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대원군 시절의 사건
오페르트 도굴 사건
영국 상선과 독일 상인 오페르트 등이 충청도 연안에 와서 각기 통상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역시 거절하였다.
오페르트는 그 뒤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무덤을 도굴하여 부장품을 훔쳐가려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는 대원군을 더욱 분노케 하여 천주교 박해와 쇄국정책을 강화하는 원인이 되었다.
"서양 오랑캐가 침범함에 싸우지 않음은 곧 화의하는 것이요. 화의를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
대원군의 통상 거부 의지는 보다 강경해졌다.
그는 서양인을 오랑캐라 하고 배척하면서 각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척화비를 세웠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
병인양요가 발생하기 직전, 미국의 상선 제너럴 셔먼 호가 평양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서 통상을 요구하고, 받아들여지지 않자 재물을 약탈하다가 평양 군민과 충돌을 일으켜서 배가 침몰하여 선원들이 사망한 사건이 있었다.
1868년 3월에 미국 군함 셰년 도어 호는 셔먼호 사건을 문책하러 평양에 나타났다.
미군이 물러가자 대원군은 조선 병사가 미군을 격퇴했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3년 뒤인 1871년 미국은 해당 문책사들을 해임하고 대원군을 굴복시키고 조선 통상을 강요하고자, 5척의 군함을 보내 강화도를 공격하는 신미양요를 일으킨다.
1871년 4월 미국 함대가 강화도에 쳐들어와 덕진진(德津鎭)과 광성보(廣城堡)를 점령하자, 흥선대원군은 항전을 주장하며 한성부의 종로 네거리를 비롯한 전국 주요도시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우고 결사항전을 준비했다.
조선 조정에서 통상을 거부하고 외교교섭에 응하지 않고 전투가 장기화되자 미국 함대는 1871년 5월 철수했다.
척화비 건립
양요들을 겪은 흥선대원군은 서양 열강에 대한 경계심이 더욱 굳어졌으며,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한층 강화하였다.
그러나 척화정책을 추진한다고 해도 척화비는 세울 필요는 없었다.
척화비의 내용은 "서양 오랑캐가 침범할 때 싸우지 않는 것은 곧 화친을 하자는 것이요, 화친을 하자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라는 간결한 문구가 전부였다.
조선은 이보다 훨씬 복잡한 포고령도 전국 방방 곳곳에 배포할 수 있는 수준의 행정망을 갖고 있었다.
또한 척화를 둘러싸고 국민의 여론이 아직 크게 갈라진 것도 아니었다.
서양과 통교하자는 사람은 당시 조선 전국을 뒤져도 얼마 되지 않았을 시대였다.
진짜 목적은 기왕이면 척화에 대한 국민 의식을 고양하고, 결의를 다지기 위함이었다.
임용환에 의하면 대원군은 척화라는 이슈를 국가적 이벤트로 만든 것이라는 것이다.
척화비는 전국 각지에 세워졌으나, 이때 세운 척화비는 흥선대원군 실각(1873년) 직후와 한일 합방(1910년) 직후에 파괴·매장되었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승리로 이끌었으나 자신감에도 불구하고 흥선대원군의 강력한 내정개혁 정치와 쇄국 정치는 결과적으로 많은 반발을 일으켜 며느리인 명성황후와 유림 세력의 담합을 유도하게 된다.
명성황후는 한편으로 대원군에 의해 숙청되었던 안동 김씨 및 풍양 조씨 등의 세도가 및 노론 세력과 손잡고 실력을 비밀리에 키운다.
종교 탄압
천주교 탄압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처음에는 천주교에 대하여 크게 반감이 있지 않았다.
그는 베르뇌 주교(천주교 조선교구장) 등의 선교사를 통해 남하 정책을 실시하는 제정 러시아를 견제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천주교에 대해 우호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리하여 신자 남종삼과 수차 회동하여 조선에서 활동하던 프랑스 천주교 신부들의 힘을 빌리려 했으나, 불행히도 그 계획에 차질이 생겨 불신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때마침 청나라에서의 천주교 탄압 소식과 이전부터 싹텄던 위기의식에 자신의 정치적 안정을 꾀하려는 의도가 가미되어 정책을 바꾸게 된다.
그리하여 흥선대원군의 천주교에 대한 정책은 우호정책에서 강경 정책으로 바뀐다.
우선 선교사들은 조선의 정치에 개입하고 싶어하지 않아 이용가치가 없었고, 지배 계급에게 ‘천당과 지옥을 주장하며 혹세무민하는 종교’로 해석 되던 로마 가톨릭교회가 이미 1831년 천주교 조선교구(현재 천주교 서울대교구)가 생길 정도로 성장하는 것에 대한 반발이 있었으며, 대외적으로 ‘종교를 앞세워 열강 세력이 침투하는’ 문제에 대한 경계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였다.
결국 1866년 남종삼 등을 비롯, 8천여 명 가까운 천주교 신자들이 새남터, 절두산, 해미읍성 등 전국 각지에서 처형당했다.(→병인박해)
1866년부터 처형당한 천주교인의 수는 1~2만명을 넘는다는 기록도 있다.
조선에 들어와 포교하던 프랑스인 천주교 선교사 12명 중 9명이 처형되고, 화를 면한 프랑스 로마 가톨릭교회 사제 리델은 청나라로 탈출하여 베이징 주재 프랑스 함대사령관 로즈에게 박해 소식을 전했다.
박해는 1872년까지 이어졌다. 프랑스는 조선정부의 프랑스의 천주교 선교사 살해의 책임을 묻는다는 구실로 로즈(Roze) 제독이 이끄는 함대를 파견하였다.
보복 원정에 나선 로즈 제독은 함대 7척과 군사 600명을 이끌고 강화도를 침략한 뒤 서울근교 서강까지 진출했다.
그해 11월 프랑스 해군 160명은 정족산성을 공격하려다가 60여 명이 죽거나 다치는 손실을 입었는데, 양헌수가 이끄는 조선군은 피해규모가 사망 1명, 부상 4명에 불과했다.
조선 군대와의 교전에서 큰 패배를 경험한 프랑스군은 사기가 크게 떨어졌으며, 로즈 사령관은 조선 침공의 무모함을 깨닫고 철군했다.
하지만 프랑스 정부의 공식 기록에선 프랑스군의 피해는 병인양요 전 기간중 3명의 사망자와 35명의 부상자가 발생했을뿐이며 오히려 조선군의 피해가 막심했다고 했다.
이후 흥선대원군은 국방을 더욱 굳게 하여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동학 탄압
널리 전파되던 동학에 대해서도 1864년 교조 최제우를 처형하여 군문 효수하였다.
이후 동학도들은 매년 교조의 무죄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리는 등의 교조 신원 운동을 벌였으나 그는 이를 모두 거절했다.
그러나 동학농민운동 당시 동학의 일부 지도자들과도 연결을 취하기도 했다.
불교에 대해서는 별다른 탄압이 없었다.
개혁 실패
인사 실패와 혼란
대원군은 깊고 신중하게 고민하는 사람보다 자신감을 표출하고 큰소리를 치는 사람을 좋아했다.
그리고 당색과 신분을 넘어 이런 인물들을 과감하게 등용해서 현장에 투입했다.
하지만 이들의 용기와 자신감은 현실에 대한 무지나 아부의 소산이었던 것으로 판명되었다.
무지해서 큰소리를 쳤던 사람들은 일을 엉망으로 만들고, 아첨으로 지방관 자리를 얻은 인물은 더 큰 탐욕과 부정을 저질렀다.
그는 민씨 척신가와 동맹을 맺었다. 가장 심각한 인사실패는 민씨가와의 동맹이었다.
원군이 겉보기에는 당색과 신분을 초월한 혁명적 인사를 진행하는 동안, 관계의 한 쪽은 민씨가로 채워지고 있었다.
나중에 양쪽은 격렬하게 대립했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이 실수는 대원군 자신을 몰락시켰고, 조선을 사상 최악의 족벌 정치와 부정 부패로 몰아갔다.