 컴퓨터에 대한 지식이 없는 사람들도 불편없이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영세한 업체로서는 사업여건이 불리했다. 스티브는 이런 환경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비전을 열정적으로 설득해나갔다. 마침내 그들의 퍼스널컴퓨터는 시장에서 큰 반응을 보이며 판매에 성공했고 그에 힘입어 1980년에는 주식을 공개했다. 그는 억만장자가 되었으며 미국에서 최고 부자대열에 합류했다.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오랜동안 연인관계였던 크리스 앤과 사이에서 리사라는 딸을 두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친부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고 친자확인 소송에서 패소한 이후 리사가 친자임을 받아들였다. 이와같이 모순되고 괴팍한 성격으로 주위를 힘들게 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태도와 생각을 바꾸지 않고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더욱 집중했다. 회사내에서는 매킨토시와 리사 컴퓨터를 개발하면서 애플사의 핵심 엔지니어와 경영진 사이에 반목이 심해졌고, 스티브 잡스는 이런 불화를 조화롭게 리드하지 못했다.
자신이 주도했던 리사 프로젝트에서 밀려나자 새로운 컴퓨터를 개발하는 매킨토시 프로젝트를 추진하였다. 하지만 그를 믿고 따랐던 매킨토시 프로젝트 담당 엔지니어들은 노력에 비해 형편없는 연봉을 받는다는 불만이 고조되었고 스티브 잡스에 대한 배신감으로 표출되기 시작했다.
마침내 1984년에는 IBM에 대항하여 매킨토시 컴퓨터를 선보이고 대대적인 성공을 거두었지만 회사 내부에서는 실패한 리사 프로젝트팀과 파워게임이 벌어지고 있었다. 게다가 매킨토시 발표 후 얼마 동안의 시간이 지나자 사람들은 맥(Mac)에서 사용할 수 있는 소트웨어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알았고 판매는 급속하게 줄었다.
스티브 잡스의 독특한 스타일과 분위기와 함께 매킨토시에 매료되었던 사람들은 이제 불편함을 호소하기에 이르렀다. 1985년 1월 19일 워즈니악과 함께 백악관에 초빙되어 레이건 대통령이 수여하는 국가기술훈장을 받았지만 워즈니악은 회사를 떠나고 말았다. 마침내 스티브는 현실성없는 망상가이자 회사를 도탄에 빠뜨린 인사로 지목되어 1985년 5월 경영일선에서 쫓겨났다.
애플을 떠난 뒤 넥스트(NeXT)社를 세워 세계최초의 객체지향 운영체제인 넥스트스텝(NeXTStep)을 개발하였고 1986년에는 조지 루카스 감독으로부터 픽사(Pixar)를 1000만 달러에 인수하였다. 차세대 운영체제를 갖춘 그래픽 전용 컴퓨터를 개발하여 의료업계에 판매하려고 시도했으나 두 회사 모두 수익을 못 내고 스티브 잡스를 위기로 몰았다.
그러나 픽사는 하드웨어 사업을 포기하고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를 만들면서 회생의 기미를 보이기도 하였다. 1991년 3월 18일 요세미티 국립공원에서 로렌 파월이라는 여성과 결혼했으며 2명의 아이를 낳았다. 결혼과 자녀양육 문제를 두고서는 확신을 가지지 못했지만 예전 모습과는 확연하게 변해있었다.
가정은 행복했지만 그의 사업은 점점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었다. 미국의 거부 로스 페로와 일본 캐논(Canon)사를 통해 투자를 받으며 겨우 버텨나가고 있었고 회생의 기회를 잡지 못했다.
픽사의 존 레스터가 감독한 '토이스토리(Toy story)'의 원형이 되는 '틴토이(Tin Toy)'를 만들어 아카데미상 단편 애니메이션상을 수상하며 세간의 관심을 받았지만 회사매출에는 기여하지 못했다. 이때까지 잡스는 픽사를 인수한 것에 후회하고 있었다.
1996년 적자에 허덕이며 새로운 운영체계를 원했던 애플이 넥스트 사(社)를 인수하면서 스티브 잡스는 13년만에 다시 애플로 복귀하여 경영 컨설턴트로 역할하며 4억달러 흑자를 내는 데 공을 세웠다.
또한 픽사는 존 래스터가 제작한 제작한 <토이스토리>의 대대적인 성공에 맞추어 상장하여 거의 빈털털이에 내몰렸던 스티브 잡스를 단번에 억만장자에 올려놓았다. 2006년에 월트 디즈니가 픽사를 인수하면서 잡스는 월트 디즈니의 이사회 임원이 되었다.
스티브 잡스가 애플의 CEO로 복귀한 2년 동안 애플은 자본이 20억 달러에서 160억 달러로 증가했으며 픽사는 연이은 흥행성공으로 애니메이션 역사상 가장 성공한 영화사로 기록되고 있었다. 한층 여유로워진 스티브 잡스는 새로운 미디어인 인터넷과 접목한 새로운 제품개발에 눈을 돌렸으며 그 대상은 음악이었다.
그는 항상 제품의 모양과 색깔을 결정하는 디자인에 매우 중시했다. 아이튠즈 개발에 이어 아이팟이라는 MP3플레이어를 개발하여 세계적인 히트상품 반열에 올려놓았다.
그는 이제 사업가에서 세상을 바꾸는 인물로 인지되고 있었다. 많은 청중들 앞에서 청바지에 검은색 셔츠로 연설하는 모습은 바뀌어가는 세상의 서막을 알리는 행사로 각인되었고 사람들은 그가 만든 제품에 열광했다. 2007년 맥월드에서 아이폰이 발표되고 전세계적으로 선풍적 인기를 끌었으며 애플은 약 500억달러의 수익을 올렸다.
특히 아이폰은 통신업계 전반을 뒤흔들어 놓았고 문화적 파급효과도 지대했다. 또한 2010년 발표된 아이패드라는 태블릿 컴퓨터를 발표하면서 스티브 잡스가 주도하는 변화는 가속화 되었다.
IT업계에 큰 획을 그은 인물로 평가되며 성공가도를 달렸으나 개인적으로는 췌장암 발병 등 건강문제에 시달렸다. 2004년 암으로 수술을 받고 2009년 간이식 치료를 받았다. 2011년 8월 24일 병세악화로 애플 CEO직을 사임했고, 사임 후 2달이 채 지나지 않은 10월 5일에 향년 56세로 사망했다.
* 다닐 트리포노프가 연주하는 <헌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